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정신이 들고 보니 멀리 그가 앉아 있었다. 나는 말없이 그에게 걸어가 곁에 앉았다. 그는 별로 새삼스러울것도 없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와인을 따른 잔을 건내었다. 나는 그에게 물었다.
"오늘도 안젤모 로시니를 위해?"
"아니… 오늘은 아이샤를 위해… 그녀의 신대륙 관세 완화 정책이 유럽에서는 맛볼수 없는 새로운 맛을 이 땅에 전해주고 있거든."
"아이샤를 위해…"
와인은 정말로 보르도산과 다른 톡쏘면서도 싫지 않은 맛을 느끼게 해주었다. 나는 한참동안 와인을 맛보다 말했다.
"오랜만이네요…"
"그러게… 그동안 잘있었어? 뭐 내 안부는 들려주고 싶지만 요즘 목이 좀 칼칼해서…. 농담이야. 목 그은거 원망안하니깐 그렇게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지마. 벌써… 10년이네. 많이 성장했구나. 하긴, 이제는 나와 동갑인가? 어땠어? 제법 풍파가 많은 삶을 거친 얼굴이 되어 있는걸 보니 지루하지는 않은 삶이었을까?"
"뭐… 그렇죠. 하루도 쉴새 없이 정신없는 나날들이었습니다. 그날 오아시스에서 나눴던 시간이 한가로운 추억으로 느껴질만큼요."
"그렇군. 고생 많이 했어. 그래도 보기 좋으니 다행이군. 그리고 잘해가는 걸 보니 흡족해. 의외로… 네 방식도 나쁘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아무렴, 날 베고 갔는데 어설프게 망해버리면 말이 안되지. 양보한 보람이 없잖아. "
"양보라구요? 카이쿠바드를 준비시켜 놓구선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군요."
"하하하… 맞다. 그랬지. 결국은 잘됐잖아. 좋게 생각하라구. 내가 먹어버리려던 거 너한테…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에라드한테 넘겨준거야. 나름 데네브의 건국 축하 선물이었는데, 별로였나?"
"에휴… 말을 말죠…"
그는 미소지으며 다시 시선을 저 너머로 돌리고 말했다.
"너에게 감사한다. 형태는 어찌되었건, 그리고 방식은 달라졌더라도… 내가 바랬던 이상까지도 포함한 거대한 꿈을 현실로 구현해줘서. 그리고 내 약혼녀를 지켜줘서… 신분을 속이고 접근해서 몇번이나 죽을뻔한 위기를 겪고도, 세번이나 목숨을 살려주고, 정치적 거래의 결과로 그녀를 안아야 할 상황에 처하면서도… 결국 매너를 지키다니, 신사로군. 뭐, 솔직히 말해 그녀를 네가 취한다고 해도 나름 원망할 생각은 없고, 오히려 그녀에게는 좋은 일이 될수도 있다고 생각하는데…"
"웰던 스테이크 되고 싶은 마음없는데요. 그리고… 그녀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아마도 죽을때까지 변치 않겠죠. 수녀원에서 당신을 기리며 살아갈 그녀에게 할수 있다면 사과하길 바랍니다."
나의 말에 그는 왠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말괄량이… 항상 나만 보면 사생아니, 천한 신분이니 난리를 쳐댔지. 결국 자기도 다르지 않으면서… 알면서도 어설픈 대의니, 사명이니 하며 내게 소중한 사람들을 너무 방치해버렸지. 지금은 조금 후회되는군. 그날 앙주에서 그녀를 보지 않았다면… 내 삶도 조금은 평범한 것이 될수 있었을까? 이런, 네게는 실례가 되는 말이겠군. 사과하지. 아무튼, 잘 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다행이야. 어때? 이제 10년… 이제는 좀 내숭떨지 안고 세상에 네 이름을 부끄럽지 않게 당당히 살아갈수 있지 않겠어?"
"네, 덕분에 아주 이가 갈리도록 유명해졌습니다. 제국이 적성국에 뭔가를 꾸미고 있다는 말로 'John will be there.' 라는 말이 관용구처럼 첩보계에서 사용된다는 말에는 기겁을 하겠더군요. 이제는 좀 그만두고 싶어요. 이 정도면 되지 않았나요? 이제 저도 예전처럼 함부로 나댈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나의 말에 그는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넌 충분히 잘해왔어. 하지만… 아직은 아니야. 한가지가 더 남았잖아."
"한가지가 남다니요? 그게 뭔데요?"
그는 말없이 우리 앞에 한 방향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그곳에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자, 이제 모든걸 끝낼 시간이야."
그리고 나는 눈을 떴다.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이제 완연히 따뜻해진 봄, 아니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간 속에서 더 이상 침대에서 나오는 것이 춥지 않다는 사실을 안도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득… 허전한 침대의 옆자리를 보며 그녀가 그리워졌다. 지금 내 곁에 없는 그녀… 그녀에게 꿈에 샤를 카페를 봤다고 말하면 그녀는 무슨 표정을 지어보였을까? 나는 일어나 세수를 하고 아침 일찍 리엔과의 약속을 지키러 퍼브의 내 숙소를 빠져나갔다.
리엔은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서 도착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왕자님, 그동안 별고는 없으셨는지요?"
한동안 잠적해 있다가 최근에 내 곁에 복귀한 그녀… 아니 그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제는 얼마 안있어 30대가 될 그는, 나이가 무색하게 여전히 화려한 미소녀처럼 보였다. 늘 하듯이 타겟에게 첫사랑에 빠진 소녀의 연기를 하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을 그의 변장에 나는 혀를 내두르며 자리를 권했다. 그가 첫번째로 가져온 것은 대외의 소식이었다.
"칼라운이 죽었습니다."
그의 설명이 이어졌다. 데네브 작전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바이바르스가 사망하고, 그 뒤를 이은 바라카를 몰아낸 살라미슈를 다시 몰아내고 오랫동안 맘루크의 수장으로서 군림해오며 명군으로 칭송을 받았던 칼라운이 타계했다. 그는 죽기전 아들 칼릴에게 절대 자신의 죽음을 3년간 외부에 알리지 말고 군사 원로들과 의논하여 정국을 운영하라 유언했지만, 칼릴은 그 말을 지키지 않고 곧바로 그 소식을 대외에 알리고, 반발하는 군사 원로들을 제거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손에 넣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그의 소식을 들으며 예전의 약속을 떠올렸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베풀어준 호의를 잊지 않겠습니다. 약속드리건데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 절대로 당신을 적대하는 일은 없을꺼라고 맹세드립니다."
살짝 한숨이 나왔다. 확실히… 멜리장드의 말처럼 나는 좀 가볍게 약속을 하는 성격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볍게 한 약속이라도 나는 그 약속을 지켰다. 나는 마음속으로 칼라운에게 잠시 애도를 표하고, 본격적으로 다음 미션에 대해서 설명하려는 리엔의 말을 끊고 말했다.
"자, 이번에는 좀 멀리 가볼까 합니다. 레콘키스타도르들이 현재 타완틴슈우에 집결하고 있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계시죠? 말린체는 이번에는 저번과 같은 괴상한 걸 불러내는 대신 좀더 현실적인 세력 강화를 모색하고 있는듯 합니다. 그런 그들의…"
"잠깐만… 그보다 먼저 할일이 있어."
"네? 아니 그게 무슨… 지금 당장이라도 재무부에서 부채 때문에 일하러 가라고 난리인 상황인데요. 안가시면 그쪽에서 가만히…"
나는 조용히 말했다.
"리엔, 먼저 할일이 있다니깐. 너의 명령권자는 아직도 체스인가?"
나의 말에 리엔은 당황하며 말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니요… 아니죠. 당신이십니다. 말씀하십시오."
"이제… 10년, 성지를 빠져나온지도 참 시간이 많이 흘렀군. 그렇지?"
"네… 그렇죠. 곧 여름이군요. 그 끔찍했던 시간이 어제 일처럼 떠오르는데 벌써 10년이라니…"
"뭐… 각자 생각하는 방식은 다르겠지만… 나름 우리에게는 기념할 만한 일이잖아. 그러니깐… 빼먹으면 안되겠지. 다들 모아줘. 이곳으로…"
"네? 그 녀석들 말하시나요? 근데 갑자기 왜…"
"그야 물론…"
나는 저 너머의 남동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너머를 떠올리며 말했다.
"10주년 기념 파티해야지."
어이없어 하는 리엔은 여러가지로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나는 모든 것을 고사하고 그에게 소집을 지시하고 자리를 떴다. 주변 카페의 사람들은 난처해하며 울쌍이 된 리엔의 모습을 보고 왠지 내가 연상의 애인을 버린 나쁜 놈 정도로 보이는지 수근거리며 욕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일어나며, 지금은 잠시 신대륙에서 이곳에 방문중인 라와드와 크리스틴도 잊지 말라고 첨언하고 내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아직 가게를 열려면 시간이 남았다. 그래서 누워서 그동안의 일들을 회상하였다. 그것은 정말이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데네브 계획은 그나마 즐겁고 유쾌한 모험이라 부를 만한 험난하고 위험천만하기 그지 없는 시간들이었다. 한동안 평탄하니 퍼브에서 노래나 부르며 살면 될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데네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체스에서 사람들이 찾아왔다. 재무부의 추심 청구를 대행해서 왔다는 그들은 피도 눈물도 없이 내 푼돈을 뜯어가고 그것도 모자라, 이자로도 터무니 없이 부족하다며 나에게 추가 용역의 일을 할것을 강요했다. 내가 뭐 힘있나… 눈물이 앞을 가려도 어쩔수 없이 동의하고 그들이 요구한 일들을 수용해야 했다.
첫번째로 그들이 요구한 것은 스코틀랜드에서 벌어지는 노래경연대회였다.
다짜고짜 배에 실려 강제로 끌려간지 몇일만에 도달한 곳에서 요구받은 조건이 의외로 내 전문인 노래에다가, 다행히 대화도 영어로 통하는 곳이라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들이 요구하는 4강에 드는 것에 목숨을 걸도 노력했다. 그래서 왠지 노래경연대회치고는 참가자들과 구경꾼들의 기세가 흉흉하고 왠지 다들 중무장 차림인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서와, 스코틀랜드는 처음이지?"
아닌데요… 두번째인데요… 결국 혼신을 다한 노력 덕분에 나는 4강에 들수 있었고, 현지에서 만난 보컬트레이너는 나의 실력에 심드렁한 표정을 보이면서도 나에게 이래저래 조언을 해준 덕분에 실력을 향상시켜 본격적인 본선에 들어가려 노력했다. 그러나 상대들은 만만치 않았다. 브루스 가문의 로버트라는 친구와 월레스 가문의 윌리엄이라는 친구는 이미 서로 아는 사이인지 서로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외부 출신으로 참가한 나에게 적대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나머지 4강에 합류한 다른 한 사람… 아무리 봐도 아버지가 틀림없는데, 끝까지 자기는 그냥 지나가는 복면을 쓴 음유시인이라고 주장하는 아버지를 나는 애써 모른척 하며 그러려니 하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콤비를 짜서 대항하자고 제안하였다. 왠지 많이 피곤함을 느끼게 하는 아버지의 어설픈 변장에도 나는 그냥 그러려니 하였고… 결국 이래저래 복잡한 과정들을 겪고 나서, 노래보다는 의외로 난투가 더 많았던 대회의 우승은 내가, 아버지는 무난하게 3등으로 대회를 끝마쳤다.
그러자 외지인이 우승 트로피와 상금을 챙겨가는 것에 격분한 다른 경쟁자들과 관중들이 나의 자격에 대해 항의를 하며, 스코틀랜드에서 자란적이 없고, 스코틀랜드어를 못하는 나는 우승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였고, 아버지는 단상에 나와 내가 어렸을 때 나를 키운 유모인 버틀러 부인이 스코틀랜드 출신이고, 그래서 그분에게 스코틀랜드 사투리를 배웠고, 잠시 에든버러에 머물던 시절이 있단 걸 상기시켜 주었다.
그러자 왠지 맥이 빠져버린 스코틀랜드의 하이랜더들과 스킬트론 예비역들은 뿔뿔히 흩어져 버렸고, 나의 경쟁자 윌리엄과 로버트는 나에게 대단히 험악하게 노려보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나중에 들어보니,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간건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오랫동안 준비해둔 스코틀랜드의 무장봉기가 와해되고, 대신 그들은 잉글랜드의 영토가 아닌 자치주로서 제국에 의원을 할당받고 완만한 형태의 공생으로 의견을 조율하였다고 했다.
아버지는 끝까지 자기가 에드워드 몽포르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고, 나에게 말하였다.
"흘룡하구나. 누군지 모르겠지만, 자네의 부친도 자네를 아마 자랑스러워 할 것 같군. 나는 이만 떠나도록 하지. 인연이 된다면 다시 만나세. 이곳의 특산품인 위스키를 아내에게 선물하러 서둘러 가야하거든. 하하하!"
"엄마는 맥클라우드산보다는 독한 던켈드 방식을 좋아할텐데요."
"아, 그렇지… 앗! 자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건가? 자네가 언제 내 아내를 봤다고… 흠흠… 아무튼 나는 이만 가네. "
아버지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아마도 나름 아버지로서 할수 있는 자식의 사랑에 대한 최대한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자 나는 오랫동안 아버지에게 들었던 서운한 마음이 눈녹듯이 사라지는 것을 느끼며 떠나가는 아버지에게 오랫동안 손을 흔들어 드렸다. 그렇게 나의 첫번째 임무는 성공리에 마쳤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다음으로 받은 임무는 말리의 어느 오지에 귀신들린 여자를 찾아오라는… 정말이지 명령 내린 사람이 귀신들린게 아닌가 하는 황당무계한 명령이었다. 다행히도 그때부터는 나의 그리운 동료들이 합류해 주는 덕분에 조금은 용기를 가질수 있었다. 물론 전원은 아니었고, 신대륙에 간 라와드와 크리스틴은 제외한 나머지 동료들이 그때부터 그 이후로도 쭉 미션마다 구성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나와 같이 함께해 주었다.
