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하민지 기자 입력 2021.03.19 19:24 장애인 입주민 ‘경사로 설치 요구’에 찬반 투표로 부결시킨 아파트 장애계 “투표 자체가 차별” 아파트 앞에서 기자회견 입주민들, 비판적 여론 의식해 “가을까지 설치하겠다” 한 발 물러나 장애인 입주민의 경사로 설치 요구를 무시하고, 설치 여부를 찬반 주민투표에 부친 아파트 문제가 계속되고 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 입주민 공계진 씨가 시흥시청, 시흥시의회, 여러 언론을 통해 문제를 공론화한 후 비판적 여론이 계속되자 아파트 측은 올해 가을까지 경사로를 설치하겠다며 한 발 물러난 상태다.
이런 가운데 시민사회단체는 아파트를 상대로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재차 촉구하고 나섰다. 두리장애인자립생활센터(아래 두리센터), 시흥시장애인종합복지관은 19일 오전 10시 30분, 신한토탈아파트 후문 계단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아파트 측의 행태는 “명백한 장애인 차별”이라고 규탄했다.
활동가들은 '비장애인에게 편리한 계단이지만 장애인에겐 감옥이다', '장애인도 주민이다. 이동권을 보장하라'라는 피켓을 들고 기자회견에 참가했다. 사진 하민지 활동가들은 '비장애인에게 편리한 계단이지만 장애인에겐 감옥이다', '장애인도 주민이다. 이동권을 보장하라'라는 피켓을 들고 기자회견에 참가했다. 사진 하민지 - “특혜 달라는 게 아니라 권리 보장하라는 것” 전혀 이해 못하는 아파트 측
경기도 시흥시 정왕동 신한토탈아파트는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 입주민 공계진 씨가 아파트 후문 계단에 경사로를 설치해 달라고 요구하자 지난 1월, 주민투표를 진행했다. 240세대 주민에게 후문 경사로 설치에 동의하는지 찬반 여부를 물었다.
투표 결과, 반대 130표, 찬성 24표로 반대표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공계진 씨는 투표 시 투표관리위원이 투표에 의도적으로 개입한 정황을 포착했다고 말했다. 공 씨는 “아내가 투표하려 하자 투표위원이 ‘찬성에 체크하면 주민이 많은 돈을 부담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내가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안 된다고 문제를 제기하자 위원이 얼른 말을 바꾸더라. 공정한 투표는 이뤄지지 않았다. 답이 정해져 있는 투표였다”고 말했다.
김유현 두리센터 소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장애인의 권리를 박탈하기 위한 투표였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아파트는 장애인 당사자의 의견을 듣지 않고 투표를 진행했다. 장애인의 권리를 박탈하기 위한 투표였다. 이런 행태는 몇 년 전, 서울 강서구 주민이 장애인 특수학교 건립을 반대했던 사건을 떠오르게 한다. 장애학생 부모는 특수학교 건립을 반대하는 주민에게 무릎 꿇고 사정했다. 그걸 보면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지금 이 사건도 마찬가지다”라고 비판했다.
신한토탈아파트 측에 문제제기한 당사자 공계진 씨. 사진 하민지 신한토탈아파트 측에 문제제기한 당사자 공계진 씨. 사진 하민지 공계진 씨는 이 문제를 공론화하면서 입주자 대표 회의에 들어가 발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아파트 측에 재차 요청했다. 하지만 번번이 거절당했다. 입주자 대표단은 경사로 설치건을 논의하기 위해 두 차례 회의를 열었지만 두 번 모두 관리사무소 건물 2층 회의실에서 진행했다. 그 건물엔 엘리베이터가 없기 때문에 휠체어를 이용하는 공계진 씨는 올라갈 수가 없다. 그래서 공 씨가 1층으로 회의장소를 바꿔 달라고 했으나 이 요청은 묵살됐다.
공 씨는 “1층에 회의할 수 있는 공간이 있길래 거기서 회의를 열어달라고 했더니 ‘당신이 뭔데 참견하냐’,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회의장소에 관해 이래라저래라 하냐’, ‘20년간 2층에서 회의했고 PPT 시설도 2층에만 있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며 아파트 측이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다고 규탄했다.
또한 공 씨는 “장애인이라고 특혜를 요구하는 게 아니다. 비장애인과 함께 살 수 있게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경사로는 선택과 찬반의 문제가 아닌 당연히 설치돼야 하는 장애인의 권리”라고 강조했다.
