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 책 출판의 홍수 속에서 아동문학은 길을 잃었다. 무엇보다도 길잡이 구실을 해온 리얼리즘 아동문학이 그렇다. 이를 뒷받침이라도 하듯, 근래에 이루어진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의 두 차례 연수 제목은 ‘어린이문학에 문학이 있는가’와 ‘어린이문학에 평론이 있는가’였다. 오죽 답답했으면 그랬으랴 싶지만, 불신과 자탄의 뉘앙스를 지닌 제목부터가 스스로 출구 없음을 드러내주는 것 같다. 그보다 ‘어린이문학에 어린이가 있는가’ 하고 물었다면 어땠을까?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는 리얼리즘 아동문학의 흐름을 주도해온 단체다. 지금 이곳의 ‘어린이’를 놓치고 과거의 잣대를 붙들고 있는 한, 길을 잃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고 여겨진다. 리얼리즘은 비(非)리얼리즘과 선을 긋는 것으로 자기를 증명해왔는데, 어느새 리얼리즘과 비리얼리즘을 구분할 수 없게끔 상황이 전개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 시대가 맞이한 아동문학의 르네상스는 사회 제도의 변화와 맞물린 현상이다. 최남선의 ‘소년’을 거쳐 방정환의 ‘어린이’에 와서 출발의 한 획을 그은 한국 아동문학은 오랫동안 독자적인 발전이 제약되었다. 식민지와 민족분단이라는 불구의 근대 역사를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도 한국 아동문학은 나름대로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우리 아이들 곁에 존재해왔다. 여기서 ‘우리 아이들’은 ‘일하는 아이들’이고, ‘독특한 성격’은 ‘리얼리즘’을 가리킨다. 물론 다른 얼굴의 아동문학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수난의 역사로 점철돼온 이 땅에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도 ‘일하는 아이들’을 위한 ‘리얼리즘 아동문학’이었다. 졸고, 「한국아동문학의 어제와 오늘」(『아동문학과 비평정신』, 창작과비평사, 2001) 참조.
리얼리즘 아동문학의 자리에서 올바른 정신을 지켜내고 이어가는 일은 아직 끝나지 않은 숙제다. 불행한 역사 때문에 흩어지고 숨겨진 창작의 성과를 온전히 되살려내고, 사람들의 상식을 지배하는 그릇된 논리를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역사는 그 일만을 위해 멈춰 서주지 않는다. 이 땅의 아이들은 수난의 역사를 과거와 다르게 겪고 있다. 요즘 아이들의 삶은 ‘수난’이라는 말과 어울리지도 않는다. 과거의 아이들이 공부하고 싶어도 일 때문에 그리할 수 없었다면, 지금의 아이들은 일하고 싶어도 공부 때문에 그리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일과 공부는 아이들의 놀이마저 빼앗아갔다. 일의 모습이 달라지듯이 놀이의 모습도 달라지고 있다. ‘수난의 역사’와 ‘일하는 아이들’로 요약되는 리얼리즘 아동문학은 과거와 다른 새로운 역사를 살아가는 아이들의 등장으로 해서 변화를 요구받아 왔다. 무엇을 얼마큼 어떻게 바꿔야 할 것인가?
원하든 원치 않든, 아동문학을 성립시킨 근대적 의미의 아동은 어른과 구분되는 독자적인 삶을 보장하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일하는 아이들’이 보편의 현실인 한에서 근대적 의미의 아동은 없거나 불완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아이들의 삶과 어른의 삶이 분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 아동문학은 전개되었고, 여기에 가장 올바르게 대응한 결과가 리얼리즘 아동문학이었다. 이때의 ‘리얼리즘’은 일반 문학의 그것을 거의 그대로 가져다 쓴 것이지 아동문학 고유의 원리로서 내용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우화 성격의 의인동화를 제외한다면 한국 아동문학의 대표작들은 ‘동화’라는 저만의 속성을 따로 구현한다기보다 그냥 ‘아동용 소설’이라 함직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독자를 한층 더 의식하고 씌어지는 아동문학의 특성에서 볼 때, 불구의 근대 역사를 살면서 독자 연령이 사뭇 높아진 점도 우리 아동문학의 성격을 색다르게 규정해온 요인이다. 일제시대의 아동잡지인 『어린이』 『신소년』 『별나라』의 주된 독자는 십대 중․후반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오랫동안 유아․유년 대상의 문학은 발달할 수 없었다. 부모가 책을 함께 읽어주는 가정을 찾아보기 힘들었고 유치원 취학률은 매우 낮았다. 문학작품을 제대로 소화할 수 있으려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예외적인 아이들은 대개 세계명작동화집이나 전래동화집으로 아동문학을 경험했다. 형편이 이러하니 창작동화는 주로 10세 이상을 향해 있었고, 이는 초자연보다 현실의 비중이 큰 창작경향으로 이어졌다. 이때까지는 일반 문학의 리얼리즘 잣대만으로 그리 부족함을 몰라도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지난 1990년대는 근대제도를 실질적으로 떠받치는 이른바 시민사회가 비로소 자리잡기 시작한 때다. 도시 중산층과 핵가족을 기반으로 하는 시민사회 문화는 아이들의 삶을 크게 바꿔놓았고 아동문학에 대해서도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요구하였다. 문화소비자로서의 학부모와 뱃속에서부터 문화를 경험하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속에서 어린이 책 출판 시장의 폭발은 예정된 것이었다. 우선 장르나 스타일의 불균형부터 빠르게 해소되고 있다. 그리하여 그림책과 동화에 대한 관심이 날로 높아지는 추세다. 독자 연령이 내려갈수록 초자연의 비중은 더 커진다. 아동문학의 초자연성은 넓은 의미에서 판타지로 분류되는데, 이는 리얼리즘의 상대어로도 쓰인다. 이럴 경우 초자연성 또는 판타지를 비(非)리얼리즘이라 할 수는 있을지언정 반(反)리얼리즘이라 할 수는 없다. 초자연성과 판타지는 유아․유년 심리의 한 반영이거나 현실의 은유로 성립하기 때문이다.
