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Vic reasoner -
교부들은 5세기 어거스틴(Augustine) 까지 대체로 로마서 7장을 그리스도인 이전(pre-Christian)의 경험으로 해석했다. 어거스틴에 의하면 로마서 7장의 갈등은 가장 높은 단계의 그리스도인의 경험으로 남아있다. 오늘날까지 칼빈주의자들(*옥한흠 목사의 로마서강해설교 참조)은 어거스틴을 보통 좇아서 로마서 7장을 그리스도인의 경험으로 해석한다. “아르미니안 논쟁은 이 구절의 주해에서 사실상 시작된다”라고 리들(M. B. Riddle)은 랑에(Lange)주석에서 말했다.
자콥 헤르만츠(Jacob Hermansz)는 16세기말 화란의 신학자였다. 우리는 라틴식 이름인 자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로 그를 알고 있다. 그는 제네바로 가서 죤 칼빈의 사위이자 후계자인 테오도레 베자(Theodore Beza) 밑에서 수학했다. 그는 목회를 하기 위해서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왔다. 그는 화려한 설교가로서 타고난 성서 주석가로 그리고 겸손하고 헌신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의 명성을 날렸다. 그의 강해 설교는 많은 군중을 끌어 모았다.
그는 그의 시대에 대석학으로 간주되었다. 그는 레이든(Leiden)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1609년 죽을 때까지 대학에서 신학교수였다.
1589년 쿠른헤르트(Dirck Coornhert)는 베자의 선택교리(the supralapsarian theory of Beza)가 실제로 하나님을 죄의 장본인이 되게 했다고 선언했다. 아르미니우스는 이 비난에 응답하기 위해서 위촉되었다. 쿠른헤르트가 옳았다고 그는 최종적으로 결론지었다. 어느 누구도 그의 학식을 반박할 수 없었지만 설교자들은 단상에서 그를 공개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은 상황에서 벗어나서 비틀어졌다고 주장하면서 그의 적들은 그의 영향력을 파괴시키려고 했다. 결국, 그는 공개회의를 요청했다. 하지만 종교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그는 죽었다. 그가 죽었을 때의 나이는 대략 49세였고 그의 죽음은 그가 받은 스트레스에 의해 앞당겨진 듯하다.
비록 공개 회의를 요청했던 사람이 바로 아르미니우스 였지만, 도르트 종교회의(the Synod of Dort, 1618-9)는 칼빈주의적 입장을 견고하게 할 뿐 이었다. 그의 추종자들인 항의자들(Remonstrants)은 논쟁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들은 사형에 처해지거나 추방되거나 투옥되었다. 그들은 제한적인 허용이 허락된 해인 1625년까지 교회 또는 국가의 어떤 직(職)도 수행할 수 없었다.
아르미니우스의 작품은 세 권으로 편집되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두 번째로 긴 논문은 그의 “로마서 7장의 참되고 진정한 의미에 대한 논술”이다. 그것은 258페이지에 달한다.
그가 죽은 후 백년 동안 항의자들은 펠라기안주의를 향하여 정처없이 떠돌았다. 자신의 잡지를 아르미니안(The Arminian) 이라고까지 이름지으며 복음주의적 아르미니안주의로의 회귀를 주도한 사람은 다름아닌 죤 웨슬리였다.
*** 초기 감리교인들은 로마서 7장이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대한 표현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웨슬리(John Wesley)는 말하기를, “이것이 자신과 혹은 어느 진실한 신자에 대해 말한 것이라면, 그(Paul)의 강연의 전체 취지와는 동떨어진 것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웨슬리는 7절로 25절까지를 바울의 '일탈'로 보았다. *아담 클라크(Adam Clarke)는 말하기를, “기독교의 진수는 이와 같은 경험은 어떤 경험도 참 그리스도인에 대한 표현이 될 수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죤 플래처(John Fletcher)는 “율법무용론에 대한 마지막 점검(Last Check to Antinomianism)"라는 논문에서 로마서 7장에 모든 부분을 할애했다. 그는 ”사도 바울의 목에 채우려고 노력하는 육(肉)의 멍에“를 내려놓으라고 칼빈주의자들에게 대항했다. *리챠드 왓슨(Richard Watson)은 로마서 7장과 8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인간의 도덕적 상태는 한 예로 사도 바울의 경험에서 추적할 수 있는 바, 율법의 영 안에서 그에게 드러난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죄에 대한 확신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은 상태의 조건과 특권의 입구까지를 포괄한다.