말리 미션에서는 에스더, 멜리장드, 안젤모, 케두스, 리엔이 합류하였다. 한때 황금의 왕국이라 명성을 떨치던 말리는 전염병으로 인해 나라가 말이 아니었고, 덕분에 무슬림 과격파들이 이교도와 마녀들을 죽여야 한다고 설치는 바람에 혼란이 극에 달해 있었다. 결국 말리의 시골에서 헤매고 헤매다가 찾아낸 귀신들렸다는 여자는… 귀신들린 여자가 아니라, 사실은 현지의 토착 종교의 샤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놀랍게도, 천형이라 불리우던 천연두에 대한 예방법을 알고 있는 여자였다. 구호기사단의 의대 입과시험에 낙방하고, 도망치려 했으나, 강제로 재수를 명받고 눈물로 사정해서 겨우 이 미션에 참여하고 도망쳐나온 멜리장드는 곧 그녀의 존재가 지금 전 유럽에 가장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닭고 목숨을 건 요인 구출 작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무슬림 과격파들은 알라에게 복종하지 않고, 더러운 귀신을 사람 몸에 넣어 악마와 거래하고 병을 몰아내는 그녀를 마녀로 몰아 태워 죽이려 하였고… 우리는 그런 현지의 움직임을 어떻게든 요리조리 피하면서 그녀를 안전하게 이송하여야 했다. 그러나 결국 말리의 항구에서 그녀의 존재 가치를 알아본 말리 국왕의 추격을 당하게 되고, 우리는 안젤모의 기지로 흩어진 수백척의 화물선을 통해 도망치는 척…을 하면서 사실은 사막을 횡단해서 걸어서 도망쳐버렸다.
정말 죽을뻔했다. 그곳에 비하면 레반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었다. 기왕에 온김에 천연두 예방법을 우리 일행에게도 시술했는데… 소의 고름을 몸에 넣는, 정말이지 귀신들렸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예방법이었다. 왠지 내키지 않는 그 시술 덕분에 우리 일행은 천연두에 걸리지는 않았지만, 열이 펄펄 오르는 와중에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는 죽음의 행군을 벌여야 했다.
결국 반쯤 죽기 직전까지 다다르고 겨우 몰타 기지에 도착한 덕분에 그녀는 제국으로 최고 중요인사 대접을 받으며 모셔졌고, 각지에 그녀의 제안에 따라 천연두 백신 접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고름이 잔뜩나는 소 한마리만 받아서 퍼브로 돌아갔다가, 마스터가 더럽다고 쫒아내 버리려고 했다. 이게 다 얼마짜리 살아있는 백신인데…
아이샤가 합류한 미션은 정말이지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군사력으로 제국을 이기는 것을 무리라고 생각한 반 제국 진영은 머리를 써서 경제 혼란으로 제국을 약화시키려는 술책을 썼다. 후거 가문에서 수립한 신성로마제국을 주축으로 한 통화 혼란 정책은 뭐랄까나… 아이샤가 아무리 심각한 얼굴로 설명을 해줘도 나는 도무지 이해를 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것의 대안조차도… 왠지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난해해져간다는 생각만 들뿐이었다. 결국 우리는 그냥 아이샤에게 할일만 알려달라고 했고, 아이샤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후거 가문이 한자동맹과 손을 잡고 벌이는 장난질을 파해하려 하였다. 그리고 덕분에 우리는 정말이지 뭣빠지게 굴렀다.
나는 아직까지도, 왜 베니스의 리알토 다리의 사육제에서 공짜 가면을 나눠주는 것이랑, 러시아의 원목을 바지선이 아닌 로프로 엮어서 해안선을 따라 이송하는 것이랑, 런던 롬바드가의 은행가들을 모아놓은 자리에 보르도산이 아닌 신대륙산 와인을 대접했다,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하는 것이랑, 동방에서 오는 비단을 싸는 면포장지의 관세를 1만%로 때려버리고 대신 비단은 무관세에 보조금까지 붙여주는 것이… 후거 가문의 당주를 미쳐버리게 만들수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데네브의 멤버들이 각자 4개 지역에서 흩어져 각자 임무를 완수하는 동안 전 유럽이 몇 달간 들썩거렸고, 결국 마지막에 만신창이가 된 후거 가문의 당주가 베니스에 모습을 드러내어 친히, 유대인 고아 출신의 경제학부 학생에게 무릎을 꿇고 어음 회수의 관용을 베풀어 줄것을 요청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황제조차도 같은 눈높이로 대화한다는 후거 가문의 당주를 굴복시킨 아이샤의 이름이 전 유럽에 널리 퍼져버렸다.
뭐 덕분에 잘 해결되었다고는 하지만… 나는 솔직히 아직도 뭐가 뭔지 잘은 모르겠다. 그저 그 미션에서 기억에 남는 거라면, 사육제가 벌어진 베니스의 아름다운 운하와 도시의 축제 열기 속에서 에스더와 같이 가면을 쓰고 추격하는 후거 가문의 에이전트를 피하며 쉴새없이 달리고, 마지막에는 곤돌라를 타고 탈출한 것 만이 기억에 남을 뿐이다.
스위스에서 진행되었던 미션에서는 오랜만에 에라드와 살라딘, 그리고 로빈 몽고메리가 합류하여 주었다. 슈말칼덴 동맹의 신성로마제국을 탈퇴해 제국, 혹은 데네브에 가입하겠다는 의사에 대해서 우리는 현지 탄압에 저항하는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에라드와 살라딘은 그동안 많이 성장한 에라드 3세를 안고 현지에 도착하였다.
아름다운 알프스의 풍광은 우리에게 적잖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신성로마제국의 탄압을 피해 일어선 스위스인들과 우정을 쌓았다. 그리고 특히, 활솜씨로 서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는 로빈과 스위스에서 우리의 가이드로 일해준 빌헬름의 신경전은 볼만했다. 결국 서로 한치의 양보도 없는 대결은 빌헬름이 현지 총독의 협박으로 자식이 붙잡혀 우리의 적이 된 순간 더 빛을 발했다.
우리를 향해 활을 날린 빌헬름의 공세에 로빈은 날아오는 화살을 마찬가지로 화살을 날려 공중에서 두동강내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연이어 아들의 목을 묶고 있는 교수대의 로프를 화살로 끊어버리고 절벽에 떨어져 강물에 빠진 아들을 안젤모가 구해내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스위스인들은 봉기하였다.
스위스 용병대의 반란에 급파된 신성로마제국의 란츠크네히트들은 강력한 기세로 티롤에서 맞붙었고, 각각의 협곡들을 봉쇄하고 한줌밖에 안되는 스위스 용병대를 지독하게 불리한 장소에서 교전하도록 유도하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반응에 에라드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재밌네… 계속해봐."
그들은 계속하지 못했다. 에라드의 지휘를 받은 스위스 용병대는 토막토막 끊어진 란츠크네히트들을 잔혹하게 물리쳐버렸다. 무려 3일동안 17번의 전투를 벌였던, 보병전으로서는 살인적인 기동을 요구한 에라드는 덕분에 나중에 이기고도 스위스인들에게 맞아 죽을뻔했다. 에라드는 5배나 많은 적들을 뭉게고도 여전히 시시한 게임이라며 하품을 할 뿐이었다. 아마도… 에라드 3세의 잠투정이 없어서 그가 충분히 숙면만 취했다면 더 끔찍한 결과를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여간… 결론적으로 슈말칼덴 동맹은 제국에 일단 합류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리고 그들을 압제하던 총독은 붙잡혀서 끌려왔고, 그는 우리에게 정당한 재판을 요구했다. 빌헬름과 로빈은 신께서 결정할것이라며 그를 묶어두고 머리위에 사과를 올리고 나란히 발사하였다. 그 먼거리에서 두 사람은 사과를 명중시켰고, 사람들은 놀랐고, 총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이런, 한발이 더 남았네.' 라고 이구동성으로 화살 한대를 더 꺼냈다. 그리고 운이 없었는지, 아니면 주님이 짖굳으신건지, 화살은 둘다 사과를 아래쪽으로 빗나가 버렸다.
신성로마제국으로의 잠입을 결정한 것은 우리에게 접근한 그녀… 신비로운 미모의 기억을 잃고 오로지, 고향이 공격당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기억하고 구원을 청하는 그녀 덕분이었다. 그녀의 말을 토대로 알게된 신성로마제국의 동부에서 발생하고 있는 천연두의 발생은 우리에게 그곳이 적성국임을 알면서도 갈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미 제국에서는 널리 퍼졌지만, 보수교회에서는 아직 용인하고 있지 않은 천연두 백신의 방법을 가지고 들어가 사람들을 구하려 애썼다. 그리고 기억을 잃은 그녀는 내 곁에서 나에게 의지하며 항상 같이 있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에스더는 처음에는 의심하고 그것에 짜증을 낸 내게 대단히 분노한듯 하다가… 결국 질려버렸다는 듯 박차고 떠나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그때는 나도 정말 화가 났다. 데네브가 끝난 이후 분명 서로 마음을 확인했고, 연인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그 누구보다도 사랑했는데… 그런 걸로 나를 의심하다니. 하지만 그녀는 결국 옳았다. 예상치 못한 신성로마제국의 병사들의 추격이 마치, 끈이라도 달린듯이 따라오자… 우리는 엄청나게 당황해버릴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에 결국, 그녀는 본색을 드러내었다. 그녀는… 샤를 카페의 약혼녀였다.
그녀는 오랫동안 나를 사랑한다는 듯이 연기를 하며 나를 사지로 이끌다가 결국, 내 목숨을 빼앗기 직전까지 다다랐다. 그리고 어김없이… 나의 여신님이 날아와 죄다 태워버리고, 살라버린 다음 도주… 하려 하였으나, 결국 나는 그렇게 할수 없었다. 샤를 카페의 약혼녀의 의도가 섞여 있긴 했지만… 정말로 그곳은 수많은 사람들이 전염병으로 고통받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에스더에게 사과했다. 그녀는 아무말이 없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녀는 광분해서 날 세번이나 기절할만큼 때렸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내 의견을 반대하지는 않았다. 나는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아이들에게 멜리장드의 도움으로 천연두 백신을 놔주었고, 아이들을 데리고 도보로 북상하며 몰려온 사람들에게 백신을 놔주는 구호 행군을 계속하였다.
위기는 계속 닥쳤었다. 몇번이고 죽을뻔했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 전염병 지대를 탈출하여 이제는 상당히 불어나버린 부모 잃은 아이들을 제국으로 피신시킬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판 함정에 오히려 빠져 나를 저주하는 샤를의 약혼녀에게도… 백신을 놔주고 왔다. 나는 오는 와중에 하프마저 망가져버려, 하는 수 없이 노래를 불러달라는 아이들에게 풀피리를 불어주며 아이들을 인솔하였다. 나중에 알고보니 그 작전의 주요 무대인 동네가 니더작센의 하멜른이었다나 뭐라나…
아무튼… 나는 에스더에게 모든 일이 마친 다음 진심으로 사과했다. 경우가 어찌되었건 진심으로 날 걱정했던 그녀의 마음을 질투려니 한건 나의 오만이었다. 그녀는 나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내가 머물던 퍼브에 와준 그녀에게 몇푼안되는 돈으로 마련한 이벤트에 그녀는 조금은 감동하고, 나의 진심어린 사과와 고백에 마음이 움직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날밤 그녀는 아침이 되어서야 내 누추한 하숙방을 빠져나갔다.
다음날 나는 바보처럼 웃으며 왠지 모르게 신나게 퍼브에서 시키지 않은 일까지 하며 즐거워 했다. 그래도 살다보면 좋은 일 한두가지는 있구나 싶었다. 몇일동안만… 한 여자 덕분에 즐거웠다면… 당연히 한 여자로 인해 피눈물 쏟는게 세상의 진리였던가?
템플기사단과 한자동맹이 결탁한 북방십자군의 결성은 그런 그녀의 살얼음 같은 복수심의 발동이었다. 어지간하다는 안젤모도 북해에서 단련된 스칸디나비아 선원들에게는 애를 먹을 수밖에 없었다. 애초부터 현지 투입이 어려운건 고단한 작전의 전개를 미리 예고해 주었다. 오랜만에 데네브의 전원이 투입된 대규모 작전이 되었다.
나는 이주를 원하는 로무바와 수오메누스코의 백성들에게 조건없는 도움을 약속했고, 당연하다는 듯이 아이샤와 멜리장드와 에스더의 발길질을 당했다. 나름 한번 해봤으니 두번째는 더 잘되리라 생각했는데… 이게 의외로 해상으로 하는 건 좀 느낌이 많이 달랐다. 역시나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기고, 예기치 못한 행운 덕에 위기를 피했다. 안젤모가 구출한 무슬림 여성들의 공동체가 해변으로 쓸려온 우리들을 구원하였던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피난민들을 안전한 곳으로 후퇴시키고, 현지의 지원 가능한 전력들을 최대한 끌어모으고… 자신의 어설픈 위악질이 들통나서 괜히 의기소침해진 안젤모를 아이샤한테 억지로 가서 키스해주라고 해서 강제로 기운을 나게 만들어, 겨우겨우 해전으로 만회하고, 북방십자군의 마수에서 수많은 사람들을 구할수 있었다.
물에 빠져 죽을뻔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나를 노려보며 증오하던 그녀에게… 차마 화살을 날리지 못하고 부목을 던져주고, 퇴각하는 걸 봐준것에 대해 안젤모는 자기가 했다고 했지만, 솔직히 나의 지시였다. 샤를을 베었던 손의 느낌은 그날도 변치 않았다. 나는… 차마 그녀까지 함부로 죽일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의외로, 에스더가 나의 그런 생각을 제일 존중해 주었다. 그래서 그녀와의 대결은 3회전까지 넘어가게 되버렸다.
신대륙을 건너간다는 것에 마음이 설레였다. 상당히 오랜, 대서양을 건너는 항해를 마친 우리는 잠시 본국의 지원을 위해 귀국했다가 북방십자군 사건의 마지막에 긴급히 와서 도와줬던 라와드와 크리스틴의 안내를 받아 신대륙에 위기를 만들고 있는 아즈텍의 발호에 대해서 대응을 준비해야 했다.
