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연대지역 작전경과
춘천지역의 제7연대는 6월 25일 오전까지 소대별 거점위주의 방어를 실시하고 오후에 소양강 남안의 주진지로 철수하여 방어를 실시하였고, 적은 수차에 걸쳐 소양강 도하를 시도하였으나 제7연대의 살상지대 화력에 피해를 입었다.
제7연대 2대대(김종수소령)는 역도하하여 도하준비중인 적을 기습공격하는 등 전과를 올렸고(특공대 30명으로), 대전차중대 2소대장 심일소위는 결사대를 조직하여 자원한 5명과 함께 휘발유병과 수류탄으로 적 자주포 2대를 파괴하여 그 장면을 보던 아군 장병들의 사기를 크게 진작시켰다.
사단에서는 원주에 위치한 제19연대를 춘천으로 증원시켰으며, 제7연대는 6월 25일 야간 도하준비중이던 적 1개연대에 대하여 포병화력을 집중 운용하여 거의 전멸시키는 등 효과적인 방어를 실시하였다. 이때 적은 북한군 2사단의 공격이 아 제7연대의 효과적인 방어로 지연되자 자은리까지 진출했던 제7사단의 2개연대와 전차 1개중대(10대)를 차출하여, 양구로 역행군시켜 춘천지역으로 투입하였다.
6월 27일 07:00시경 춘천지역 제7연대 지휘소를 방문한 제6사단장은 북한군 제7사단 2개연대와 전차 10대의 춘천지역 투입사실을 모르는채, 춘천지역은 아 제7연대가 효과적으로 방어하고 있기 때문에 별 문제가 없을 것이나, 홍천이 피탈된다면 사단주력의 후방이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춘천지역에 증원한 제19연대를 철수시켜 홍천북방에 제2연대에 이어 제1방어진지를 편성토록 지시하였다. 결과적으로 북한군 제2군단 주력이 집중된 정면에서 오히려 병력을 차출하는 격이 되었다.
6월 27일 05:00부터 춘천 전면은 강력한 새로운 적과 전투를 하게 되었다. 동일 11:00부터 적은 도하를 시도하였으나 아군의 정확한 포사격에 의해 실패하였으며 독전에 휘몰린 적은 희생을 무릅쓰고 계속적인 압력을 가하였다. 이렇듯 전투는 치열하였으며, 사단장은 춘천을 고수하겠다고 시민에게 약속한 임무를 완수하려고 노력하였다. 전투가 한창 치열할 때 기적적으로 사단장은 육군본부와 전화가 통하게 되었는데, 육본에서는 전선의 균형을 위해 “사단장 판단에 의하여 중앙선을 따라 지연전을 실시하라”는 명령을 받게 되었다. 이리하여 제 7연대는 가래모기로 도하한 적의 돌파구가 축차적으로 확대됨으로써 17:00에 춘천을 철수하여, 28일 12:00에 원창고개로 철수하였다
【보충1】북한군 제2사단의 공격계획과 막대한 피해 발생원인
【보충2】제7연대지역 작전경과 세부내용 보기
- '50년 6월 25일 북한군 제2사단 我 제7연대 정면 공격
- 공격준비 사격 : 화천-춘천 도로상의 모진교 남쪽 집중
- 적의 주공 화천-신포-춘천 축선 지향 판단, 예비 1대대를 소양강 북쪽 164고지 배치
- 38선 남쪽 300미터 지점의 250미터, 폭 4미터의 모진교는 화천-춘천 축선의 관문, 적의 감제하에 있어 폭약장전 불가로 모진교 파괴 실패 (주 : 다리 남쪽 600미터 지점에 기계화부대의 도섭 가능한 곳이 있기 때문에 모진교를 폭파하지 않더라도 기계화부대가 춘천 방향으로 진출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음. 실례로 남침 이틀전에 민간인을 강제로 모진교를 통해 월남시켜 아군이 설치한 지뢰에 의해 폭사하는 사건이 발생하였음.)→제7연대 방어 정면 붕괴→09:00경 적은 춘천이 보이는 역골, 지내리까지 진출후 일단 멈춤(주 : 모진교는 춘천 북쪽 13km에 위치한 교량으로서 모진장(북한강)에 놓여 있다 하여 모진교 또는 38도선에 있다 하여 38교라고도 불리웠다. 1965년 춘천댐의 완공으로 수몰되었다.)※ 참고 : 한국전쟁기간중 교량폭파 관련자료모음
- 제7연대 전방부대는 계획된 주저항선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 점령
- 춘천 동북쪽에 배치된 제2대대(김종수 소령 )는 도하 준비에 광분하고 있는 적을 특공대 30명으로 역도하여 기습으로 많은 전과 획득
- 옥산포로 철수한 57미리 대전차 중대 제 2소대장(심 일 소위)는 옥산포 도로옆 소나무 숲에서 적의 SU-76 자주포를 근접 유인하여 대전차포와 화염병과 수류탄으로 결사대 5명과 함께 2대 파괴 ( 창군이래 최초로 태극무공 훈장 수여 )
- 적은 역골-소양교간의 6km에 달하는 개활지를 밀집대형으로 접근
※ 주#1 : 당시 제7연대장 임부택 중령에 의하면, "북한군은 단숨에 춘천을 점령하려는 듯 전술원칙 따위는 전혀 무시한 채 역골-춘천간 6km에 이르는 개활지를 밀집대형으로 저돌적으로 약진해 왔다. 적의 대형은 전투대형이라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지형지물을 이용하지 않고 대오를 맞추어 앞으로 치달아 왔다...... 소위 사단기동훈련까지 마쳤다는 이청송 소장의 북한군 제2사단이 왜 이렇듯 엉터리 전술로 일관했는지 알 수는 없다. 그들은 기습의 달성으로 큰 저항없이 38도선을 돌파하였기 때문에 국군의 전투력을 너무 깔 본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옥산포전투에서 적은 전술의 기본원칙도 제대로 적용할 줄 몰랐으며, 제각기 행동하는 상태였고, 보전포 협동작전 또한 미숙하기 짝이 없었다."라고 했다.(출처 : 임부택,「낙동강에서 초산까지」서울, 그루터기, 1996, p.100)
※ 주#2 : 제7연대 1대대의 공세행동에 대하여 당시 대대장 김종수 소령은 "그들은 이미 사단전투훈련까지 마쳤다고 하는데 보전협동이 형편없었다. 우리를 얏보고 공격하였겠지만 애당초 그들은 지형지물을 도외시 하였고 전술 따위는 없었다. 우리가 1개 연대로 1개 사단을 이길 수 있었던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으며 우리는 이길 수 있는 전투를 하였다."라고 하였다.
