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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레문학상]
대상 수상 / 박 봉 준
박봉준 qkek1165@hanmail.net ----------------------------
강원 고성출생. 강원대학교 졸업.『시와비평&시조와비평』등단.
두레문학회 부회장. 산다촌문인회원. 글벗문학회원. 다울문학회장.
공저/『글벗』『시와비평』『두레문학』
홈피/ http://wolfeyes09.kll.co.kr/
1) 적막강산 (寂寞江山)
어머니 돌아가시자 괘종시계가 멈췄다
긴 긴 하루해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무료한 탓이었을까
어머니는 꼭, 괘종시계만을 고집하셨다
삼십 년 넘도록 벽에 기대 함께 살아온
세이코 시계는 목소리도 거칠어지고
밥 한술 뜨고 나서야 터벅터벅 길을 나섰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어머니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만만한 아범을 불러서 수시로 밥을 주자니
아들의 불만도 서서히 원을 따라 돌았다
건전지를 한 번만 넣어도
오랫동안 제 본분을 다하는 디지털시계
뻐꾸기 소리 정겨운 그런 시계도 지천인데
하필 제 구실 성치 않은 불알시계
툭하면 허기져 늘어지는
늙은 시계의 심줄을 조이라 하셨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그 쉰 소리 들리지 않아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
아들 딸 서울 가고 아내 없어 혼자 사는 날
방 한구석에서 아직도 벽을 기대있는
그 늙은 괘종시계 물끄러미 바라보니
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내 어머니 마음
죽어서 살아야 할 그 길고 긴 적막강산을
2) 고로 나는 살아 있을 것이다
전장으로 떠난 사내는 머리카락을 남겼다
그의 분신
용맹스럽고 건장한 그의 몸이다
딸이 외출한 자리에 머리카락이 눈에 띈다
딸의 것이 분명하다
긴 머리의 소유자는 딸밖에 없으므로
청소기로 머리카락을 빨아들이며 혀를 찬다
쓸고 쓸어도 방바닥에 떨어져 있다
내가 가는 곳
네가 가는 곳 어디든지
퍼질러 앉아 투정을 부리고 있다
뼈다귀처럼 뒹굴고 있다
한바탕 청소기로 요란 떨고 돌아보니
방금 내가 지나온 자리에도
나의 머리카락들 조롱하듯 숨어있다
언젠가는 무덤 속에서도
내 몸의 수액을 남김없이 빨아올릴 때까지
저놈의 머리카락은 죽지 않을 것이다
고로 내가 죽어도 나는 살아 있을 것이다
그 아득할 어둠 속에서
3) 덤
동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심심한 육손이는 무얼 하고 놀았을까
막내 삼촌만 한 육손이 골려 먹는 재미가
사시사철 쏠쏠했는데
손가락 발가락이 한 개씩 더 달린 육손이
아이들은 늘 그가 만만하였다
자고 일어나면 꼭, 떨어졌을 것 같은
손바닥선인장 끝에 달린 그의 막내 손가락
조무래기들이 육손아! 육손아! 부르면
심사가 뒤틀린 육손이 어머니는
막대기를 휘두르며 아이들을 쫓고
발가락도 한 개 삐죽 머리 내밀어
벗겨질 듯 말듯 고무신을 걸치고 다니던
코밑이 시커먼 육손이
날 선 보망* 칼 들고 그물 손질할 때면
영락없는 어른이어서
반 토막짜리 덤이 달랑거리는 손으로
바다가 빠져나간 자리 촘촘히 꿰매기도 하고
아이들의 조롱을 웃으면서 쓸어 담던
