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천주교의 발상지인 천진암 성지
천진암 성지는 1779년-1784년까지 이벽, 이승훈, 권일신, 정약종, 권철신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들께서 선교사 없이 학문적 지식의 수준에 있던 천학(天學) 을 자발적인 진리 탐
구를 위한 6, 7년간의 강학회(講學會)를 통하여 종교적인 신앙의 차원인 천주교회로 승화,
발전시키고 천주교 신앙 공동체를 시작한 한국천주교 발상지이다.
또한 이 성지에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의 성업을 이루신 이벽,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정
약종 등 한국천주교회 창립 선조 5위 묘가 모셔져 있고, 조선교구 설립자 묘역에는 정하상,
유진길 및 한국 천주교회 창립 선조들의 직계 가족인 정약전, 정지해, 이석 등 선인들의
묘가 안장되어 있다.
천진암 성지는 한국천주교회 창립선조들께서 선교사 없이 자발적으로 진리를 탐구하고 복음
을 전파하며 교회를 세우신,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한국천주교 발상지일뿐더러, 음력 주일
제정과 실천으로 국내에서는 최초로 근로자들의 정기적인 휴식을 겸한 경신예절과 사회계급
타파, 남녀평등 실천 등이 교회창립과 더불어 시작되어, 훗날 민족개화와 조국근대화 및 조
선 사회개혁 운동의 싹이 트기 시작한, 온 겨레의 정신문화 성지이기도 하다.
천진암은 본래 단군영정 천진을 모시고 산제사, 당산제, 산신제 등을 올리던 천진각 혹은
천진당이라는 작은 초가 당집이 오랜 세월 있었던 자리로 추정되며, 훗날 천진암이 되어,
1779년을 전후하여 폐찰이 되었었으니,
정약용 선생의 글에, "천진암은 다 허물어져 옛 모습이 하나도 없다" 하였고, 1797년 정사
년 당시 홍경모의 남한지에서는, "천진암은 오래된 헌 절인데, 종이를 만드는 곳으로 쓰이
다가 이제는 사옹원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함으로써, 사찰로서의 기능을 언급하지 않고 있
으며, 성 다블뤼 주교는 1850년 경, 젊은 선비들과 함께 이벽 성조께서 강학을 하던 곳은
쓰지 않는 폐찰이었다고 하였다.
성모경당 옆 고해실.
1779년 당시 이벽 성조 26세, 정약용 17세, 정약종 19세, 정약전 21세, 이승훈 22세, 이총
억 15세, 권철신 44세, 등 주로 10代와 20대 젊은이들이 모여서 그 당시 아주 생소하고 이
상한 천주교 책을 읽고 실천하는 일을 일반 유교 서당에서나 정상적인 사찰에서, 또는 일반
가정에서는 하기 어려우므로, 다블뤼 주교의 기록대로, 폐찰이 된 천진암에서는 여럿이 모여
함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천주교 진리를 탐구하고 실천할 수 있었으니, 천진암은 바로
유불천이 합류한 곳이고, 조선 천주교회가 시작된 한국천주교 발상지이다.
그런데 정약용 선생은 종종 [천진암]에서 [菴] 자를 빼고 그냥 "天眞"이라고만 부르기도
하였다.
이곳은 1970년대에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고, 1979년에는 경기도 포천에서 이벽의
유해가 이장되었다. 이어 1981년에는 화성군 반월면에서 정약종(丁若鍾, 아우구스티노)의
유해가, 인천 만수동에서 이승훈의 유해가, 대감마을 뒷편의 효자봉 자락에서 권철신, 권일
신의 유해가 각각 천진암으로 이장되었으며, 1981년 12월에는 경기도 광주 배알미리(현 하남
시)에서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성인의 유해가 간신히 수습되어 이곳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묘지 오르는길에서 만난 계곡물...이곳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가르멜 봉쇄 수녀원이
나온다.
울타리 안으로 들여다본 수녀원..