방문한 신대륙은 예상과는 달리 많이 발전해있었다. 제국의 영지인 조아니아는 신대륙 동북쪽에서 거점을 확대시켜 나가며, 서부로의 개척을 시작하고 있었고, 유래없는 기독교 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어우러진 독특한 양식의 도시들은 나의 마음을 설레게 하여주었다. 그리고 현지에서 우리는 신흥 국가로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는 현지 원주민들의 나라, 이로쿼이 합중국에서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동맹의 특사로 합류한 이로쿼이 합중국의 에이전트인 리버 인 투마운틴 (River in two mountain), 현지어로 포카혼타스라고 불리던 요원을 만났다.
샤를의 약혼녀는 관대히 봐주던 에스더는 왠지 모르게 포카혼타스 요원에게는 뭔가 숨은 꿍꿍이나 이중첩자 같은 건 아닌 이상 기류는 없다고 인정을 하면서도 괜히 신경을 곤두세웠고, 왠지 포카혼타스 요원은 그런 그녀를 놀리듯이 나에게 은밀한 느낌으로 다가오며 왠지 모를 두통거리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공과 사는 구분해야 했기에 우리는 곧, 북방의 민족들에게 조선 기술을 배워 유럽의 침공을 준비하는 아즈텍으로의 잠입을 시도했다.
그곳에서 우리가 만났던 묘령의 여인, 말린체는 아마도 죽는 그날까지도… 아니 죽어도 잊지 못할 것 같다. 망국의 공주였다는 눈부시게 아름다웠던 그녀는 미모뿐만 아니라 특유의 어학실력과 지혜로 자신을 노예 신분에서 풀어준 우리들을 안내했다. 하지만, 에스더와 포카혼타스는 왠지 그녀가 이상하다는 반응이었다. 나는 그녀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면서도… 결국 당하고 말았다. 정신을 차렸을때는 나는 레콘키스타도르들의 손에 잡혀 아즈텍으로 이송되고 있었다.
보자마자 나를 죽이리라 생각했던 레콘키스타도르들은… 의외로 나의 신변을 그들의 협력자인 아즈텍에 넘겼는데,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보다 훨씬 끔찍하게 나를 죽여줄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의 의식의 제물로 끌려가 피라미드 위에서 심장이 꺼내질 위기에 처했다. 그리고 살려달라고 곁에 있던 말린체에게 사정을 해보았으나 그녀는 왠지 모르게 먼 바다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제사장의 검이 내 심장에 박히려는 순간…
에스더와 포카혼타스 요원이 달려와 제사장을 내동댕이 쳐버리고 말린체에게 홀랑 넘어가 헬렐레하다가 잡힌 나를 죽일듯이 추긍했다. 그리고 분이 안풀리는지 자기들끼리도 싸움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말린체는 깔깔 웃으며 자신을 더럽히고 조국을 멸망시킨 아즈텍을 저주하며, 이미 의식은 나와 상관없이 완성되었다고 영문을 알수없는 소리를 했다.
그리고 그 순간… 멀리서 무언가 거대한 존재가 우리에게 바다에서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리속에는 왠지 미칠 것 같은 악마의 괴성 같은 것이 울려퍼졌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말린체는 광희하며 그 존재를 맞이하고,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라고 세상에 저주를 퍼부었다. 그리고 그녀의 추종자들은 소리높여 주문을 외었다.
"테켈리-리! 테켈리-리! 테켈리-리! 테켈리-리! 테켈리-리!"
그러자 그 광기는 정말이지 세상의 모든 것을 종말로 만들 것 처럼 머리속과 온 세상을 혼란시켰다. 그리고… 바다 저 너머에서 그 거대한 존재… 마치 문어를 머리에 얹은 것 같은 몸에 날개달린 괴물이 나타나자 나는 정말이지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세상은 종말을 맞이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키리에!!! 일레이손!!!!!!"
"스피릿! 위드 얼어라운드!!!!"
나를 두고 한창 머리끄댕이를 잡고 싸우던 두 여자는 나타난 존재에 짜증이 난다는 듯이 나타난 괴물을 노려보며 자신들의 특기를 화풀이 하듯이 퍼부어 버렸다. 그러자, 곧 바다마저 얼어버리는 어마어마한 냉기가 그 괴수를 덥쳤고, 이어서 바위도 녹아버린다는 불꽃이 그위로 작렬해버렸다. 괴물은 세상에 들어본 가장 끔찍한 소리로 서서히 바다속으로 무너져 버렸고… 특수병기를 다 써버린 두 사람은 아직도 분이 안풀렸는지 다시 머리끄댕이 잡고 싸웠다.
그리고 말린체는 그 혼란의 와중에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하고 어버버거리다 구하러 온 레콘키스타도르 들의 목숨을 건 퇴각전 덕분에 달아났고, 덕분에 우리는 의식의 장소가 위치한 아즈텍의 해변 전진기지에 이루 말할수 없는 초대형 깽판을 쳐버리고… 더불어 준비해둔 수많은 유럽 침공을 위해 준비해둔 선박들까지도 날려버리고 정신없이 도망쳐와야 했다.
지금까지의 모험들이 다들 고개가 절로 저어지는 것들이지만, 특히나 이것만은 두번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다. 귀국하는 길에 어디 도망도 못가고 배에서 같은 방 쓰는 에스더에게 뭐라 말도 못하고 구석에 처박혀 침대도 못쓰는 경험은 정말이지 최악이다.
인도에서 했던 데네브 작전과 안젤모의 호구질을 결합한 것 같은 일도 참 토하고 싶은건 마찬가지였었다. 아이샤의 제안으로 현지에 종합 무역상사를 보내어서 안정적인 교역망을 확보하려던 초기의 취지는 무색하게… 안젤모는 그들의 관습에서 존재하는 지참금이 부족한 아내를 살해하는 또다른 명예살인을 목격하였다.
결국 분개한 안젤모는 항상 그렇듯이 지시도 없이 아내들을 태워죽이려고 하는 남편들을 창으로 꼬챙이처럼 꿰어버렸고, 그들중에 브라만 계급들의 고위 자제분들이 있는 건 사건의 시발점이 되어버렸다. 지원도 없는 현지에서 난동을 과하게 부린 안젤모 덕분에 나와 안젤모는 현지 라자들에게 잡혀 노예로 팔리는 수모를 당하게 되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안젤모의 연이은 사고질로 인해 노예중에서도 가장 말썽인 노예로 떨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뭔가 일이 꼬여버렸다. 노예 신분으로 매질을 당하면서도 쉴새없이 깐죽거리는 안젤모를 보며… 불가촉 천민으로 인간 이하의 모멸을 당하며 살던 하리잔 청년들이 갑자기 용기를 내기 시작해버린 것이다. 결정적인 계기는 그가 브라만 출신의 우리를 경멸하던 도도한 아가씨를 반쯤 강제로 안아버리고선 외친 선언때문이었다.
"썅, 눈앞에 죽여주는 여자가 있는데 남자라면 와서 그냥 한판 뜨는 거지, 신분이고 나발이고 알게 뭐야! 난 너희 신들이 아니라 우리 주님이 천벌을 내린다고 해도 한판뜨고 신나게 천벌받을꺼다! 거시기는 크고 오래가면 장땡이지 거기에 신분같은게 어딨어? 한번 하면 다 내 여자다! 불만있는 놈 있으면 나와봐!"
그 논리도 감동도 없는 막말이 의외로 낮은 신분의 청년들에게는 감동의 파도가 되어 몰아쳤다.
"오오… 형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저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저희도 하고 싶습니다."
뭘? 아무튼, 그의 정신이 나간 것 같은 거시기 평등론에 감격한 수많은 하리잔 젊은이들이 우리에게 모여들었다. 어이없는건 나름 여자로서 심한 짓을 당한 바로 그 브라만 계급의 아가씨까지도 안젤모에게 빠져서 우리에게 합류해 버린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사람들이 '거시기로 하나되는 우리!'라며… 내가 다 부끄러운 발언을 쏟아내며 사람들이 더 몰려들어 버렸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일부 천대 받던 수드라 청년들까지 봉기를 하고, 거기에 여성들도 안젤모를 건드리지 말라고 난리를 치기 시작하자 난장판이 벌어졌다.
결국 현지에서 좋게좋게 무역상사 기반을 만들어 달라는 아이샤의 요청은 안젤모의 만행으로 이번에도 다시, 탈출계획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우리는 현지의 저항 세력들과 불교 사제들의 도움을 받고, 결국 사고를 알게 되어 신속하게 합류한 동료들의 도움으로 수많은 백성들을 데리고 남동쪽으로 이동하였다. 결국 요새는 하도 자주해서 이제는 내 직업이 아닌가 착각마저 들게 하는 짓거리를 다시 하게 되었다.
가는 와중에 식량이 부족해서, 굶주리다가 어느 하리잔 소녀가 바닷물을 건져서 소금을 만들어주는 것을 먹었다. 근데 이해할 수 없는건 사람들은 그 소녀에게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건드리지 말라고 비난했고, 안젤모와 나는 화가 나서 그 소녀를 보호하며, 눈앞에서 그 소금을 퍼먹고, 당황해하는 모든 백성들에게 소금을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게 왜 그렇게 충격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백성들은 나를 보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나를 위대한 영혼이라는 뜻으로 '마하트마'라고 불렀다.
결국 불교국가인 실론에서 상당한 난민을 수용해주고, 제국의 인도 조차지역들에서도 난민들을 수용하여 그 작전도 끝을 보았다. 하지만 아이샤는 완전히 적자가 나버린 회사의 회계장부를 들고 눈물을 쫙쫙 쏟으며, 이것만 잘 터졌으면 내 채무도 한방에 해결이었다며 깽판을 친 안젤모를 비난했다. 하지만 안젤모는 심드렁하게 자기가 손해 메꿔주겠다고 했다. 그의 손에 넘겨져서 회사명칭도 동인도회사라고 변경된 무역상사는 앞으로 사업을 상당히 거칠게 할 것 같은 우려가 든다.
동방에서 리엔 등과 같이 몽골 제국에 파견되었던 일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그곳에서 호탕하게 웃으며 나와 허물없는 태도를 보여준, 준적성국의 왕자이긴 하지만 싫지 않은 그 사람… 쿠빌라이와의 우정을 떠올리며 미소가 드리워지는 것을 느꼈다. 우리는 그곳에서 그의 경쟁자인 이리크부카와의 대결에 제국의 현 정책의 기조인 '쿠빌라이의 지원을 통해 몽골이 동방에만 전념하게 한다'를 관철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좋을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을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리크부카와의 대립구도는 우리의 이런저런 지원을 통해서 순식간에 해소하고 쿠빌라이 왕자는 정국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그러나, 작전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그가 넘어야 할 가장 큰 산인 남송과의 대결 지원을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심각한 갈등을 할수 밖에 없었다.
기울어가는 국가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강한 사람들이었다. 단순한 국력만이 아닌, 망국을 지켜내기 위해 노력하는 충신들의 모습에 우리를 스스로 고개를 숙일수 밖에 없었다. 에라드는 비단길의 거점인 장안에서 체스와는 다른 중국식 장기와 바둑을 배우며 흥미로워 했다. 그리고 개봉 근처에서 만난 준수한 모습의 청년에게 기법을 배우고선 곧 그 청년과 친해졌고 실력을 순식간에 향상시켜 바둑으로는 4수를 먼저 깔고, 장기로는 맞수를 둘만큼 성장했다.
그 청년은 우리 일행에게 미소지으며 그곳을 떠났고,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되었다. 양양성에서… 그 청년, 남송의 천재 재상이라던 문천상은 에라드와 양양성을 두고 대결을 벌였다. 장강을 배경으로 빈틈없이 방어시설을 굳건하게 갖추고 있던 남송의 방어막을 에라드는 다양한 기만 전술로 돌파를 시도하였다. 그리고 몇번의 공세가 좌절하자… 그는 한숨을 쉬며 두고 있던 바둑판 대신 체스보드를 꺼냈다. 그리고 에라드의 체스택틱스와 문천상의 문선류가 맞붙었다. 그것은... 감히 범인들이 상상하기조차 힘든 상상을 초월하는 대국이었다.
한달후 양양성은 본성을 제외한 지성들은 모두 함락되었다. 에라드는 그 결과에,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휘할 재량권을 가졌던 몽고군과 그들에게 협력하는 한족 군벌들의 군사력이 남송보다 뛰어난 것에 불과하다며, 보기드문 무승부에 가깝다는 자평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는 슬슬 그곳을 떠나자고 말하였다. 쿠빌라이는 우리를 더 이용하고 싶어하겠지만, 아마도 그의 명장인 바얀이 더 이상의 승리를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고… 문천상이 기보를 통해 넌지시 알려줬다고 했다.
우리는 잔치자리에서 그들의 옛 고사를 따라 케두스가 칼춤을 추는 사이 슬그머니 빠져나왔고, 남송과 몽고의 경계를 따라 그곳을 이탈하였다. 그리고 국경의 끝에서 그 사람, 문천상을 다시 만났다. 그는 담담하게 자신의 나라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힌 우리들을 배웅해 주었고, 에라드는 남송은 오래가지 못할것이라고 말하며 같이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문천상은 그것을 거절하고 조국의 충신으로 남겠다고 말하고 우리는 그렇게 아쉬운 작별을 했다.
돌아왔을 때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 여자의 마지막 공세였다. 템플기사단과 폴란드를 동원하여 러시아를 침공하였고, 그곳에서 자신을 막아보라고 우리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이다. 우리는 곧바로 러시아를 향해 달려가야 했다. 그리고 거기서 만난 젊은 군주, 알렉산더 네프스키와 그녀를 막을 방법을 고민했다.
그리고 더불어 그때는 예상치 못한 손님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나의 동생, 윌리엄이었다. 윌리엄은 러시아를 지원하라는 미션에 대해 자신도 참가를 허락받았다고 말하고, 우리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작전을 진행하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동생이 데려온 우리와 비교되는 케임브리지의 정치와 군사의 프로페셔널 태스크포스를 보며 오랜만에 위축되는 기분을 느꼈지만, 그래도 간만에 본 동생을 적극 환영하였다. 그러나… 어렸을때는 항상 숨바꼭질을 하며 같이 놀던 동생은 왠지 까칠하게 나를 대했다.