기자회견에 참가한 활동가들이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하민지 기자회견에 참가한 활동가들이 "투쟁"을 외치고 있다. 사진 하민지 신한토탈아파트 인근 오이도역은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촉발된 곳이다. 20년 전인 2001년 1월, 장애인 부부가 오이도역 리프트를 이용하다가 추락해 한 명은 사망하고 다른 한 명은 크게 다치는 참사가 일어난 바 있다. 이 사고로 장애인 이동권 투쟁이 진행돼 많은 지하철역에 엘리베이터가 설치될 수 있었다.
김병태 안산단원장애인자립생활센터 소장은 오이도역 참사를 언급하며 “장애인이 거리에서 치열하게 싸웠고, 그 결과 모두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지하철이 돼 가고 있다. 마찬가지로 아파트 후문 계단에 경사로를 설치하면 임산부, 노인, 아이들도 편하게 다닐 수 있다”며 아파트 측이 하루빨리 경사로를 설치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장애인 당사자의 요구로 계단에 경사로가 설치된 사례가 있다. 작년 10월, 정의당 장혜영 의원, 류호정 의원, 배복주 부대표는 현충원 학도의용군 무명용사탑에 참배하러 갔지만 탑 가까이에 갈 수 없었다. 탑 앞에 계단만 있고 경사로가 없어서 휠체어를 이용하는 배 부대표가 접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현충원은 정의당의 문제제기를 받아들이고 무명용사탑 앞에 경사로를 설치했다.
양범진 정의당 시흥시위원회 위원장은 이 같은 사례를 언급하며 “신한토탈아파트도 현충원이 한 것처럼 경사로를 설치해 장애인의 이동권을 보장해야 한다.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모든 힘을 다해 연대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계진 씨가 아파트 후문의 계단을 뿅망치로 내리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 하민지 공계진 씨가 아파트 후문의 계단을 뿅망치로 내리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 하민지 - “경사로 설치하겠다” 한 발 물러난 아파트… 당사자인 공 씨에겐 연락 없어
두리센터는 지난 12일 아파트 측에 면담을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으나, 아파트 입주자 대표단은 17일에 면담요청을 거절하는 공문을 보냈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단은 공문에서, 해당 사건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의식한 듯 “여러 사정상 여건이 완료되면 최대한 협조하는 방향으로 진행하는 분위기를 조성하여 이번 달 대표회의에 안건을 올려 심도있는 논의를 하겠고, 아울러 현재 시흥시청에 행위허가 신청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려드린다”고 답했다.
여기서 ‘행위허가 신청’이란 현재 논란이 되고 있는 후문 계단을 시청에 ‘정식 통로로 허가해달라’고 신청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후문 계단은 아파트 담벼락을 허물어 만든 ‘불법’ 계단이지만, 13년째 주민들은 편의상 관습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입주자 대표단은 계단의 ‘불법적’ 존재를 경사로 설치를 거부하는 논리로도 활용했다. 실제 이번 공문에서 입주자 대표단은 “시청에서도 허가한 정식통로가 아닌데 입주민 마음대로 설치했다가 사고가 나면 구상권 청구를 받기에 계단식으로만 통로를 만들게 되었다”고 배경을 밝혔다. 시흥시청 또한 계단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이제까지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아파트 입주자 대표단은 19일 비마이너와의 통화에서 “우리는 장애인 무시하는 사람 아니다. 13년간 경사로 설치해달라고 요구하는 사람이 없었고, 이제야 알게 되어 내부적 고민이 많았을 뿐”이라면서 “정식통로 허가를 받은 후, 빠르면 올해 가을까지 계단 옆에 경사로를 설치할 계획”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처음 문제제기를 한 공 씨는 “입주자 대표가 다른 기자에게도 경사로 설치를 확실히 할 것이라고 말했다는데 정작 당사자인 나에게는 연락이 없었다. 아직은 경사로를 설치하겠다는 말을 신뢰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활동가들은 기자회견을 끝낸 후 계단에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내용의 피켓을 붙였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김유현 두리센터 소장이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계단 앞에 머물러 있다. 사진 하민지 활동가들은 기자회견을 끝낸 후 계단에 장애인 이동권 보장을 촉구하는 내용의 피켓을 붙였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김유현 두리센터 소장이 계단을 오르지 못하고 계단 앞에 머물러 있다. 사진 하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