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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방송 프로그램에서 요즘 시중에 뜨고 있다는 어떤 여자강사가 한 강연내용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참 과묵하고, 감정표현을 잘 하지 않는 사람이었답니다.
그런데 그녀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평소에는 그렇게 과묵하고, 감정표현도 않던 남편이 상청에서 계속 슬피 울더랍니다.
잘 알아듣기 어려웠지만“민물낚시, 민물낚시”라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면서 울더라는 거지요.
그래서‘이상하다 왜 저렇게 섧게 울까’궁금하여 초상을 모두 치룬 다음, 남편에게 물었답니다.
“당신 평소와 달리, 왜 그렇게 서럽게 울었어요? 그리고 민물낚시, 민물낚시 하던데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러자 남편은 쑥스러워 하면서 이렇게 대답하더랍니다.
“사실 얼마 전 일요일에 아버지께서 날 보고 민물낚시나 가자고 했거든. 당신도 알다시피 아버지는 민물낚시 광이잖아”
“그런데 그게 왜 서럽게 울게 만든 거예요?”
“그때 난 별로 바쁜 일도 없으면서, 피곤하다는 핑계로 아버지 혼자 가시라고 거절했거든. 그런데 막상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보니, 그때 아버지 모시고 민물낚시를 갔더라면 좋았을텐데 막 후회가 되고, 내가 안 간다고 했을 때, 아버지가 얼마나 섭섭했을까 생각하니 자꾸 눈물이 나더군. 그일 때문에 나도 모르게 중얼거리면서 울게 됐어!”
저는 티브이를 통해서 그 강연을 들으면서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상청에서 우는 사람은 제 서러움에 운다는 말이 저런 뜻이었구나 싶기도 해, 오랫동안 그 강연 내용이 여운을 남기더군요.
올해도 매년 그러하듯 여름휴가를 맞아 보약 한 첩 먹는 셈치고, 지리산 종주 산행을 한 후, 고향으로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육군 방공포 부대에 복무하다가 막 제대하여 복학한 아들 녀석과 함께 지리산 종주 산행을 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더군요.
그래서 그 녀석에게 지리산 종주 산행을 하자고 제안했더니, 아들은 단호하게 거절하더군요.
하여, 전 앞서 여자 강사가 했던 강의내용을 아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만약에 니가 이번 등산에 따라가지 않으면 넌 정말 후회할 거다. 후제 나가 죽고 나면, 등산을 따라가지 못한 것이 한으로 남아‘지리산 종주, 지리산 종주’험시롱 울테니까 말이다”
“에이, 아부지가 조만간 돌아가실 리도 없고, 전 그런 것에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조금 섭섭했습니다.
그럼 할 수 없지 뭐, 하며 체념하고, 올해는 혼자 지리산으로 가야겠구나 생각하고 여름휴가가 오기만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 녀석은 생각이 바뀌었는지 지리산 종주에 따라가겠다는 겁니다.
저는‘정말?’하면서 아들에게‘지리산 종주, 지리산 종주하면서 울지 않으려고 그러는 모양이지?’라고 농을 쳤습니다.
아들은 아버지 혼자 가는 것이 걱정되어서 따라 가겠다는 것이지‘지리산 종주, 지리산 종주’하면서 울지 않으려고 따라가는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제가 한 이야기가 가슴에 남아있어 따라 오기로 결심했구나 싶어지데요.
7. 30. 오후 3시 당일치기로 중산리를 출발하여 천왕봉에서부터 노고단아래 성삼재 까지 소종주를 한다는 생각을 하고, 등산 배낭을 최소의 무게로 만들고 아들과 무작정 남부 터미날로 갔습니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결과, 지리산 중산리로 천왕봉을 오르려면 산청읍으로 가야하고, 산청으로 가는 버스는 남부터미날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도착하고 보니, 산청으로 가는 우등고속버스는 오후 5시40분에 출발하더군요.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 어떻게 시간을 보내나 걱정하다가 일단 버스 터미널 옆 한식당에서 갈비탕으로 늦은 점심을 먹고,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으로 터벅터벅 걸어갔습니다.
그곳에서‘인상파 거장 전시회’를 하고 있으니 한번 관람해 보라고, 제가 근무하는 서부지검의 이승구 검사장님의 권유가 생각나, 그곳으로 갔지요.