아무튼 미묘한 경쟁구도 속에 충분한 자금과 잉글랜드의 후방 지원을 활용하여 작전을 주도하려는 윌리엄과는 달리… 우리는 늘 그렇듯이 가진건 없고, 면상만 두꺼운 점을 살릴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현지 사람들에게 굽신굽신 스킬과 빈대빈대 영업을 시전했다. 다행히도 그 훤칠한 러시아의 군주, 알렉산더 네프스키는 윌리엄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우리에게도 호의적으로 대해주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킵차크칸국의 압제에 시달리던 러시아의 전투력은 보기보다 심각했다. 우리는 결국 모략으로 상대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압제를 가한 킵차크칸군을 오히려 동맹으로 소환한다는 제정신인가 싶은 책략이었다. 얼핏 듣기엔 러시아인은 물론 다른 사람들도 미친게 아닌가 할만한 책략이지만, 오랜 시간 고생을 하도 하다보니 이제는 이가 갈렸는지, 나의 허락이 떨어지자 멜리장드와 케두스는 순식간에 일 추진하고 마쳐버렸다. 바투는 잔혹한 군주인척을 해도 의외로 말이 통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오랜 시간 러시아를 압제하던 킵차크칸국은 그들의 궁기병대를 보내 우리를 지원해 주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리가 몽고에서 쌓은 인맥과, 우리 데네브 특유의 블러핑과 안젤모 특유의 섹드립이 큰 역할을 해주었다. 물론 동시에 여러 번 위기를 맞기도 하였고…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진행된 템플기사단을 내분을 일으키는 모략은 나름 결과를 내어 적의 주력인 템플기사단의 자크 드 뤼지냥은… 어느날 홀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오래전 멱살을 잡고 무슨 일 잇으면 나한테 덤비라고 했고, 실제로도 여러차례 전투에서 만나야 했던 그와 마주했다. 그리고 그는 오랜 시간 망설이듯 고민하다가 결국 이 전쟁을 이쯤에서 매듭짓기를 바란다고 고했다. 템플기사단도 나름 내부적으로 갈등이 심했던듯 싶다. 나는 그의 의견을 수용하기로 하였다.
그는 떠나면서 부디 그녀에게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말했고, 오래전 자신의 조상들이 왕국에 저지른 죄를 후손인 자신이 사죄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좋은 왕이 되길 바란다고 말하고 떠나갔다. 템플기사단은 적의 연합에서 이탈했고, 갑작스러운 이탈에 남은 군소세력들은 순식간에 킵차크칸국의 군대에 무너졌다. 그리고 킵차크칸국의 사절이 나에게 찾아왔다. 그리고 그들은 나에게 체포된 그녀를 넘기며 말했다.
초원의 법에 따르면, 원수인 여자는 취해서 아내로 삼든가 아니면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전자로 하고 싶다면 데려가고, 후자라면 내 손으로 죽이라고 하였다. 만약 이도저도 아니라면 데려가 그들의 칸인 바투의 여자로 바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황당해 하면서도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죽어도 바투에게만은 보내지 말라고 하였다. 차라리 죽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취하겠다고 그들에게 말했다.
그날밤 그들이 만든 오르도에서 그녀는 알몸으로 결박되어 놓여져 있었다. 수치심으로 온몸을 새빨갛게 물들이고선… 나는 그녀의 결박을 풀어주고 옷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몸을 가린 그녀와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샤를을 변호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그녀가 복수 대신 자신의 삶을 소중히 여겨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열심히 설득하였다. 결국, 아침이 되었을 때 그녀는 눈물을 쏟으며 복수를 포기하고, 산타 카탈리나로 가서 수녀로서 남은 여생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축복의 키스를 이마에 해주고선 오르도를 나왔다. 그리고 멀리서 밤새 오르도를 지켜 보고 있었을 나의 연인에게 갔다. 그녀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나는 한기에 차가워진 그녀의 몸을 감싸안으며 말했다. '이제야 끝났다… 그의 악연으로부터…' 그리고 그녀는 말없이 담담하게 내 등을 토닥이며 수고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윌리엄과 그의 친구들은 잠시 리보니아 공작에게 인질로 잡혔다가, 우리 손에 구해지고 나서 나에게 찾아와서 다 죽어가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안부를 묻고, 굳이 윌리엄이 전력외로 판단한 현지 농노들에게 어이없이 체포되어 끌려간 자존심에 상처가 나는 지적은 피하려 애썼다. 그러나… 윌리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가 많이 났는지 나에게 다짜고짜 물었다.
"형님… 한가지 여쭙겠습니다. 항상… 이러고 사세요?"
"아니. 미쳤냐? 이게 제정신으로 할일들이 아니잖아. 일년에 석달정도?"
"서…석달이나요?"
"야, 왜 놀라고 그래? 나도 석달은 쉬어야지. 그것도 쉬는 것도 아냐. 그 동안에도 퍼브에서 알바뛰고 일당 벌어서 입에 풀칠해."
그리고 나의 말에 윌리엄은 도무지 형용하기 힘든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 크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하아… 기회는 그 누구에게나 균등하게 주어지지만… 결과가 같으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라시더군요. 그 말이 맞았네요. 이건… 단순히 우수하고 무능하고의 문제가 아니군요. 알겠습니다. 이제는 납득하겠어요. 찰스와 안나에게는 제가 말해두겠습니다. 형님을 쫓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라고 얘기해두죠."
"야… 당연한거 아니냐? 너희는 나처럼 이렇게 막살면 안돼. 이게 어디 사람이 할 짓들이냐? 너희들은 자질이 우수하니깐, 나보다는 훨씬 더 세상에 기여하면서도, 대접받는 일을 해야지. 나처럼 땡전 몇푼에 목숨이 오고가는 삶은 형으로서 말리고 싶구나."
나의 그 말에 윌리엄은 더 크게 한숨을 쉬며 다시 한번 나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떠날때는 오랜만에 다시 나의 사랑하는 동생으로 나를 한번 안아주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콘스탄티노플에서 벌어진 미션에서는 의외로 에스더와 동행하지 못했다. 그것은… 우리의 적이 다름아닌 아그네 공주였기 때문이었다. 아그네 공주는 에스더를 멀리 아나톨리아 동부에 파견해놓고 그 틈에 안드로니쿠스파라고 불리우는 선제의 파벌들을 이끌고 수도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리엔과 같이 가서 영문도 모르고 이리뛰고 저리뛰며 사건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혼란스러워해야 했다.
우리중에서 가장 무술이 뛰어나고 용의주도한 아그네 공주의 계획은 생각이상으로 철저하였다. 그녀는 각 안드로니쿠스파의 귀족들을 한곳에 모아 단 한수로 비잔틴을 손에 넣을 계획을 세웠다. 겨우 마틸다 아주머니의 전언이 담긴 서신을 받고 상황을 파악한 리엔과 나는 그녀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움직여야만 했다. 그리고 결국… 리엔은 아그네 공주님의 행방을 파악해 그들의 거점이 되었던 성소피아 성당을 배경으로 혈투를 벌여, 그녀를 체포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실렙스에 충성하는 바랑기안 근위대와 마지스트리아노스의 개혁파들이 반란을 획책한 귀족들을 체포하고, 병력을 되돌려 콘스탄티노플이 불꽃에 휩쌓이는 일만은 막을수 있었다. 모든 소요가 끝나고 우리는 감금된 아그네 공주를 만나러 갔다. 그녀는 우리를 보며 웃으며 사건의 전모를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녀, 에스더의 정체에 대해서도…
그녀의 정체를 들은 나는 별로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저 담담하게 그러냐고 되물을 뿐이었다. 결국 그것은 그녀가 에스더를 위해 미리 반대파를 몰아내기 위한 일종의 위장 쿠데타였던 것이다. 우리는 그녀의 고육지책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결론적으로 반란죄를 지은 그녀의 심판에 대해서 우려를 표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결혼하라는데요?"
포르피로게니타는 보호받는다는 원칙에 따라 극형을 처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미 안드로니쿠스가 예전에 알렉시우스 2세를 손아귀에 넣고도 죽이지 않은 전례가 있어 처형 당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그 대신으로 알렉시우스 2세에 충성하는 앙겔로스 가문의 당주와 결혼을 할것을 명령받았다고 했다. 그녀의 말에 나는 리엔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그는… 별다른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알수 있었다. 그는 동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그는 그녀에게 담담한 작별의 인사만을 고하고 그대로 지하감옥을 빠져나왔다. 나는 그에게 항의하였다. 두 사람이 이대로 헤어져도 괜찮은거냐고? 하지만… 리엔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자신도 싫다고. 그녀와 같이 있고 싶다고… 하지만, 거기서 그녀를 구하는 것은 비잔틴은 물론 제국 또한 배신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리고 구한다고 해도 결국 체스와 마지스트리아노스가 그 두 사람을 놔두지 않을 것이란걸 그 누구보다도 체스인 자신이 더 잘알고 있다고… 그는 그렇게 말했다.
나는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그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체스를 그만두면 안되냐고? 하지만 그는 펄쩍 뛰며 말했다.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고 하였다. 자신에게 체스는 모든 것이며, 자신은 다음 체스마스터의 가장 유력한 후보라고… 나는 그에게 담담히 지적해주었다. 어차피, 우리들은 몇 년전에 이미 두 나라와 척을 지고 인연을 맺은 사이가 아니였냐고? 만약에 네가 나를 주인이라고 생각한다면… 나는 제국이건 비잔틴이건 알거 없고 서로 사랑하는 두사람을 축복해줄 테니… 마음대로 저지르라고 명령하겠다고… 그렇게 말해주었다.
그리고 결혼식날, 아름답게 차려입은 아그네는 성소피아 성당에서 혼례를 올렸다. 앙겔로스가의 당주는 아름다운 그녀를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리고 한참 예식이 진행되고, 마지막으로 이 결혼식에 이의가 있는 사람이 있으면 나오라고 한 순간… 성소피아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깨져버렸다. 그리고 그 혼란속에 가는 은사를 사용해 난입해 신부를 끌어안고 다시 스테인드글라스의 창틀에 착지한 그녀… 그녀로 밖에 안보이는 리엔이 소리쳤다.
"포르피로게니타와의 혼례를 이런식으로 협박해서 밖에 못하는 비잔틴의 호모새끼들한테 고한다. 신부는 내가 데려간다. 불만 있는 새끼들이 있으면 다 덤벼봐! 나는 리엔 느베리다!"
결혼식장의 경호를 맡았던 헥터 바넬경은, 그 모습을 흐믓하게 보며 미소지었다. 그리고 항의하는 앙겔로스 가문의 귀족들에게 웃으며 자제를 권하고… 역시나 화사하게 미소지으며 바랑기안 근위대 1대대에게 리엔을 잡으라고 명령하였다.
"니들 보고 호모새끼란다. 한번 가서 확인해줘라. 조져!!!"
그리고 그날 천년의 성도에서는… 사상 초유의 여자가 여자를 보쌈해간 만행과 더불어, 그녀를 추격하는 바랑기안 근위대와의 건물들의 지붕을 달리는 화려한 시가지 배틀이 시민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어느새 베팅도 붙어서 그가 황금문을 통해 도시를 빠져나갈 무렵에는 어디선가 달려온 호객꾼이 그에게 던져준 '잡힌다'에 걸었던 판돈에서 선수 페이에 해당되는 돈이 제법 큰 돈이 되었는지 하늘 가득히 금화를 흩뿌리며 그는 달아나는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체스와 마지스트리아노스의 두 수장은 흥미롭게 가장 높은 첨탑에서 차를 마시며 구경하였다고 한다.
결국 두 사람은 그후로 한동안 양쪽 세력의 보여주기 식의 추격을 피해 신혼여행을 보내고, 결국 관계자 협의를 통해 몇가지 조건으로 사면을 받고 얼마전부터 내가 일하는 퍼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림집을 차렸다. 물론, 체스를 제 발로 박차고 나간지라… 은근히 생활력이 없는 리엔은 체스에서 연락책 비슷한 계약직으로 전락했고, 아그네는 공주 신분에서 밤에 퍼브에서 춤추는 무희로 일하고 있지만… 뭐 자기들이 좋으면 그만 아닐까 싶다.
아그네의 결혼식이 파토가 나고, 대외적으로는 나 역시도 철수한것으로 되어 있었지만… 나는 헥터 바넬경의 부탁으로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바로… 비잔틴의 바실렙스였다. 병세가 심각해 숨조차 고르게 쉬지 못하는 몸이었지만… 그는 꼭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에스더의 부친인 그를 만나러 무거운 발걸음을 하였다.
그는 위중했다. 어린시절 황위에 올랐다, 친척의 반란으로 황위를 빼앗기고 유폐되면서 얻은 병마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나는 그에게 담담히 다가가 그의 손등에 키스하며 그에게 예를 표했다. 그는 기침으로 고통스러워 하면서, 나에게 이것저것 많은 것을 물었다. 나는 솔직하게 그의 질문에 모든 것을 대답해주었다. 그녀와의 관계까지도 말이다.
그는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냐고 하였다. 나는 모르겠다고 하였고… 그는 내가 예상치 못한 그와의 만남을 들려주었다. 옛날 옥스포드의 숲속에서 문둥병 환자를 만났을 때… 그도 거기에 있었다고 했다. 안드로니쿠스에게 추방되어 프랑스로 귀국한 뒤 문둥병에 걸려 병동에 옮겨진, 그의 모친… 에스더의 할머니를 만나러 서방 세계의 방문 중에 들렸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거기서, 문둥병에 걸렸어도 꺼리낌없이 환자들을 안아주던 나를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미소지으며… 영문도 모르게 나에게 계속 고맙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잠시동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이곳에 머물러 달라고 하였다.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였다. 사흘동안…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은 그저 쓸데없는 이야기들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시한 이야기들을 들으며 왠지 모르게 기뻐했다. 그리고 나에게 계속 고맙다는 말을 거듭했다.
