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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 관점
이 본문은 예수를 세상의 빛으로 증거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증인 세례 요한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구절들은 말씀(로고스)으로서의 예수의 영원한 선재(창조 시 하나님과 함께 존재 함, 1-5절)와 말씀의 역사적인 현현 (인간이 되어 땅을 걸음, 14) 사이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한다. 요한의 증언은 예수가 누구인가에 관한 것이다. 이 증언은 복음의 두 가지 초점, 즉 성육신(육화된 하나님으로서의 예수)과 기독론(그리스도로서의 예수)과 일치한다.
6-8절에서 요한과 예수의 관계가 명백하게 드러난다. 요한복음의 서문(1-18) 부분에 속한 이 구절들은 역사적이고 우주적인 관점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해석하기 위한 렌즈가 된다. 요한은 <창조 시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역사 내의 영원한 하나님이 되실> 예수에 대해 역사 속에서 증언하기 위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다. 시간적이고 우주적인 (영원한) 차원이 결합함으로 세계의 창조와 구원의 드라마 안에서 요한의 위치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요한은 단순히 또 다른 예언자가 올 것이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현(embody)하는 말씀이 올 것이라고 선포했다. 이와 같이 육화된 하나님의 임재는 다음 구절의 Anchor Bible 번역에서 잘 표현된다: "그 말씀은 인간의 형태를 취하여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텐트를 치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존귀함(영광)을 보았는데, 이는 사랑과 정의로 충만한 아버지의 사랑하는 외아들의 존귀함과 같았다." [새번역: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 우리는 그의 영광을 보았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외아들의 영광이었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
마찬가지로 19-28절은 예수가 속해있는 유대교 공동체 역사의 맥락에서 예수의 정체성을 이해하는 데 요한의 중요성에 관해 설명한다. 이 구절들에서 종교 지도자들은 요한이 증언하는 자의 정체성을 확인하기 위해서 우선 요한의 정체성에 관해 질문한다. 그들의 질문은 요한과 예수의 정체성과 사명에 관한 이해를 위한 중요한 표지가 된다. 흥미롭게도, 질문이 시작되기 전에 요한은 자신이 메시아가 아니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이제 유대교 지도자들의 질문은 과연 요한이 메시아의 도래를 선포할 인물로 성서에서 예언된 엘리야나 "그 예언자"인지로 축소된다.(21) 요한은 자신이 그 두 인물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자신이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23)로 예언자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밝혔다.
다음으로 종교 지도자들은 요한이 허락 없이 세례를 주고 있다고 도전하기 시작했다. 이 도전에 대한 요한의 대응은 자신이 예수와 어떻게 구별되고 어떤 관계인지를 밝히는 것이다.(6-8) 요한은 예수를 위해 길을 트는 자이고, 그러므로 물로 세례를 줄 권한이 주어진다. 요한은 자신이 유대교 지도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그러나 막상 그들 앞에 나타나니 인정하기를 거부하는) 그분을 위한 예비적 행동을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밝히고 그들도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두 단락의 구절(1:6-8, 19-28)은 성육신과 기독론이라는 두 가지 주제에 관한 신학적 고찰로 인도한다. 첫째, 이 두 구절들을 함께 고려할 때 예수의 인성과 신성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그분 안에서 갈등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예수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위한 요건은 그가 어떻게 완전한 인간이며 완전한 신이냐는 난제를 해결하는 데 있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고 고백하는 성육신의 은총을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여성 신학자들에 따르면 성육신의 선물은 그것이 "화신"(embodiment)과 "관계(relationship)"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새롭게 한다는 데 있다. 하나님이 예수의 몸으로 인간이 된 것은 우리의 육체와 영혼의 건강한 결합, 즉 우리의 "화신"의 선함에 대한 주장의 근거가 된다. 마찬가지로, 예수의 성육은 우리가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구현(embody)하면서 서로 관계를 맺고 살 수 있다는 신념의 근거가 된다.