그런데 관람객이 너무 많아 제대로 감상이 될 것 같지 않아 다음기회로 미루고, 시원하게 냉방되는 그곳에서 빈둥거리다가 5시 40분 마침내 산청으로 출발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계속 졸다가 저녁8시50분쯤 산청에 도착했습니다.
산청읍에서 시천면 중산리로 가는 버스 편에 대해 잘 알지 못해 택시를 탔습니다.
택시 기사는 여름철에는 경호강에서 래프팅 하러 오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다고 했습니다.
중산리에 도착하니, 택시요금이 무려 4만2,000원 나왔습니다.
교통편을 잘 몰라, 너무 비싼 값을 치룬 것 같았습니다.
중산리 매표소 입구 쪽 민박 겸 식당에 숙박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니 예상과 달리 모두 방이 찼더군요.
할 수 없이 10분가량 걸어 내려가 민박집 방 한 칸을 2만원에 구해, 짐을 풀고 땀을 씻었습니다.
너무 더워서 잠이 오지 않고, 내일 지리산 당일치기 종주를 한답시고 나섰지만, 그동안 몸을 돌보지 않은 것이 걱정이 되어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버스 안에서 잠만 자다가 왔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아들도 처음에는 업치락, 뒷치락 하더니만 곯아 떨어졌습니다.
잠은 오지 않고, 오히려 정신이 말똥말똥해져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리고 평상에 앉아, 찬란하게 빛나는 뭇별을 우러렀습니다.
정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별들이 마치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했습니다. 반짝이는 모습은 별들이 눈물 그렁그렁 머금고 있다고 표현해도 될 듯 싶데요.
긴 밤을 꼬박 뜬 눈으로 보내고, 7월31일 새벽 세시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주섬주섬 짐을 꾸리고, 천천히 중산리 매표소 쪽으로 갔습니다. 별들은 아직도 쏟아져 내릴 듯 찬란했습니다. 새벽등산객을 상대로 음식을 파는 식당에서 시래기국밥을 사 먹고, 수통에 물을 채운 다음, 드디어 새벽 4시 매표소를 통과했습니다.
초장부터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몸 관리를 안해서인지 몸이 천근만근이나 된 듯 무겁데요.
칼바위로 가는 길은 그렇게 힘든 길이 아님에도 땀이 비 오듯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군대에서 제대한지 얼마 되지 않는 아들은 앞장서서 잘도 걸었습니다. 밤길에는 앞사람과 적당한 거리를 두고 방향을 가늠하며 따라가야 하기 때문에 가급적 앞 사람을 추월하면 안 되는데도 힘이 남았다고 몇 사람을 추월하기까지 했습니다. 전 뒤따라가느라고 허덕였고요.
칼바위 인근에서 잠시 쉬면서 숨을 골랐습니다. 월요일 새벽이라 등산객들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칼바위를 지나 쇠줄로 만들어진 다리를 건너서부터 가파른 산행길이 시작됐습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쉬곤 했습니다.
지난번 서부지검의 해오름 산악회원들과 천왕봉 등산을 하면서 힘들게 올라갔는데, 그 괴로움을 잊고 또 오르고 있는 꼴을 생각하니 참으로 한심스러운 인간이다 싶었습니다.
몸 관리도 하지 않고 무작정 이 높은 산을 오르는 제가 어찌 보면 참으로 어리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잠시 쉴 때는 밤하늘의 은성한 별을 아들과 함께 우러러봤습니다. 저와 함께 하늘을 우러러보던 아들 녀석은 그 옛날 초등학교 다닐 때, 오후 늦게 백무동 능선 길을 따라 장터목산장으로 오르면서 봤던, 그 수많던 별을 본 추억을 되살려내기도 했습니다.
걷다가 쉬기를 반복하던 중, 아들이 나 때문에 쳐지고 있는 것 같아 먼저 가라고 했지만‘같이 산행을 하기 위해 따라왔는데 먼저 가면 안 되지요’라면서 계속 나와 보조를 맞췄습니다.
산멀미가 나서, 가파른 산행 길 산죽이 무성한 곳에서 새벽에 먹은 국밥을 모두 토해 냈습니다. 그러자 뭉쳐있던 기운이 도는 듯 조금씩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해발 1,068미터 망 바위에 도착했을 때는 동녘하늘에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습니다. 망 바위에 올라서서 일출을 기다리다가 태양이 좀처럼 그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다시 걷기 시작했습니다.