사흘이 지나고, 그날따라 그의 기침은 잦아들었다. 그리고 왠지 통증도 호소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온화한 표정으로 그는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나에게 의견을 구하고 제안을 하였다. 나는 별다른 말없이 그저 담담하게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리고 그가 깊게 숨을 한번 쉬어 보이고, 나의 손을 가만히 잡고선 말했다.
"내 딸을 잘 부탁하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는 주변에서 흐느끼는 시녀들에게 목례를 해보이고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거기에는 헥터 바넬 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배웅해 드리겠습니다."
한참동안 그는 말없이 황궁의 복도를 걸었다. 그리고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에스더 황녀, 아니 폐하께서는… 지금 막 갈라타에 내리셨다고 합니다. 곧 이곳으로 오실것입니다. 만나보시고 가시면 좋지 않을가 생각합니다만… 당신의 소망에 따라 일단 밖으로 모시겠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폐하의 곁에서 임종을 지켜주셔서…"
나는 그에게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슬퍼하고 있었다. 흔히 보이는 황권의 교체로 인해 자기 보신을 고민하는 관료 군인이 아닌, 진정한 황제의 친구로서 그는 먼저간 친구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달한 곳은 황궁의 비밀통로로 연결된 해변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배에 올라타며 말했다.
"이제는… 그녀를 쉽게 만나긴 어렵겠죠. 저는 폐출된 왕자이고, 그녀는 천년 제국의 여제니깐요."
"당신은… 여전히 그녀의 요구를 수용하진 않을 생각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늘 그렇지만… 내가 좋아하는 건 에스더입니다. 당신의 따님일수는 있지만, 비잔틴의 포르피로게니타나 바실리카는 아니죠. 그게 모두 같은 사람이라면… 제가 떠나는 것이 맞겠죠."
"그 아이가 화를 낼겁니다."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에스더가 좋아하는 것도 결국은 제국의 적장자나, 데네브의 왕이 아닌… 그냥 죤이 아닐까요. 일단은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로서 임종을 지킨 것만으로도 과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장례는 남겨진 분들에게 맡기고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그는 차분하게 말했다.
"곧… 다시 만나뵙길 기대하죠. 그때 어쩌면 당신의 목에 도끼를 들이밀고 만나는 자리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부디 내손에 죽지 않도록 잘 준비해서 다시 뵙기를 바라죠."
"하하하… 너무 무서운데요. 바랑기안 연대장님의 협박은 일반인이 쉽게 감당할게 아니잫습니까. 부디 상냥하게 대해주시길 청원드립니다만."
"바랑기안 연대장으로서가 아니라… 아버지로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과 즐거운 밤을 보낸 친구에게 이보다 더 상냥할 수가 있을까요? 잘 돌아가십시오."
나는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을 느끼며 콘스탄티노플을 떠났다. 멀리서, 성당으로 옮겨진 유해에 통곡하는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울려퍼진다. 최악의 상황에서 자신의 이름에 부끄럽지 않게 비잔틴을 부흥시킨 군주가 세상을 떠났다. 앞으로 더 파란만장한 시간이 펼쳐질 것은 자명했다.
장례를 마치고 에스더는 마치 아직도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예전 그 모습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려는 나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비잔틴으로 와줄 생각이 없냐고… 나는 그녀의 10년전 했던 제안을 다시 했다는 것을 깨닭았다. 그리고 나의 답변 역시도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달랐다.
그녀는 화내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담담히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그리고 마스터는 나에게 말했다. 이번엔 정말로 독한술이 필요한 상황일지도 모른다고. 나도 알고 있었다. 더 이상 그녀가 진흙탕을 뒹굴며 사지를 넘나드는 전우이자 연인으로서 나에게 머물수 없다는 사실을…
나는 마스터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독한술을 마시며, 이제는 더 이상 어린 시절처럼 아무 생각없이 살아갈수 없다는 사실에 슬퍼하며 한잔했다. 몇일이 지나고 나에게 아이샤와 멜리장드가 찾아왔다. 둘다 대단히 분노한 표정으로…
"비잔틴이… 제국과의 오랜 우방 관계를 청산할지도 모른다는군요. 새로운 바실리카의 분노에 우리측 외교 담당자는 물론 비잔틴의 외무 책임자들도 덜덜 떨고 있는 상황입니다."
"통상도 금지에 가까운 상황입니다. 무슨 놈의 관세가 15만%라는 숫자가 다있죠? 이건 비잔틴이 작정하고 열받았다는 걸 만방에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근데 왜 나한테 그런 얘기를…"
그리고 두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다 너 때문이잖아!!! 지금 당장 콘스탄틴노플에 달려가서 무릎꿇고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 죽을 죄를 지었으니 헤어지잔 말은 하지 말아달라고 빌라고!!!"
나의 말에 두 사람은 두통이 밀려온다는 표정을 제대로 지으며 준비해둔 초급행 쾌속선 티켓과 입국 서류들을 내밀었고, 당장 쫓아가 빌고 오라고 내 등을 떠밀... 아니 발로 찼다. 나는 그 녀석들의 등쌀에 밀려 마지못한듯 그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도착한 그곳은 전에 왔을때와 분위기가 딴판이었다.
블라르케르나이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곳에서 험악한 기세로 완전 무장을 갖추고 시립한 바랑기안의 호위를 받으며 보랏빛 황제의 복식을 제대로 갖추고 옥좌에 앉아 있는 그녀는 진정한 2천년을 버텨온 비잔틴의 여제로 모자람이 없었다. 나는 깊게 한숨을 쉬고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높은 단상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제국의 개자식아… 잘도 이곳에 머리를 들이미는구나. 예전 나의 제안을 거절할때는 언제고, 이제는 나에게 무엇을 얻어내고자 왔느냐? 우리 비잔틴이 그리 허술하게 보이더냐? 너희들의 마음대로 황위를 올리고 내리며, 국가의 정체성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면 우리가 곱게 받아들이리라 생각했더냐?
대답해라. 제국의 개여. 그 대답은 네 목을 걸고 잘 생각하고 대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는 내게 무엇을 요구하려는 것이냐? 그리고 그것을 요구하기 위해 너는 무엇을 내놓을 것이냐. 만약에 그 대답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너는 그 대가를 참혹하게 치를 것이다. 헥터 장군, 그의 뒤에 도끼를 들고 가서 서라. 자, 대답해라."
그녀의 말에 나는 내 뒤에 선 한때 5대 명장으로 불리웠고, 그 다섯명중에서 일대일 전투라면 확실히 최강자일 내 여자친구의 아버지의 살기에 좀 후덜덜한 기분이 들었다. 원래 이런 자리면 네가 내 변호해줘야 하는거 아니냐? 하지만 결국 모든건 내 결자해지겠지. 나는 한숨을 쉬며 그녀에게 담담히 말했다.
"내 대답은 항상 같아. 내가 좋아하는 건 에스더야. 비잔틴의 포르피로게니타건 바실리카든… 나는 별로 관심이 없어. 나는 항상 변함없는 다뜻한 시선으로 내곁에 머물러준 에스더를 사랑해. 그래서… 나는 비잔틴의 바실리카의 남편이 되서 콘스탄틴노플에 갈수는 없어. 하지만… 에스더라면 얘기는 다르지.
네게 줄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지? 알다시피… 난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빈털터리야. 그래서 너에게 줄수 있는건 이 노래밖에 없어. 하지만 나는 그 노래에 용기를 담아 너에게 다가가겠어. 에스더, 너를 사랑해. 그리고 너도 나를 사랑한다고 생각해."
그리고 잠시 숨을 고르고 오랫동안 가슴속에 품고 있던 말을 꺼냈다.
"그러니깐… 우리 결혼하자. 이제부터 너를 위한 프로포즈를 이 노래로 대신하겠어. 이 노래가 끝나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네 마음대로 날 죽이든 살리던 해."
그리고 나는 하프를 꺼내 그녀에게 노래를 불러주었다. 여전히 에스더와 헥터경은 살기등등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긴장하였지만 나는 심호흡을 하고 그동안의 시간속에서 나와 함께해준 그녀에게 진심을 담아 청혼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노래가 끝나고 정적이 일었다. 한참후에 에스더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한걸음, 한걸음 단상에서 내려와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손가락으로 나의 턱을 잡고 눈을 마주보며 한참동안을 바라보았다. 나는 예전 예루살렘에서 처음 보았을때부터 설레였던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조금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말했다.
"제법… 남자다운 말도 할수 있게 되었네. 예전에는 언제 죽을지 몰라 하루하루 조마조마하던 애송이라고 생각했는데…"
"안그러면 웰던 스테이크 되잖아. 프로포즈는 이 정도로 만족?"
그녀는 키스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날 처음으로 보랏빛 방에서 숙박하는 영광을 누렸다. 물론 황제 경호라는 명목으로 문밖에서 딱버티고 선 장인어른 덕분에 큰소리를 내며 하지는 못했지만… 나름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다음날 비잔틴의 바실리카가 아닌 에스더의 복장으로 콘스탄틴노플의 외곽에 있는 작은 공회당에서 우리 둘과 주례를 맡은 오랜만에 귀국한 라와드 이맘, 그리고 크리스틴 부인, 헥터 바넬경, 에스더의 모친인 마리아 부인, 그리고 어떻게 알고 왔는지 시골 광대와 놀러나온 부인으로 변장하고 멀리서 모르는 사람인척 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만 참석한 작은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여행은 에게해의 아름다운 섬들을 배를 타고 떠나는 여행이었다. 그리고 리마솔에 돌아와 일주일… 그녀와 꿈과 같은 시간을 보냈다. 물론 그 전에… 그 두 녀석들… 아이샤와 멜리장드가 내 방에 들어와 있는대로 깽판을 쳐놓고, 술처먹고 토해놓고, 벽에 낙서해놓은 것을 먼저 지워야 했지만… 나는 멜리장드가 벽에 쓴 글을 보며 쓴웃음을 지었다.
'You know nothing, John Fxxk!!!"
지들도 십년 넘게 곁에서 머물러준 남자친구들 있으면서 이제와서 뭔 소리야. 나는 왠지 모르게 미안한 표정을 짓는 에스더에게 괜찮다고 말하며 일단 방청소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야속하게도, 그녀는 나의 아내이기 이전에 비잔틴의 바실리카였다. 그녀는 나에게 못내 아쉬움을 표하고, 이제 막바지에 들어선 아나톨리아 전선의 최후의 전장으로 이동해야 했다.
나는 그렇게 그녀를 미소로 배웅하며 리마솔의 허름한 나의 하숙집에 머물렀다. 그리고 거기서 나의 회상은 끝났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슬슬 일나갈 시간이다. 앞으로 일주일… 다들 시간을 맞춰서 올수 있을까? 나는 미소를 지으며 오랜만에 전원 다같이 해후할 생각에 이것저것 파티 준비를 고민하며 퍼브로 내려갔다.
일주일후 다행히도 전원 모여주었다. 이제 막 여름으로 접어드는 시기의 온화한 리마솔에서 만난 그리운 친구들은 다들 즐거운 얼굴로 자리에 모여주었다.
"내년에는 졸업하긴 해야 하는데… 빌어먹을, 해부학 실습…"
멜리장드는 상당히 초췌해보였다. 구호기사단의 단장으로 끌려가 의대 입시를 강제로 강요당하며 3수끝에 겨우 합격은 하였으나… 여전히 의학은 적성에 안맞는지 7년째 졸업을 못하고 아직 예과를 다니고 있었다. 덕분에 너무 좌절을 많이 했는지 예전의 이상을 꿈꾸던 금발의 미소녀는 간데 없고, 신대륙에서 배워온 담배와 술을 끼고, 시도때도 없이 독설을 퍼붓는 다소 퇴폐적인 느낌의… 하지만 여전히 키랑 가슴은 안커서 어린애같이 보이는 특이한 캐릭터로 성장하였다.
그녀를 위해 변명해보자면… 단순히 의학에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전 세계의 구호가 필요한 곳에 나의 미션은 물론 그녀 단독으로도 하도 여기저기 구호 활동을 다니느라 제대로 시험공부 할 시간이 없다는 것은 인정해줘야 할 듯 했다. 하지만 덕분에 왠지 늘어난 짜증과 독설과 강경함 덕분에… 구호기사단은 차라리 무력에 호소하던 시절에 나왔으면 최고의 단장이었을꺼라고 입을 모아 공감하고 있는 중이다.
"역시나… 왕정은 무리겠죠. 공화정으로 데네브의 가입을 생각중입니다."
케두스는 케임브리지를 졸업하고, 앙주의 의회에 필립경의 추천을 받아 출마하여 자신의 연고가 없는 지역임에도 제국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각종 의회 분과 위원회에서 활약하고 제국 국무부의 외교 업무에 협조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였다. 틈틈이 나의 미션에도 동참하면서 세운 업적이었다.
지위가 상당히 높아졌지만 그는 여전히 온화하고 겸손한 사람이었고, 조국의 동포들을 위해 급여를 아낌없이 송금하며 명망을 높이고 있다. 그리고 현재 의회에서 서서히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 아비시나아 독립에 대한 문제에 대해 그는 허둥거리지 않고 차분하게 추진하고 있는 중이다.
"오랜만에 어머님이 애들 봐주기로 하셨어요. 이게 얼마만의 육아 해방인건지…"
살라딘은 힘든 시간을 보냈다. 제국으로 돌아와 정식으로 에라드와 결혼하고, 살라딘 위체가 된 그녀는 마틸다 아주머니에게 상당히 혹독하게 부려먹혀졌다. 며느리로나, 군인으로서나 동시에 말이다. 제국사관학교의 교장으로 각종 전술과 전략에 관련되 저서를 여러권 내며 에라드의 지휘를 보충하는 토대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출산과 나의 미션 지원과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중에도 군무를 놓치지 않고 각지에서 군공을 세웠다. 에라드도 이제는 같은 병력이라면 아내를 이길 사람은 없을꺼라고 말해서 처음으로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물론, 자신은 적은 병력이라도 당연히 이긴다는 전제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랜만이다. 죤… 늦었지만 결혼 축하한다. 이제 너도 유부남이구나."