둘째로, 대림절기의 맥락에서 이 구절들은 끊임없이 확장하는 소비주의의 폐해 속에서 성탄의 의미에 대해 증언을 해야 하는 우리의 정체성과 역할을 상기시켜준다. 요한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을 21세기의 소비주의 광야에서 증거하는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 광야에서 외치는 목소리가 되어, 우리는 찬미를 받고 있는 상품의 소비를 (우리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런 것들을 주고받을 때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반문화적인 선포를 하여야 한다. 그런 반문화적 행동의 한 예로 자신의 신분 표식으로 이용되는 소위 명품(고가 사치품)의 구매와 사용 금지 운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반문화적 주장의 핵심은 한 인간의 완전한 정체성은 우리와 예수의 관계성에 근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요한이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했던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그리스도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는 것을 상기하면서 우리의 정체성을 확인해야 한다. 요한이 그의 시대에 수행했던 역할처럼, 우리 시대 우리에게 주어진 역할은 우리가 증언하는 그분을 선포하고, 우리가 그분이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셋째, 요한처럼 우리는 그리스도의 빛에 대한 증인으로 산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빛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4절, "그에게서 생명을 얻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의 빛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빛에 대해 증언을 함으로, 우리는 대림절기에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을 새롭게 드러냄으로 그 빛을 구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We embody that light.") 빛을 구현하고 그리스도의 생명을 드러내는 것은 우리가 인간성- 특별히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양성하고 자비와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를 베풀면서 인간미 있게 행동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결론적으로, 이 본문에 관한 신실한 반응과 이 본문이 주는 실천적 명령은 다음의 흑인 영가 가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작은 나의 빛, 비추게 할테야 (This little light of mine, I'm gonna let it shine)"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 자체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빛의 선포가 되는 삶을 살도록 부름을 받았다.
주석적 관점
요한복음서는 시간이 존재하기 이전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이 부분은 창세기의 가장 첫 부분을 떠올리게 하고, 고대 유대교의 지혜 신화와 2세기 영지주의 문학의 로고스에 관한 시들을 떠올리게 한다. 요한복음 첫 장 18절 까지의 기원과 성격에 관해서 거의 일치하는 결론은 없지만 게일 오 데이(Gail O'Day), 라마르 윌리암슨(Lamar Williamson) 그리고 C. K 바렛(C. K. Barrett) 같은 학자들은 이 "프롤로그"가 "요한 공동체의 초기 기독교 찬송시이며, 성육신한 말씀의 사역에 관한 복음서 이야기의 도입부"라고 평가하는 레이몬드 브라운(Raymond Brown)의 견해를 따른다.
대림절 세 번째 주일의 말씀은 이 서두부분이 정확히 우주적이고 신비한 것에서 육화(incarnational)되고 구체적인 방향으로 변화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브라운의 해석에 따르면 6-8절은 삽입된 해석부분이다. 다른 학자들은 이 부분이 시적인 문체의 도입부에 어울리지 않는 산문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둘 다 아니라고 생각한다. R. A 컬페퍼(R. A. Culpepper)와 찰스 탈버트(Charles Talbert)는 6-8절에서 시작하여 뒤에 따라오는 15절이 보완하는 기능을 하는 B-B′형식의 교차대구로 본다. 6절에서 복음서 저자는 로고스(말씀)와 포스(빛)이, 가장 강력한 어둠의 세력(5절을 보라.) 속에서도 어떻게 살아남았는지에 대한 다소 장황하고, 때론 복잡한 신학적 주석을 시작한다.