덤으로 평생 덤을 지고 가야 할 그 남자
이름이 뭐였더라
*보망: 그물을 손질하여 고침
4) 청호동 아바이
내 장인은 북청 짜꼬치 아바이다
사변에 아가리 배를 타고 남쪽으로 피난 왔다가
갯바위에 죽기 살기로 붙어있는 따개비처럼
남은 생 송두리째
아바이마을에 뿌리를 박다가 가셨다
뒷바람*에 실려오는 고향
새벽녘이면 삼삼하게 눈眼 밟히다가도
끝내는 다 털어내지 못하고 비린내로 남았다
내가 처가 집에서 묵은 그날 밤에도
형수와 마주앉은 내 작은 장인의 눈물은
이슥토록 소주병에서 출렁거렸다
살다가 진저리치는 날
깡 소주로 나발 불면 창지가 모두 녹을 거라고
불쑥불쑥 이마가 닿는 골목마다
식전부터 아마이들이 억세게 목청을 높여도
청호동 아바이들,
무시기 소린가 깡 소주 마셔대더니
바다보다 깊은 쪽빛 멍 시름시름 퍼져서 죽었다
함경남도 북청 짜꼬치 앵꼬치*
홍원 이원 단천 신포로 가지 못하고
북녘 하늘이 손끝에 닿는 공동묘지에 누웠다
*짜꼬치. 앵꼬치: 함경남도 북청의 지명
* 뒷바람; 북풍의 방언 (강원)
5) 귀신고래
냉장고에 병따개며 온갖 쿠폰이
어지럽게 나붙었다
저 덩치 큰놈이 자리를 잡자
집안 훤하던 그날
참, 세월이 많이 흘렀다
검버섯이 생기면 오래 산다고
텔레비전에 비친
그룹 회장님 같은 어르신을 보며
어머니의 눈치를 살피던 기억이
눈에 선하다
동해바다 한가운데서
귀신고래가 하늘로 솟구치자
거대한 몸에 붙은
따개비며 굴 껍데기가 스산하다
몇 살이나 잡수셨을까
고래의 몸에서 풍상이 인다
사람이나 고래나 오래 살고 보면
귀신 소릴 듣는가
6) 향수鄕愁
느닷없이 풀빵이 먹고 싶은 것은
늙어간다는 증거인가
옛날식 풀빵이 노릇노릇 구워지는
사거리 노점 앞을
그냥 지나칠 것 같아도
아내는 내 심중을 용케도 알아챈다
파치 명태며 양미리를 얻어서
쪼르르 달려가던
내 유년의 무쇠 풀빵 틀에는
학교에서 돌아온 부둣가 아이들의
눈빛이 익는다
딸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집에 오는 길에
풀빵 좀 사오라고 하였더니
풀빵은 없고 붕어빵은 어떠시냐고
발목 깊숙이 빠진 겨울
주머니가 허전할수록
봉지 속 풀빵이 어른거리는 것은
7) 대박
복권을 사러 갈 눈치면
아내는 꿈 이야기를 못 하게 한다
묵비권을 행사하는 피의자처럼
입 꾹 다물고 있어도
번번이 허탕이다
어쩌다 돼지꿈이라도 꾸는 날
들뜬 기분에 그만
꿈 자랑을 해 버리고 나면
이미 효험이 없다고 판정을 내린
현명한 아내는
내 꿈을 헐값에 처서 복권을 산다
그래도 역시 꽝이다
돈이 아깝다는 생각인지
아내는 요즘 대박에 시큰둥하다
별이 대낮처럼 밝은 꿈을 꾼 오늘
복권을 한 장 샀다
영하의 날씨
햇살이 찰랑 허공에 걸린다
8) 친구
양계장 배수로에 비름이 무성하다
들풀인가 싶어 관심도 없는데
세월이 눌어붙은 헛간에서
냉큼 고무 대야를 가져온 친구는
식구가 없어 미처 먹지도 못한다며
뜯어가라고 성화다
쭈뼛거리는 나를 제쳐놓고
고무 대야 가득 비름나물을 채우는
친구의 눈에 설핏한 여울이 인다
언젠가는, 바빠서 농약도 못 쳤다며
잎사귀마다 고단함이 숭숭 드나드는
구멍 뚫린 가을배추를
승용차에 가득 실어주던 그 사내
휘어질 줄 모르는 성격 탓에
멋대가리 없는 남자라고
그의 아내와 내가 더러 흉을 보지만
그런 그에게
나는 가끔 무공해 신세를 지고 산다
9) 삼겹살
대학을 졸업한 아들이 취직을 하여
서울로 올라가는 일요일 날 저녁
평생 섭섭할 것 같은 마음에
아들과 딸을 데리고 갈빗집에 갔다
메뉴판을 보며 망설이는 사이에
눈치 빠른 아이들이
생 삼겹살 3인분을 주문하였다
불판 위에서 노릿 노릿하게 익어가는
주검을 보고 있자니, 어느 날
순댓국밥집 골목에서 웃고 있던
