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 수정헌법 제14조는 미국헌법에서 꽤 길면서도 중요한 조항이다. 수정헌법 제14조의 끝부분에는 적법절차조항과 평등조항 같은 중요한 조항들이 자리잡고 있어 이 규정은 더더욱 빛을 발한다. 그 중에서 평등조항은 “어떤 주(州)도 그 관할권내에 있는 주민에 대해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평등조항은 노예제도 등을 둘러싼 미국 남부와 북부의 정치적·경제적 대립과 갈등이 폭발해 1861년부터 1865년까지 5년간 벌어진 미국의 남북전쟁 직후에 헌법에 들어왔다. 1865년 개정을 통해 헌법에 들어온 노예제 폐지에 관한 수정헌법 제13조, 흑인의 투표권 보장에 관한 1870년의 수정헌법 제15조와 더불어 1868년에 미국헌법에 입성한 것이 바로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조항인 것이다. 이 세 조항들의 주된 목적은 미국사회에서 대대로 부당한 차별을 받던 흑인들에 대해 자유와 평등보호를 특별히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1896년에 선고된 Plessy v. Ferguson판결(163 US 537)은 당시의 미국 연방대법원이 이 새로운 흑인인권 규정들의 적용에 어떤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예였다.
남북전쟁 이후인 1890년에 제정된 루이지애나주 주법(州法)은 주내(州內)에서 승객을 운송하는 철도회사에게 백인전용의 백인 열차칸과 흑인 등 유색인종을 실어나르는 유색인종 열차칸을 따로 만듦으로서 백인과 유색인종에 대해 같은 요금에 ‘분리하되 평등한(separate but equal)’ 열차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또한 흑인이 백인 열차칸에 탑승한다거나 백인이 유색인종 열차칸에 자리를 잡는 경우처럼, 자신의 소속 인종에 맞지 않는 열차칸에 탑승한 승객에 대해서는 차장이 인종에 맞는 열차칸으로 옮겨 가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승객이 이에 불응시 체포하고 벌금이나 구류로 처벌까지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이러한 주법에 대해 흑인 민권운동가들 주도로 여러 번, 여러 곳에서 다양한 형태의 시민불복종운동이 전개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플래시는 7/8은 백인피를 1/8은 흑인피를 가지고 있으면서 피부색이 하얀 혼혈인이었다. 그는 백인 열차칸에 앉아 있다가 적발되어 차장으로부터 유색인종 열차칸으로 옮겨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는 차장의 명령을 거부했고 이를 이유로 체포되고 기소되었다. 일심에서 유죄판결이 내려지자 그는 열차칸의 인종분리는 흑인들에게 오명을 씌우고 그들의 마음에 ‘열등의 징표’(badge of inferiority)를 각인하므로 이러한 인종분리가 수정헌법 제13조와 제14조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면서 항소했다. 일심법원은 플래시의 이런 주장에 대해, 열차칸 인종분리를 규정한 루이지애나 주법은 루이지애나주의 관습, 관행, 전통에 근거해 생각해 봤을 때 주경찰권(州警察權)의 합리적 행사의 하나일 뿐이라는 이유에서 플래시에게 유죄를 선고했었다.
연방대법원에서 다수의견의 집필은 브라운 대법관이 맡았다. 그에 의해 집필된 다수의견은, 만약 열차칸의 시설이 ‘분리하되 평등한’ 시설이라면 인종을 분리해 수용해도 평등조항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백인 열차칸과 유색인종 열차칸을 구분하고 있던 루이지애나 주법을 합헌이라고 판시함으로써 평등권 침해가 아니라는 면죄부를 주었다.
다수의견은 인종에 따른 열차칸 분리수용을 주경찰권의 합헌적이고 유효한 행사로 보았다. 수정헌법 제14조의 평등조항 위반인가의 여부는 ‘합리적 차별’인가 여부에 달려있고, 다시 합리적 차별인가의 판단을 위해서는 주내의 관습, 관행, 전통이 고려되어야 하며, 만약 인종에 따른 열차칸 분리가 주내에서 확립된 관습, 관행, 전통이라면 그러한 분리는 공공의 평화와 질서유지를 위해 계속 요구되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 즉, 불합리한 차별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실제로 이런 분리수용을 지지하는 각종 법원판결들이 그 전에 계속해서 내려진 바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따라서 인종에 따른 열차칸 분리수용은 수정헌법 제13조가 금하는 ‘노예제’의 징표도 아니고 수정헌법 제14조에 위배되지도 않는다고 보면서 플래시에 대한 하급심의 유죄판결을 인용했다.
이 판결은 만장일치의 합헌판결이 아니었고 유명한 할렌(Harlan) 대법관의 반대의견이 첨부된 판결이었다. 그의 반대의견은 간명한 문장으로 유명하고 그 후의 후속판결들에서 많이 논의된 것으로도 이름이 높다. 할렌 대법관은 인종에 따른 열차칸 분리수용을 내용으로 하는 이 루이지애나 주법이 다른 사람들과 자유롭게 교섭하려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한다고 결론지었다. 흑인들은 종속적이거나 열등하지 않고 그들도 미국시민이며 미국시민이 누리는 모든 특권을 누릴 자격을 부여받고 있는데, 열차칸의 강제된 분리수용은 이러한 특권과 자유들을 침해한다는 것이었다.
이 플래시판결은 ‘분리하되 평등의 원칙’을 확립시킨 유명한 판결로서, 다음에 곧 보게 될 1954년의 Brown판결에 의해 뒤집어질 때까지 58년의 긴 세월동안 굳건한 선판례로서 미국사회 전체를 지배했다. 그러나, 이 판결은 남북전쟁 직후에 연방 수정헌법 제14조 등에 들어온 각종 인종차별 금지조항들을 공허하게 만든 보수적 판결로 많은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필자는 이 판결이 평등조항 위배여부를 따지면서 합리적 차별인가를 판단함에 있어 당시 루이지애나주 내의 관습, 관행 즉 관습헌법을 고려한 점에 주목하고자 한다. 원래 평등이라는 개념 자체가 합리적 이유있는 차별은 용인하고 합리적 이유없는 차별만 평등권 침해라 보기 때문에 ‘차별의 합리성’ 여부가 평등판단의 관건이다. 그리고 이 차별의 합리성은 그 자체가 또 다른 가치판단을 필요로 하면서 시대의 평균적인 정의감정에 비추어 결정되는 가변적 기준이다. 즉, 똑같은 법조문이라 하더라도 시대와 사회에 따라 평등권 침해로 인한 위헌·합헌 여부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차별의 합리성이라는 평등판단 기준의 가변성과 추상성 때문에 미국법원들은 평등심사에 이 플래시판결처럼 그 사회의 관습과 관행이라는 관습헌법을 곧잘 인용하곤 했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 헌법재판소가 신행정수도건설을 위한 특별법 위헌결정에서 관습헌법을 위헌의 근거로 든 것이 다른 나라 법원에 그 전례(前例)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 헌법재판소와 미국 연방대법원의 관습헌법 사용방식에는 명백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연방 수정헌법 제14조라는 성문헌법 규정의 해석과 판단에 그 시대와 사회의 관습이라는 관습헌법을 부수적·보조적 근거로 사용해 제14조 평등조항의 의미를 구체화하는데 관습헌법을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 헌법재판소는 대한민국의 수도는 서울이라는 관습헌법을 재판관들이 성문헌법 밖에서 만들어내어 이를 위헌의 유일한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이다. 우리 헌법재판소는 관습헌법을 헌법재판의 조연이 아니라 단독주연의 새로운 스타로 부상시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