- 소양강 북쪽 옥산포 남쪽 진지의 제16포병대대는 직접조준사격으로 포격 집중하여 적은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완전 노출된 상태로 정면 파상 공격 반복
- 사단은 원주에 위치한 제19연대를 춘천 정면으로 증원하여 2대대를 소양강 북쪽 우두산 배치
※ 주(제19연대의 유병화) : 25일 외출외박을 나가지 않은 3대대는 차량으로, 1, 2대대는 기차편으로 원주에서 청량리를 경유하여 춘천으로 출발
- 3대대 : 탄약 1기수, 건빵 3일분 휴대하고 연대 차량 20대(이중 5대는 영월광업소 징발)로 이동. 25일 18:00시경 북한강을 건너 금산리 일대 218고지에 배치하였으나, 접적이 없었음
- 2대대 : 26일 06:00 열차편으로 춘천도착후 우두산에 배치, 오후에 7연대 1대대 철수를 엄호후 소양강 남안으로 철수
- 야간에 도하를 위해 집결중인 적 1개 연대규모를 가래모기 보리밭 일대에서 포병의 기습적인 사격(거의 전멸)과 보병의 추격(도주한자:극소수에 불과)으로 적을 섬멸
- 사단장은 방어정면 축소시기가 되었다고 판단아래 26일밤 소양강 북쪽의 전 부대를 소양강 남안의 최후 저지선으로 조정 배치
- 이때 공병 중대장이 사단 계획에 따라 소양강 폭파건의,사단장 단지 교량위에 장애물만 설치 할 것을 지시(주 : 서울 지역 전투 상황 불확실, 17연대가 해주에 돌입 했다는 소식을 듣고 차후 반격시 사용을 고려)(참고 : 심문과 방송 보도내용
)
- 사단장은 적 2개 연대가 춘천으로 전환된 것을 모르고 홍천을 적이 장악하면 사단 주력의 후방이 차단될 것을 우려하여 춘천지역에서 제19연대를 전용(춘천 →홍천)
※ 춘천은 적 제 2군단의 집중된 주력앞에 오히려 병력을 차출하는 결과 초래.
※ 주 : 제7연대장은 사단에 건의하여 제19연대 2개 중대를 배속받고, 연대본부 행정요원, 춘천일대 각종 지원부대(공병 1개 중대, 병참/병기근무대)를 통합하여 혼성 1개 대대를 편성하고 경리장교 김양호 대위로 하여금 이를 지휘하여 제19연대 1, 2대대 지역을 담당하도록 하였다.(출처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제3권("춘천-홍천전투", p.286), 1970년.)
- 제6사단의 춘천 철수 상황
- 27일 새벽부터 아 제 7연대는 강력한 적의공격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동일 11:00경 적의 도하부대를 군의 정확한 포사격으로 저지하였으나 적은 계속 압력 가중
- 육본의 지시 의거 제7연대는 17:00경 춘천에서 철수하여 원창고개에서 방어(주 : 육본명령은 "사단장 판단에 따라 중앙선 방향으로 내려 오면서 지연전 실시"하라는 것임)
- 제2, 19연대 :제 2연대는 19연대의 증원에 힘입어 28일 오전 큰말고개의 S자 굴곡 지점에서 제19연대의 육탄 11용사와 함께, 전차 및 자주포 10대를 노획 및 파괴하는 전과를 올렸음.
- 29일 사단은 이전투의 최후 보루이자 요충지인 홍천을 끝까지 지켜 장비 및 병력의 안전한 철수를 위하여 주력하는 한편, 큰말고개/원창고개에서 지연전을 실시하면서 적에게 큰 타격을 주고 홍천 이남으로 철수
- 적은 이 작전의 실패로 제 2군단장과 양계 사단장이 경질 되었으며 제7사단은 명칭마저 제12사단으로 변경 되었고 이 전투이후 我 제 7연대를 “춘천 바우”라 호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