기법과 정신을 아우르는 리얼리즘 개념은 이제 과거의 용법대로라면 새로운 창작현실을 싸안지 못하고 혼동을 일으킬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동문학을 논하는 데 꼭 무슨 ‘주의’를 들먹여야 하느냐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지금까지 살핀 내용은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쓰느냐 마느냐와 관계없이 작품을 보는 데에서 하나의 관습으로 작용하는 어떤 원칙이나 기준을 가리킨다. 이 글에서 문제삼으려는 것도 리얼리즘이라는 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관습으로 작용하는 어떤 원칙이나 기준 같은 것이다.
나는 리얼리즘을 둘러싼 이런 문제점들 때문에, ‘삐노끼오’ 경향과 ‘꾸오레’ 경향이라는 틀로 우리 아동문학을 살펴보려 한 적이 있다. 이 구분은 캐릭터에 따른 것이다. 『삐노끼오의 모험』은 작가의 교훈적 의도보다는, 바깥 유혹을 못 이겨 늘 결심을 배반하고 모험을 즐기다가 또 돌아서서 속상해 하는 솔직하고도 자유분방한 삐노끼오의 성격이 아이들을 붙드는 힘이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는 위협도 사실은 즐거운 상상이다. 『꾸오레』(일명 ‘사랑의 학교’)는 고난극복의 영웅적인 주인공을 통해서 인내와 용기, 사랑과 헌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예의 등 사회생활의 덕성을 함양하려는 내용이다. 아주 일찍부터 우리나라에 번역 소개되었는데, 서민성과 민족주의가 두드러진다.
‘삐노끼오’가 동화이고 판타지라면, ‘꾸오레’는 소년소설이고 리얼리즘이다. 또 ‘삐노끼오’가 자유와 일탈의 상상력이라면, ‘꾸오레’는 덕성과 교훈의 메시지다. 그간의 우리 아동문학은 말할 것도 없이 '꾸오레' 경향이 기본이었다. 그렇다고 ‘삐노끼오’ 경향을 이단시하거나 더 열등한 것으로 여겨도 좋다는 것일까? 두 경향은 서로 다른 모습일지라도 아동문학이 함께 요구하는 것으로, 독자의 나이나 처지에 따라 강조점이 옮겨질 수는 있지만, 서로 밀쳐내는 관계로 바라볼 것은 아니다.
그럼 이 시대의 아동문학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달리 말해서 무엇을 과제로 삼는 것이 우리 아동문학을 살찌우는 길일까? ‘꾸오레’ 경향은 우리 작가들의 체질이 되어 있지만, 독자의 요구가 더욱 높아지고 있는 ‘삐노끼오’ 경향은 개척해야 하는 몫이 있다. 나는 이런 맥락에서 채인선 동화를 반겼다. 위기철, 김옥, 임정자 등의 동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들 동화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초자연성(환상 또는 공상)에 대해서는 비(非)리얼리즘이라고 규정하기보다, 역사의 층위를 달리해서 요구되는 리얼리즘의 갱신 또는 확장으로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문제를 둘러싸고 적지 않은 논란이 벌어졌다. 그럴 만하다. 동화의 초자연성 문제는 우리에게 무척 낯설고, 이렇다 할 평가기준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리얼리즘의 눈으로 사실동화 또는 소년소설의 현실성을 살피는 데에 익숙한 이들도 공상동화 또는 판타지의 현실성을 살피는 데에는 익숙지 못하다. 그렇다면 문학사적 의미에서 권정생 이후의 창작이 나타나기 시작했지만 이오덕 이후의 비평은 아직 없는 셈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최근에 이루어진 이른바 공상동화의 현실성을 둘러싼 평가는 극단에서 극단을 오가는 모습이다.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 안에서는 새로운 창작의 흐름을 옹호하는 비평에 대해 리얼리즘의 원칙을 내세워 마치 이단인양 단죄하였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단순이분법, 이를테면 역사의 층위를 달리하는 비(非)리얼리즘의 흐름을 과거에 리얼리즘과 마주 부딪혔던 반(反)리얼리즘의 흐름과 하나로 놓고 비판하는 식이었다. 비평을 떠받치는 힘은 참여의 정신, 그리고 대화의 정신이다. 그런데 문단에는 기묘한 침묵의 기류가 흐르고, 비평은 어느새 추문이 되어 버렸다. 비평의 추문은 비판과 매도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식 이하 또는 논리 이전의 평론들에서 비롯한다. 지난 한해 동안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의 대표논객인양 『어린이문학』에 활발하게 글을 발표한 이지호도 여기 포함되는데, 이 글은 지면 사정상 최근 비평의 주된 내용만 다루었지 비평의 논리(학)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았기에 이지호의 평론은 부득이 제외하였다.
