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다음은 중앙일보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지 2006.3.7일자에 실린 "글로벌시대 무역사고" 시리즈 물에 게제된 필자의 글 입니다.)
글로벌시대 무역 사고
영문주소 잘못 써 35만 달러 부도
Hong Cheon을 Hong Chun으로 기입...확인 안 한 국내은행도 책임
외국과 무역을 할 때는 영어로 작성된 서류를 주고받는다. 외국어에 능통하지 않은 사람이 영문서류를 작성하거나 읽고 정확하게 이해해야 하는 일은 보통 스트레스가 아니다. 웬만큼 영어를 한다는 전문직 종사자들도 외국거래처와 신속하고 정확한 의사소통을 어려워한다. 또한 영문무역서류의 작성과 검토에 익숙하지 않아 대충대충 넘어가는 일이 많다. 어떤 무역실무자들은 약간의 실수가 있어도 매번 사고가 터지는 것은 아니니까 운에 맡기면서 대충 넘어간다는 말도 하는데 위험천만의 사고방식이다.
필자는 우리나라에 장기간 거주하고 있는 영국인 친구로부터 불평어린 하소연을 자주 듣는다. 그 친구의 말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영문주소를 가지고 혼자서 운전을 하거나 길을 찾아가는 것은 그야말로 수학방정식을 푸는 것 보다 어렵다고 한다. 중요한 문서에 한글 고유명사를 영어로 표기할 때는 어느 것이 맞는 지 도무지 알 수 없어 잘못 썼다가 나중에 법적인 문제가 생길까봐 너무 신경이 쓰인다고 한다.
자기가 근무하는 사무실 주소지인 “종로구”가 씌어진 문서들을 보면 “Jongno-gu", ”Chongro-ku", "Jongro-ku", "Chongno-gu" 등 너무나 다양해서 골치가 아프다고 한다. 또 “중구”라는 주소를 쓰는데 어떤 사람은 “Chung-gu"로 쓰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Joong-ku"가 맞는다고 우기니 미치겠다고 한다. 사실은 그것 외에 “Choong-ku", "Jung-gu", 심지어는 ”Zoong-Ku"라고 쓰는 사람도 보았다. 자식을 국제화시대에 뒤지지 않게 하려고 영어권 국가로 조기유학을 보낸다고 난리법석인 마당에 정작 길거리 간판과 정부의 공문서에서 조차도 통일된 영문철자를 쓰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그냥 웃고만 넘길 일이 아닌 것 같다.
최근 우리나라 어느 의류업체는 알고 보면 말도 안 되는 영문서류 작성의 사소한 실수로 4억5천만 원의 무역사고를 내고 파산한 사건이 있었다. C사는 주로 고가의 고급 의류제품을 생산하던 업체인데, 중개무역상을 통해서 중국의 바이어와 미화 34만8천 달러 상당의 의류제품 수출계약을 체결하고 중국의 모 은행이 개설한 신용장을 받았다.
신용장은 C사가 물품을 선적하고 선하증권과 함께 상업송장과 보험증서를 한국의 은행이 매입하고 중국의 개설은행에 그 서류들을 보내면 개설은행이 지급한다는 조건이었다. C사는 중개무역상을 통하여 합의한 계약에 따라 의류제품을 납기에 맞추어 선적하고 신용장에서 요구한 서류들을 준비해서 우리나라 모 은행에 제시하였다. 서류를 받아 본 우리나라의 은행은 대충 살펴보고는 이상이 없다고 판단해서 C사에게 매입대금을 지불하고 중국의 개설은행으로 서류를 보내면서 지급을 요청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일부 은행들에는 아직도 고쳐지지 않은 나쁜 관행이 남아 있는데, 그 매입은행도 그러한 관행으로 일을 처리했다가 큰 사고가 터진 것이다. 그 나쁜 관행이란 은행이 무역서류를 심사할 때 국제관행과 규칙을 정확하게 따져서 서류를 꼼꼼히 살피기보다 웬만한 것은 대충 넘어간다는 것이다. 은행이 더 중요하게 따지는 것은 문제가 되면 수출상으로부터 매입대금의 회수가능성이다. 즉, 일단 부도가 나면 지불했던 매입대금을 법적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 수출업체가 제공한 담보와 변제능력이 있는 지부터 생각하는 것이다.