성령은 전체 장에 걸쳐서 단 한번 언급된다(6절). 다음 장에서 성령은 약 20번 언급된다. 로마서 7장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것은 양심과 의지 사이의 갈등을 나타내는 고전적인 심리분석이다. 죄인은 누구나 그가 해야 하는 것과 그가 하고자 하는 것 사이의 갈등을 안다. 욕망은 기어이 의무를 이긴다.
희랍어 인칭 대명사 ego는 여기서 여덟 번 사용된다. 많은 다른 언어들과 더불어 희랍어에서 주어는 동사 안에서 이해된다. 바울은 강조를 위해 부가적인 단어(ego)를 고용했다. 그는 8장에서 그것을 한번만 사용하지 않는다. 7장은 25절의 “나는 스스로(I myself)”의 이중 대명사로 끝을 맺는다. 바울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노력하는 한 사람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동사의 시제 변화에 의해 혼란을 겪는다. 13절에서 병행시제(the aeorist tense)가 사용되었다. 이 때 바울은 현재시제로 전환해서 그 장의 끝부분 내내 그 시제를 사용하였다. 패커(J. I. Packer-성서근본주의자)는 “따라서 그것을 문법적으로 자연스럽게 읽는 방법은 집필시의 바울의 자아에 대한 지식을 묘사한 원고로서 읽는 것이 될 것. . . .”이라고 선언했다. 그는 주장하기를 현재시제는 현재에 대한 언급이어야 하며 따라서 앞 절의 과거 경험과는 구별된 것을 묘사해야 한다고 했다.
칼빈주의자들이 시제 변화의 사실에 주목하는 데는 옳다. 허나 그 사실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는 그들이 옳지 않다. 이 경우 문맥을 자세히 읽어보면 그것에 대한 해석을 훨씬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이 일탈은 6장 14절에 발견되는 명확한 언급에 의해 소개되고 8장 2절의 간결한 요약에 의해 결론 맺어진다.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출이다.
어떻게 문맥이 동사 시제의 변환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희랍어 신약 성서 문법 지침서에서 우리는 현재 시제의 특별용법의 한 예로 “역사적 현재”의 용법을 듣게 된다. “이와 같이 그 현재 시제는 한 과거의 사건이 현재 사건의 생생함으로 보여질 때 채택된다”. 오늘날 이 문학적 기법은 “플래쉬백(flashback)"이라고 부른다. 이것을 로마서 7장 14절에서 25절의 적절한 해석으로 수용하느냐 아니냐는 아마도 여러분들 자신의 신학적인 전제에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그의 전(前)그리스도적 경험을 추억하고 있다는 해석은 희랍 문법이 허용하는 한에서이다.
*최근에 칼빈주의의 주도적 인물이요, 칼빈 신학대학원 석좌교수인 안토니 훼케마(Anthony Hoekema)는 전향해서 로마서 7장이 거듭난 자를 묘사하는 것으로 더 이상 믿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는 말하기를:이 부분에 스며있는 좌절과 패배의 기조는 바울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늘 묘사하는 기법의 승리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연상되는 그 사람은 여전히 죄의 법의 포로(7:23)이다. 반면에 6장 17절에서 18절까지에서 묘사되는 사람은 더 이상 죄에 있어서의 노예가 아니다.
그와 같은 종류의 지적인 정직은 드물다. 그라면 도르트 종교회의에서 어떻게 처신했을까?
훼케마의 해석이 신선한 반면 로마서 7장에 관한 성결 운동에서 나온 주석을 읽고 설교를 읽으면 그것은 우리를 매우 낙담케 한다. 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웨슬리적-아르미니안 정통의 수호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명심하라. 고드비(W. B. Godbey)는 말하기를:개종했을 때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있는 천사들처럼 지상에서 하나님을 복종하기 시작한다. 따라서 그들은 성결의 미 안에 있는 법을 지킨다. 그러나 “오 나는 곤고한 자로다!”라고 절규한 구절에 나타난 바울처럼 패배하고 실패하고 절망적인 낙담에 이르고 결국은 좌절하고 만다.