앞서도 지적했듯이 아동문학의 역사를 살펴 올바른 전통을 세우는 일, 동시대 작품들의 성과를 살피고 가리면서 새로운 창작방향을 모색하는 일은 하나로 이어진 문제다. 이와 관련해서 다시 돌아보고 강조되어야 할 사항은 무엇인가?
2.유산과 전통에 대한 논의: 리얼리즘과 속류사회학주의
아동문학은 아동관과 문학관의 두 차원에서 논의가 이루어진다. ‘어린이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와 ‘문학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는 각각 다른 차원이지만 결국 하나로 이어져서 아동문학에 대한 관점을 만들어낸다. 리얼리즘은 일단 ‘문학을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에서 비롯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이 ‘어린이를 어떻게 볼 것이냐’의 문제와 제대로 이어질 때 비로소 아동문학의 리얼리즘으로 제 몫을 다할 수 있다.
리얼리즘의 눈으로 아동문학을 논한 것 가운데 이오덕의 1970-80년대 저서 이후 가장 널리 영향을 미치고 있는 책은 이재복의 『우리 동화 바로 읽기』(한길사, 1995)다. 이 책은 이른바 관제 아동문학이 유포한 분단시대의 지배관념을 뒤집어 보인 점에서 소중한 성과다. 이점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러나 졸고 「한국 아동문학이 창조한 주인공」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방정환의 「만년샤쓰」, 마해송의 「바위나리와 아기별」, 적파의 「꿀단지」 등을 살피는 대목에서는 일정한 편향이 드러난다. 이른바 ‘카프 리얼리즘’에서 충분히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작품을 사회의식 또는 이데올로기의 번역물로 바라보려는 이 시각은 사회성을 지나치게 앞세움으로써 오히려 삶의 진실과 현실의 구체성을 놓치는 수가 많다. 또한 독자의 나이가 더 어려지는 동화에서의 현실 반영이라든지 리얼리즘의 적용 수준 등에 대한 세심한 논의를 가로막는다.
일찍이 이원수는 동화와 소년소설의 차이를 놓치는 데에서 비롯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동화에서의 리얼리즘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를 확실히 이해한 바탕” 위에서 작품이 나와야 할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이원수, 「1970년의 아동문학 개관」(이원수아동문학전집 29권, 웅진, 1984).
이때 이원수가 주의를 돌린 것은 다름 아닌 리얼리즘 계열의 작가와 작품이었다.
과거의 우리 동화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을 도외시하고 있었거나 도피적 입장을 띠고 있었음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회복은 오늘의 동화 작가에게 주어진 하나의 숙명적 과제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현실의 회복이란 것을 소설적 측면에서 이해하려는 태도는 적어도 동화 작가에서는 현명하지 못한 일임을 깨닫지 않아서는 안 된다. 리얼리즘을 소설적 측면에서만 이해한 근거에서 거두어진 한 편의 작품은 이미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화는 아닌, 그것은 소설이 되고 만다. 이를 극복하려면, 동화의 본질적인 요소라 할 비현실적 요소, 즉 환상이며 상상이 건전하게 구사되어야 한다.(이원수, 같은 글, 259-60면)
리얼리즘의 자리에서 작품을 보는 이재복은, 「만년샤쓰」와 「꿀단지」를 평가하는 데에서 드러나듯 소년소설 쪽에서는 인물의 현실성을 놓치고 있고, 「바위나리와 아기별」을 평가하는 데에서 드러나듯 동화 쪽에서는 환상 이야기의 상징성을 놓치고 있다. 이는 교육문예창작회, 더 거슬러올라가서는 ‘카프 리얼리즘’의 작품 해석을 떠올린다. 나는 그 한계를 리얼리즘 논의의 용어를 빌려 ‘속류사회학주의’라 했다. 굳이 속류사회학주의라는 말을 써야 했느냐 하는 점에서 내 잘못을 인정하지만, 달은 놔두고 손가락에만 매달려 논의가 이루어진 사실도 문제였다.
속류사회학주의는 사회의식을 성급하게 독자에게 주입하려 드는 태도라는 점에서, 어린이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차원으로 와서 생각해볼 때, 아동문학의 오랜 병폐인 교훈주의와 통한다. 교훈주의는 작품의 주제 또는 작가의식이 진보적이냐 보수적이냐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윤동재는 내 글에서 속류사회학주의를 “리얼리즘의 변종”이라 하지 않고 “교훈주의의 변종”이라고 한 것이 “사실의 왜곡”이라고 비판했다. 윤동재, 「한국아동문학의 문제점과 나아갈 방향」(『한국문학평론』, 2001년 여름호).
이는 속류사회학주의의 문제점을 아동문학의 자리에서 해명해보려는 뜻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에서 비롯한 오해다. 속류사회학주의가 리얼리즘을 편향되게 이해한 결과로 나타난 것임은 내 글에 누구나 알 수 있게 서술되어 있지 않은가? 또한 윤동재는, 문학사회학의 연구방법론을 적용한다고 밝히고 쓴 졸고 「이원수 판타지 동화와 민족현실」에 대해, “판타지와 별 관련이 없는 당대 정치사회 현실과 문단 이야기들을 매우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 글이야말로 “속류사회학주의의 폐단을 보여주고 있는 글”이라고 되받았다. 위의 논문은 『숲속나라』의 문학사적 성과와 판타지로서의 한계를 밝히기 위해 쓴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원수 판타지’를 검토하기 위한 글이었지, ‘판타지 일반’을 검토하기 위한 글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서평자는, 해방기 정치사회 현실, 문단의 동향, 발표된 아동 잡지의 성격 등을 살피는 일이 글의 목적에 부합하는지 아닌지를 따졌어야 옳다. 실증을 도외시하는 우리 아동문학의 연구 풍토를 감안해서, 더욱이 정치적으로 민감했던 그 부분을 제대로 규명한 글이 하나도 없기에 자료조사에 대한 몫도 크겠거니 하고 일부러 자세하게 검토해둔 것이다.
