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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간주된다. 군사력으로 통치했고, 군사·행정·상업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스라엘 식민지들을 건설했다. 그가 벌인 대규모 토목사업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수도 예루살렘에 세운 유명한 성전이다. 그는 현인과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전통적으로 〈아가〉의 저자로 간주되며, 〈잠언〉에는 그가 쓴 것으로 간주되는 격언과 교훈이 있다. 개요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왕으로 간주된다. 군사력으로 통치했고, 군사·행정·상업 문제를 다루기 위해 이스라엘 식민지들을 건설했다. 그가 벌인 대규모 토목사업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은 수도 예루살렘에 세운 유명한 성전이다. 그는 현인과 시인으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전통적으로 〈아가〉의 저자로 간주되며, 〈잠언〉에는 그가 쓴 것으로 간주되는 격언과 교훈이 있다(유대교). 배경솔로몬에 관한 거의 모든 정보는 〈구약성서〉에 근거를 두고 있다(특히 Ⅰ열왕 1~11, Ⅱ역대 1~9). 〈역대기 하〉에는 전설 자료가 일부 담겨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사실적이고 신빙성 있는 역사적 사실들로 이루어져 있다. 솔로몬의 배경은 유명할 뿐만 아니라 화려하다. 아버지 다윗은 자수성가하여 왕이 된 인물로, 강한 적들을 물리치고 유다 왕조를 세웠으며, 이집트 국경에서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했다. 다윗이 만난 가장 강했던 최초의 적은 필리스티아(불레셋) 사람들로서, 이들은 팔레스타인을 지배했고 티레(두로)와 시돈이 해상무역으로 번성하는 것을 방해했다. 다윗은 이스라엘 보병, 그중에서도 궁수(弓手)들을 훈련하여 말과 전차를 사용한 필리스티아 군대와 그밖의 적들을 능가했다. 그밖에도 티레 왕 히람과 제휴하여 육상 및 해상 동맹을 맺었는데, 이 동맹은 솔로몬 때까지 지속되었다. 따라서 솔로몬은 상당히 큰 제국과 해상 통제 및 무역에 대단히 중요한 페니키아 동맹을 유산으로 받았다. 솔로몬의 어머니 바쎄바는 다윗과 혼인하기 전에는 히타이트족 출신 장군 우리야의 아내였다. 바쎄바는 궁정에서 벌어진 음모에서 노련한 수완을 발휘했는데, 그녀는 왕비가 되기 전에 장군의 아내에서 왕비가 되려는 목적으로 감수성이 예민한 다윗 앞에 의도적으로 자신을 노출시켰을 수도 있다. 다윗은 재위 말년에 노망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런 가운데 아내들 중 하낏(학깃)이 자기 아들 아도니야를 다윗의 후계자로 세우려는 음모를 꾸몄다. 아도니야는 다윗의 선임 장군 요압, 제사장 에비아달, 그외 여러 대신을 자기편에 가담시켰다. 다윗이 아직 살아 있을 때 솔로몬이 형들을 제치고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오직 바쎄바가 예언자 나단의 협조를 받아 이루어낸 일이었다. 제국 건설자솔로몬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정적(政敵)들을 하나씩 가차없이 숙청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했다. 정적들을 제거한 뒤 측근들을 군대·정부·종교기관의 요직에 앉혔다. 고대 중동 제국에서는 이것이 정권을 안정시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솔로몬은 또한 여러 군사 동맹을 맺음으로써 왕권을 강화했다. 〈열왕기 상〉의 기록을 보면 그는 무려 아내 700명과 첩 300명을 데리고 살았다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민간전승과정에서 과장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엄청난 숫자는 대군주로서의 그의 지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대가족은 쾌락뿐 아니라 명성도 가져다주었는데, 당시 혼인은 외교의 한 형태였다. 솔로몬은 원근각처 왕들의 누이나 딸과 혼인함으로써 거대한 상업제국을 세우는 데 필요한 군사·무역 동맹들을 맺었다. 이러한 혼인으로 얻은 신부들 가운데 이집트 파라오의 딸이 있었는데, 파라오는 가나안족의 도시 게젤을 점령하여 약탈한 뒤 사위 솔로몬에게 주었다. 모든 제국 건설자들과 마찬가지로, 솔로몬은 군사력으로 영토를 유지했다. 그는 보병 외에도 막강한 전차부대와 기병대를 직접 조직했다. 