그 돼지의 일생이 눈물겨운 것인가
매운 연기가 자꾸 내게로 몰려왔다
죽어서도 제 살을 아낌없이 내주는
그를 돼지라고 불렀는데
돼지보다 못한 내가 성스러운 그의
육신을 보시 받는 것이 부끄러워
소주 한 잔에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착하고 복된 돼지의 무던한 의지가
불판마다 지글지글 타올랐다
10) 눈깔
목선을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가마때기에 둘둘 말려온
개똥이 아버지 얼굴엔 눈이 없었다
고기나 문어가 뜯어먹었을 거라고
골뱅이가 파먹었을 거라고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어린 나는 한동안
그 좋아하던 생선을 먹지 않았다
바닷가에서 고동도 게도 잡지 않았다
오래전 집들이에 갔는데
유심히 나를 지켜본 회사 동료가
그 많은 산해진미 중에서
제일 먼저 생선으로 젓가락이 가더니
눈깔을 먼저 파먹더라고
바닷가 사람이 틀림없다고
연신 감탄을 하면서 놀려댔다
동탯국을 먹다가
멀겋게 눈을 뜬 동태 눈깔을 보니
개똥이 아버지가 생각이 나서
요즘은 내가 문어인지 골뱅인지
눈깔을 제압하는 것이 사는 것인지
자꾸 눈이 스멀거린다
[시평]
죽어서 살아야 할 그 길고 긴 적막강산
김 영 승
희랍인들에게 있어서 탐구나, 그 탐구를 통해 도출된 진리는 내 앞에(pro-) 장애물로서 던져진 것(blema) 즉, 문제(problema)를 직시하는 그 발견의 소산이라면, 박봉준의 시는 그러한 발견의 시이다. 박봉준은 연속적으로 혹은 불연속적으로 시시각각 주마등처럼 스치는 그 현상의 파노라마를 외면하거나 간과하지 않고 부단히 포착하고 의미부여를 하는데, 개별적인 사례의 전체에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동일한 것을 정의(定義)라고 한다면, 박봉준의 시는 그 자체가 세계(또는 대상)에 대한 그러한 시적 정의이다. 눈깔, 개똥이 아버지, 동태, 동탯국𘃔! 9;(이상「눈깔」), 딸, 머리카락(이상 「고로 나는 살아 있을 것이다」), 육손이(「덤」), 자신의 장인인 청호동 아바이(「청호동 아바이」), 냉장고에 붙은 병따개며 온갖 쿠폰(「귀신고래」), 풀빵(「향수(鄕愁)」), 복권(「대박」), 비름(「친구」), 삼겹살(「삼겹살」), 괘종시계(「적막강산(寂寞江山)」) 등등 일상에서 포착된 소재들을 소도구처럼 배치하여 방편처럼 자유연상을 통한 시적 정의를 내리는 박봉준의 시는 일단은 소재주의의 시이다. 소재주의는 소재가 없으면 시도 없거나 그 소재의 속성에 전부 혹은 일부가 의존하게 되어 시인의 시상이 흡수되거나 매몰된다면 한계이나, 박봉준은 그 소재를 새로운 물상으로 창조하거나 변형시키는데, 그 소재가 원관념이 아니 보조관념으로서의 수단으로만 동원되어 시적 공간 속에서 용해되었기 때문이다. 즉, 박봉준의 시는 그 소재를 시적 언어로 풀! 어서 쓰는 게 목적이 아니라 다른 것을 제시하는 수단으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박봉준에게 있어서의 그 모든 현상은 다 소재이며, 그 소재의 발견(혹은 포착)은 박봉준의 의식과 무의식이 함수하는 시간적․ 공간적 좌표 상에서의 무수한 한 점으로서의 삶 그 자체이다. 박봉준의 삶은, 아니 시인으로서의 박봉준의 삶은 그가 포착한 소재들의 연결이며 그 총량인데, 그러한 소재를 징검다리처럼 놓아가며 박봉준은 바라밀다, 즉 도피안(到彼岸)하고 있는 듯이 보이며, 독자들은 그 징검다리가 곧 그의 삶의 궤적이라는 것에 동의하며 함께 건너갈 수 있다.