만일에 『우리 동화 바로 읽기』가 1980년대에 나왔더라면 역사적인 배경을 고려할 여지가 좀더 커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1990년 전후의 교육문예창작회 논리를 거쳐 1990년대 중반에 나온 것이라 할 때는 좀 다르다. 1991년 교육문예창작회 여름 연수에서 발표된 권순긍의 「현실주의 동화론과 ‘삶의 동화운동’」란 글의 서두는 다음과 같다.
동화운동은 동화를 통하여 아이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운동이다.
이미 1920-1930년대에 KAPF의 아동문학부에 의해 그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1990년 이래로 교육문예창작회에서 그 중요성이 거론되었다. 이 글은 1990년 이래 교육문예창작회에서 전개되고 있는 ‘삶의 동화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기 위한 것이고 그 성과물들을 점검하기 위해 쓰여졌다.(권순긍, 『역사와 문학적 진실』, 살림터, 1997, 329면)
권순긍은 교육문예창작회의 ‘삶의 동화운동’이 참조하려는 카프 동화론의 계급성을 높이기 위해 방정환 동화론의 ‘초계급성’을 비판한다. 예컨대 방정환이 「새로 개척되는 동화에 관하여」(『개벽』, 1923.1)에서 “아동의 세계에 돌아가 마음의 순결을 빌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고 쓴 구절을 인용해 놓고, “당시가 민족의 탄압이 극심하던 식민지시대인데 이런 논리대로라면 모두가 순결한 동심으로 돌아가 역사의 횡포에 순응하자는 것”이라며 문제점을 짚는다. 방정환의 동화론이 아동문학 성립기의 산물임을 그냥 지나치고 있을 뿐더러 동화와 소년소설에 대한 구별도 분명하지 않은 이 글은, 일제시대 카프 비평의 오류를 벗어나지 못한 논리의 비약이 곳곳에 나타난다. 다음은 어떠한가?
방정환의 동화론은 그 뒤 창작동화의 이론적 기초가 되는바, 이는 당시의 현실을 왜곡하여 일제의 통치제도에 순응하고 민중들의 민족해방 의지를 약화시키는 역기능을 하고 있다. 또 아이들을 성인들과 고의적으로 구별하여 ‘영원한 아동성’의 신기루 속에 아동들을 가두어 일제의 식민지정책에 순응하게 하는 지침서 구실을 하기도 한다.
결국 방정환 동화론의 실체는 일제의 탄압 아래 신음하던 식민지시대에 어떤 민족의식도 용납하지 않고 오히려 민족해방 의지를 약화시키는 ‘극단적 유아성’인 것이다.(권순긍, 같은 곳)
이 대목은, 주인집 아기에 대한 증오를 드러낸 이원우의 「애 보는 법」을 “계급적인 적에 대한 증오”의 형상이라 높이 평가한 반면에, 방정환에 대해서는 “일제의 통치제도를 예찬” “조선 인민들의 민족해방투쟁을 반대” “일제와 민족반역자들의 종복” 등이라고 비판한 ‘카프 리얼리즘’을 닮아 있다. 송영, 「해방전의 조선 아동문학」, 『조선문학』 1956.8(이선영․김병민․김재용 편 『현대문학 비평자료집-이북편』 8권, 태학사 1994).
이런 논리가 힘을 발휘하는 동안, ‘삶의 동화운동’이 내세운 현실성은 작품 평가의 자리에서 때로 폭력성을 지닐 수밖에 없었다. 권순긍의 논리가 교육문예창작회의 성과물인 『우리 동화 바로 읽기』에 부분부분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한국 아동문학이 창조한 주인공」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다.
이재복은 속류사회학주의 개념 하나라도 제대로 짚어보자면서 카프, 교육문예창작회, 윤기현의 작품 가지고 다시 검토해볼 것을 요구했다. 이재복, 「올바른 정신의 옷을 입은 아동문학」(2001년 8월 한국글쓰기회 연수자료집). 이 글은 이오덕, 「어린이문학 무엇이 문제인가」(『문학의 길 교육의 길』, 소년한길, 2002)에도 전문이 인용(182-89쪽)되어 있다.
그런데 카프 작품은 겨레아동문학선집에 뽑혀 실린 것, 교육문예창작회 작품은 최근에 다시 골라내서 책으로 낼 예정인 것, 윤기현의 작품은 비교적 잘 알려진 것들을 들고 나왔다. 이렇게 성공했다고 평가되는 작품들을 가지고 속류사회학주의의 문제점을 짚어본다는 것은 참 난감한 일이다. 속류사회학주의는 문학의 사회성을 내세우다가 빠져들기 쉬운 편내용주의와 도식성의 문제, 특히 문학과 이데올로기를 단순하게 짝지어 보려는 경향이라고 이해하면 족하지 않을까?