로타리 산장과 망바위 중간지점을 지날 때, 일출이 본격적으로 시작됐습니다.
노랗기도 하고, 붉기도 한 복숭아 하나를 토해내듯, 해는 순식간에 튀어 올랐습니다. 자로 일자를 그은 듯한 동녘 하늘에 삐죽 햇살을 내 비추더니만, 잠시 후 바로 튀어 오르더라는 뜻입니다.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로타리 산장에 도착했습니다.
수통에 물을 보충하고 땀에 젖은 수건을 헹궈 얼굴을 닦고, 숨을 골랐습니다.
두 번 다시 지리산을 안 와야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산행기를 쓰고 있는 지금, 난 참으로 바보 같은 놈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다음에는 몸을 잘 만들어서 등산해야지 라고 반성을 해야 마땅함에도, 아무 책임도 없는 지리산 천왕봉 탓을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습니다. 허덕허덕 걷다가 쉬기를 반복한 끝에 겨우 개선문에 도착했습니다.
물을 마신 후, 숨을 고르고 나서 발아래 펼쳐진 거대한 지리산을 바라봤습니다. 녹음이 우거진, 측량할 수 없을 만큼 깊고도 넓은 그 여름 산이 절 압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숱한 봉우리 사이사이 골짜기에 하얀 구름이 펼쳐쳐 있는 모습은 마치 봉우리 하나하나가 섬 같고, 낮게 깔린 구름이 바다로 보이는 것은 어인 까닭일까요?
그리고 또 구름의 끝자락이 봉우리에 약간 거칠게 붙어 있는 모습을 보고 섬 주위에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고 있는 보이는 것은 어인 까닭이며, 해조음(海潮音)이 들리는 듯 한 것은 또 어인 까닭일까요?
그건 아마도 제 태생이‘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튄 한점 섬’출신이기 때문이겠지요.
그리고 다시 한번 지리산이 방장산인 까닭을 생각해 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철 철마다 그 몸체와 색깔 그리고 내밀하게 감춰진 정신을 다양하게 드러내 종잡을 수 없기에, 도력이 크고 높다는 뜻에서 불교 총림의 가장 높은 어르신 방장(方丈)에서 따와, 천하제일 산, 방장산이라고도 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다시 천왕봉의 마지막 은산철벽(銀山鐵壁)을 향해 몸을 일으켰습니다.
평소에는 수량이 그렇게 풍부하지 않았는데 긴 장마 뒤끝이어서인지 석간수 천왕샘에 물이 콸콸 흘렀습니다. 그곳에서 수통에 물을 가득 넣고, 한발 한발 걸어 올라갔습니다.
다리에 쥐가 나기도 해 주무르면서 올랐습니다. 머리가 화끈거렸습니다.
새삼스레 해발고도 1,915미터의 지리산은 제가 매주 한번씩 다니고 있는 북한산이나 청계산 그리고 최근에 다녀온 감악산과는 비교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숨이 턱에 차면서 생각도 하얗게 빛이 바랠 때 쯤, 지리산 정상 천왕봉을 기다시피 올랐습니다.
도착한 시간이 8시15분, 무려 4시간 15분이나 걸렸습니다.
어느 후배검사의 압도적인 표현대로, 포악스럽게 술을 마시고 다닌 대가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들은 자신의 페이스로 갔다면 7시쯤이면 도착했을 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나도 젊었을 때는 그 정도에 갔다고 뻥을 치고, 이제 막 군에서 제대한 젊은이는 아직까지 군기가 안 빠졌을테니 당연히 3시간대에 주파해야 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한국인의 기상이 여기서 발원된다.’고 새겨진 천왕봉 표지석에 서서 주위를 한바퀴 둘러봤습니다. 동서남북 모두가 수해(樹海)였습니다.