그러니까 박봉준이 무엇을 발견하였는가, 아니 박봉준이 포착하여 박봉준의 시적 공간에 편입시킨 그 소재들이 무엇인가를 보면 우리는 그 박봉준의 인간을 조상(彫像)할 수 있다. 즉, 눈깔을 포착한 박봉준은 눈깔을 포착했을 때의 박봉준의 지금-여기이며 그 지금-여기의 전 영토과 영해와 영공을 함께 통과할 수 있는 것이다. 랭보의 견자(見者)와는 다른 견자로서의 박봉준은 그러나 정밀(靜謐)이다. 추정하건대, 박봉준은 청소기로 머리카락을 빨아들이며 혀를 찰 만큼, 그리고 그 머리카락을 쓸고 쓸 만큼 완벽주의자 혹은 결벽주의자의로 여겨지는데 그러한 집착과 경도(傾度)는 놀랍게도 죽음을 직관하며 그 삶의 중심에서부터 그 죽음을 관통한다.
여하튼 박봉준의 시는 논리학에서 말하는 바 소위 P ⊃ S의 형식과 그 구조를 이루고 있었다. 즉, P면 S이다, 혹은 만일 P이면 S다 형식의 함언(含言, implication) 구조에 그 시간적 선후관계와 공간적 인과관계를 설정하여 시세계의 심리적 안정감과 구도적 안정감을 동시에 획득한다. 소설 속에 또 하나의 소설이 전개되는 소위 액자소설과는 다른 통칭 액자시, 그러니까 시인이 설정한 그 시적 틀로서의 그 액자 안에서 그 자체로 완결된 그러한 액자시가 아닌 박봉준 식의 그 끊어진 흑백영화의 필름 한 컷 한 컷 같은 액자시는 그러나 불연속적이 아니라 동영상처럼 연속적이며 그 이미지와 아우라의 현현으로 영사되고 있었다.
일단은, 박봉준이 소위 객관적 상관물이며 동시에 인식의 소재로 포착한 그 시적 징검다리를 독자는 마치 자기가 놓은 징검다리 마냥 하나 하나 건너갈 수밖에 없게 한다.
목선을 타고 바다에 나갔다가
가마때기에 둘둘 말려온
개똥이 아버지 얼굴엔 눈이 없었다
고기나 문어가 뜯어먹었을 거라고
골뱅이가 파먹었을 거라고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어린 나는 한동안
그 좋아하던 생선을 먹지 않았다
바닷가에서 고동도 게도 잡지 않았다
오래 전 집들이에 갔는데
유심히 나를 지켜본 회사 동료가
그 많은 산해진미 중에서
제일 먼저 생선으로 젓가락이 가더니
눈깔을 먼저 파먹더라고
바닷가 사람이 틀림없다고
연신 감탄을 하면서 놀려댔다
동탯국을 먹다가
멀겋게 눈을 뜬 동태 눈깔을 보니
개똥이 아버지가 생각이 나서
요즘은 내가 문어인지 골뱅인지
눈깔을 제압하는 것이 사는 것인지
자꾸 눈이 스멀거린다
―「눈깔」 전문
예(例)의 그 P ⊃ S의 형식이므로 이야기는 간단하며 그 이해는 더 간단하다. 어린 시절 그는 목선을 타고 바닷가에 나갔다가 / 가마때기에 둘둘 말려온 / 개똥이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 얼굴엔눈이 없었다. 고기나 문어가 뜯어먹었을 거라고 / 골뱅이가 파먹었을 거라고 /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그 좋아하던 생선도 먹지 않았으며 바닷가에서 고동도 게도 잡지 않았었다. 그 기억은 저 무의식의 심층에 침전된 충격으로서의 정신적인 외상, 즉 트라우마이다. 그리고는 그 사실을 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느 집들이에 갔는데 / 유심히 나를 지켜본 회사 동료가 / 그 많은 산해진미 중에서 / 제일 먼저 생선으로 젓가락이 가더니 / 눈깔을 먼저 파먹더라고 그래서 바닷가 사람이 틀림없다고 / 연신 감탄을 하면서 놀려댔던 사실을 상기하면서 시인은 그 회사 동료의 지적처럼 그 많은 산해진미 중에서 제일 먼저 생선으로 젓가락이 가는, 그리고 그 생선 중에서도 그 생선의 눈깔을 제일 먼저 파먹었다는, 자신도 모르고 있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소위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굴절된 표출로 파악되는데, 그 유년의 충격이 오히려 공격적으로 나타나는 순간의 발견이다. 