에라드 형은 늦게나마 나의 결혼을 축하했다. 그는 사실 은근히 한가하게 지냈다. 에라드 형은 자신의 업적이 자신의 것으로 드러내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살라딘의 전술 참모로서 곁에서 실제로 대부분의 불가능한 미션에서 말도 안되는 승리를 이끌어 내면서도 군부에서 크게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현재 제국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는 죤 몽고메리경이 내년쯤에 퇴역을 결정함에 따라 다음 총사령관은 현재, 참모본부장인 살라딘이 유력하게 되었다. 살라딘은 난감해 하며 남편에게 양보를 하려 했으나, 왠지 에라드는 이제 제법 체스가 익숙해진 에라드 3세를 보는 육아에만 전담하겠다고 선언하고 사절하였다. 뭐 실제로는 마수드 집사장이 보게 되겠지만…
"대체, 왜 내가 당신한테 남자 사귀는 것까지 지적받아야 하는건데요?"
아이샤는 대단히 미인이 되었다. 흑발이 흐트러져 늘씬하면서도 지적인 여성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은 베니스 상업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재무부의 특수감사실의 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틈틈이 돈을 모아 어떻게든 나의 부채를 해소하려 노력하는 듯 하지만 그건 여의치 않은 모습이었다.
처음에 안젤모의 소개로 기욤 로스경과 안토니오 차일드경이 후견인으로 나서고 나서, 그분들의 극진한 보살핌에 오랜 가족에 대한 응어리도 완전히 털어내버린듯 하였다. 그녀는 지금 두분의 양부의 성을 함께 써서 아이샤 로스차일드라는 이름으로 세계의 경제계에 가장 영향력있는 인사로 활약하고 있다.
"원래, 로시니학파랑 사귈라면 논리와 숫자, 열걸음안에 납득… 당연한거 아뇨? 선배한테 수작 걸고 싶다면 후배인 이몸을 그걸로 통과해야지. 뭐… 두걸음도 못걸은건 내 잘못 아님다. 다 약간 어설픈 선배랑 눈맞은 빙충이 탓이라고요."
안젤모는 여전히 제멋대로 살고 있었다. 그의 위악의 실체가 드러나자, 모든이들이 비웃으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모든 여자들이 그의 감동적인 러브스토리에 환호했다. 덕분에 여자 꼬시는 데는 훨씬 더 편해졌지만 덕분에 그의 말썽과 아이샤의 절망은 심도를 더 깊게 하는 것 같았다.
여전히 유쾌한 우리의 이탈리아 용사는 제국 해군을 통해 일곱 바다를 제압하고 이제는 흑해가 아니라 모든 바다에서 씨서펜트의 허락없이 숨도 쉬지 말라고 엄포를 놓는 입장에 있다. 그런 그에게 통제를 걸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밖에 없는 듯 하였다.
"와인이랑 살라미는 먼저 올려다 놨습니다. 저는 퍼브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창문으로 좀 실례를…"
리엔은 변함없었다. 이제는 이웃사촌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장한 모습이 아름다워, 동네에서는 뭔가 사연있는 여자들끼리 사는 걸로 오해를 사고 있다. 다행히 아그네가 임신한듯 하니 이제는 좀 오해를 풀지 않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왠지 메이드 복장으로 파티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면 당분간 무리가 아닐까 싶었다.
한때 체스에서 유래가 없는 깽판을 치고 퇴직한 덕분에 퇴직금도 없고, 일거리도 없어, 다시 체스에서 일당 받고 일하는 안습한 가장을 연출하고 있어 참으로 애석하지만… 그래도 오늘만은 기운차게 파티를 준비해주었다. 며칠전까지 체스에서 의뢰한 타완틴슈우 프로젝트 거절한걸로 전전긍긍하더니만…
"오랜만에 모이니 반갑네요. 마치 예전의 그날과 같아요."
아그네는 여전히 유쾌했다. 사상 초유의 포르피로게니타의 셀프 국외 유출로 인해 한동안 정계는 시끌시끌하였다. 이제는 그녀도 30대에 가까워지지만 여전히 우아하고 아름다우며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빈틈이 없었다. 이미 우리 마을의 부녀회는 완전히 장악해서 자신의 소문에 대해 이리저리 떡밥을 던지며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괴상한 리더쉽을 발휘하고 있다.
그리고 얼마전 아이가 생겼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녀의 진지하게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말했다. 십년을 넘게 그 짓을 해도 안생겨서 정말 고자인줄 알았는데, 아닌걸 보니 다행이라고… 리엔이 길길이 날뛰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듯 하다. 요새는 애 가지고도 바에서 춤추는 일을 그만두지 않아 리엔의 고민을 늘리고 있다.
"오랜만에 방문이군요. 이번에도 무사히 도착하심을 알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사합니다."
라와드는 신대륙에서 존경받는 종교인으로서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들 특유의 스피릿 신앙이 있기는 하지만 종교라기 보다는 전통에 가깝다고 생각한 이로쿼이 합중국의 지도자들은 의외로 외국의 종교에 대해 관대하며 오히려 장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는 그런 그들의 지원을 받아 각지에 무슬림의 좋은 점을 설파하고 신대륙에 이쪽의 문물을 전파했다.
덕분에 제법 많은 무슬림이 신대륙에 생겨났다. 라와드는 현재 조아니아 현지에 이전에 도착한 개척민의 리더인 하버드와 공동으로 대학을 설립하고 그곳에서 제자들과 학생들을 키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그의 존경받을 만한 일화들 덕분에 이로쿼이 합중국의 각 정당은 선거때마다 그의 연설을 따내기 위해 노력중이라고 한다.
"다들 무사하니 다행입니다. 축복이 함께하시길…"
크리스틴도 마찬가지로 대학을 설립했다. 현지 선교사인 엘러휴 예일과 협력하여 기독교 신앙을 근간으로 부조리를 배격하는 이성적인 종교관을 가진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현지에서 무슬림도, 기독교도 아닌 현지 샤먼의 주례로 두 사람은 결혼하였다. 그래서 지금은 대학에서는 한발짝 물러나 딸아이를 키우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신대륙에서 종교로 인한 다툼은 절대 있어서는 안된다는 요지의 이성으로서 빛을 찾으라는 룩스 엣 베리타스( Lux et veritas, 빛과 진리)를 선언하였고 반발하는 사람이야 말로 진정한 신앙의 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풀수 없는 종교적 갈등은… 건전한 방법으로 풀면 된다고 언급하였는데… 덕분에 예일과 하버드는 매년 부상자가 안나오고 심각한 무례가 안되는 선에서 서로를 엿먹이는 경쟁이 일종의 축제처럼 되어버렸다고 한다.
"다들 이렇게 모여줘서 고마워.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도 있으니, 오늘은 그냥 아무런 고민을 하지 말고 즐겁게 한잔하자. 그래서 다들 애기들도 집에다 두고 왔잖아. 이제 성지에서 탈출한지도 10년… 이제는 슬슬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잊혀져 가지만… 우리들만이라도 이렇게 축하면서 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나의 말에 안젤모가 화색을 띄며 한가지 지적을 했다.
"어라? 그러고 보니 우리 그때 데네브 작전 마치고, 종결 기념 파티도 안했군!. 마침 잘되었다. 이제 10년이나 지났지만… 뭐 아무렴 어때? 이렇게 다들 모였으니 좀 늦은 종결 기념으로 한잔 하자고!!!"
나는 그의 말에 조금 사람들이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대답했다.
"종결 기념파티는… 아니겠죠.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깐요."
하지만 내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사람들은 다들 자기들의 잔에 술을 따르며 건배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은 어색함은 간데 없이 다들 신나게 웃고 떠들며, 먹고 마시며 우리들의 시간을 즐겼다. 마스터에게 부탁해 하루 전세낸 퍼브가 동이 날만큼 우리들의 파티는 신나게 이어졌다. 그리고 그것은 밤이 늦어져도 이어졌다.
우리는 퍼브에서는 철수해서 다들 내 남루한 하숙방에 옹기종기 모여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그때를 추억하고, 술을 마셨다. 다들 거나하게 취하고, 이제는 헛소리가 슬슬 섞일 무렵에… 나는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그들에게 말했다.
"그립다… 예루살렘의 그 시절… 그리고 그 장소… 어때? 다시 한번 보고 싶지 않아? 그 그리운 추억의 장소를?"
나의 말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나 이내 왁자지껄해지며 그들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네요. 한번 다시 가보고 싶네요. 그때 먹었던 연유가 듬뿍든 커피 맛은 아직도 안잊혀져요."
"버리고 온 제 집도 다시 가보고 싶어요. 어린 시절 아끼던 물건들도 전부 두고 왔는데…"
"난 거기 술집 내 소유였다고… 집한채 날리고 온거야… 아오, 거기 남겨두고 온 애들 영업 제대로 하고 있으려나 몰라."
그러면서 다들 그때의 기억들을 떠올리며 웃었다. 나는 왠지 술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그들에게 말했다.
"그러면… 다같이 한번 갈까?"
나의 말에 아이샤가 물었다.
"언제요?"
"내일… 말이 나온김에…"
다시 잠시 침묵이 감돌았지만, 술자리 특유의 분위기가 그렇듯이 다들 왁자지껄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거 걸작인데요! 그래요. 까짓거 가죠 뭐."
"칼릴이 거기 다스린다지? 어디 체스 한판 두러 가볼까나?"
"오오… 술집을 되찾자! 거기 가면 내가 종업원들한테도 안알려주고 숨겨놓은 시라즈 와인이 몇동이는 있어. 지금 숙성되서 맛이 최고일거야. 그거 먹으러 가자! 가자!"
그리고 다들 웃고 떠들며 다시 즐거운 밤이 깊어갔다. 그리고 어느새 새벽이 올 무렵에 다들 하나둘 잠이 들었다. 내 하숙방에 널부러져… 오랜만에 그날의 회상을 떠올리게 하였다. 나 역시 깊게 잠이 들어버렸다. 하지만… 일어나는 것을 제일 먼저였다.
아침에 일어나 아직도 여기저기 널부러져 자고 있는 나의 동료들을 깨우지 않게 조심하며 벽에 내가 갈 행선지를 적어놓고 퍼브로 내려왔다. 아래층에 미리 준비해둔 여행장비들을 짊어지자 바에서 마스터가 나타났다. 그는 졸린 표정으로 짐을 꾸리는 나를 보며 지나가듯이 말했다.
"떠날꺼냐?"
"네… 지금까지 보살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이곳에는 한동안 다시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냐? 그동안… 너도 수고 많았다. 근데… 어떻게 갈꺼냐? 너 아직 죄인 신분이잖아. 리마솔에 무단으로 나가는 순간 벌집이 될텐데?"
"그래서 부탁 좀 드릴께요. 10년치 퇴직금은 안받을 테니, 마스터가 좀 손을 써주시죠. 가지고 계신 얼티넘을 사용해서 말입니다. 루이 느베리, 퍼브마스터님."
그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알았냐?"
"리엔이 여장한 상태로 이곳에는 죽어도 안들어 오려구 하더라구요. 그래서 알았죠. 하지만 짖굳으시네요. 어린시절 몇번 뵙기는 했지만 한동안 못뵈서 얼굴을 모른다는 이유로 이곳에 저를 보호하면서 머물고 계실줄은 생각치도 못했습니다."
나의 말에 그는 한숨을 쉬며 딴청하듯 말했다.
"딱히 널 보호하려고 이곳에 머문건 아니야. 원래 이 퍼브는 우리 체스가 생겨난 장소야.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 왕국이 세워졌을 때, 수많은 유럽의 청년들이 이곳 중간 기착지인 리마솔에 모여들었지. 그리고 그들중에 군인으로서는 부족하지만 지혜와 정보로 성지를 지키겠다는 청년들이 있었어.
이곳에서 그들은 체스 시합을 핑계로 모여 의견을 나누고 화합했는데… 당시 퍼브보다는 체스방으로 운영되던 이곳에서 본격적으로 조직이 구성되고 나서 그들은 조직명을 체스로 불렀지. 그리고 그들은 120년동안 예루살렘을 위해 어둠속에서 일했지. 그리고 관례적으로 당대 마스터가 후임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하면 이곳에 와서 노후를 보내는 것으로 되었지.
물론 최근에는 끝까지 성지를 포기하지 못하고 지위를 나주처 다시 복귀한 파멜라 스승님이나, 너무 청출어람해서 아직 한창인 내가 조기 은퇴를 하게 만든 마틸다도 있어서 전통이 흐릿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야. 아무튼… 딱히 너를 위해 이곳에 자리를 만든건 아니다. 하지만… 열심히 일한건 사실이니… 퇴직금은 줘야겠지. 쿠폰 받아가라."
그렇게 말한 그는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듯 품에서 얼티넘을 꺼내 나에게 건내주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아그네는 애 낳을때까지 여기 뒀으면 좋겠다만… 말을 안듣겠지? 하는수 없군. 레베카와 베니를 보내서 임산부 보호하게 하는 수 밖에… 우리 귀한 느베리의 아이가 무사히 태어날수 있도록 잘 좀 부탁한다. 다음번에 만날때는 내가 존대말을 해야겠군. 수고많았다. 행운을 빈다."
나는 그와 악수를 하고 새벽 공기가 서늘한 퍼브의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때는 석달이 넘게 걸렸었는데… 혼자서 이동해보니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얼티넘을 손에 들고 리마솔의 선착장으로 가서 아무 배나 하나 징발해서 타고 안티오크에 도착했다. 그리고 거기서 오론테스 전투의 자취를 바라보았다. 10년의 세월은 그토록 강렬하게 우리를 지켜주었던 해자도 완전히 모래속에 자취도 없이 사라지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내가 노래불렀던 언덕은 아직도 그곳에 남아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추억을 되새기며 걸음을 남쪽으로 향했다.