웅대한 서두 부분에서 소개되는 첫번째 인간(anthropõs)은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성이다. 이 요한은 마가가 세례를 베푸는 자(막1:4)라고 정의했던 요한과 동일인물이다. 그리고 마태에서는 이 일반 명사가 세례 요한이라는 이름이 되었고 그는 회개에 관해 열정적으로 설교하였다.(마3:1) 누가복음에서 요한은 스가랴의 아들 광야의 요한(Ioannen ton Zachariou huion en te eremo 눅3:2)으로 가족의 이름을 따르고, 그의 사역장소가 이름에 덧붙여져 유대 예언자 전통 안에 그가 깊고 분명하게 뿌리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네 번째 복음서에 등장하는 첫번째 인간을 "세례 요한"이라고 부르고 싶을지 모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하나님의 빛"으로 세상을 인도하고자 보내진 거룩한 인간으로서 요한의 독특한 소명에 대한 저자의 이해를 오히려 모호하게 만들 수 있다. 이 복음서에서 요한은 그 출신이나 가족의 이름으로 소개되지 않는다. 그는 세례자, 예언자, 권면자 혹은 하나님의 사자로 소개되지도 않는다. 요한은 어떠한 어둠도 사라지게 하지 못한, 그리고 앞으로도 지속될 "빛", "육화된 말씀"을 증언하게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순교자이자 증인이다. 이 복음서에서 요한의 주요한 역할은 요한복음에서는 서른 세번이나 등장하지만, 전체 공관복음서에서는 단 두 번밖에 등장하지 않는 동사 즉 "증언을 하는 것"이다.
"증인이 되겠습니까?"1) 는 말은 많은 아프리카계 설교자들이 주로 외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네 번째 복음서에서 만난 "첫번째 증인"인 요한이 그 설교를 듣는 회중 가운데 있었다면, 틀림없이 그는 "제가 증인이 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라마르 윌리암슨(Lamar Williamson)은 "증인들은 다른 이들이 증언한 것의 사실여부를 증명하거나 그들이 보거나 들은 것을 말한다.", "요한의 역할은 참 빛이 나타났을 때 그것을 인지하고 다른 이들이 그 빛을 주목하게 함으로서 인식하고, 믿고, 그 빛에 헌신하도록 하는 것이다."라고 서술하였다. 정말 어떤 이들은 요한복음서의 세례 요한을 예수의 인격과 성품을 미리 가지고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증언하도록 앞서 부름받은 사람으로 읽는다.2)
이 복음서 안의 모순들-빛과 어둠, 하나님이 만드셨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속에서 요한은 가능성과 한계를 가진 증인으로서의 인간일 뿐이다. 요한은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진" 말씀(logos)처럼 하나님으로부터 보내졌음에도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로고스)이 되도록 보내지지 않았다. 게다가 요한은 하나님의 빛(phos)도 아니다. 요한복음서의 서두부분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셔서 빛에 대하여 증언하게 하신 "증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강조하며 이야기 한다.
네 번째 복음서에 등장하는 첫 인간에 대한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경쟁 관계가 아니라 증언을 하기 위해 보내졌고, 그 자신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빛이 아니라 오히려 히브리 신화와 영지주의 철학의 영역을 초월하여 예수의 인격을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빛에 대하여 증언하기 위하여 보내졌다는 것이다. 이 상징의 복음속에서 "첫 번째 증인"으로 요한은 이후 등장하는 하나님의 빛(phos)과 말씀(logos)의 이정표이자 기준이 된다. 말씀과 빛에 대해 증언하고 이를 통하여 모든 이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요한이라는 이정표가 없었더라면 이 복음서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어떤 메시지도 읽혀질 수 없다.
대림절의 한 가운데서 요한복음은 베들레헴으로 가는 젊은 부부의 이미지를 보여주지 않는다. 독자는 목동이나 초원에서 울려퍼지는 칸타타를 볼 수도 없다. 못된 여관 주인이나 동방박사 이야기도 서두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림절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는 교회 안의 풍습이나 크리스마스를 로맨틱하게 만드는 내용도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반대로 요1:6-8은 예수가 도착하기 전에 첫 번째로 예수에 대해 증언하는 이가 도착했다는 것을 세심한 독자들에게 상기시킴으로서 대림절을 알린다. 그는 성탄을 위해 잘 꾸며진 것들이나 준비된 사람들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주의 길을 예비하기"(사40:3) 위하여 왔다.
그는 이 세상의 어둠의 세력이 보여지는 것처럼 계속 강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하나님의 빛이 온다는 것을 "증언하기"위해 왔다. 그는 어둠의 세력들이 말하는 매력적인 말들이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여 육체가 되어 우리 가운데 계시게 된"(요1:14) 말씀 앞에 결국 그 매력을 잃게 되었다는 것을 증언하기 위해 왔다.