운동이 일정한 궤도에 오르고 나면 도식에 기대려는 관성적인 ‘흐름’이 나타나기 쉬운데,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돌아보자는 것을 남의 일로 여겨야 할 까닭이 없다. 따라서 일정한 성취에 대한 평가를 전제로 해서 『우리 동화 바로 읽기』에 대해 ‘다시 읽기’를 시도한 것은 리얼리즘 아동문학 운동의 일환이지 대립은 아니었다. 이점은 리얼리즘 아동문학 운동을 다른 눈으로 비판해온 최지훈이 「한국 아동문학의 어제와 오늘」에 대해 격렬하게 반박하고 나온 사실을 통해서도 증명된다. 최지훈, 「지난 세기, 한국 아동문학이 잃은 것과 얻은 것」(『아동문학시대』 2000년 가을호).
그러나 나와 이재복 사이의 논쟁은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의 문제로 확대되었고, 윤기현은 나의 문제의식이 “이제까지의 역사발전에 진보적인 작품과 작가를 폄하하는 작업”이고 “기득권 세력들의 논리를 교묘하게 포장해서 대변”하는 것이라고 차이를 부풀렸다. 이오덕, 「어린이문학 무엇이 문제인가」에 전문이 인용(174-82쪽)된 졸고 「덧붙이는 말」 참조.
윤동재도 「한국 아동문학의 어제와 오늘」이 “가해와 피해의 관계를 뒤바꿔” 말하는 꼴이라고 보았다. 윤동재, 앞의 글.
윤동재는, “속류사회학주의는 (…) 일종의 소재주의로 기울면서 진부한 생활동화와 우화류를 남발하였고, 이것은 판타지를 비롯한 아동문학 고유의 양식 탐구를 가로막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고 말한 대목을 인용한 뒤에, “이러한 지적에 따르면, 한국 아동문학의 잘못이나 폐단이 온통 현실주의 아동문학에 있는 것 같다”면서 주어를 바꿔 놓았다. 이렇게 해서 나의 문제의식은 “리얼리즘 전통”과 “단절”하려는 것(윤기현), “시정신”을 버리고 “유희정신”으로 가려는 것(윤동재)으로 곡해되어 갔다. 이오덕, 윤기현, 윤동재의 대화 내용(이오덕, 위의 글, 242-3쪽 참조).
이오덕은 「어린이문학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으로, 최근 글쓰기연구회와 어린이문학협의회 연수에서 논란이 된 내용을 전후 사정과 함께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여기에는 글쓴이의 견해도 포함되어 있다. 이오덕은 내가 비판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했는데도 논란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뭐냐고 물었다. 아마 비판을 받아들인다는 내 말이 조금 다르게 이해된 것 같다. 나는 이오덕의 비판을 늘 근본의 문제로 인식해왔다. “어린이문학에서 글쓰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이 시대에 글쓰기로 살아가는 이들이 마땅히 지녀야 할 몸가짐이 어떻게 되어 있어야 하는가” “중심(中心), 정심(正心), 단심(丹心)이 있어야겠다”는 원로비평가의 말 앞에서 우선 부끄러움이 앞섰고, 다른 복잡한 사정에 따른 견해 차이는 나중 문제라고 여겼다. 누구나 얼른 이해할 수 있게 글을 쓰지 못하는 점, 오늘날 삶의 문제에 대해 확신이 서지 않은 채로 비평을 하고 있는 점, 이 두 가지가 나에 대한 비판의 가장 큰 줄기라고 판단했고, 스스로도 숙제라 여겨왔기에 두 말 않고 반성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한 이오덕의 견해만큼은 수긍하기 어렵다. 우선 잘못 읽은 곳이 만만치 않다. 이오덕은 내 글이 “현실주의라고 하는 그 작가들의 잘못만을 지적하면서, 순수문학 하는 사람들이 늘 주장하는 그런 말만을 힘주어 말해 놓았다”고 비판했다. 그런데 이 말의 근거가 되는 곳은 “20년대 카프문학 운동이라든지 80년대 민중문학 운동의 흐름에서 나온 작품들을 냉정히 검토해 보면 관념이나 치기가 앞선 것들이 꽤 된다”는 대목이었다. 또한 이오덕은 내 글이 “문학에서 ‘무엇을 쓰나’보다 ‘어떻게 쓰나’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고,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삶과 현실보다 ‘순수’라고 하는 쪽을 편들고 있다”고도 비판했다. 그런데 이 말의 근거가 되는 곳은 “내용이 형식보다 중요하다는 말만으로는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칠 수 있겠는가” 하는 대목이었다. 내 글의 한쪽 끄트머리를 지적하고서도 꼭 맞아떨어지는 비판이라 하기 어렵다.