가령, 20세기 남미에서의 소위 피압박자의 실존적 이원성처럼, 그러니까 가령 사탕수수 농장에서 학대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이 이다음에 자기가 그 사탕수수 농장의 주인과 같은 위치에 되면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 나는 그 노동자들을 지극히 인간적으로 대우해야지 하는, 미래의 자기 자신을 놓고 그 가혹한 사탕수수 농장 주인이나 그 노동자가 아닌 제3의 인간상을 상정하는 게 아니라, 자신도 모르게 먼 훗날 자신도 그 사탕수수 농장 주인처럼 노동자들을 부리며 살리라 하는 결의가 서서! 히 자라 결국은 그러한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그 피압박자의 실존? ? 이원성처럼 그러한 상반된 이원성을 보이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발견은 이제는 자기가 그 얼굴에 눈이 없는 개똥이 아버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로 그 개똥이 아버지 눈을 뜯어먹고 파먹는 문어며 골뱅이라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문어나 골뱅이와 동일시시키면서 피해자에서 가해자라는 인식의 전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또 하나의 충격이다. 즉, 시인은 그러한 인식의 전환을 통하여 시적인 정신적 외상, 그 트라우마를 독자에게 가하면서 그 변증법적인 치유의 합일점을 제시한다.
눈깔은 눈의 비어이다. 그 멀겋게 눈을 뜬(?) 동태 눈깔이나 사람 눈깔이나 그 눈깔이 그 눈깔이라는 탄식과 절망이 그 여운으로 동시대인들을 끝까지 소위 방법적 회의의 무대에 홀로 남겨 놓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 눈깔은 무엇인가. 눈은 일차적으로 세계(또는 대상)을 보는 신체기관이다. 가령, 우리가 본다고 할 때 그 본다는 것(to see)은 s에 e가 네 개 혹은 다섯 개가 붙은 to seeee 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일차적으로 눈(eye)으로 보며, 그의 경험(experience)으로 보고, 환경(environment)으로 보며, 그가 제도적으로 혹은 비제도적으로 받은 그 모든 유형무형의 교육(education)으로 보고, 마침내는 그의 어떤 기대(expectation)로 보는 to seeeee라면, 우리가 본?! 鳴? 할 때 그 본다는 것은 우리의 전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통해서 본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눈깔을 제압한다는 말은 그 상대를 죽인다는 말이다. 즉 눈깔을 제압한다는 것은, 그러니까 눈깔에 제일 먼저 젓가락이 가 그 눈깔을 파먹는다는 것은, 눈깔을 공격한다는 것은 상대를 죽인다는 것이다. 즉, 상대의 그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전 영역을 다 말살한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 누군가의 현재만을, 그 현재의 장점, 아름다운 점만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그 상대가 통과해 온 그 상대의 시간과 공간의 전 영역을 사랑하는 것이라면 동시대의 소위 사랑이라는 것도 그러한 공격과 공격, 그러니까 최선의 공격은 최선의 수비, 혹은 최선의 수비는 최선의 공격이라는 속언(俗諺) 같은 생존의 실존적 이원성에서 파악될 것을 박봉준은 시사하며 압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 역설과 반어는 동시대의 인간 일반, 그 데드마스크 같은 얼굴들에 대한 월인천강(月印千江) 같은 화룡점정(畵龍點睛)이다.