목회적 관점
“세례요한은 독립적인 인물이 아니다. 그는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속해 있다. 그는 한분이고 유일하신 그리스도의 형상에서 그에게 비치는 빛을 모아서 반사하기 위해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거기에 서서,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완전한 인간이며 죄인으로, 온전히 섬긴다.”
목회적 관점에서 우리는 대림절 두 번째 주일에 누가 참석하였고, 어떤 희망과 두려움이 오늘 예배에 참석하게 했는지 묻고 싶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대림절 예배에 참석한 우리 모두는 증인이다. 우리의 증언은 우리를 우리 자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한다. 증언은 우리를 예배의 초점인 그리스도와 우리 증언의 대상인 형제자매를 향하게 한다.
대림절에 우리가 경험하는 목회적 유혹은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것에서 벗어나 우리의 기다림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충분히 대비하고 있는가? 우리는 그것들을 충분히 만족하며 즐기는가? 성실한 기대는 열광적인 활동과 불안한 자기 진단으로 빠르게 전환될 수 있다. 대림절은 기다림에서 허둥댐으로 전환한다. 구유를 기다려야 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내면을 살피면서, 우리 자신의 영적 온도를 측정하고 있다.
대림절 우리의 예배는 항상 자기만족이라는 위험 속에 있고, 자기만족을 향해 기울어진다. 장식을 하고, 설교는 자제하고, 음악을 높이고, 귀여운 아이들이 촛불을 밝히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가!
우리가 주일 예배마다 묻는 질문은 특히 대림절을 위한 질문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는가? 그리스도가 선포 되었는가? 이 가족 축하 행사 때문에 곤혹스럽고 외로워서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었는가?
세례요한이 그 자신의 대림절 주간에 성서정과에서 사라지고, 요한복음의 장엄한 도입부에서 제외되어서 복음서 기자가 그를 위치시킨 장엄한 성탄절 서막에서 눈에 띄게 없어져 버린 것은 좀 이상하다. 어쩌면 요한은 어떤 큰 일이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지만, 어떻게 잔치에 참여할 지를 잘 알지 못하고, 매번 대림절과 성탄절기의 주변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우리 같은 사람의 상징인지도 모른다. 확실히 이런 계절을 위한 적절한 목회적 관심은 공동체와 기뻐하는 사람보다는 성탄절을 외롭고 슬프게 보내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세례요한이 여기에서 예시한 신학적이고 목회적인 지혜는 자신이 누가 아닌지에 대한 고백이다. 나는 아니라고 하는 자기인식에 대해서 예언자들 사이에서 명예로운 전통이 있다. 아모스 : “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오.” 이사야 : “나에게서 떠나세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입니다.” 예레미야 : “저는 아직 너무나 어립니다.” 전통적인 그리스의 훈계인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은 분명히 “당신이 누구인지, 그리고 당신이 누가 아닌지를 알라”는 뜻이다.
스토아 철학이나 상식은, 건강한 자기 지식이란 자기의 한계에 대한 건강한 지식을 포함한다고 일깨워 준다. 세례요한이 하는 고백의 한계는 그가 소개하는 사람과 그 자신 사이의 차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리스도의 증인이라고 말하는 것과 우리가 “작은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주권을 우리의 예배와 뒤섞어 놓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를 가리킨다. 우리는 그를 섬기고, 우리는 전적으로 그의 심판 아래 서 있다.
이런 식으로 목회적 건강과 신학적 신실함이 합쳐진다. 가식으로부터 해방된 영혼은 자유롭게 하나님의 자비를 예증한다. 그리고 교회는 자신의 쇠락하는 권위에 대한 불안에서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권위를 증거하는 더 나은 기회를 가진다. 내가 가진 개신교인으로서의 선입관은 실제로 우리가 예수님을 모방하는 것보다는, 거리를 두고 예수님을 따르도록 초대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내 옷의 단추에 새겨진 문구가 묻고있다. 그는 물 위를 걸었고, 시각장애인을 보게 했고, 죽은 사람을 일으켰다. 우리의 본문은 더 나은 질문을 제안한다. “예수님이라면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하실까?”