혹시 내가 정말로 이오덕은 무시해도 좋다고 여기는 리얼리즘 아동문학 운동의 작은 문제를 필요 이상으로 확대해서 바라보는 것은 아닌가? 이에 대해서는 1990년대 이후 아동문학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상황 인식의 차이로 설명될 것이다. 역사는 단선으로 흐르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부터 장르의 불균등한 발전이 해소되는 과정은 근대제도의 내용을 갖추는 정도에 비례하는 현상이라고 앞서도 지적했거니와, 동화의 특성에 대한 더욱 적실한 이해와 함께 현실의 변화를 새롭게 인식해야 할 필요성도 생겨났다. 1990년대 이후의 창작현실은 1980년대까지의 그것과 크게 다르다. 동구권 변화에 따른 냉전체제의 종식과 더불어 지난 세기를 옭아맨 이념적 금기도 대폭 완화되었다. 외세와 민족분단의 문제라든지 가진 자의 횡포 때문에 헐벗고 굶주리는 민중의 삶을 그리는 일은, 1980년대라면 그런 소재만으로도 문학의 긴장을 불러일으켰지만, 그것이 금기가 아닌 시대에 와서는 소재가 곧바로 문학의 긴장이라든지 작가의식의 건강함을 보장해주는 것일 수 없었다. 오히려 어린이도서연구회와 같은 독서시민운동의 성과에 힘입어 그런 소재는 잘 팔리는 작품의 보증 또는 출판사가 선호하는 맞춤형 창작의 폐단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신춘문예의 동화 응모작품을 보더라도 그런 소재들은 넘쳐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나오면 실향의 아픔을 지녔거나 치매에 걸려 있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오면 실직 상태거나 이혼을 했고, 형제자매가 나오면 그 중 한 명은 장애인이고, 주인공 아이는 교실에서 왕따를 당하거나 고아이고……. ‘무엇을 쓰나’ 하는 것이 ‘어떻게 쓰나’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해서, 틀에 박힌 발상에 기대고 있는 작품들조차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3.새로운 창작경향에 대한 논의: 리얼리즘과 환상 또는 공상
아동문학의 유산과 전통을 둘러싼 관점의 차이는 새로운 창작경향을 둘러싼 관점의 차이로 해서 더욱 증폭된 면이 없지 않다. 이오덕이 내 글의 한쪽 끄트머리에 민감하게 반응한 까닭도 어느 정도는 이와 관련된다. 사실 이오덕의 평론집에서 가장 힘주어 비판한 것은 새로운 창작경향에 대해 적극성을 보인 김이구의 평론 「아동문학을 보는 시각-‘일하는 아이들’ 이후의 길」(『아침햇살』, 1998년 가을호)이다. 김이구의 논리와 내 글의 지향 사이에는 상당한 친연성이 있다. 물론 김이구와 나 사이에는 판단이 같은 부분도 있고 다른 부분도 있다. 김이구의 평론에서 내가 공감하는 부분은 아동문학에 관한 내용이고, 공감하기 힘든 부분은 글쓰기교육에 관한 내용이다. 김이구의 평론은 글쓰기교육이 보여준 아동관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아동문학의 진로를 모색하는 것처럼 되어 있어서 좀 혼란스럽다. 그러나 아이들의 삶이 바뀌고 있는 만큼 아동문학도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는 기본취지는 분명하게 읽힌다.
이오덕은 ‘일하는 아이들’이 글쓰기교육의 개념이지 아동문학의 개념이 아닌데도 김이구가 이를 혼동했다면서 글쓰기교육에 초점을 두고 김이구의 평론을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이오덕, 「‘일하는 아이들’은 버려야 할 관념인가」(같은 책).
하지만 김이구가 인용한 「아동문학의 서민성」에 나오는 구절을 봐도 그렇고, 글쓰기교육과 아동문학이 모두 ‘아이들’을 의식하고 성립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일하는 아이들’을 한 시대의 명제로 여기면서 아동문학을 논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없다. 김이구는 “오늘날 아이들은 대개 아이로서 사육된다”면서 근대 제도의 본질과 문제점을 들어 보인 다음에, 이처럼 ‘일하는 아이’와 대비되는 ‘아이가 된 아이’가 등장한 시대에 와서 아동문학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탐색한다. 그리고는 채인선 동화의 한 특징인 ‘역할 바꾸기’를 하나의 방법으로서 주목한다.
채인선 동화는 삶의 공간이 엄격히 분리되어버린 ‘근대’의 아이를 반영한다. 근대세계, 도시세계의 아이는 보육공간에서, 교육공간에서, 놀이공간에서, 그 외의 거의 모든 공간에서 어른들과 나뉘어 사육된다. 아이들끼리도 연령에 따라 놀이방으로, 유치원으로, 초등학교로, 중학교로 나뉘어 생활한다. 사실 가족 성원 모두가 집이라는 공간에서 함께 만난다 해도 일에서, 정서에서, 문화생활에서 뿔뿔이 갈라져 살아야만 하는 것이 오늘날의 삶의 양식이다. 채인선 동화의 역할 바꾸기는 이렇게 아이로서 살아가는 아이가 세계와 만나는 방식이다.(김이구, 앞의 글, 102면)