〈역대기 하〉 8장에는 솔로몬이 시리아에서 군사작전을 감행하여 성공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 공격 목표 가운데는 시리아-메소포타미아를 잇는 요충지로서 사막 가운데 세워진 대상(隊商)들의 오아시스 도시 타드모르팔미라도 포함되었다. 그의 목표는 주요 육상교역로를 장악하는 데 있었다. 그는 이 지역에서 거두는 이익을 지키기 위해 식민정책을 펼치고 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군사·행정·상업 등을 도맡게 했다. 이러한 식민지 가운데 전차와 식량을 보관하는 도시들도 있었는데, 그러한 식민지들은 본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으로 상인 및 군사 요원을 파견하여 왕의 무역이권을 챙기도록 한 오랜 전통에 따라 생겨난 것이었다. 해안 평야와 에스드라엘론 평원을 잇는 가르멜 지역 문턱에 있는 므깃도는 솔로몬의 이러한 도시들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된 예에 해당한다. 므깃도에서 발견된 450마리의 말을 수용하는 마구간 유적지는 〈열왕기 상〉에 기록된 솔로몬의 병력, 즉 전차 1,400대와 말 1만 2,000필이라는 숫자가 과장이 아님을 보여준다(어떤 학자들은 이 시설들이 마구간이었는지 상점이었는지 분명하지 않다고 함). 광범위하게 얽혀 있던 솔로몬의 교역거점망은 결국 최초의 대규모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핵을 이루었다(팔미라). 팔레스타인은 육상과 해상 무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에 주요중심지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육상으로는 아시아-아프리카를 연결했고, 해상으로는 이집트와 함께 대서양-지중해와 홍해-인도양을 잇는 항구들을 가진 유일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팔레스타인의 경제적 이점을 최대한으로 살려 그곳을 전성기에 올려놓은 사람이 바로 솔로몬이었다. 솔로몬 제국의 성격은 주로 무역에 있었으며, 이것은 그와 그에게 우호적인 군주들에게 육로와 해로를 통한 무역을 확대할 수 있게 해주었다. 예를 들어 티레의 히람은 홍해를 지나 인도양으로 통하는 아카바 만 엘랏 근처에 있는 항구도시 에시욘게벨이 필요했다. 히람과 솔로몬의 해상무역 탐험대는 실제로 당시에 알려진 세계 끝까지 항해했다. 예정된 일정에 따라 항해했는데, 어떤 경우는 돌아올 때까지 3년이나 걸렸다. 솔로몬의 재위중 일어난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는 시바(세바) 여왕의 방문이다. 그녀의 남부 아랍 왕국은 인도양으로 나가는 홍해길에 있었고, 그 영토에는 금·유향·몰약 등이 풍부했다. 솔로몬은 교역망을 유지하기 위해 시바 왕국의 산물과 교역로가 필요했고, 시바의 여왕은 팔레스타인 항구들을 통해 지중해권에 상품을 팔기 위해 솔로몬의 협조가 필요했다. 전설 속에서는 시바 여왕과 솔로몬의 연애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는데, 그 이유는 솔로몬이 "시바의 여왕에게 관례에 의한 답례물 이외에도 여왕이 요청한 것을 모두 주었다"(Ⅰ열왕 10 : 13)는 구절이 '자녀까지 낳았다'라고 해석되었기 때문이다. 솔로몬 성전솔로몬은 자기 나라와 제국 전체에 요새와 수비도시들을 세울 필요를 느끼고 대규모 토목사업을 시작했다. 이것은 국가가 번영했기 때문에 가능한 사업이었다. 그는 성벽을 쌓고 '밀로' 궁전과 유명한 성전을 세우는 등 수도 예루살렘을 화려하게 치장했다. 예루살렘 주위(그 거룩한 도시 내부를 제외한)에는 무역을 위해 이스라엘에 들른 주요 외국인 집단들을 위하여 신전을 포함한 시설들을 세웠다. 안정과 번영이 솔로몬 시대보다 뒤지는 후대 사람들은 솔로몬의 범세계적인 시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예루살렘 주위에 있는 신전들을 파괴했다. 솔로몬 성전은 그 규모에 비해 훨씬 더 큰 중요성을 띠게 되었는데, 이는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유일한 중앙 성소였기 때문이다(예루살렘 성전). 〈열왕기 상〉 8장의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드린 기도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여기서 예루살렘의 하느님은 우주의 유일한 하느님으로 고백된다. 솔로몬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 복을 빌 뿐 아니라, 예루살렘과 그곳에 거하는 위대한 하느님의 명성을 듣고 땅 끝에서 온 이방인들의 기도도 들어달라고 간청하며, 그러한 이방인들을 도와줄 때 온 땅에 하느님과 성전의 명성이 드높게 될 것임을 상기시킨다. 솔로몬은 국제무역을 하면서 지적·영적 보편주의를 가져왔으나, 솔로몬 시대의 보편성이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고전적인 표현으로 성숙하기까지는 몇 세기가 걸렸다. 