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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은 흘러간다. 흘러가 강이 되고 바다가 된다. 바다가 되어 둥그런 수평선이 된다. 미약골 모두부치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벌력의 강이었고 남천이었고 화양강이었다. 이 강에서 아버지가 살았고 어머니가 살았고 그 아들딸이 살았고 또 그 아들과 딸들이 살아 산이 되고 물이 되어 또 살았다. 물이 알고 있는 낮은 곳이란 곳 물은 낮은 곳을 애써 찾지 않으며 높은 곳을 탐하지 않으며 부끄럽지 않게 품고 돌아 흐르는 것이리니 그 구비가 땅이 되고 하늘이 되고 태극이 되고 삼라만상이 되고 내가 되고 네가 되고 우리가 되는 것 아니더냐 강을 따라 걸으면서 강에 귀의한다. 무색무취의 빛으로 탄주하는 물의 맑은소리에 귀의한다. 강물소리에 귀를 열고 심연의 푸르른 물빛에 마음을 연다. 마른 논에 물이 들듯 눈을 감고 몸 안으로 스미는 소리를 듣는다. 끝을 보고 흐르지 않는 묵언의 몸짓은 그냥 흐른다. 흐르다 깊어지면 소를 이루고 여울을 만나면 음악이 된다. 재즈가 된다. 강이 내준 돌다리를 건너다가 강물이 씻어 놓은 바위 위에 걸터앉아 물속의 하늘과 그 하늘의 고요를 마음에 들여 놓는다. 홍천강 기행을 쓰면서 가끔 전화를 받았다. 홍천강에 놀러가려고 하는데 추천해달라는 것이다. 물놀이도 즐기고 고기도 잡아먹을 수 있는 깨끗한 곳을 좀 가르쳐 달라는 것이다. 그런 곳이라면 홍천강 어디든 자리를 펴도 좋다. 그러나 정말 강을 즐기려면 물과 함께 여행을 떠나라 권한다. ‘재즈 같은 홍천강의 리버로드’ 자전거를 타고가도 좋고 걸어가도 좋다. 의미를 두지 말고 천천히 흐르는 강물처럼 저녁노을과 함께 떠나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고 연봉다리를 건넌다. 그리고 강둑을 따라 간다. ‘송학정’을 지나고 ‘배무기’를 지나 ‘둔지모테’를 지나 다리를 건너 ‘하화계리 사둔지’로 들어서게 되는데, 이제부터 홍천강의 리버로드가 이어진다. 강이 들려주는 재즈 같은 리듬이 싱그럽다. 북방면 하화계리는 그 일대가 구석기시대의 박물관이다. 중앙고속도로 공사를 하면서 한국의 중석기시대의 유물인 흑요석제 석기들이 출토 된 곳이며, ‘작은 솔밭’일대의 국도 5호선의 확포장공사에서도 10만년 전 이상의 것으로 추정되는 전기구석기를 비롯하여, 중기 구석기, 후기 구석기, 중석기 시대 등 4개시기의 유물이 500여점이 출토된 곳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하화계리에는 어떤 안내문도 전시공간도 없다. 그 일부가 무궁화공원의 홍천사료관에 몇 점 전시된 것이 고작이다. 왜 구석기인들은 이곳에 자리를 잡았을까? 당시의 구석기인들은 수렵생활이 편리하고 농사를 짓기에 수월한 이곳에 모여 살았다. 홍천강이 쌓아올린 퇴적층과 강에는 물고기가 풍부했다. 또 큰 산이 이어져 있어 사냥감이 많았다. 이곳에서 나온 유물들 중 상당수가 어업 수렵활동의 도구들이란 점에서 홍천강변에서 살았던 구석기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다. 이 일대에 ‘송학정’을 중심으로 한 삼림욕장이 개설될 예정이라고 하지만 이왕이면 구석기 시대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석기시대 체험장도 함께 마련되었으면 좋겠다. ‘작은 솔밭’과 ‘새둔지’를 돌아 강 길을 따라 내려오면 ‘사단 사령부 휴양소’다. ‘도둔보’가 가둔 물빛이 푸르다. 너무 진하지도 않고 탁하지 않은 맑은 빛의 물. 그 물에 봄빛이 어린다. 강 건너 ‘하이트맥주’가 자리 잡고 있다. 예전에 이곳에는 겨울이면 섶다리가 놓였고 여름에는 나룻배를 타고 건넜다. ‘도둔’과 ‘소단이’를 건너다니던 이 나루는 ‘소매곡’을 지나 ‘더운김내리’ 앞을 돌아 올라온 배들이 돛을 내리고 한숨 쉬었다 가기도 했다. 