세상이 계속 우리의 증언에 저항한다는 것을 기억하지 않고는 세례요한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없다. 제4복음서는 세례요한의 운명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우리는 공관복음에서 세례요한이 그의 신실함 때문에 참수 당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의 바른 북미 사회에서 저항은 훨씬 미묘하다. 우리가 처한 위험은 우리가 처형당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무시당하는 것이다. 육신이 된 말씀은 종이반죽으로 된 말들로 바뀌어, 매력적이고 능력 있는 산타와 요정과 빨간 코의 순록과 함께 잔디밭에 전시되었다.
우리가 증인으로 부름 받았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교회 역시 저항에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전형적인 주류 교회에서, 당회가 빌리 그래함 십자군을 지원해달라는 우편물을 받았다. 당회장은 편지를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우리는 전도를 믿지 않는다”고 그는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도를 믿는다. 대림절이 축하하는 선물을 감안하면, 우리의 복음을 우리만 간직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복음주의”와 “주류” 또는 “구식” 기독교인을 구분하는 것은 전적으로 인위적이다. 우리 모두는 전도를 받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다. 우리는 복음을 들어서 믿게 되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에게 증언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진정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은 신앙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종교는 전적으로 사적인 문제이며, 결코 선포되지 않았거나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는 주장은 요한복음의 확신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진실로 복음적인 기독교인은 다른 사람을 믿게 하려고 조작하거나 강요하거나, 속이거나, 홀리려고 하지 않는다. 진정한 복음주의 기독교인들과 복음주의 교회들은 계속 예수를 가리키면서, “여기 주님이 계신다”고 말한다. 전도는 요한복음에서 또 다른 말을 가져온다. 우리는 “믿으라 아니면 멸망하라”라고 하지 않고 “와서 보시오”(요 1:46)라고 선포한다.
1921년부터 그가 죽을 때까지 칼 바르트(Karl Barth)는 그의 책상 위에 Matthias Grunewald의 그림 사본을 걸어놓았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께서 그림 가운데에 매달려 계시고 한쪽 편에는 바르트 자신의 모델이고, 모든 기독교인의 모델인 세례 요한이 “거의 불가능한 방법으로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거의 불가능한 방법으로, 우리 역시 계속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설교적 관점
-요한복음 1장은 우리에게 익숙한 예수 이야기를 몇 가지 방식으로 뒤바꾸어 놓는다. 먼저 거기에는 탄생이야기가 없다. 제4복음서 [요한복음]에 나오는 성탄절 장면은 검은색 벨벳으로 된 커튼 앞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는 한 어린아이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사셨고 우리는 그의 영광 곧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았다.” 이것은 의상이나 소품에서 큰 절약이 될지는 몰라도 청중들은 별다른 감동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보는 것은 대림절 장면인데 여전히 의상과 소품을 절약한 한 사람이 등장한다. 이 등장인물은 하나님께서 보낸 요한이라는 이름을 지닌 사람이다. 그는 마태복음에서처럼 세례요한 (John the Baptist)이란 이름도, 마가복음에서처럼 세례자 요한 (John the baptizer)이라는 이름도, 그리고 누가복음에서처럼 사가랴의 아들 요한(John the son of Zechariah)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여기서 그냥 요한이고 (just plain John) 심지어 자신에게 종교지도자들이 질문을 할 때도 별 말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종교지도자들은 이 외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가 보았던 이 땅으로 떨어진 빛에 대하여 말하기를 멈추지 않는 이 사람, 비록 공인된 권한을 어느 누구로부터 받은 바는 없지만 사람들에게 그 빛을 볼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세례를 주고있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를 원한다. 그들은 이 사람 스스로가 자신이 누구인지 말하기를 바라지만, 요한이 말하게 될 모든 내용은 자신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메시아가 아니다. 그는 엘리야가 아니다. 그는 모세의 죽음 이후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모세같은 그 예언자가 아니다.