실제적인 보편성이 보편적인 종교를 일으킨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더 나아가 사람들은 국제무역에 참여하면서 번영을 위해서는 국제적인 평화가 필요하다는 교훈을 배웠다. 솔로몬 시대의 필요에 따라서 "민족들은 칼을 들고 서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다시는 군사훈련도 하지 아니하리라"(이사 2, 미가 4)라는 최초의 국제 평화 공식이 생겼다. 솔로몬은 의욕을 가지고 건축사업을 벌이는 가운데 백성을 억누르게 되었다. 예를 들어 장정들은 3개월마다 1개월씩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이론상으로는 그러한 노동은 가나안인들에게 돌리고, 행정·종교·군사 부문은 히브리인들이 맡았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솔로몬이 요구하는 것을 충족시킬 만큼 가나안인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인들도 왕을 위해서 강제노동을 해야 했다. 열정적인 행정가인 솔로몬은 이스라엘을 12지파로 나눈 옛 분할방식이 국가 이익에 이롭지 않은 지파 감정 때문에 국가 통일에 위협이 된다는 점을 인식했다. 그러므로 지파들의 경계선을 대부분 없애고 전국을 12개의 행정구역으로 개편했다. 12라는 숫자를 그대로 유지한 이유는 각 구역이 한 해에 한 번씩 '왕실에 양식을 대도록'(봉건적인 의무를 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각 구역에는 왕이 임명한 장관이 있었는데, 이 12명의 장관은 1명의 총리대신의 지휘를 받았다. 왕이 임명한 또 하나의 중요한 관리는 세금 담당자였으며, 세금은 대부분 강제노동 등의 방식으로 거두어졌다. 전설적인 지혜솔로몬은 현인으로도 유명했다. 후궁 둘이서 아기 하나를 놓고 서로 자기 아이라고 주장할 때 아기를 반으로 나누라고 명령해놓고 각 여인이 보이는 반응을 보아 진짜 어머니를 가려냈다. 솔로몬은 이집트와 중동의 모든 현인들, 심지어 고대의 몇몇 현인들보다도 더욱 지혜로웠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잠언〉에는 그가 쓴 것으로 인정되는 격언들과 그외 교훈 모음이 실려 있다. 솔로몬은 1,005편의 시를 지은 시인으로도 유명했고, 〈구약성서〉의 〈아가〉 도입부도 그가 쓴 것으로 추정된다. 후궁의 수로 알 수 있듯이 그가 대(大)연애가로서 얻은 명성이 〈아가〉의 주요주제이다. 성서시대 이후의 작품에서 그의 이름으로 된 책들 가운데는 솔로몬의 묵시적 지혜서 〈솔로몬의 송가 Odes of Solomon〉·〈솔로몬의 시편 Psalms of Solomon〉이 있는데, 이 책들은 현인이자 시인인 그를 예찬한다. 솔로몬의 전설은 그의 능력이 지니는 또다른 차원, 즉 자연과 초자연을 망라한 모든 피조물을 뛰어넘는 권세를 강조한다. 〈아라비안 나이트 The Arabian Nights〉에 따르면 진(jinn : 천사나 마귀보다 서열이 한 단계 낮은 초자연적 존재)을 호리병 속에 가두어 바다에 던진 사람도 솔로몬이었다고 한다. 아람어로 씌어진 〈마술 그릇 Incantation Bowls〉 같은 마술서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효험 있는 봉인(封印)을 예로서 인용했다. 예수를 가리켜 '다윗의 자손'이라고 할 때, 그 말은 단순히 그가 다윗 왕가 출신임을 뜻하지 않고, 어떠한 마귀도 대적할 수 없을 정도로 기적을 일으킨 예수야말로 사람들과 '진'들을 다스린 '다윗의 아들 솔로몬'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왕국의 쇠퇴솔로몬의 개인적인 명성과 천재성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강력한 제국을 유지하고 더욱 강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했다. 추측하건대, 이스라엘은 부유하게 됨에 따라 그만큼 사치도 심했고, 부(富)를 백성들에게 고루 나누어주지 않은 듯하다. 또한 솔로몬은 자기 지파인 유다는 편애하면서 북쪽 지파들에 대해서는 달리 대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를 계승했을 때, 북쪽 지파들은 지금까지 백성들이 짊어졌던 부담에 대한 왕의 정책을 알고 싶어했다. 르호보암이 신하들의 잘못된 조언을 받아들여 더욱 강경한 정책을 공포하자, 북쪽 지파들은 솔로몬의 자손들을 남왕국 유다에 남겨둔 채 갈라져 나가 이스라엘 왕국을 따로 세웠다. 이로써 솔로몬의 제국은 회복불능의 상태에 빠졌고 때로는 서로를 적대시하는 두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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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우영의 블로그 원문보기 글쓴이: 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