그 쉴 참에 ‘도둔’뿐만 아니라 ‘소단이’, ‘돌터거리’ 사람들이 나루로 모여들어 물건을 구입하기도 했다. 그 후 이 자리에 1958년 ‘공굴다리’가 놓였는데 잠수교였고 하이트맥주가 들어오면서 철거 되었다. 하이트맥주가 들어서면서 견학 오는 탐방객들과 도둔을 중심으로 한 홍천강변을 찾는 여행객들이 많아졌다. 여름이면 물에 들어서서 견지낚시를 하는 등 여유로운 풍경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성동천 어귀를 지나 ‘이괄이훈련장’(상화계 앞 내 건너 산-이곳에 소학정(巢鶴亭)터가 있다)을 감고 도는 강가에는 백사장이 펼쳐져 있어 여름밤에는 기타소리가 별밤을 밝히기도 하는 곳이다. 강 건너는 ‘소매곡리 더운김내기’다. 이곳에 ‘홍천온천’이 자리한다. 옛날부터 추운 겨울에도 16℃이상의 더운 물이 나와 피부병환자들이 치료를 위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한다. 이러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 개발한 끝에 1987년에는 ‘홍천온천 원탕’이 문을 열었고, 그후 ‘홍천온천 썬스파 리조트’가 문을 열었다. 하루 내방객이 천명에 이르게 되자 홍천군은 온천입구에 농산물 판매장을 열기도 했다. ‘홍천온천’은 병풍처럼 둘러친 산과 거울같이 맑은 강을 함께 즐길 수 있는 곳이다. 특히 겨울에는 눈썰매장이 여름에는 홍천강 레프팅을 즐기고 또한 알칼리성의 중탄산나트륨이 다량 포함된 온천수로 피부건강을 지킬 수 있어 여행의 참 멋을 아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북방을 실핏줄처럼 이어주는 개울은 크게 ‘성동천’과 ‘능평천’이다. ‘대룡산’과 ‘연엽산’, ‘구절산’에서 흘러오는 ‘성동천’은 동양최대의 아미타 불상을 모신 ‘연화사’와 대한민국 최대규모의 ‘강원도 자연환경연구공원’, 살신성인의 표상인 ‘강재구 공원’이 있어 자연과 명상을 즐길 수 있다. 또한 ‘성동리 성골’은 ‘장수촌’이라 이름이 나기도 했다. 실제로 ‘성골’(자연환경연구공원)어귀의 안정도(작고)씨는 장수촌의 살아있는 전설로 쟁기질을 하다가 소가 지치면 자신이 쟁기를 둘러메고 밭을 갈았을 만큼 장사였다고 한다. ‘부사원 진골’과 ‘막은내밋골’, ‘방울고개’에서 시원을 이룬 ‘능평개울’은 ‘능평뜰’을 가로질러 흐른다. 특히 능뜰에는 ‘연산군묘’(이조 제 7대 세종 때 정랑공신 연산군 김효성의 묘)가 있고 신도비가 있다. 하이트맥주에서 홍천온천으로 건너는 길은 없다. 그러나 산밑을 돌아 ‘소매곡리’로 들어갈 수 있다. 다시 ‘도둔나루’(지금은 하이트교가 놓였다)를 돌아 ‘굴결’을 넘어 ‘소매곡’으로 들어섰다. 다리위에서 바라보는 강은 그 자체가 비단결처럼 곱다… 중앙고속도로가 왼편으로 지나고 오른편으로 이어지는 여울에선 재즈가 흘러나온다. ‘산구내미’를 돌아드는 여울을 바라보며 ‘도사곡리’로 들어서는 길은 벼랑을 끼고 서낭고개를 넘게 된다. 서낭당 고개를 오르면 ‘문들’을 감고 도는 강물줄기가 ‘굴지리’로 이어지고 고개 아래에는 ‘천냥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어느 마을에 한 머슴이 동네에 사는 친구한테 천 냥의 돈을 빌려 쓰고 갚지 못했다. 자신의 형편으로는 어떤 방법으로도 갚을 수 없게 되자 하루는 친구를 이 바위로 불러내어 술잔을 나누며 ‘내 이제 자네에게 진 빚을 도저히 갚을 수 없어 이 바위에서 떨어져 죽고 말겠네’ 라고하자 바위에서 떨어지려는 친구를 만류하며, ‘이 사람아 아무리 빚을 갚지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자네의 목숨을 원하겠나? 나중에 돈을 벌면 갚도록 하고 제발 목숨은 버리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그 후로 두 친구 사이가 더욱 두터워졌음은 두말할 것도 없고 열심히 돈을 벌어 빚을 갚았다고 한다. ‘천냥바위’와 ‘산구내미’를 감도는 물빛은 봄이면 철쭉이 얼비추고 가을이면 단풍과 조화를 이루어 타는 듯 붉다. ‘문들’에서 ‘굴지리’로 건너는 줄 배가 있었지만 큰 물에 떠내려가고, 지금은 ‘서낭당고개’에서 굴지리로 건너는 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서면의 강을 백사장이 아름다운 강이라한다면 도사곡리나 굴지리 장항리는 산과 바위와 강이 어우러진 강이다. 