김이구는 아동문학이 하나의 제도로서 존재하지만 “제도를 뒤흔들고 갱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다고 보고, 이오덕이 ‘일하는 아이들’을 발견한 것은 그런 실천의 좋은 본보기라고 평가했다. 그럼 채인선의 ‘역할 바꾸기’에 대해서는 어떤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가? 이와 관련해서는 “타자와의 공존의 논리를 바탕으로” “세계를 이해하는 한 방식”임이 지적되었다. 그런데 이런 의미 부여는 어딘지 모르게 소극적이다. 오랜 독재정치 사회에서 참여와 합의를 존중하는 시민사회로 막 옮겨가는 과정임을 고려한다면 ‘공존’과 ‘이해’의 의미도 결코 가벼운 것은 아니지만, 글의 결론으로 갈수록 적응의 뉘앙스가 짙어진다. 이오덕은 김이구 평론의 결론에서 타협의 혐의를 부각시키면서 강도 높은 비판을 가하였다. 무엇보다 시대현실을 보는 눈이 다르고, 채인선 동화에 대한 평가를 전혀 달리하기 때문이다. 김이구는, 채인선이 역할 바꾸기에 환상을 동원함으로써 작품을 더욱 동화답게 만들고 있으며, 현실과 환상을 능숙하게 결합시키는 데 그 뛰어남이 있다고 보았는데, 이오덕은 정반대의 견해를 드러낸다. 이오덕이 보기에 「우리 모두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와 「학교에 간 할머니」는 “한갓 우스개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들이 읽으면서 정말 이렇게 네 식구들이 저마다 하는 일을 바꾸어 보고, 또 할머니가 1학년 아이가 되어 학교에 가서 그런 일을 겪었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세상천지에 있을 수 없다. 그런 아이가 있다면 그건 정신장애 어린이일 것이고, 그런 아이는 이런 글을 읽지도 못한다.(이오덕, 앞의 글, 116면)
동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공상’이나 ‘난센스’의 요소를 평가하는 이오덕의 잣대는 무엇일까? 원리라고 여길 만한 객관기준은 찾아보기 힘들다. 김이구는 퍽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공상을 이오덕은 아주 억지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하고 있을 따름이다. 임정자 동화를 좋지 않게 평가한 다른 글에서도 비판의 논리는 거의 주관 감정으로 읽힌다. 이를테면 「낙지가 보낸 선물」 「어두운 계단에서 도깨비가」 「꽁꽁별에서 온 어머니」 등에 대해, “허황한 공상이고 괴상하고 엉뚱한 이야기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는다면서 강한 어조로 비판하고 있다. 이오덕, 「허황하고 괴상한 이야기들」(『어린이책 이야기』, 소년한길, 2002) 참조.
무엇이 허황한 공상과 그렇지 않은 공상을 구별하게 해주는가? 만일 이오덕처럼 작품을 해석한다면, 『학교에 간 사자』나 『말광량이 삐삐』 같은 동화들도 “허황한 공상이고 괴상하고 엉뚱한 이야기”라고 얼마든지 비판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여기서 잠시 이오덕의 장르 인식에 대해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리얼리즘 아동문학의 이론을 확립한 이원수와 이오덕의 글에서 장르 명칭과 대상 작품들은 차이가 나고 있는데, 이것이 작품 평가에서도 작용하고 있다. 이원수는 아동문학의 산문을 동화와 소년소설로 구분했고 이원수, 「아동문학 입문」(전집 28권).
, 이오덕은 동화를 공상동화와 생활동화로 구분했다. 이오덕,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어린이를 지키는 문학』, 백산서당, 1984).
주의할 것은 이오덕의 동화 개념이 소년소설을 포함하는 아동문학의 산문 일반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이오덕의 ‘공상동화’ 개념이 문제로 된다. 이원수는 동화의 특징을 소년소설과 구분해서 "공상적 초자연적 세계"라고 되풀이 강조하면서 내용으로는 공상동화(메르헨)에 가깝게 서술하였다. 반면에 이오덕은 ‘공상동화’를 환상이나 상상력과 혼동되지 않는 ‘장르로서의 판타지’로 인식할 것을 요구했다. 이오덕, 「아동문학의 서민성」(『시정신과 유희정신』, 창작과비평사, 1977).
그리고 판타지를 메르헨과 구분했다. 곧 “메르헨은 초자연을 처음부터 당연한 것으로 얘기하지만, 판타지는 현실과 비현실을 확실하게 나누어, 현실에서 비현실로 넘어갈 때나 비현실에서 현실로 넘어올 때는 거기에 필연성을 느껴지도록 구성을 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이오덕,「판타지와 리얼리티」(『어린이를 지키는 문학』).
이오덕은 메르헨에서 창작메르헨으로, 또 거기서 판타지로 발전해 나오는 과정을 들어 보이며, 판타지는 “19세기 후반의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고 “리얼한 수법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대개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이오덕의 ‘공상동화’ 개념은 이원수가 말하는 동화의 독자보다 나이가 많은 소년소설의 독자에게 알맞은 장편 판타지를 가리킨다.
이오덕의 판타지 탐구는 ‘생활동화’(소년소설) 편에서 리얼리티가 결여된 ‘공상동화’(동화) 작품들을 비판하기 위한 준거로 행해진 것이었지, 실제 판타지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나왔기 때문은 아니었다. 이오덕은 독자의 나이에 따라 “유아동화, 유년동화, 소년(소녀)동화”를 구분하기도 했다. 이오덕, 「동화를 어떻게 쓸 것인가?」.
