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물과 종잣돈
우리는 수도꼭지를 돌리면 언제든 물이 나온다는 사실을 너무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높은 언덕 위의 집이나 고층
아파트까지 물이 오르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수고가 숨어 있다. 물은 본래 낮은 곳을 향한다. 자연의 순리를
거슬러 높은 곳으로 물을 보내기 위해서는 사람의 지혜가 만든 펌프가 쉬지 않고 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 원심펌프는 아무리 정교하게 만들어져도 처음부터 스스로 물을 끌어올리지는 못한다. 시동을 걸기 전, 펌프 안은
반드시 물로 채워져 있어야 한다. 만약 공기만 가득하다면 임펠러는 헛돌 뿐, 물을 빨아들이지도 밀어 올리지도 못한다.
그래서 먼저 한 바가지의 물을 붓는다. 그 물이 공기를 밀어내고 길을 열어 준다. 사람들은 그 물을 '마중물'이라 불렀다.
참 정겨운 이름이다.
마중 나온다는 말처럼, 먼저 다가가 길을 열어 주는 물. 자신은 많지 않지만 뒤따라올 거대한 물줄기를 위해 기꺼이 첫걸음
이 되어 주는 물이다. 마중물은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마중물이 없으면 아무리 성능 좋은 펌프도 제 힘을 쓰지
못한다. 작은 한 바가지가 수천, 수만 리터의 물을 움직이는 시작이 되는 것이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이런 마중물 같은 존재를 자주 만난다.
따뜻한 격려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기도 하고, 첫 번째 고객이 작은 가게를 오래가는 명소로 만들기도 한다. 한
권의 책이 평생의 길을 열어 주고, 한 번의 용기가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한다. 눈에 띄지 않는 작은 시작이 결국 큰 흐름을
만들어 낸다.
주식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주가가 하락하여 매입한 주식에 자금이 묶이면 장부에는 자산이 남아 있어도 실제로 움직일 수 있는 돈은 사라진다. 시장은
매일 새로운 기회를 만들어 내지만 손에 쥔 현금이 없으면 그 기회는 그저 바라보는 풍경일 뿐이다. 증권사의 미수금 제도가
있다고는 하지만 일정한 예탁금과 상환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오래 의지할 수도 없다. 특히 변동성이 큰 장세에서는 빚으로
버티는 투자보다 여유 있는 현금이 훨씬 큰 힘이 된다.
투자자들이 말하는 종잣돈이 바로 그것이다.
종잣돈은 액수의 많고 적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이며, 기회를 붙잡을 수 있는 자유이다. 농부가 가을의
수확을 모두 먹어 버리지 않고 다음 봄을 위해 씨앗을 남겨 두듯, 투자자도 언제나 새로운 계절을 준비하는 종잣돈을 품고 있어
야 한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마중물과 종잣돈은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형제와도 같다.
하나는 물의 흐름을 시작하게 하고, 다른 하나는 돈의 흐름을 이어 간다. 하나는 높은 곳으로 물을 올리는 힘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기회를 향해 다시 나아갈 수 있는 힘이다. 둘 다 처음에는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그 존재가 없으면 아무 일도 시작
되지 않는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 사회는 흔히 결과를 칭찬한다. 높은 빌딩을 바라보고, 큰 수익을 부러워하며, 화려한 성공만 기억한다. 그러나 그 성공
뒤에는 언제나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작은 준비가 숨어 있다. 펌프를 살린 것은 거대한 저수지가 아니라 이름 없는 한 바가지
의 마중물이었고, 큰 자산을 일군 투자자의 출발점 역시 묵묵히 지켜 낸 종잣돈이었다.
인생도 그렇다.
큰 꿈은 작은 결심에서 시작되고, 깊은 신뢰는 짧은 인사에서 시작된다.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는 성실함, 하루를 아끼는 절약,
실패 속에서도 다시 일어서는 용기가 모두 인생의 마중물이다. 우리는 종종 큰 기회만 기다리지만, 사실 기회는 작은 준비를 갖춘
사람에게 먼저 찾아온다.
나이가 들수록 깨닫게 된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거대한 힘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작은 물 한 바가지,
넉넉하지는 않지만 끝까지 지켜 낸 종잣돈, 그리고 남보다 한 걸음 먼저 준비하는 마음이 결국 인생의 물길을 바꾼다.
오늘도 어딘가에서는 펌프가 쉼 없이 물을 밀어 올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미래를 위해 종잣돈을 아끼며 내일을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비록 시작은 작을지라도, 그 작은 준비가 언젠가는 큰 강을 이루고, 한 사람의 삶을 더욱 높고 먼 곳으로
흘러가게 하리라 믿는다.
그래서 나는 마중물을 볼 때마다 종잣돈을 떠올리고, 종잣돈을 생각할 때마다 인생을 떠올린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거창한 것
이 아니라, 언제나 조용히 먼저 길을 열어 주는 작은 시작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