정문 앞
일반인이 출입이 가능한 옆길로 발소리 죽여가며.. 들어가보다.예수님과 수녀님 성상이
무척 평화로워 보이고..
이벽 성조를 중심으로 젊은 학자들에 의해 한국천주교회가 시작된 곳인 천진암은,
여러 역사 자료에 의하면, 천주교 강학회가 열릴 당시, 폐허가 된 버려진 암자로
소개되고 있고, 후에 다산이 쓴 시에도 천진암을 가리켜 寺破無舊觀(절은 파괴되어
옛모습을 볼 수 없구나)라고 읊은 구절이 있다.
또 강학회 이후에도 절로서의 기능을 전혀 하지 못했다는 것은 홍경모의 남한지에도
기록되어 있으며, 원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약150여년 전에 절이 완전히 없어져 그
이후로 화전논밭으로 변하였다.
이렇게 논밭이 되어버린 천진암터를 1978년에 처음으로 변기영 신부가 매입하면서 본
격적인 천진암 성역화 사업이 시작되었다. 1979년에 경기도 포천군에서 광암 이벽 성
조의 묘를 기적적으로 찾아 이장하였고 이후 1981년에 정약종, 이승훈. 권철신. 권일신
성현 등의 묘를 이장함으로써 현재와 같은 한국천주교회창립 선조 5위 묘역이 조성되게
되었다.
5위 성현 묘역은 천진암 성지의 지성소로서 경건하게 기도하고 참배하는 성역이므로,
일체의 오락과 식사가 금지된다.
1. 이벽 성조(曠菴, 德祖, 李檗, 세자 요한)
1754 :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화현리에서 탄생
1779 : 천진암 강학회에서 천학논증. 성교요지,천주공경가 저술, 그 후 천주밀험기, 험세
문득기, 래세예언기, 령득경신기, 숭례의, 상천도 저술
1783 : 이승훈 성조를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
1784 : 이승훈 성조에게서 영세
1785 : 명례방 집회로 을사박해 중, 가내 연금상태에서 아사벌(餓死罰)로 단식순교(斷食
殉敎)
2. 이승훈 성조(蔓川,子述, 李承薰, 베드로)
1756 : 서울 중림동 만초천 언덕에서 탄생
1779 : 천진암 강학회 참석
1783 : 북경 천주교회로 파견
1784 : 영세받고 귀국
1785 : 명례방 집회참석, "만천유고"남김
1787 : 북경주교에게 보고서 저술, 발송
1801 : 서울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순교(斬首殉敎)
3. 권일신 성조(沙右居士, 稷菴, 權日身, 프란치스꼬 사베리오)
1742 :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 갈산에서 탄생
1779 : 천진암 강학회 참석
1784 : 이벽 성조에게서 영세
1785 : 명례방 집회에 참석
1791 : 신해박해 때 서울 감옥에서 혹심한 장타(杖打)로 귀양도중 순교(杖打殉敎)
4. 권철신 성조(鹿菴, 權哲身, 암브로시오)
1736 : 경기도 양평군 양근면 양근리 갈산에서 탄생
1779 : 천진암 강학회 참석, "유한당 언행실록" 서문 저술
1784 : 이벽 성조에게서 영세
1801 : 신유박해 때, 서울 감옥에서 옥중 고문으로 장타순교(杖打殉敎)
5. 정약종 성조(選菴, 丁若鐘, 아오스딩)
1760 : 경기도 남양주군 와부면 능내리 마재에서 탄생
1779 : 천진암 강학회 참석
1785 : 명례방 집회 참석
1795 : 명도회 회장으로 활약
1797 : 이벽 성조의 "성교요지"를 본따서 그 해설판으로 "주교요지"를 저술
1801 : 서울 서소문 형장에서 참수순교(斬首殉敎)
성역로를 따라 300m 정도를 올라가면 약 5만여평의 광장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100
년계획으로 대성당을 짓고 있는 현장이다. 천진암 대성당은 한국 천주교회 창립선조들의
자발적인 교회 창립정신과 거룩한 순교정신을 오늘에 기리고, 또 후대에 전하기 위하여
건립되는 민족 대성당인 동시에, 한민족이 대를 이어가며 건축함으로써 길이길이 민족화
합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100년계획으로 건립되고 있는 성당이다.
