서킷브레이커, 멈춤의 미학
기관사로 승선하던 시절, 엔진콘트롤룸(ECR)에서 가장 믿음직한 장치를 하나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서킷브레이커
(Circuit Breaker)'를 말한다. 평소에는 묵묵히 제자리를 지키다가도 사고의 기미가 보이면 단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고
회로를 차단하는 장치. 평범해 보이지만 배의 안전을 책임지는 숨은 영웅이었다.
선박에서 전기는 곧 생명이다. 발전기에서 생산된 전력이 배전반(Main Switch Board)을 거쳐 조타기와 냉동기, 펌프와
각종 항해장비에 이르기까지 배 전체로 흘러간다. 그 흐름이 끊기면 배는 순식간에 무기력해지고, 반대로 과전류가 흐르
면 귀중한 설비가 한순간에 손상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길목마다 서킷브레이커가 버티고 서 있다.
항해 중에는 대부분 발전기 한 대만으로 충분하지만, 화물 작업을 하거나 냉동 컨테이너가 많은 항만에서는 전력 소비가
급격히 늘어난다. 그럴 때는 발전기를 두 대, 때로는 세 대까지 병렬운전한다.
요즘은 자동 동기장치가 대부분 알아서 처리하지만, 내가 젊은 기관사였던 시절에는 달랐다. 병렬운전은 온전히 기관사의
몫이었다.
전압을 맞추고, 주파수를 맞추고, 동기계(Synchroscope)의 바늘이 천천히 12시 방향으로 다가오는 것을 숨죽여 바라본다.
바늘이 정중앙을 스치는 그 짧은 순간, 손은 재빨리 ACB(Air Circuit Breaker) 투입 레버를 밀어 넣는다.
'철컥!'
짧지만 묵직한 그 소리는 지금도 귀에 선명하다. 타이밍이 조금만 어긋나도 발전기에는 큰 충격이 가해질 수 있다. 그래서
그 순간만큼은 기관실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모든 신경은 동기계의 바늘 끝에 집중되어 있었다. 성공적으로 병렬운전이
이루어지면 말없이 미소를 짓곤 했다. 마치 어려운 퍼즐 하나를 정확하게 맞춘 기분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서킷브레이커가 평생 전기공학에서만 쓰이는 말인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경제신문을 펼쳤더니 낯익은 단어가 큼지막한 제목으로 실려 있었다.
'코스피, 서킷브레이커 발동.'
순간 웃음이 나왔다.
'언제부터 증권거래소에도 배전반이 설치됐나?'
물론 진짜 차단기가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주가가 일정 수준 이상 급락하면 시장의 과열된 공포를 식히기 위해 거래를 잠시
멈추는 제도였다. 이름은 같지만 대상만 달랐을 뿐이었다.
최근에는 코스피가 8% 넘게 급락하면서 올해만 여러 차례 서킷브레이커가 발동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같은 대표 종목들이 크게 흔들리면서 시장 전체가 휘청거렸다. 투자자들은 손에 땀을 쥐고 시세판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문득 엔진콘트롤룸에서 발전기 부하계를 바라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부하가 급격히 치솟으면 우리는 먼저 원인을 찾는다. 필요하면 발전기를 한 대 더 투입하고, 그래도 위험하면 차단기가 회로를
보호한다. 무리하게 버티다가 큰 사고를 내는 것보다 잠시 멈추는 것이 훨씬 현명하기 때문이다.
주식시장도 다르지 않았다. 공포라는 전류가 한꺼번에 몰려들면 시장도 잠시 숨을 고른다. 그 20분의 멈춤은 거래를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라 더 큰 사고를 막기 위한 안전장치인 것이다. 전기를 다루는 기술자들이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원리를 경제도 받아들
인 셈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 인생에도 서킷브레이커는 꼭 필요하다.
살다 보면 화가 과전류처럼 치솟을 때가 있고, 욕심이 허용치를 넘을 때도 있다. 그때마다 감정이라는 회로를 계속 연결해 두면
결국 자신도 상처 입고 주변도 다치게 된다. 그럴수록 잠시 멈추는 용기가 필요하다.
기관사 시절, 나는 수없이 많은 차단기의 '철컥'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고장이 아니라 안전의 소리였다. 멈춤이 실패가 아니라
더 큰 사고를 막기 위한 지혜라는 신호였다.
이제 경제 뉴스에서 '서킷브레이커 발동'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자연스럽게 엔진콘트롤룸의 배전반을 떠올린다. 검은 손잡이
를 힘 있게 밀어 넣던 젊은 날의 내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세월은 흘러 내가 서 있는 자리는 달라졌지만, 서킷브레이커가 가르쳐 준 원리는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위험할수록 서두르지 말고, 잠시 멈추어라.
전기회로도, 주식시장도, 그리고 인생도 그 멈춤 덕분에 다시 힘차게 흐를 수 있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