그중에서도 ‘도사곡리’와 ‘굴지리’로 이어지는 비경은 홍천강의 백미다. 굴지리에서는 강을 배경으로 한 비경 여덟 곳을 정하여 마을을 소개하고 있다. 굴지천의 철쭉이 강안의 바위를 붉게 물들이며 활짝 피어날 때쯤 ‘괴바우’와 괴바우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백사장과 어우러져 흠뻑 빠져들게 한다. 푸른빛의 강물은 너무 깊지도 얕지도 않으며 또한 무서움을 주지 않는다. 그 강을 따라 이어지는 강안에는 왜가리와 중대백로가 물고기를 기다리기도 하며, 족대를 들고 돌을 뒤집으며 고기를 잡거나 낚기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굴지리’를 돌아들어 ‘장항리’로 이어지는 길은 비포장 도로다. ‘장항리(獐項里)’는 ‘노루목’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도사곡’에서 ‘굴지리’를 거쳐 굽이굽이 흘러온 강물이 장항리에 와서 노루목처럼 길고 넓고 깊게 흐르다가 다시 남노일강에 이르러 굽이치며 흐른다. 홍천강을 굽어보며 우뚝 서 있는 ‘금학산’은 ‘팔봉산’과 함께 등산객들이 많이 찾는 산이다. 금학산은 행정안전부가 주최한 제3회 지역자원 경연대회에서 당당히 금상에 선정되었을 만큼 조망이 아름다운 산이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다양하지만 ‘여호내고개’에서 산행들머리를 잡으면 좌우로 이어지는 홍천강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또한 정상에 오르면 남노일리의 ‘고주암’과 ‘위안터’를 감고 도는 거대한 수태극 문양의 홍천강을 볼 수 있다. 금학산에는 ‘용수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다. 홍천용씨의 시조가 된 ‘용득의’가 지은 ‘용수사’는 금학산자락 절골에 자리를 잡았는데 지금도 그 터에는 절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학서루(鶴棲樓)’를 지어 학문을 가르치기도 했는데 남아있는 자료는 찾을 수 없다. ‘남노일’은 원래 북방면 지역이었으나 ‘용수 모래나드리’에서 징검다리를 건너가야만 했으므로 남면으로 편입된 곳이다. 마을 앞으로는 홍천강이 감싸고 뒤로는 금학산이 에두른 곳이라 섬처럼 아늑하고 외딴 곳이다. 마을의 중심이 되는 고두암(고드래미)에는 큰 바위가 있다하며 건너편 ‘위안터’는 마을 앞에 ‘금학산’이 솟아있고 냇물이 흘러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다. 홍천군에서 추진하고 있는 홍천강 리버로드가 이어지면서 ‘위안터’는 새로운 휴식공간이 되고 있다. 남면은 원래 ‘금물산면’이다. 금물산은 홍천, 양평, 횡성의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넓게 어깨를 펼친 형상이다. ‘시동’을 가로지르는 ‘금계천’은 ‘오음산’과 ‘금물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흐르는 개울이다. 옛날에는 ‘시동’이 남면의 중심이었을 만큼 너른 뜰을 가졌다. 지금은 군부대가 주둔하고 곳곳에 사격장이 자리하고 있어 가끔씩 총성이 끊이지 않는 곳이지만 ‘매화산’을 중심으로 시를 짓는 선비들이 즐겨 찾는 곳이라 하여 ‘시동(詩洞)’이라 했다. 금계천의 아름다움을 두고 시동의 시객들은 곳곳에 시문을 남겼다고 하는데 찾을 수는 없고 다만 곳곳을 찾아다니며 산천경계를 즐긴 시동팔경이 남아있다. 팔경의 으뜸은 삼성서당의 시 읊는 소리이고 풍악들의 논매는 소리, 소리개뜰의 풍년경지, 금계천의 고기잡이 횃불, 미봉산의 월출, 인적산의 저녁놀, 금물산의 가을단풍 그리고 매화산의 설경을 꼽는다. ‘신대리’는 홍천배의 본 고장이다. 