동서남북의 길이가 각각195m, 지붕높이가 85m인 천진암 대성당은. 유교의 서원과 불교의
대웅전 지붕과 처마 및 천주교회 성당의 내부 구조를 종합하여 설계되었는데, 이는 천진암
이, 유교 학자들이 불교암자에서 천주교를 시작한, 儒ㆍ佛ㆍ天이 합류한 성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대성당터에는 교황 요한 바울로 2세의 천진암 대성당 강복문이 새겨진 머릿돌(27톤, 4m X
1.5m X 1m)과, 대성당 중앙 제단에 놓일 제대석 (길이 10.5m, 넓이 2.3m, 높이1.5m, 무게
87톤)이 있다.
광암성당 제대
성지 입구 표지석
허망의 잠을 깨며 (천진암에서) - 김영수 -
꿈 깊어야
향내 맡을 수 있는 것입니까
목숨 걸어 대지 밝히며
골짜기 거느리는 이들 노래
나는 사랑이 부족해서
낮에도 아프게 기우는 별 하나 봅니다
가슴 안으로 파아란 선 예리하게 그어질 때
나는 비로소 허망의 잠을 깨며
천진암의 샘물에 닿습니다
추억과 꿈 속에 도는 비밀
문득 눈 뜨고 다가오는 물소리
나는 높이 오르는 바람 하나 타고
절벽 위 숨은 꽃잎 하나 흔들다
이곳 골짜기 묘지들 위로
한 올 햇살 되어 떨어질 수 있을까요
부활처럼 흰 구름 속으로
아득히 스며들 수 있을까요
출처 - 한국의 성지 -
첫댓글 꼬랑쥐가 다 날라갔시유~~~무단복사금지를 풀어주시면..고맙겠구먼유~~~
이벽 세자 요한 님이시여, 이승훈 베드로 님이시여, 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님이시여, 권철신 암브로시오 님이시여, 정약 아오스딩 님이시여.. 귀한 신앙을...목숨을 받치셔서 유산으로 남겨주셨건만...제대로 받들지를 못하고 살아가니..그저 럽기만 합니다..아오스딩 형제의 발길을 따라서..천진암을 향하여..고개를 들고 멀리서 바라보노라니..오늘은 한숨이 절로 납니다../바라옵고, 청하옵기는...비록 인터넷 바다에 세운 터이지만, 이 곳에 함께 계셔서..다녀가는 분들의 마음이 순교성인을 향하여 오래토록 머물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103위 한국순교성인분들과 무명 순교자분들에게 청하나이다../늘 감사드리는 나가요
백년 후에나 완성될 성당이기에 우리네들은 하늘에 가서야 보게 되겠지요. 천진암 성지를 만나느라니, 고인이 되신 어머니와 함께 갔던 마지막 성지였음이 생각나서 더욱 감회가 큽니다. 아오스딩 형제님이 성지 여행을 다니셔서인가 건강해 보이셔서 참으로 좋군요. 언제나 하느님 안에서 행복하시기를 화살기도 보냅니다.
저는정약용선생을훌륭하신 역사의 인물이라생각합니다 하지만그분이 마치한국천주교회에 없어서는 안되는인물로등장합니다 물론 그분이 초창기교회에 일꾼이라는점은인정합니다 그러나모든것을 정약용의 어록을 인용하는것은 어딘가 잘못된것갔읍니다 순교자보다 더위대하게모시는것은 잘못아닌가합니다 정약종이나 정하상이나 황사영을 유항검을 더위대하게 부각해야하지않을가요 황사영은 묘역도 생가도 성역화하지않으면서 정약용은성역화해서 위대하게만들어노은것은 잘못아닌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