동네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심심한 육손이는 무얼 하고 놀았을까
막내 삼촌만 한 육손이 골려 먹는 재미가
사시사철 쏠쏠했는데
손가락 발가락이 한 개씩 더 달린 육손이
아이들은 늘 그가 만만하였다
자고 일어나면 꼭, 떨어졌을 것 같은
손바닥선인장 끝에 달린 그의 막내 손가락
조무래기들이 육손아! 육손아! 부르면
심사가 뒤틀린 육손이 어머니는
막대기를 휘두르며 아이들을 쫓고
발가락도 한 개 삐죽 머리 내밀어
벗겨질 듯 말듯 고무신을 걸치고 다니던
코밑이 시커먼 육손이
날 선 보망* 칼 들고 그물 손질할 때면
영락없는 어른이어서
반 토막짜리 덤이 달랑거리는 손으로
바다가 빠져나간 자리 촘촘히 꿰매기도 하고
아이들의 조롱을 웃으면서 쓸어 담던
덤으로 평생 덤을 지고 가야 할 그 남자
이름이 뭐였더라
*보망: 그물을 손질하여 고침
― 「덤」 전문
고은의 「만인보」를 연상케 하는 이 시는 그러나 김광규의 시편들처럼 보다 더 주지적이다. 덤은 원래의 것에 조금 더 얹어주는 것을 말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서 덕이니 진정한 지식이니 로고스니 사유(思惟)니 등은 인간에게 덧보태어진 것(epiktesis)으로 언표되는데 그 말을 뒤집으면 그러한 것들은 원래 인간에게는 없었던 것이라는 말이기도 하다. 원래 없었던 것에 얹어서 준 것, 그 덤의 소유자 육손이는 그 덤 때문에 아웃사이더가 된다. 노자나 장자에는 소위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 데 없음의 쓸데 있음으로서의 비유와 그 예로서 무수한 기형적인 동식물과 인간이 등장하는데, 맹자에는 다음과 같은 비유가 나온다.
지금 여기에 무명지가 굽어서 펴지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별로 아프지도 않아서 일하는 데 방해되는 것도 아니지만, 만약 이것을 펼 수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 있다고만 하면, 진(秦)이나 초(楚) 같은 먼 곳이라도 멀다 하지 않고 찾아갈 것이다. 손가락이 남 같지 않음을 부끄러워함이다. 손가락이 남 같지 않음은 싫어하면서, 마음이 남 같지 않은 것은 싫어할 줄 모르니, 이것을 일컬어 일의 경중(輕重)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다.
― 고자장구상(告子章句上)
수술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육손이는 가난하다. 노장(老莊)과 공맹(孔孟) 철학의 양극단에서 우리는 그 덤이 짐이 되는 순간, 그 초월과 수용의 그 경계(境界)를 본다. 그것은 박봉준이 시로써 보여준 그 경계의 우화이다. 타자와 다르다는 것은 저주이며 은총 아닌가? 그러한 시적 관상(觀想)은 생과 사의 경계조차도 넘나들며 다음과 같은 반짝이는 돈오(頓悟)를 낳는다.