-그 지도자들이 요한에게 자신에 관해 말하도록 압력을 넣을 때, 그는 심지어 자신의 말로 답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을 인용한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다. 그는 그 빛이나 그 말씀이 아니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되시는 그 분을 증거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의 존재이유는 자신이 아닌 그 분에 대한 증인의 역할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 때 요한은 종교지도자들에게 그 분이 그들 가운데 서 있더라도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요한 자신은 그 분의 신발끈을 풀 자격도 없다고 말한다. 본문 13절에 전부 10개의 부정적인 단어들 (not, neither, no)이 들어있다. 그것은 오실 그 분을 이미 있던 신학적 틀 속에 갇히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외치는 소리 요한(John the Voice)를 조사하기 위해 온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단호한 거부이기도 하다. 그것은 마치 저자가[요한복음] 독자들에게 요한이 메시아를 위해 준비된 식탁에서 식탁보를 재빨리 빼는 옛 마술을 하는 것을 지켜보도록 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식탁용 식기류가 제자리에 있다-최상품 식기도자기, 6개의 나이프와 포크들, 워터포드 포도주잔등. 요한이 테이블보를 재빠르게 치우면서 그는 테이블보와 함께 모든 식기류를 취해서 테이블에서 사라지게 한다: 테이블 위에는 [이것도] 없고(not), [저것도] 아니고 (neither), 없고 (no). 모든 식기류들이 처음부터 없던 것처럼 모두 사라진다. 바로 그 때 요한이 검은색 벨벳 커튼 앞에 홀로 서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던 일을 한다. 그것은 그 빛에 대해 그리고 오직 그 빛에 대해서만 증언하는 것이다. [식탁용 식기류는 옛 이스라엘의 메시아 이해를 뜻하고 요한이 이 모든 것을 제거하고 빛이신 예수를 소개한다는 의미를 마술에 비유-역자 주]
-지역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설교자는 믿음(faith)과 소망(hope)이 방향은 다르면서도 같은 크기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설명해도 좋을 것이다. 믿음을 정의하자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대한 철저한 신뢰이다(비록 그것에 관해 분명히 알지 못하더라도). 광야에서 심지어 자신에게 적합한 타이틀도 없이 그리고 심지어는 오실 그 분에 대해 이름도 알지 못하고 광야의 소리 요한은 그 빛에 대한 증거를 계속한다. 의상, 소품, 보조 출연자 심지어 제작예산도 없이 그는 최소한의 것으로 버텨가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것에 관해 증거한다.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Meister Eckhart)의 말처럼, 하나님은 무언가를 채우는 자가 아닌 덜어내는 자의 영혼에서 발견된다. [믿음은 자기 희생적, 마이너스 방향] 반면 소망은 개별적이고 집단적인 바램의 차원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나는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분쟁이 덜한 교회를, 예수와 보다 친밀한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을 소망한다. 이 소망들 가운데 잘못된 것은 없지만, 이 소망들은 한편으로 나에게 이런 부담을 준다. 나는 내 공동체나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필요로 하는 것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에게 좋은 분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메시아의 식탁 위에 있는 유일한 소망은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케 하는 하나님께서 오신다는 그 소망이다. [소망은 자기 만족적, 플러스 방향]
-역사적인 주제를 살펴보기를 원하는 설교자는 1세기 말 메시아 기대에 대해 연구하면 좋은데 특히 사해사본과 연관해서 하면 좋다. 요한복음의 서언이 창세기 1장을 떠올리게 하므로, 예수에게서 드러난 그 빛이 제 4일에 하나님이 창조했던 해, 달, 혹은 별빛이 아니라 첫날 창조된 하나님의 빛이라는 점을 주목하는 것 또한 중요하다.