그러나 신대리의 역사는 고려말에 닿아있다. 신대리에는 ‘숨어지내기 좋다’는 의미로 ‘동은’(동거른 다리:東隱), ‘서은’(서거른다리:西隱),‘하은’ 등 작은 부락이 있고, ‘밭귀너미고개’(발귀현, 새터고개, 발기고개)를 넘어 양평군 ‘신대리’로 넘나들던 고개가 있다.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면 ‘망덕산’이 보이는데 고려말 왕(王)씨들이 피난와 살면서 고려의 옛 서울 송도가 그리워 ‘발기고개’까지 왔다가 저녁이면 돌아갔다고 한다. 그 후손들의 묘가 아직도 ‘망덕산’ 곳곳에 있다. 신대리의 주산은 금물산의 능선이 이어지는 시루봉이다. 봉우리는 작지만 골짜기안으로 들어가면 섬바위를 비롯해 놀기좋은 곳이 있고, 두릅이며 나물, 송이 등 봄부터 가을까지 많은 것을 베푸는 산이다. 신대리의 ‘창말’은 홍천의 ‘남창’이 있던 마을로 매화산 등산의 들머리가 되고 있고, 유목정 뒤편의 인적산은 임진왜란 때 마을사람들이 이 산속에 피난을 왔다가 왜놈들에게 발각이 되어 무참히 학살당하여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인적산의 천년바위와 거북바위는 인적산을 찾는 등산객들의 좋은 볼거리가 되고 있다. 홍천과 양평의 경계를 이루는 ‘신당고개마루’에는 휴게소가 자리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성황신을 모신 당집이 있었으며 ‘두루봉’에는 봉화터가 남아있다. ‘갈기산’으로 이어지는 큰 갈기골과 작은 갈기골은 유목정 뜰의 젖줄이다. ‘화전리’는 신선들이 꽃을 가꾸며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마을인 만큼 골짜기도 많고 봄에는 골짜기마다 꽃이 지천이다. 화전리의 봄나들이는 ‘봄놀이’를 찾는 일부터 시작된다. ‘봄놀이의 약수’는 만병통치로 알려져 있으며 화전리의 웃과우에는 황금전나무가 전해오고있지만 만나지는 못하고 마을 한가운데 오래된 전나무가 서있다. 금물산 자락의 마을을 돌아 흐르는 개울물이 양덕원에서 모여 오리청정농법의 뜰 ‘명동’을 거쳐 제곡 - 용수를 지나는 산협의 물줄기는 수정처럼 아름답다. 강물이 자연의 몸짓을 거스르지 않듯이 제곡리는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기도 하다. 최승희는 제곡리 옻나무재 우물가에서 물동이를 이고 뱅글뱅글 도는 춤을 추기도 했다고 한다. ‘금계천’이 홍천강과 만나는 ‘어룡와지(魚龍臥池)’ 응아지 나루는 오래된 미래처럼 이야기가 깃들어 있을 뿐이며, 다만 먼 길을 가는 물소리만이 노일강에 물들고 있다. 남노일은 육지속의 섬이다. 지금은 소매곡리부터 이어지는 리버로드가 있어 강과 함께 흘러들듯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산을 넘고 넘어 가야만 했다. 겨울이 오고 강에 얼음이 꽝꽝 얼어야 읍내 장이라도 보러 나왔을 정도다. 홍천군에서 유일하게 길이 이어지지 않은 곳이 ‘위안터’였는데, 위안터 사람들은 쪽배를 타고 건너다니거나 섶다리를 건너다녀야 했다. 최근에 고드래미 위안터 북노일을 잇는 리버로드가 열리면서 홍천강 400리 물길 여행은 여유와 낭만 그리고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테마로드가 되고 있다.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는 시를 다시 읽는다.
‘그대는 이 강을 따라 떠났고 물결처럼 남은 사랑만이/ 내 가슴에 와 뒤척인다 은밀하게 상처속에 남아 있는/ 고독은 미루나무 숲 그늘 아래 서성이게 하리라/ 밤새의 울음이 적막하게 둥글어지고/ 나는 나무의 저쪽에서 또는/ 물의 안쪽에서 들려오는 메아리를 듣는다/ 내 사랑은 아직도 강가를 서성인다’ ‘노을강에서 재즈를 듣다’ 중에서
나는 이별을 예감하고 이 강가에 와 소리 내어 운적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