유장한 가락처럼, 춤사위처럼 고갯마루와 봉우리가 아스라이 휘돌아가면서 솟구쳤다가 가라앉는 그 모습, 경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옆으로 보면 고갯마루요 모로 보면 봉우리 (橫看成嶺側成峰)
멀고 가깝고 높고 낮음이 제각기 다르구나 (遠近高低無一同)
여산의 참모습을 알 수 없는 것은 (不識廬山眞面目)
바로 내 스스로가 이 산중에 있음이라 (只緣身在此山中)
<蘇軾의 題西林壁>
한참동안 휘둘러보니 가히 소식의 시가 절창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속이 비어서인지 허기가 져 구경을 마치고 서둘러 장터목 산장으로 갔습니다. 이제 몸이 풀려 그런대로 걸을 만 했습니다.
통천문을 통과하면서 아들과 초등학생 시절 두 차례 종주하면서 사진 찍고 했던 것을 상기시켰으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때는 모두 노고단 쪽에서 천왕봉으로 올랐거나, 백무동 능선을 타고 올라와 천왕봉으로 왔다가 다시 노고단으로 갔기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리라 싶었습니다.
제석봉으로 가, 제석봉 정상 여기저기에 앙상하게 남아, 찬바람 속에서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있는 고사목을 볼 때마다 인간에 의한 상흔 같아 씁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는 아들의 다리에 쥐가 나 연고를 발라 마사지를 해 주었습니다. 큰소리치더니 오버페이스 한 거라고 놀려먹었습니다.
9시 30분 경, 장터목 산장에 도착해서 초코파이를 두개씩, 백도 통조림 한개, 생 라면 하나, 콜라 두개를 샀습니다. 컵라면을 하나 사 국물을 마시면 좋았을텐데 팔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산장 마당에 퍼질러 앉아, 허겁지겁 먹고 마셨습니다. 라면을 왜 샀는지 궁금했는데, 아들은 봉지에 담긴 생 라면을 빠개서 먹었습니다.
생라면을 어떻게 그렇게 먹느냐고 하니, 군에서는 간식거리로 이렇게 자주 먹었다네요.
포만감이 들고, 기력이 되살아나는 듯 해, 일단 세석평전까지 가 보고 등산을 더 할 것인지 여부를 판단해 보기로 했습니다.
장터목산장에서 연하봉 쪽으로 조금 올라 간 곳을 지니던 중, 아들이 갑자기 이 자리에서 우리 가족이 지리산 종주할 때 텐트를 치고 하룻밤 잔 기억이 난다고 했습니다.
불현듯 저도 그 생각이 났습니다. 좁은 텐트 안에서 우리 가족이 밥을 해 먹고, 웅크리고 잤던 옛 추억이 마음을 따뜻하게 했습니다.
그 이후로는 산장 인근에서 야영을 하지 못하게 하는 바람에 더 이상 텐트를 메고 산에 올라가 야영하는 맛을 느낄 수 없게 되어 아쉽게 되었지요.
연하봉(연하봉)을 끼고 돌아가는 길은 정말 따뜻한 느낌이 드는 좋은 길입니다. 그 길과 더불어 임걸령 위 봉우리에서부터 반야봉 하부 노루목까지 가는 길도 또한 참으로 좋아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 풍광이 얼마나 수려합니까?
산 아래로 섬진강이 휘감고 돌아가는 모습도 아련하고, 남쪽으로 광양백운산 자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지요.
산 빛 정하여진 모습 없어 (山色無定姿)
안개 끼인 듯, 분 단장한 듯 (如烟復如黛)
외로운 봉우리 석양볕에 솟아 보이고 (孤峰夕陽後)
가을하늘 저만치로 산등성이 뻗었네 (翠嶺秋天外)
구름 덮여 아득히 보일 듯 말 듯 (雲起遙蔽虧)
강물은 굽이굽이 감돌며 흐르네 (江回頻向背)
가까워졌는지 멀어졌는지 알 길 없으나(不知今遠近)
아무튼 내내 마주하면서 간다네 (到處猶相對)
<유장경(劉長卿)의 추운령(秋雲嶺)>
풍광 좋은 자리를 발견할 때마다 경치를 구경하면서 갔습니다. 지리산 십경(十景)에 연하선경(煙霞仙境)이 들어있을 만 합니다.
그래서 시인 이원규씨가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이라는 시에서
연하봉 벼랑과 고사목을 보려면
툭하면 자살을 꿈꾸는 이만 반성하러 오시라고 한 까닭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습니다. 아마 그 풍광을 보면 자살할 생각을 자연스럽게 버리게 될 것이라는 뜻이겠지요.