매입은행은 C사가 중소기업이긴 하지만 그런 데로 굴러가는 업체이고, 더구나 부도를 대비하여 수출보험에도 들었기에 안심하고 매입대금을 먼저 지불하면서도 서류심사를 소홀하게 했던 것이다. 만약 부도가 나면 돌려받을 수 있으니 귀찮게 따지지 말고 대충 넘어가자는 잘못된 관행이다. 서류가 잘못되어 부도가 나면 수출업체야 어떻게 되건 무조건 대금만 돌려받으면 된다는 은행의 생각은 도덕적 해이이며 궁극적으로는 은행 자신에게도 그 업보가 돌아간다.
결국 C사와 우리나라 매입은행에게 불행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서류를 받아 본 중국의 개설은행은 서류상 하자를 이유로 지급을 거절하고 서류를 반송해 왔다. 중국의 은행이 지적한 서류상의 하자는 (1) 서류에 기재된 수출업체의 주소지가 “Hong Cheon"인데 이것은 신용장의 수출업체 주소지인 ”Hong Chun"과 다르다는 것과 (2) 보험서류에 기재된 화물도착지가 “Xinjiang, China"인데 이것은 신용장의 화물도착지인 ”Xingang, China"와 다르다는 것이었다. C사는 이것 때문에 34만8천 달러의 수출대금이 부도가 났다는 황당한 소식을 듣고 기가 막혔다. 수출상의 명의인 “Hong Cheon"과 ”Hong Chun"은 한국말로 하면 다 같은 “홍천”이라는 지명인데 영문으로는 둘 다 쓰고 있으므로 하자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XINGANG”을 “XINJIANG”으로 기재한 것은 서류를 작성할 때 중국의 신강항을 염두에 둔 것인데 보험회사 직원이 발음되는 데로 작성하다가 발생한 단순한 타이핑 실수이므로 하자가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매입은행도 같은 취지의 항변을 중국의 개설은행으로 보냈지만 결국 부도처리 되었고 매입은행은 당연한 듯이 C사에게 매입대금과 이자를 합쳐 4억5천만 원의 환불을 요구했다. 요즈음 의류를 수출해서 몇 푼이 남는다고, 4억5천만 원을 생으로 손해보고 버틸 수 있는 중소기업이 몇이나 되겠는가? C사는 대금을 되돌려주지 못하고 차일피일 미루자 은행은 담보를 확보하려고 C사의 자산에 대한 법적조치에 나섰고, 결국 C사는 두 손 들고 폐업하고 말았다.
고스란히 손실을 떠안게 된 매입은행은 수출보험공사를 상대로 보험금을 청구하였다, 그러나 수출보험공사는 매입은행의 불성실한 서류취급이 부도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므로 보험금 지급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배상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매입은행은 수출보험공사를 상대로 제소하였지만 2년여의 재판 끝에 결국 은행의 패소로 막을 내렸다. 재판부도 은행이 국제관행에 따른 서류심사의무를 태만히 하여 하자있는 서류를 매입한 책임이 있음을 인정했다.
영문무역서류를 작성할 때 그까짓 것 대충 만들어도 물건만 잘 만들어 주면 대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이 한 수출업체를 파산까지 시키고 거래은행도 부실을 안게 되었다. 설사 그 은행이 공기업인 수출보험공사에서 보험금을 받아 손실을 보전 받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우리 국민의 혈세로서 채워지는 공적자금이다.
기업은 질 좋은 물건을 만들어 수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영문계약서, 영문신용장, 영문서류를 대충대충 처리하다가는 언젠가 한번 큰 사고가 터진다. 은행들도 마찬가지이지만 기업체들이 무역서류취급 전문직원의 확보와 양성에 투자하는 비용을 아끼다가는 반드시 후회하는 일이 벌어진다. 국제수준에 맞고 영문서류를 완벽하게 이해하는 무역전문가를 시급히 키워서 더 이상의 황당하고 억울한(?) 무역서류사고를 막아야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