모리슨(H. C. Morrison)은 묘사하기를:믿는 영혼들의 매일의 삶의 경험에 의해서 이 성서의 진실성이 의심의 여지 없음을 기독교 독자들은 즉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나, “옛사람”과 대적해서 싸우는 믿는 영혼들은 종종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낼꼬?”라고 종종 절규하도록 만들어 졌다고 말했다. 모리슨 에게 있어서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으로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보며, 그는 이 성령세례를 완전한 성화와 같게 여긴다.
***초기 감리교인들은 성령세례를 칭의와 더불어 발생하는 것으로 가르쳤다.***
챨스 어윙 브라운(Charles Ewing Brown)은 자신이 생각했던 로마서 7장 7절에서 25절까지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이 장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의 경험과 심지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대한 설명을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 선과 악의 혼합이 존재한다. . . .는 사실을 우리는 배운다.
성결에 대한 위대한 고전(Great Holiness Classics) 중 홀리네스 티칭 투데이(Holiness Teaching Today)는 모리슨과 브라운의 언급 뿐 아니라 밀튼 애그뉴(Milton Agnew)의 그리스도인의 경험에 관한 글도 실려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회심후 그는 새로운 본성을 자기 안에서 발견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법(롬 7:22)과 기쁘게 일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한 ‘옛 자아“가 살아나 우위를 차지하려고 다투는 옛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고민에 싸이게 된다. 로마서 7장 14절로 25절의 두 개의 ”나“인 두 본성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일어난다. . . .”
윌리엄 그레이트하우스(William Greathouse)는 비콘(Beacon) 성경 주석을 집필하면서 로마서 7장의 주된 의미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을 묘사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는 주장하기를 그 구절이 이차적인 의미로 그리스도 안에서의 육적인 어린아이를 묘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성서해석학은 “만일 성서가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나사렛 학자인 랄프 얼(Ralph Earle)은 로마서 7장의 회심 이전과 회심 이후를 신약 성경의 단어의 의미에 적용시키도록 고무한다. 따라서, 동료 나사렛인 케니쓰 그라이더(Kenneth Grider)는 “성결 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누구나 거듭난 사람은 의도적인 죄를 짓지 않는다고 알고 있다. 하지만 로마서 7장에 묘사된 이 사람은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것 같다“고 주장하면서 지나치게 낙관적인 태도를 보이는 듯하다. 그는 ”민중 신학“을 하는 교역자들과 교사들이 로마서 7장을 구원받은 사람을 묘사한 주장으로 보급시킨 것을 비난한다. 그러나 그의 교단이 성결에 대한 위대한 고전(Great Holiness Classics)을 출판하는 한, 비록 그것이 반드시 위대한 고전 또는 웨슬리적인 것이 아니라 할 지라도, 모든 비난을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지우기는 어렵다.
설교가 불확실한 음을 낼 때 청중이 헷갈리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까? 교사가 적당히 얼버무려 넘길 때 학생이 명확하지 않은 것이 이상한 것입니까?
로마서 7장을 우리가 어떻게 믿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그 구절에 대한 우리의 핵석은 마치 분수령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느 길을 택하든지 그것은 철저하게 다른 신학적인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 것입니다. 로마서 7장에 묘사된 사람은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는 성화 되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는 또한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성화에 자리를 내어주기 위해서 중생을 값싸게 취급할 필요는 없습니다. 너무나 오랜 기간 동안 성결 운동은 첫 작품의 실패를 선전하면서까지 두 번째 작품의 필요성을 내세우려고 해왔습니다.
이성을 잃고 소를 차고 물고 때리는 것으로 상상된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실례에서 일시정지를 선언합시다. 갈라디아서 5장 20절에 의하면 분노는 육체의 일입니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육체를 좇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에 의해서 죄된 욕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완전한 성화는 하나님께서 거듭난 자 안에서 시작한 것의 완성 또는 완전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아무 변화도 없다면 그 때 우리는 구원받기 위한 제단으로의 두 여행을 하는 것이며 두 번째 축복을 받아야한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논리적인 추론에 근거해서 두 번째 축복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두 번 또는 그 이상의 여행을 하는 것도 그래서 여전히 죄의 노예가 되는 것도 가능한 것입니다.
성결 운동은 죤 칼빈(John calvin)의 신학을 수용하면서도 죤 웨슬리(John Weley)의 수호자임을 자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고백하고 우리의 고백과는 너무 미치지 못하는 삶을 산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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