-이 본문으로 설교함에 있어 실제적으로 청중들이 제4복음서가 말하는 “유대인들” (the Jews)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이 말은 8장에 가면 보다 첨예한 어조로 다시 나온다. NIV는 여기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 (the Jews of Jerusalem)이라고 번역하는데 그것이 어느정도 도움이 된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이 말을 예수 이야기를 말할 때 60회 이상을 사용하면서, “유대인들”을 유대인 후손 개인이 아닌, 그 나라의 수도에 형성된 종교적 집합체를 뜻할 때 주로 사용한다.
-마지막으로 신실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복음서를 쓴 요한과 예수에게 세례를 주었던 요한을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오늘의 본문은 설교자에게 이 둘을 분명히 비교해서 설명할 좋은 기회를 준다. 그 때 제4복음서와 공관복음이 요한에 대해 기술하는 차이점을 동시에 부각시켜도 좋을 것이다.
사회적 관점
이번호에서는 지금 이슈가 되고 있는 동성애와 페미니스트에 관한 기사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성 소수자 혐오에 맞선 소비자 연대”는 일부 기독교 단체의 항의로 성 소수자 강연을 비공개해 논란을 일으킨 <세상을 바꾸는 시간, 15분>(세바시)이 해당 동영상을 제공했다는 기사이다. <세바시>는 2011년 CBS에서 방송을 시작한 인기교양프로그램이다. 미국의 <TED>처럼 공개강좌형식으로 진행된다. 각계각층의 연사들이 15분가량 강연을 하고 영상은 CBS TV와 인터넷으로 공개된다. 현장 강의나 TV방송보다는 SNS가 주 유통 플랫폼이다. 지난 6월 기준 포털·유튜브·페이스북 등 채널구독자수는 총100만명, 누적 영상수는 4억2000만회가 넘는다. 수상도 많이 했다. 브랜드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지난 5월 CBS에서 독립하여 (주) 세바시로 운영된다. 그런데 문제는 지난 11월23일 방영된 대학성소수자모임연대 QUV활동가 강동희씨의 성소수자들이 겪는 차별을 소개한 뒤 관심을 호소한 영상 때문이었다. 다음날 반동성애기독시민연대(반동연)이 ‘동성애 옹호 방송 내보낸 CBS, 세바시는 한국교회 앞에 사과하라!!’고 성명을 냈다. 이들의 주장은 대한민국이 동성애를 박해한다는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과 기독교방송인 CBS가 동생애자를 홍보하는 방송을 내보낸 것은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성명이 나온 다음 영상은 비공개처리되었다. 방송선교를 담당하는 CBS가 난처한 상황에 처하거나 오해받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취지에서였다. 하지만 역풍이 불어 <세바시>강연을 한 작가 손아람, 변호사 이은이, 모델 김지영이 나서 이러한 결정을 비판하며 “내 강연 영상을 내려달라”고 요청했다. 많은 누리꾼들도 동조했다. 그러자 11월26일 (주)<세바시>는 자신들의 조치를 사과하며 영상을 다시 공개했다. 단지 자막에 이 영상이 CBS와 관련이 없다는 것을 첨부했다.
이 사태로 자의반 타의반 <세바시>프로그램이 CBS와 한국교회로부터 독립했고, 성소수자도 사회구성원이라는 평범한 메시지조차 부정되자 사람들이 참지않고 연대했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기독교는 성소수자에 대해 박해하는 집단의 이미지를 가지게 명확하게 가지게 되었다.
다른 주제로는 지난 11월26일 배우 유아인이 페이스북에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선언에 대한 다른 두 입장의 기사이다. 이민경작가는 이에 대해 “남성의 환호를 업고 페미니스트가 된 남성”이라고 지적하며 페미니스트들은 애호박으로 맞아보겠냐고 말하고, 또한 스스로의 젠더 권력을 성찰하라는 다른 누리꾼들의 요구에 ‘증오를 패미니즘으로 포장하는 메갈 짓을 멈추라’고 말했다며 비판적으로 보고 있다. 어느 날 갑자가 등장한 남성이 다른 패미니스트를 준엄하게 꾸짖음으로써 진정성을 가로채는, 여성의 투쟁이 긴 역사에 걸쳐 겪어온 이 지겨운 사건이 또 한번 반복되는 일을 막고싶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페미니스트가 오욕의 역사 속에서 싸우는 상대는 불의 대신 불의로 이한 분노를 불편해 하는 자다. 그 상대에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 칭한 이들도 늘 포함되어 있다고 일갈한다.
