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파트 화단의 작은 황금, 비파
아침 산책길이면 나는 늘 우리 아파트 화단 앞에서 걸음을 늦춘다. 키가 다섯에서 여섯 미터쯤 되는 비파나무 두 그루가
서로 기대어 서 있다. 가지는 넉넉하게 뻗었고, 두툼한 초록 잎은 사철 변함없는 생기를 품고 있다. 정원수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늠름한 모습이다. 그런데 초여름이 되면 그 짙은 녹색 사이사이에서 노란 열매들이 하나둘 얼굴을 내민다.
마치 "나 여기 있어요." 하고 수줍게 손을 흔드는 듯하다. 무심코 지나던 사람들도 한 번쯤은 발걸음을 멈추고 올려다
보게 만드는 풍경이다.
비파는 우리에게 그리 익숙한 과일이 아니다.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나무여서 우리나라에서는 제주와 완도 등 남부지방
에서 주로 자란다고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아파트 화단에서 만나는 비파나무는 더욱 반갑고 특별하다. 사계절 푸른
상록수라는 점도 매력적이다. 겨울에도 푸른 잎을 잃지 않고, 늦가을부터 한겨울까지 꽃을 피운 뒤 긴 겨울과 봄을 견디어
마침내 초여름에 열매를 맺는다. 대부분의 과일이 봄에 꽃을 피우고 여름이나 가을에 익는 것과는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
가는 셈이다. 차가운 계절을 묵묵히 견뎌 얻어낸 결실이기에 더욱 귀하게 느껴진다.
비파의 계절은 유난히 짧다. 시장에서도 겨우 한 달 남짓 만날 수 있다. 수박이 여름 내내 자리를 지키는 동안 비파는 어느
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존재를 미처 알기도 전에 한 해를 보내기 쉽다. 그러나 한 번 맛본 사람이라면
그 짧은 만남을 오래 기억하게 된다.
겉모습은 살구를 닮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또 다르다. 부드러운 주황빛 껍질 속에는 감처럼 윤기 나는 갈색 씨가 서너 개
들어 있고, 과육은 보드랍고 촉촉하다. 한입 베어 물면 과즙이 흘러내릴 만큼 수분이 풍부하다. 달콤함 속에 은은한 새콤함이
배어 있고, 끝맛에는 열대과일 같은 향긋함과 살짝 쌉싸래한 여운이 남는다. 살구 같기도 하고, 복숭아 같기도 하고, 배를 닮은
듯도 하지만 결국 어느 과일과도 닮지 않은 자신만의 맛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비파는 대체할 수 없는 과일이라는 말이 잘
어울린다.
영양 또한 알차다. 열량은 낮고 수분은 풍부하며 베타카로틴, 비타민 C, 칼륨, 폴리페놀과 식이섬유가 들어 있어 건강한 여름
과일로 손색이 없다. 귀한 생과는 그대로 먹는 것이 가장 좋고, 요거트나 치즈와 곁들이면 색과 맛이 더욱 살아난다. 잼이나
청으로 만들어도 좋지만, 무엇보다 갓 딴 비파를 그대로 맛보는 순간이 가장 큰 행복이다.
비파는 열매만 귀한 것이 아니다. 길고 두꺼운 잎도 오래전부터 약재와 차로 사랑받아 왔다. 잎의 뒷면에 있는 잔털을 깨끗이
제거한 뒤 덖고 말려 우려내면 은은한 향과 부드러운 맛이 난다. 감잎차보다 순하고 카페인이 없어 남녀노소 누구나 편안하게
마실 수 있다. 예부터 기관지와 폐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전해져 왔으며, 여름에는 찬물에 오래 우려 시원하게 마시면 갈증을
달래는 훌륭한 냉차가 된다. 열매가 떠난 자리에는 잎차가 남아 사계절 동안 비파의 향기를 이어 주는 셈이다.
비파나무는 쓰임새도 다양하다. 잎과 열매는 식품과 약재가 되고, 단단하면서도 치밀한 목재는 최고급 바둑판 재료로 이름이
높다. 바둑돌을 살포시 내려놓으면 나무가 미세하게 충격을 받아들였다가 다시 되돌려 주는 듯한 탄력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
섬세한 감촉 때문에 애호가들은 비파나무 바둑판을 으뜸으로 친다. 한 그루의 나무가 먹을거리와 차, 약재, 목재에 이르기까지
사람의 삶을 풍성하게 해 주는 것이다.
이제 나는 화단 앞을 지날 때마다 비파나무를 새롭게 바라본다. 예전에는 그저 잎이 무성한 나무 한 그루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는 겨울에 꽃을 피우고 긴 시간을 견디어 초여름에 황금빛 열매를 선물하는 나무라는 사실을 안다. 눈길이 머무는 시간도
길어졌고, 계절의 흐름을 읽는 마음도 한층 깊어졌다.
사람들은 흔히 계절을 벚꽃이나 단풍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나에게 초여름은 이제 비파의 계절이다. 짙은 녹색 잎 사이로 얼굴
을 내민 작은 황금빛 열매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계절은 소리 없이 우리 곁으로 다가와 어느새 마음속에 한 장의 추억을 남긴다
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언젠가 노랗게 익은 비파를 반으로 갈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나누어 먹고 싶다. 그리고 열매가 모두 사라진 뒤에는 비파잎
차를 천천히 우려 마시며 그 짧았던 초여름을 오래도록 음미하고 싶다. 우리 아파트 화단의 비파나무 두 그루는 오늘도 말없이
서서, 계절이 얼마나 아름답고 또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조용히 일깨워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