그런 벼랑 위 적당한 곳에 자리 잡고 앉아, 북쪽을 바라보다가 정말 오랫만에 아들과 두런두런 이런 이야기를 했네요.
“아이, 니는 지리산 종주 두 차례 험시롱,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뭐디?”
“음, 뭣보다도 종주를 할 때마다, 아부지가 참말로 야속하고 무정했어요.”
“어, 왜 무정했다는 거냐? 난 무정하게 한 적이 없는 것 같은디...”
“뭐가 무정했냐 하면요. 힘들게 걸어서 앞서서 간 아부지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 곳까지 가면, 제가 오자마자 걷기 시작할 때, 쉬지도 못하고 정말로 무정하데요.”
“그래? 난 그건 전혀 생각을 못했다. 니가 쉬었다가오고, 쉬었다가오고 그러는 줄 알았는데. 미안허다.”
“그렇지만 좋은 기억도 많아요. 아부지가 맨날 하는 소리 있잖아요. 내려갈 때 방심하지마라. 방심하지마라고 했잖아요. 편해질 때 더욱 조심해야한다는 뜻에서 참말로 옳은 소리 같아요. 그리고 또 좋았던 기억은 아부지랑 외삼촌이랑과 종주를 하면서 외삼촌이 끓여준. 꽁치 김치찌개 있잖아요? 그 꽁치김치찌개 맛, 정말 꿀맛으로, 김치찌개를 볼 때마다 생각나요. 군대 쫄따구 때 주방일 보면서 그 김치찌개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전혀 그 맛이 안나오던데요”
아들의 회고는 이렇게 이어졌습니다.
“글고, 우리식구 넷이 아까 지나온 장터목산장 부근에서 텐트치고 잤던 기억이 안 잊혀질 거예요. 그때 텐트 천장에 달아두었던 등불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네요.”
우리가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자, 우리 곁에서 잠시 쉬던 등산객들이‘부자지간인 모양이지요? 부자간에 등산하는 모습, 참 좋습니다. 부럽네요.’라고 인사말을 하고 가더군요.
우리도 자리를 털고 일어나, 촛대봉으로 향했습니다.
그동안 촛대봉으로 오르는 길이 경사져 힘들었던 기억이 나 걱정하면서 올랐으나,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의외로 수월하게 올랐습니다.
촛대봉에 도착한 시간이 11시 10분.
예전에 등산을 다닐 때, 이 시간에 이곳에 도착했다면 끝까지 종주를 했을 터이나, 세월 앞에 장사 없고, 힘도 예전 같지 않아 당일치기 종주를 시도하는 것은 무리다 싶어졌습니다.
촛대봉에서 집으로 전화를 하자, 아내는‘싸나이들이 칼을 뺏으면 썩은 호박이라도 찔러야한다’고 종주를 부추겼습니다.
아내의 이야기를 아들에게 하자, 멈춰야할 때 멈추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라면서 자꾸 쥐가 난다고 그만 내려갔으면 하는 표정이었습니다. 저는 속으로 아들이 그렇게 나오길 바랬는데 다행이다 싶데요.
한신계곡으로 내려가는 것은 너무 멀고 힘들 것 같아 거리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림골로 내려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촛대봉에서 이곳저곳을 구경하려고 했으나, 아들은 그늘이 없다고 내려가자고 했습니다.
바로 세석평전을 가로질러 세석산장으로 향했습니다. 등산로 양편에 출입을 하지 못하도록 막아둔 바람에 구상나무도 제법 보이는 등 식생이 많이 복원돼 가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습지가 형성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지리산을 다니기 시작한 초기에는 이곳에서 철쭉제를 하면, 수많은 등산객들이 세석평전 이곳저곳에 텐트를 치는 바람에 산이 완전히 뭉개지다시피 했었는데, 뒤늦게라도 출입을 금한 것은 참으로 다행이지요.
철쭉꽃 만발할 때는 이 평원이 불타는 듯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하여 시인 송수권씨는 지리산 뻐꾹새라는 시에서
봄 하룻날 그 눈물 다 슬리어서
지리산하에서 울던 한 마리 뻐꾹새 울음이
이승의 서러운 맨 마지막 빛깔로 남아
이 세석 철쭉 꽃밭을 다 태우는 것을 보았다.