나의 걸음은 추억을 회고하는 여정이었다. 나는 내가 걸어왔던 그해 여름의 엑소더스를 역순으로 회상하며 한걸음한걸음 남쪽으로 내려갔다. 여정의 중간에 도달한 클라크 데 슈발리에에 이르러서는 나는 나의 적이었지만 나름 애증이 엮여 있던 샤를 카페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계속 남쪽으로 향했다. 어느새… 내가 따로 부르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이 나를 따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기웃거리던 몇몇 사람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그들은 나를 알아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나와 나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예전 데네브 작전보다도 더 무책임하고 충동적인 그저 무작정 걷는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까지도 나의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결국 한달반정도의 시간이 흐르고… 이제는 완연한 여름으로 접어들자 나는 옛 예루살렘의 영역에 도달할수 있었다. 수만명의 나를 따르는 순례자들과 함께… 그리고 그때쯤에 나의 동료들도 하나하나 대단히 열받은 표정으로 나의 곁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도착한 것은 의외로 로빈 몽고메리였다.
"리틀죤 중대장과 셔우드 레인저들은 같이 못오셨나 보네요."
"걔는 이제 정식으로 제국군에 편입되었습니다. 이제는 리틀죤 소령이라고 불러줘야 겠더군요. 저랑 아내는 예편하고 사실상 예루살렘 대사에서 면직된 이후로 갈곳도 없어서 제국군에 하청받으며 머물러 있었습니다. 책임져주시죠. 데네브에서 저번에 못데려간거 이번에는 꼭 챙겨주셔야 합니다."
나는 웃으며 나에게 합류해준 그와 그의 약혼녀를 환영하였다. 다음으로 나에게 온 것은 키호트경이었다.
"올레! 10년만에 다시 만나뵈니 보기 좋군요."
"은퇴 안하시나요? 이제 연세도 있으신데…"
"아직은 카심 영감 기록은 못깼습니다. 하아… 꼭 한번 맞붙어 보고 싶었는데 재작년에 타계하다니… 아쉽기 그지 없군요. 대신 저희 프라이팬, 저번 10년 전 사건 이후로는 업그레이드 해서 윙드 프라이팬으로 개명한 우리가 다시 왕자님을 모시겠습니다. 야, 세르반테스... 지금의 만남도 잘적어라. 저번처럼 내가 노망난걸로 묘사하면 너 죽는다."
나는 웃으며 이제는 깃발에 프라이팬에 날개까지 달려 있는 모습을 보고 훌룡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아오, 썅! 저걸 그래도 좋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내가 호구야! 내가 최강 호구라고!!! 술먹고 다 뻗어 있는 사이에 저 혼자 쪽지에 달랑 한마디 '먼저 간다.' 라고만 적어놓고 가면 어쩌라는거야!!!"
멜리장드는 여전히 입이 험했다. 하지만 가장 먼저 구호기사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도착해 나의 신변이 무사함을 확인하였다. 세계 최강의 의료부대인 그들의 참전에 나는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아마도 어지간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는 한 불필요한 사상자가 발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구호기사단 특유의 흰바탕에 검은 십자가가 그려진 전선 구호복을 입고 담배를 한대 물며 거칠게 기사들과 스콰이어들... 아니, 의사들과 레지던트들을 각각의 부대에 재배치했다.
"그 대롱이 달린 막대기는 뭔가요? 메이스치고는 너무 약해보이는데…"
"이거 말입니까? 전에 기억나시죠? 양양성에서 사용하던 진천뢰의 화약을 응용해, 파괴력 대신 압력에 중점을 맞춘 신병기입니다. 오늘 처음으로 실전에 활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게 잘되면 곧바로 아비시니아의 독립도 먼 미래는 아닐겁니다. 이미 이산들와나에서 에라드경도 검증을 마쳤습니다. 연사력이 좀 떨어지는게 문제이긴 하지만... 그건 3열로 축차 사격을 통해 해결할 수 있을것 같습니다."
나는 천여명의 건장한 흑인 청년들이 대단히 조심스럽게 대롱을 통해 화약과 쇠구슬을 투입하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몽고의 지원을 표면에 내새우고 실제로는 비법을 알아내려 노력한 미션의 목표인, 저 물질을 저렇게 활용하는 것이 가능할까? 뭐 듣기로는 그리스의 불을 대신할 혁신적인 무기라고는 하지만... 뭐 아무튼 나는 그에게 행운이 있기를 빌며 내년에 있을 아비시니아 임시정부의 선거에서 가장 유력한 초대 대통령 후보가 될 그가 무사하기를 기원했다. 아마도 그는 데네브에 제국과 비잔틴에 이어 세번째 입장 번호표를 받을수 있을 것이니 절대 무사해줘야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서로 말없이 서로를 지켜준 멜리장드를 위해서도…
"현재 제국과 비잔틴의 각 증권가에서 맘루크 관련주들의 매도를 시작하고 있어요. 이제 슬슬 분위기 파악이 되겠죠? 앞으로 그들에게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요. 아버지들에게 부탁해서 해당 종목들을 리버스 옵션으로 확보해두겠습니다. 왕자님, 걱정하지 말고 앞을 보고 나아가십시오. 눈앞에 적들에게 우리가 베이루트에서 겪었던 기갈이 뭔지를 그들에게도 체험하게 해주겠습니다."
아마도… 지금 리알토, 롬바드, 샹젤리제의 증권가들은 다들 미친듯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증시에 늘 그렇듯이 'John will be there!'이라고 외치며 몇날 몇일을 아이샤의 행보에 뜬눈으로 밥을 지새울것이다. 나는 이제 로스차일드의 이름을 제국을 넘어 전세계에 떨치고 있는 그녀의 지원에 감사하였다. 예전 예루살렘의 꽃파는 소녀는 거기 없었다. 거기 있는 것은 세계의 경제를 주름잡는 아이샤 로스차일드였다.
"혼자서 첩보 뛰려니 이만저만 고생이 아니네요... 이럴줄 알았으면 좀 민망하더라도 체스를 때려치지 말껄 그랬을까요? 뭐 지금에 와서야 의미없는 후회죠. 지금 상황을 파악해보니 칼릴은 약 20만 대군을 몰고 브엘세바에서 서서히 북상하고 있는 중인듯 하더군요. 부족하나마 혼자서라도 맘루크의 주요 요인들의 포섭 및 체포, 혹은 제거를 시작하겠습니다."
나는 리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에는 나보다 더 자신의 정치적 위치를 파악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기는 하구나. 그리고 그게 앞으로 체스마스터가 될 사람이라는 점에서 어떤 의미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체스와 마지스트리아노스 양쪽에서 두 사람은 탈영이 아닌 현재 신혼여행으로 인한 장기 휴가로 근태처리되고 있다는 사실을... 아그네는 알고 있는듯 하지만 리엔은 여전히 모르는 것 같았다. 뭐, 당장 자기 의사만 있으면 마지스트리아노스의 수장으로 복귀가 가능한 아그네와 달리, 마틸다 아주머니는 왠지 한 30년은 더해먹으실것 같으니 모르는게 약일지도... 이미 저 너머에 자신을 지원하러 온 체스 요원들이 아직도 그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는것 같다. 잠시만... 내버려 두자.
"얏호!!! 조금 늦었나요? 다행히도 아직 연락망이 살아 있더군요. 답신까지 받았습니다. 몽고의 역참은 정말 인정해줘야 할 것 같아요. 그 먼 대도에서 여기까지 동의가 오는데 겨우 한달밖에 안걸리다니… 황금군단의 정예와 케식의 일부가 우리를 지원하기 위해 곧 페르시아를 넘어 올겁니다. 쿠빌라이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아아… 우리 아가야, 엄마 잘했지?"
아그네는 항상 그렇듯 아무리 힘든 상황에서도 미소를 흐트리지 않고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하기 힘든 발상을 해내어 그것을 현실로 옮겼다. 리엔은 이제 배까지 불러오는 아내의 천방지축에 여전히 전전긍긍하면서 제발 집에서 좀 쉬라고 부탁했고, 아그네는 벌써부터 뒷방신세 만드냐며, 이럴꺼면 뭐하러 보쌈해왔냐고 거짓 눈물을 흘렸고, 나는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흐믓하게 지켜보았다. 역시나 마지스트리아노스의 수장... 임시로 맡겨둔 사람은 역시나 페이크고, 실질적으로 아직 그녀가 조직을 장악하고 있다는 뜻이겠지?
"이거 너무 과한거 아닌가요? 이제 대체 몇척이…"
"24개 함대, 1,208척! 뭔가 문제라도? 관함식을 하는데 이 정도는 모여야 정상이잖아."
"왜 관함식을 남의 영해, 그것도 적성국에서 하는 건데요? 이건 그냥 한판 뜰 테니 나오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제국 해군이 잘도 이런 미친 명령을 수용했군요."
"선배님… 우린 해군이야. 조낸 쿨하고 멋진, 바다 사나이라고. 육군 출신 총사령관이 명한 데네브에 대한 가급적 비협조 명령 따위 알게 뭐냐? 우리는 우리 꼴리는 대로 달려와서, 닥치는대로 쑤시고, 박고, 휘저어서, 천국으로 가게 만들어 버릴 꺼라구. 쫄리면 뒈지시던가."
"나… 정말 이탈리아 남자가 싫어!!!"
안젤모는 쿨하게 모든 제국 해군에 레반트 집결을 명령했다. 그것은 군부에서 펄쩍뛸 거의 반란에 준하는 행동이지만, 놀랍게도 대부분의 함대가 그의 명에 따라 레반트에 모여들었다. 지중해와 대서양 함대는 물론 인도양의 동인도회사 소속 사략함대도 홍해를 따라 접근하는 중이었다.
해상에 빽빽하게 들어차서 튀어나오기라도 했다가는 지옥을 맛보여줄듯한 기세로 버티고 있는 그들의 위세는 정말이지… 인류 역사에 유래가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앞에서 가장 당당하게, 해군 제복 따위는 맨몸에 아무렇게나 걸치고 그을린 피부와 곱슬머리를 휘날리며, 제독이라기 보다는 해적 선장 같은 모습으로 그는 모여든 사람들중 아가씨들에게 추파를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를 비난하는 아이샤를 보며 나는 내년쯤에는 슬슬 두사람의 결혼 선물을 준비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 저희들과 같이 제국에 합동 훈련을 위해 파견된 이로쿼이 합중국의 특수전 부대들이 같이 와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로쿼이 합중국 대사관 주재 무관도 이번 일에 관심을 가지고 급파되었습니다. 아시는 분이라고 들었습니다만…"
나는 라와드와 크리스틴의 말에 당황했다. 아는 사람? 설마… 그러나 그 설마가 맞았다.
"어머나, 오랜만이에요. 나의 왕자님. 못보신 사이에 훨씬 더 멋져지셨어요."
"아… 그렇군요… 오랜만입니다. 포카혼타스 요원… 별고는 없으셨죠?"
"이제는 요원이 아니라, 대령으로 불러주세요. 이번 특수전 부대의 지휘권도 같이 받아 왔으니 이곳 직급으로 대령에 준합니다. 이로쿼이 합중국의 위대한 대추장이신 속삭이는 부엉이께서도 안부를 전해드리라 하시고 현지에서 부대동원의 재량권을 주셨습니다. 일단 제 부대를 소개시켜 드리죠. 강행 정찰 전문 부대인 독솔져(Dog soldier)와 고속 추격부대인 타탕카 체이서(Tatanka Chaser)입니다. 이미 실력들은 지난번 작전에서 목격하셨죠?"
나는 그들을 보았다. 무슬림 출신들이 많다는 독솔져들은 강인해보이는 근육질에 질긴 가죽 갑옷을 입은 난투전 전문 부대였다. 그리고 날렵한 외모에 흉갑을 걸치고, 말이 아니라 거대한 늑대를 타고 있는 타탕카 체이서들은 기병대에게 치명적인 공격이 가능한 노련한 사냥꾼들이었다. 하지만 그들보다 더 반가운 존재들이 있었다.
"그리고 여기는… 기억나시죠?"
"물론이죠. 다들 많이 컸구나…"
나는 내 앞에 나타난 눈에 붕대를 감은 소녀들을 보고 감격했다. 그녀들은 장님이 아니다. 그녀들은 바로 호크아이 (Hawk Eye), 하늘을 날아다니는 매와 시각을 공유해 정찰과 지휘가 가능한 이로쿼이 합중국의 비밀 병기들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저번 작전에서 아즈텍의 손에 몰살당할뻔 한걸 우리가 구해준 적이 있는 익숙한 아이들이었다. 저번에는 그냥 어린아이들이었는데 이제는 완연한 숙녀가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크리스틴에게 보호받은 그녀들은 현지 정령신앙의 사제면서도 왠지 우리 기독교의 수녀복장과도 다르지 않은 의식의 옷을 갖춰 입고 나에게 다가와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당신을 봅니다."
그리고 나도 그녀에게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당신을 봅니다."
손바닥이 마주하자 곧 나의 시각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매의 시각이 되어 멀리 지상을 내려다볼수 있었다. 그리고 손을 떼자 그 영상은 사라졌다. 나와 손을 마주한 소녀가 미소지었다.
"이곳에서도 잘 보이시는 것 같군요. 다행입니다. 이곳의 영혼들은 저희들의 속삭임을 제대로 듣지 못할 것 같아 걱정했는데… 그렇지 않군요. 저곳의 도시… 그곳에 강대한 영혼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어요. 어서 와달라고… 다같이 손을 잡고 이곳으로 돌아와 달라고… 그 끝까지 왕자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를 표하고 그 시각을 에라드와 공유해줄것을 요청하며 인사를 마쳤다. 그리고 포카혼타스 요원이 말했다.
"저곳이 성지로군요. 듣던것보다 멋진걸요? 오늘밤이면 함락 및 입성이 가능할까요? 어떠세요? 오늘 일정은? 저녁에 별다른 일정이 없다면 오랜만에 만났는데 저한테 잠시 시간을 내주지 않으시겠어요?"
그녀의 당혹스러운 제의에 나는 손사래를 어색하게 치며 말했다.
"하하하… 저 이미 결혼했습니다. 이제는 그럴수가…"
그러나 이 아가씨도 여간내기는 아니었다.
"네, 들었습니다. 그 석탄녀랑 결혼했다면서요? 뭐 어때요? 본처 자리 따위는 그런 시시한 년보고 가지라고 하죠 뭐. 이제 곧 제왕의 자리에 오르시잖아요. 아내 한두명 정도는 그리 큰 일도 아니잖아요? 부담스러우시다면 제가 무슬림으로 개종할까요? 그럼 다처가 가능하니 별로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아내 한명으로는 말 나올껄요. 분명히 카톨릭이나 무슬림 출신도 하나 받으셔야 할지도 몰라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1번으로 입후보하고 싶은데…"
그러나 그녀의 그 노골적인 유혹에 태클을 건 것은 내가 아니었다.