어머니 돌아가시자 괘종시계가 멈췄다
긴 긴 하루해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이 무료한 탓이었을까
어머니는 꼭, 괘종시계만을 고집하셨다
삼십 년 넘도록 벽에 기대 함께 살아온
세이코 시계는 목소리도 거칠어지고
밥 한술 뜨고 나서야 터벅터벅 길을 나섰다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어머니에게는 어떤 의미였을까
만만한 아범을 불러서 수시로 밥을 주자니
아들의 불만도 서서히 원을 따라 돌았다
건전지를 한 번만 넣어도
오랫동안 제 본분을 다하는 디지털시계
뻐꾸기 소리 정겨운 그런 시계도 지천인데
하필 제 구실 성치 않은 불알시계
툭하면 허기져 늘어지는
늙은 시계의 심줄을 조이라 하셨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그 쉰 소리 들리지 않아
까마득히 잊고 있었지
아들 딸 서울 가고 아내 없어 혼자 사는 날
방 한구석에서 아직도 벽을 기대있는
그 늙은 괘종시계 물끄러미 바라보니
아, 이제야 조금은 알 것 같다
내 어머니 마음
죽어서 살아야 할 그 길고 긴 적막강산을
―「적막강산(寂寞江山)」 전문
괴로워하기를 그만둔 자들…… 고대 희랍인들이 인식한 사자(死者)들이다. 인생은 고해(苦海)라는 그 세속화된 불교의 세계관 같은 그러한 사생관(死生觀)은 박봉준에게서는 어머니 돌아가시자 멈춘 괘종시계로 촉발되어 오고감도 없다는 원래의 불교적 시간관과 그 사생관을 일상의 짧은 에피소드와 그 직관적인 단상(斷想)을 통하여 육화(肉化)시킨다. 죽는 것을 입적(入寂) 혹은 적멸(寂滅)이라고 표현하는 영혼들을 생각하면 박봉준의 시적 직관은 반딧불이다. 반딧불은 그 배경이 어둠일 때만 빛나는, 그리고 현존하는 생명이 내는 빛 아닌가. 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같은 박봉준의 이 「적막강산(寂寞江山)」은 결국 우리 모두의 실존적 고독이며 그 시적 정각(正覺)인 것이다.
박봉준의 시는 시의 인공적 자연미와 자연적 인공미를 동시에 충족시켜 주는 인공적 자아의 노래이다. 즉, 그 자아는 자연스러운 자아이되 인공적인 자아, 그러니까 만들어진 자아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박봉준의 시는 모두(冒頭)에 언급한 그 소재주의와 P ⊃ S의 형식과 구조에 의해 이미 상당한 부분은 고정화되고 정형화된 소위 투(套)의 시의 편린이 여전히 산견되는데, 그것은 각각의 시편들이 일상적 소재의 사소주의와 매너리즘에 의해 다소는 과도 하리만큼 절제되어 있고 세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가령 소월의 시는 소월의 시풍이라 할 만한 특수한 어보(語步)를 보이나 각각의 시편들이 각자 독립된 발상과 그 진행을 보이지만 박봉준은 어떤 소재가 포착되면 그 소재를 놓고 시가 어떻게 전개되어 어떤 결말에 도달할 것인가 하는 그 시의 귀결이 약간은 예측이 가능하기에 그 시 쓰기, 혹은 시적 발화의 투(套)가 때로는 반드시 바람직하지만은 않다는 사족을 첨언한다. 「귀신고래」, 「향수(鄕愁)」,「대박」, 「친구」, 「삼겹살」 등의 작품이 그것이다. 앞으로도 그런 식의 소재 포착과 시적 발상을 통한 자유연상, 그런 식의 형상화가 반복된다면 박봉준은 어쩌면 독백과 같은 동어반복의 크고 작은 동심원에 갇힌(?) 파문만을 그 잔잔한 수면에 만들고 그려나가리라. 여과되지 않은 육성과 격정도 시의 지극히 소중한 부분이라는 점을 상기한다면, 그러한 육성과 격정을 수용하고 분출할 또 다른 형식의 창조와 파괴 그 실험도 부단히 병행돼야 하리라. 군자(君子)는 불기(不器) 아닌가. 그렇다면 시의 그릇도 박봉준의 그 투명한 세계인식 만큼 다양해야 한다.
김영승(金榮承) 略歷
계간「세계의 문학」1986 가을 「반성․序」외 3편의 詩 발표.
시집 『반성』(민음사.1987). 『車에 실려가는 車』(우경.1988), 『취객의 꿈』(청하.1988). 『아름다운 폐인』(미학사.1991), 『몸 하나의 사랑』(미학사.1994), 『권태』(책나무.1994). 『무소유보다도 찬란한 극빈』(나남출판.2001). 에세이집 『오늘 하루의 죽음』(문음사.1989). 제3회 현대시작품상(2002)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