라고 노래하지 않았을까요?
세석산장에 도착하자마자, 아들은 거림골로 완전히 내려갈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산장매점으로 가 물어보고 왔습니다.
2시간 정도면 가능하다고 했답니다. 그렇게 자주 지리산을 왔지만 이곳으로 내려가는 것은 처음이라 길사정이 어떤지 모르지만 하산 길 약 6킬로미터 가량인데, 두 시간이면 괜찮은 하산길이라고 짐작했습니다.
수통에 물을 받고, 머리에 물을 부어 정신을 차린 다음, 거림골로 방향을 잡고 내려갔습니다.
처음 내려가는 길은 곳곳에서 흘러오는 물로 인해 늪지 같이 평탄해, 좋았지만 너덜겅 길로 바뀌자, 아들은 발바닥에 불이 난다면서 절룩거리며 힘들어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다가 중간 계곡 물에 머리와 얼굴을 씻고, 지루한 바윗길을 수없이 돌고 돌았습니다.
거림으로 가는 계곡은 수량이 풍부하고, 풍광이 수려해 볼만했지만 하산 길로는 참으로 지루했습니다.
불규칙하게 박힌 자연석들이 무릎을 아프게 했고, 발바닥을 화끈거리게 했습니다.
이 길은 처음 가보는 길이기에 더욱 힘든 느낌이었습니다.
마침내 2시 30분쯤 거림 매표소를 통과하자마자, 무더위를 달래기 위해 팥빙수 가게로 들어가 팥빙수를 사 먹으면서 달궈진 몸을 식혔습니다. 팥빙수가 그렇게 맛있는 줄 몰랐네요.
머리가 벗겨질 정도로 뜨거운 햇살 아래서 등산을 마치고 나니, 또다시 등산을 할 때 괴로움은 잊혀지고, 저기 저곳에 산이 있으니 또 와야지 하는 생각이 머리 속에서 출렁거렸습니다.
무엇보다도 아들과 등산을 함께 하면서 고통스럽게 숨쉬면서 흘린 땀, 그리고 그런 땀은 저의 체세포와 혈관 곳곳에 박힌 나태함과 방종 그리고 오만을 씻어내는 땀이라는 사실이 저를 쇄락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는 아들 녀석과 지리산 산행을 같이 하지 못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오는 아쉬움과 멋진 과거 한때의 추억을 공유했고,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냈다는 기쁨이 묘하게 교차하는 느낌이 들더군요.
사족1) 한시 해석은 서울대 이병한 교수의‘이백이 없으니 누구에게 술을 판다?’라는 책에서 원용했습니다. 송나라 때 시인 소식은 잘 아실테니 생략하고, 유장경(710-785)은 하북성 하간사람으로 개원 21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감찰어사, 수주자사를 지냈습니다. 그는 오언시를 잘 지어 오언장성(五言長城)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답니다.
사족2) 지난번에는 일본을 아버지와 함께 여행이고, 이번에는 지리산을 아들과 등산하여 기분이 각별했습니다.
사족3) 다리에 쥐가 날 때, 특효약이 아스피린이랍니다. 의욉니다.
첫댓글 오붓하고 의미 있는 시간 이었겠다.부러움만 가득.멋진 시조 또한 잘 감상했다.건강하길..
부러워만 허지말고, 니도 해봐....요새도 부산순고동창회 모임은 정기적으로 허냐? 서정환 선배님을 비롯하여 여러 선배님들께 안부 전해 줘.
녀석이 애비말 잘 듣냐?제대하고 서울서 학업중이다.부산동문회는매월15일 잘하고있다.안부 전할께.이제 계절이 바뀌는데 항상 건강하고 무궁한 발전도..
지리산에 오거들랑 동문 수첩보고 연락한번 주시게....이영재가
취운은 지리산 [거사]님이란다. 근데 너하고 학교는 같이 다녔대 ㅋㅋㅋ
군대까지 갔다온 아들이 아버지께서 산행하잔다고 따라나선걸 보면 자식교육은 정말 잘 시킨 것 같네. 요즘 아이들이 가장 싫어한 것 중 하나가 산에 가는것. 글 잘 읽었고 부럽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