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페스티벌 오! 광주-브랜드공연축제
푸른연극마을 ‘사평역’
2012. 07.11(수) 14: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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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보라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곽재구의 ‘사평역’ 중에서.
무대 위 대합실은 푸른빛과 그윽한 붉은빛, 가로등의 희면서도 노란 파스텔 톤의 배경이다. 대합실 밖으로는 하얀 송이 눈이 내리고 매표소 위의 시계는 웬일인지 멈춰있다. 시간이 멈춘 곳, 현실에 없는 ‘사평역’에서 사람들은 막차를 기다리고 있다. 이 사람들은 누구일까.
이 연극의 보이지 않는 해설자인 역장과 해소병에 걸린 노인이 대합실 의자에서 장기를 두고 있다. 그 뒤의 의자에는 한 사내가 벌레처럼 웅크리고 엎드려 있다. 철로변 의자에는 기타를 든 여자가 있다. 그녀는 음유시인처럼 극 전체의 분위기를 아프게, 때로는 그리움으로, 때로는 희망을 노래한다. 그리고 출산을 앞둔 베트남여자와 그녀의 모자라지만 착한 남편, 서울 영등포시 월세방에 딸아이를 남겨두고 산골 오지까지 약을 팔러 온 약장수 남자, 남광주역 장터에서 건어물을 파는 아낙, 예전에는 사모님이었던 보따리 옷장사, 팔십년 오월의 진압군으로 마침내 자살해버린 남자의 여자, 여자는 술집을 전전하다가 결국 고향까지 내려왔는데 포주는 그 여자를 잡으러 산골까지 온 것이다. 그리고 여자의 늙은 어머니는 딸이 화장품회사에 다닌 줄로 알고 있었다.
극중 사건이라면 인간미가 조금은 남아있는 포주와 여자와의 실랑이, 출산을 앞둔 베트남여자의 진통 등, 우리 삶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을 잠깐 엿볼 수 있는 정도다.
시간이 흐르면 극중 인물들은 임산부의 진통으로 한 마음이 되는데, 어느 순간 들려오는 기차소리를 듣고 모두 자신의 짐을 챙기기에 바쁘다.
그러나 계단을 허겁지겁 올라가 막차를 타려했던 사람들은 허탕을 친다. 그 기차는 특급열차였다. 특급열차를 보낸 허망함을 달래려는 막차인생의 쓸쓸함. 그들은 오히려 한 잔의 술과 춤과 노래로 극중 무대를 경쾌하게 이끌어낸다. 이 유쾌한 반전으로 관객들은 왁자하게 웃고 연기자들은 춤추고 노래한다. 한바탕의 떠들썩한 열기로 극중 대합실은 후끈해진다. 그러다 또다시 임산부의 진통이 시작되고, 반사적으로 사람들은 해산을 돕기 위해 안절부절못한다. 영화 속의 슬로우모션으로 느리게 연기하는 사람들, 시간은 흘러가지만 (그러나 대합실의 시계는 멈춰있었다.)또 흘러가지 않고 멈춰있었다(관객석에서 가끔 시계를 보았다. 시계바늘은 움직이지 않았다.)
사평역 대합실에서 나누는 그들의 대화는 기막히게 우울한 사연이지만 그리 무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치고 고단한 삶의 무게를 가진 사람들은 막차를 기다리는 지루함을 어떻게 견딜까. 그들은 막차가 오지 않음에도 불평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시간동안 건어물 아줌마가 보따리에서 꺼내준 북어를 안주 삼아 술도 마시고, 약장수 남자의 춤과 노래로 어울리며 가라앉은 분위기를 경쾌하게 만든다. 대합실에서 만난 그들 삶이 칙칙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연극 ‘사평역’이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인가. 가난한 그들은 따로국밥이 아닌 모듬비빔밥이었다. 그들은 해산을 앞둔 여자의 진통을 몰라라 하지 않았고, 포주에게 당하는 여자의 늙은 어머니를 비웃지도, 모른 척하지도 않았다. 대합실의 춥고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난롯불을 따뜻이 지피는 역장과 기침병이 있는 노인은 라면 한 가닥이라도 나눠먹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제 삶에만 고개 처박는 인생이 아니라 서로의 삶에 눈길을 돌려 같이 맞장구 쳐주며, 이야기를 들어주며, 임산부 여자의 진통에 동참하였고, 술 한 잔씩 돌려 마시며 춤추고 어울렸다. 극중 음악 송대관의 '네 박자' 인생이었다. ‘한구절 한고비 꺾고 넘을 때/ 우리네 사연을 담는 울고 웃는 인생사/ 연극 같은 세상사/ 세상사 모두가 네박자 쿵짝’. 결국 인생의 아름다움이란 ‘쿵짝쿵짝’ 모두 함께하는 그 정겨움에 있는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막차는 오지 않았다. 또 한 번의 특급열차가 지나갔고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겼다. (여전히 매표소의 시계는 멈춰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막차가 도착했다. 모두 자신의 길을 가기 위해 막차에 올랐다. 그리고 다음날 대합실에는 새로운 손님이 찾아왔다. 그들도 막차를 기다리는 팍팍한 인생이었다.
‘사평역’ 바깥의 현대인들 역시 고단한 일상에 지친 삶이다. 지하철 안에서 각자 스마트폰을 들고서 끊임없이 소통을 시도하는 외로운 사람들이다. 아예 타인의 고통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사람들 같지만 그들도 ‘사평역’ 대합실에서처럼 만남과 이별에 웃고 우는 삶이다. 그 아픈 사연이 비단 나 혼자의 것이라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원작인 ‘사평역’의 느낌과는 연극은 흥을 조화롭게 가미해 우리의 삶에 희망이 있음을 암시한다. 마치 강강술래처럼 손을 잡는다. 그래야만 모두들 ‘막차’를 기다리며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줄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연극 ‘사평역’은 곽재구의 시 ‘사평역’을 원작으로 한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을 오성완이 연출해 24회 광주연극제의 최우수작품상·연출상·신인연기상·무대미술상과 전국연극제의 은상·연기상·무대미술상을 수상했다.
소설가 김현주
컬쳐인 root@hona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