"키리에! 일레이손!"
"어맛! 이게 무슨짓이야!!!"
에스더는 이제는 개량이 되서 아주 가는 열선처럼 쏘아낼수 있는 그리스의 불을 발사해 나와 그녀를 갈라놓고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아랫도리가 눈사람보다 차가운 년이 왜 여기 나타났냐? 다시 보는 날이 너희 가족들 부의금 챙기는 날이라고 경고했을텐데."
"하하하… 그래 말이 안통했지. 잠시 잊었다. 그래 한판 뜨자. 이번에 새로 개량된 므깃도 인페르노의 첫 성능테스트로 오늘 레시피는 포카혼타스 스테이크다."
"그래 오랜만에 한판 뜨자. 나도 놀지는 않았다고. 우리 윈딩고 프로스트의 개량형으로 본처따위는 꽁꽁 얼려 냉장고에 처박아두고, 니 서방이랑 성지에서 성스러운 행위 한번 해볼란다. 덤벼!!!"
나는 살금살금 그녀들을 피해 라와드와 혀를 차며 왠지 나를 비난하고 싶어하는 크리스틴과 함께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아내가 데려온 병력들을 살펴보았다. 만지케르트를 수복하고, 그곳에서 옛 전사자들의 유해를 수습한 뒤 거대한 합동미사를 드린 에스더는 나의 연락을 받자마자 단신으로 리마솔로 달려왔었다. 그리고 내가 메시지를 남기고 떠나자 그녀는 만지케르트에서 귀국하던 비잔틴의 최정예들을 급거 방향을 틀어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럼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옛 상처가 있던 만지케르트를 수복하고 합동미사를 올려서 오랜 비잔틴의 숙원을 풀어낸 에스더를 따르는 병사들의 사기는 기세등등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번 일이 데네브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일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제국에 뒤지지 않기 위해 좀 과잉이라 생각될만큼의 병력을 집결시켜 버렸다. 나는 그들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쉬며 라와드에게 말했다.
"우와… 저게 다 뭐야. 바랑기안 근위대는 당연하다 쳐도, 캐타프랙터에, 클리바노로포스에 아나톨리아 테마의 최정예 스쿠타토이와 수도의 타그마타 정예 부대, 그리고 발칸반도의 바르다라오타이까지 불러오다니… 거기에 그리스의 불을 전문적으로 사용하는 소녀들로 구성된 부대, 인페르노 네메시스는 극비사항 아니었던가요? 저 정도면 그냥 혼자서도 성지 탈환하고도 남겠는데요… 과잉 전력이에요."
나의 말에 크리스틴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부군이 얼마나 못미더우면 그럴까요…"
할말이 없네. 그리고 그녀는 말을 이었다
"지금 각지의 데네브의 생존자들이 이곳으로 몰려오고 있습니다. 이미 키프로스와 아르메니아의 난민들은 대부분, 우리보다 먼저 도착해서 왕자님을 따르고 있더군요. 다시 한번 수백만의 백성들이 집결하게 될것 같습니다. 에휴... 이제는 저도 두손두발 들었습니다. 이번에는 저도 위생 및 보호 담당자 못하니깐 다른 젊고 유능한 사람 선발해서 일 시키도록 하세요."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보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이미 그녀 역시도 신대륙과 유럽에서 그녀의 행적에 감동한 수많은 구호단체들의 집결을 이미 명한 상태이다. 아직 은퇴를 허락하기는 무리다. 그녀의 후계자가 될 그녀의 딸 루치아 디블랭 아자프가 성장하기 전까진 허락할수 없다는 점을 나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했다.
나는 슬쩍 자리를 피해서 작전의 준비를 하고 있는 살라딘에게 갔다.
"순조롭습니다. 각 부대의 배치는 일사분란하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든건 결과가 나와봐야 하겠지만 그리 큰 우려는 하지 않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오랫동안 제가 자라고 정들었던 옛 저의 궁전도 다시 갈수 있겠군요. 마수드와 아딜도 감격스러운 모양입니다."
"다행입니다. 그래도 긴급하게 오느라 보병 전력이 좀 부족한거 아닌가요? 이제는 카심 노인도 돌아가셨고…"
"아, 그러고 보니 소개해 드릴 사람이 있습니다. 어서 이리 오려무나."
제국군 총참모장이자, 유력한 차기 총사령관인 그녀는 안정된 자리를 박차고 면직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릎쓰고 이곳으로 달려와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뒤에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 중에서 누군가를 불렀다. 그리고… 낯익은 한 소년이 다가왔다.
"너는…"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왕자님… 오스만 가지입니다. 기억하십니까?"
나는 미소지으며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예전에 일곱살짜리 소년은 이제 어엿한 소년 생도가 되서 그녀를 보좌하고 있었다. 나는 그 아이에게 간단한 안부를 묻고 카심의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오스만이 말했다.
"할아버지의 죽음은 저에게 큰 슬픔이었지만 동시에 제게 사명이 되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의 삶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분과 같이 자신의 무공을 세우고, 가족을 지키며, 받들어 모실만한 왕을 지키는 일에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데네브의 아이들은 살라딘님에게 부탁드려 자체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그것은 왕자님을 위한 군대가 될것입니다."
살라딘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일정 규모의 무슬림을 반드시 관료와 군대에 편입한다는 데브시르메 법에 의거하여 제법 많은 데네브의 아이들이 군대에 지원했고, 그 군대의 편성과 훈련을 맡은 살라딘은 제국의 전력을 강화한 공을 인정받아 고속 승진을 거듭했던 것이다. 하지만 암묵적으로는 제국 군부와 합의를 통해 그 아이들의 지휘통제 재량권을 데네브에서 일정 가져가게 해두었다고 했다.
물론 아직 제대로 된 전력으로 쓰기에는 시간이 걸리지만 그것은 앞으로 데네브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 될것이라고 그녀는 설명했었다. 그것은 살라딘의 영광을 위해 끝까지 우리를 지켜준 굴람들에 대한 그녀가 보내는 마지막 경의 였다. 나는 아이들을 둘러보았다. 조금 독특한 복식과 무장을 갖춘 아이들… 그리고 좀 눈에 띄는 프라이팬? 그 모습을 본 오스만이 말했다.
"할아버지뿐만 아니라 저희들은 키호트경도 존경합니다. 병종을 바꿀수는 없지만 그분의 방식에 따라 저희들은 편제와 부대 용어를 주방에서 많이 따왔습니다. 하지만, 우리 부대에는 아직 이름이 없습니다. 왕자님께서 저희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시길 바랍니다."
나는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이들을 보며 뭐라 할말이 없었다. 나는 아이들에게 일단 이번에는 참전이 아닌 참관만 하라고 당부한 다음 부대의 이름을 지어주려고 했으나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그래서… 살라딘에게 물었다.
"아직은 신병이나 다름없는 아이들이군요. 새로운 병사들을 투르크어로는 뭐라고 부르죠?"
살라딘은 미소지으며 대답했다.
"예니체리(Yenicheri)라고 하지요."
"흐음… 어감이 좋군요. 그걸로 하지요."
아이들은 미소지으며 자신들이 부여받은 명칭을 깃발에 수놓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는 성장하여 당당히 군인의 길을 걷겠다고 맹세한 아이들을 보며 흐믓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한일이 비록 아무것도 아닐지라도, 적어도 저곳에 있는 몇몇 아이들은 노예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는 인생을 살수 있었다. 그 정도면… 내가 한일에 조금은 의미를 부여해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에라드는 심각한 얼굴로 전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주변에는 십여명의 호크아이 소녀들이 매를 여기저기 날리며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고, 멀리서 타탕카 체이서들이 강행 정찰을 통해 확인된 결과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그리스어로 헥터 바넬 장군이 이곳저곳 에라드의 명령을 번역하여 데려온 비잔틴의 부대들에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나는 에라드에게 다가가 물었다.
"어때? 이번에도 해볼만해?"
에라드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병력차이는 아직 우리가 불리하지. 여기저기 이합집산을 한 부대라 유기적인 시너지를 내기도 힘들고. 하지만… 항상 결과는 체스를 다둬야 나오는 법이지. 어떻게 할까나? 20만은 다죽일까? 아니면 다 살릴까? 일부만 죽이는 옵션이 이번에는 좀 어렵네. 이건 전략의 문제가 아니라 정책적 의사결정의 문제가 될듯한데?"
그는 왠지… 점심 메뉴를 빵으로 할지 밥으로 할지를 묻는 투였다. 나는 왠지 서늘한 그의 질문에 혀를 내두르며 그에게 말했다.
"가능하다면… 다 살리는 쪽으로…"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농담이야. 당연히 다 살려야지. 대부분 우리 데네브에 흡수해서 전력으로 사용할 병력들이니깐. 그래서... 다시 한번 좀 무리수를 둬볼라고. 짚단위에 놓인 바늘만 낚아채는 매의 기술처럼... 적의 지휘부만을 붕괴시켜서 전장에 이탈시키고, 남겨진 20만명을 멀뚱멀뚱한 상태로 그대로 포로로 잡는 기보를 보여줄께. 카이로에 체스를 보내서 칼릴을 보호할 준비를 하라고 해. 황당하게 도망쳤다가 부하들에게 살해당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니깐."
그는 그렇게 말하고 다시 한번 심상의 전장을 펼쳐 배치를 시작하고 기보를 그려갔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저 전장의 대국만이 흥미로운 체스광… 그는 항상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영광도 자신의 손에 넣지 않았다. 나는 항상 나를 군사력으로 지켜준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고마워... 에라드형..."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미소로 화답하였다. 그 미소를 보며 나는 발걸음을 돌려 내려왔다.
이미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저 너머의 광야에 빽빽하게 들어차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소식을 들은 데네브의 난민들과 지난 10년동안 나와 관계를 가진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위해, 그리고 우리들의 나라 데네브가 일어서는 것을 보기 위해 몰려왔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아우성과 나를 알아보고 꽃을 던지거나 악수를 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멜리장드는 독설을 내뱉으며 그들을 통제하며 내 주변을 정리했고, 나는 이제 멀리서 보이는 예루살렘의 성벽을 보며 옛 추억을 떠올렸다.
지금도 바로 어제 일처럼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아직 어렸고, 그러기에 두려움이 없었고, 세상을 향해 거침없이 걸어갔었고, 그로 인해 얻은것과 잃은것이 있었다.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내 뒤를 말없이 따르던 순례자들이 말없이 나를 따라 멈춰서서 내 기분을 살폈다. 나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아무것도 아니란듯이 다시 앞으로 시선을 향했다.
그러자 저너머에 자욱하던 모래먼지가 어느새 걷혀져가고 그로 인해 드러나 시야에 거대한 성벽이 눈에 들어왔다. 성지 예루살렘, 내가 그해 여름 치기어리고도 어처구니 없는 사고를 쳤던 그 시발점이 다시 오랜 시간이 흘러 내 시야에 들어왔다. 주여 나를 이곳으로 다시 무사히 인도하심을 감사하나이다. 그리고 조금전에 느꼈던 옛 추억이 다시 떠올랐다. 그리고 나의 기억은 내가 어렸던 그시간 속으로 이동하여 그날의 일을 바자의 음유시인들처럼 이야기로 들려주기 위해 여행을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까? 그리고 그 긴 회상은 이제 끝을 맺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변한건 없었다. 나는 이곳을 떠나던 날처럼 여전히 남루하고 손에 든 것은 하프와 금화 한 개와 동전 몇닢, 그리고 먼지투성이의 사탕 몇개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심호흡을 하며 앞을 향해 걸어갔다. 어느샌가 싸움을 마친듯 내곁에 내가 사랑하는 그녀가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맞잡고 앞으로 걸어나갔다.
걸어가며 수많은 나의 소중한 사람들을 다시 한번 돌아보았다. 그리고 모두의 축복속에 나는 드디어 먼길을 돌아 이곳에 다시 돌아왔음을 깨닭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여정에는 나홀로가 아닌 수많은 사람들이 다함께 손을 맞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감사하며 기도를 올렸다.
우리의 성지, 우리들의 나라… 데네브를 위하여… 천상의 왕국을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힘겨워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 내일 패러디와 후기가 한편 더 나갑니다
와 진짜 어제 제가 말씀하신데 다 해버렸네요.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밖에 없네요. 도대체 깨알요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재밌게 보았습니다. 중세의 이상적 왕인 죤과 국가인 데네브를 알게되어서 기분 좋았습니다. 혹시 뎌4 배경으로 글 쓰실 생각 없습니까? 이번화의 스케일로 보아서 가능할 꺼 같은데요.
첫댓글 고생하셨습니다!
신이여 황제를 보호하소서!
해피엔딩이라니! 정말 긴 여정, 수고하셨고 그동안 잘봤습니다! 오늘 들어와서 몰아읽기 잘했네요 ㅜㅜ
통장의 갈리치,루스에 대한 로마니아의 징벌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각오하십시오!
@독일육군 히익 ;ㅅ;
순식간에 뎌4가 된 기분입니다. 세이브 파일이라도 받고 싶은 마음입니다
와 진짜 어제 제가 말씀하신데 다 해버렸네요. 어마어마하다고 할 수 밖에 없네요. 도대체 깨알요소들이 얼마나 많은지. 재밌게 보았습니다. 중세의 이상적 왕인 죤과 국가인 데네브를 알게되어서 기분 좋았습니다.
혹시 뎌4 배경으로 글 쓰실 생각 없습니까? 이번화의 스케일로 보아서 가능할 꺼 같은데요.
벌써 끝이라니... 너무 아쉬움
데네브에서 살고싶네요 어떻게 이민갈 방법 없을까요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나저나 쓰릅인들은 데네브의 통치에서 벗어난 족속들이니 결국 데네브의 징벌을 받게 되겠지요?
으잌 아바타 드립 ㅋㅋㅋㅋㅋ 당신을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