그런데 여성신학자 강남순교수는 전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보고 있다. 그녀는 “유아인은 패미니스트인가?”라는 물으며 페미니스트의 개념에 대한 공허한 논쟁을 파괴적이고 소모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1971년 <카톨릭세계>에 발표된 신학자 레너드 스위들러의 “예수는 페미니스트였다”는 글을 인용하며 그 당시 하부 인간으로 취급받으며 살아가던 여성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본 예수의 시선과 행동에 초점을 두고, 여성을 온전한 인간으로 보는 것이 페미니스트의 우선적 규정 기준이라는 스위들러의 주장을 소개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예수는 페미니스트, 그것도 아주 급진적인 페미니스트라고 말하며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도 예수와 같이 급진주의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된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강교수는 이런 면에서 페미니즘을 생물학적 본질에 관한 것으로 귀속하게 되면 페미니즘 자체가 편파적으로 된다고 지적하며 페미니즘은 궁극적으로 성차별을 포함한 다층별 차별구조를 넘어서고자 하는 정치적 견해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유아인은 자신의 가정사를 돌아보며 말했듯이 이러한 페미니즘의 뿌리 문제에 대한 인식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인정한다. 물론 이에 더하여 페미니즘은 단순한 자기 정체성만이 아니라 과제이자 책임성이라고 지적하며 공허한 구호를 외치는 ‘낭만적 페미니즘’을 넘어, 차별과 배제의 문제가 현실 세계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고 실천되는 가에 대한 다층적 학습을 통해서 페미니스트가 되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누구도 페미니스트 자격을 판단할 ‘대심판관’은 없다는 것이 강교수의 결론으로 모든 페미니스트 또한 ‘형성 중인 페미니스트’라고 말한다.
이번주 시사인에 나오지는 않았지만 대림절 평화의 주로 오신 아기를 기다리는 계절에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예루살렘을 이스라엘 수도로 인정한다는 뉴스가 엄청난 소용돌이를 몰고왔다. 이 소식을 알려진 뒤 중동에 칼바람이 불고 있다. 전 세계 무슬림 국가, 아랍권 등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이번 결정에 강하게 반발했다.
영국 BBC 등에 따르면 10일(현지시간) 레바논 수도 베이루트 소재 미국 대사관 앞 도로에서 팔레스타인 국기를 든 시민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이러한 시위는 전 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사실 예루살렘은 국제법적으로 이스라엘의 수도가 될 수 없다고 한다. UN은 전쟁으로 빼앗은 영토를 자국의 영토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은 1967년에 일어난 3차 중동전쟁을 통하여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으로부터 빼앗은 도시이다. 왜 갑자기 트럼프대통령이 이러한 어이없는 결정을 했을까?라고 많은 사람이 의문을 품고 있다. 국내에서의 곤경을 벗어나기 위한 관심돌리기, 중동의 분쟁을 통해 무기를 팔고자 하는 장사속 등등의 추측이 난무하지만 여전히 미스테리이다. 이렇게 중동의 전화가 일어나면 한반도의 위기가 상대적으로 완화되는 엉뚱한(?) 효과가 있긴 하다. 두 곳에서 전쟁을 할 수 없다는 미국국방정책이나 중동에 훨씬 더 우선 순위를 두는 정서로 볼 때 북핵도 관심의 대상에서 일단 벗어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효과로 인해 우리가 예루살렘 사태로 인한 갈등의 우려를 완화할 수는 없다.
1) 아프리칸 아메리칸 교회 집회에서는 증인이 되겠습니까?(Can I get a witness?)라는 설교자의 말에 보통 아멘으로 답한다.
2) 예수의 성품과 능력을 그대로 가지고 예수보다 앞서 시험적으로 세상에 온 메시아처럼 읽는 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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