하지만 이런 명칭에서는 장르를 변별케 하는 형식적 자질이 드러나지 않는다. 이원수의 장르론에는 이오덕이 말하는 판타지가 빠져 있고, 이오덕의 장르론에는 이원수가 말하는 동화가 빠져 있다. 결국, 이원수와 이오덕의 장르론을 한 자리로 모아보면, 초자연의 세계를 포함하는 작품에서도 동화(메르헨, 공상동화)와 판타지를 구분하지 않을 수 없는데, 왜냐면 장르 명칭이야 어떻든 각각에 상응하는 작품들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원수는 동화가 소년소설에 비해 나이가 적은 어린이를 독자로 해서 성립하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공상적 초자연적 세계”를 담고 있지 않은 사실동화(생활동화)에 대해 그리 탐탁지 않게 생각했고, 따라서 굳이 동화 앞에 공상이라는 수식어를 둘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이태준과 현덕의 동화처럼 소년소설과 뚜렷이 구별되는 사실동화를 인정한다면, 동화를 다시 공상동화와 사실동화로 나누어 바라볼 필요가 생긴다. 이때, 아동문학의 소설은 다시 판타지와 소년소설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공상동화와 판타지의 차이는 동화와 소설의 차이다. 예컨대 필리파 피어스의 『학교에 간 사자』가 공상동화라면,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는 판타지다. 공상동화는 자연법칙에 대한 이해가 없는 나이의 독자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옛이야기처럼 현실과 초자연의 세계에 구분이 없지만, 판타지는 자연법칙에 대한 이해를 지닌 나이의 독자를 상대로 하기 때문에 초자연의 세계를 포함하더라도 소설에 상응하는 리얼리티가 요구되며, 이에 따라 대개는 현실과 초자연의 세계가 구분되어 있다. 공상동화의 주인공은 초자연의 세계를 거의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지만, 판타지의 주인공은 초자연의 세계를 만났을 때 흔히는 놀라고 머뭇거리고 주저한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졸고, 「동화와 판타지」(『어린이문학』, 2001년 7월호)를 참고하기 바란다.
동화는 낮은 연령의 독자, 판타지는 높은 연령의 독자에 각각 대응한다. 이런 기준에서 볼 때, 이원수는 판타지의 특성을 주목하지 않은 데에 그치지만, 이오덕은 동화의 특성을 주목하지 않은 데에서 더 나아가 판타지에 ‘이르지 못한’―장편 판타지의 리얼리티를 갖추지 못한―“공상적 초자연적 세계”를 그린 짤막한 동화(공상동화)를 다소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당시 동화라고 나온 작품들이 실제 독자의 나이와 처지에 맞지 않는 유치한 내용이거나 소년소설(생활동화)로 나온 작품들보다 동심주의에 더 많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진다. 이오덕의 장르론에서 유년물에 대한 관심이 소년물보다 낮은 까닭도 독자 연령이 상대적으로 높았던 한국 아동문학의 리얼리즘 특성과 관련된다.
소년소설과 구별돼야 마땅한 동화에서 공상이 차지하는 몫은 자못 크다. 소설이 현실에 대한 구체 경험, 곧 주인공이 세상과 부딪치는 모습을 ‘선택과 책임의 인과관계’ 속에서 사실적으로 그려내는 것임에 비해, 책임을 몰라도 좋은 나이의 아이들을 상대로 하는 동화는 현실의 반영이 흔히는 소망 실현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옛이야기의 해피엔딩은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공상은 바로 소망의 세계다. 견디기 힘든 현실의 탈출구이자 스스로 불러낸 초월의 세계로, 낙천성과 유희본능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것이 어린이의 전유물인양 여겨지는 까닭은 현실에 대한 책임을 얼마큼 져야 하느냐에 대한 잣대를 어른과 다르게 적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이에게 공상은 도피가 아니다. 견디기 힘든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 공상에 몸을 맡기고 싶어하는 심정은 어린이가 어린이인 이유가 된다.
이오덕이 “한갓 우스개 이야기”요 “허황한 공상”이라고 비판한 채인선과 임정자 동화는 현실의 인물이 스스럼없이 초자연의 세계와 만나는 서사구조다. 여기서 초자연의 세계는 외부의 억압에 저항하는 내면의 힘이 분출한 공상이다. 채인선과 임정자 동화에도 나름대로 ‘이 시대 아이들’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서로 소통이 가로막힌 식구들, 이래라 저래라 잔소리를 퍼부어 대고 윽박지르며 심지어 때리기까지 하는 어른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집과 학교와 학원 사이를 뱅뱅 도는 아이들…….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아이들의 조각난 일상생활을 사실 그대로 담아낸다는 건 그 자체로 큰 의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채인선과 임정자는 현실의 부대낌이 아이들의 내면을 통과하면서 굴절되어 나온 ‘소망’의 세계를 그려 보인다. 식구들끼리 바꿔 살고 싶은 대로 다른 사람이 되어 한바탕 소동을 벌이는 이야기(「우리 모두 다른 사람이 되었어요」), 잔소리꾼 할머니가 손녀의 하루일과를 몸소 겪어보고 힘들어서 몸져눕는 이야기(「학교에 간 할머니」), 어머니에게 학대받는 아이가 낙지의 목숨을 동정한 댓가로 빨판이 달린 신발을 선물 받고 폭력을 피해 다니는 이야기(「낙지가 보낸 선물」), 말이 통하지 않는 외계인 같은 어머니에게 기억상자를 되찾아주기 위해 꽁꽁별로 여행을 다녀오는 이야기(「꽁꽁별에서 온 어머니」), 소란을 피웠다고 집 밖으로 쫓겨 나온 아이가 아파트 계단에서 튀어나온 도깨비들과 뛰어 노는 이야기(「어두운 계단에서 도깨비가」)……. 이러한 동화를 읽으면서 아이들은 해방감을 느끼는 한편으로, 자기 안에 숨쉬는 자유의 감각을 일깨우고, 지금보다 더 나은 세계에 대한 지향을 품게 된다. 아이들의 공상을 대변하는 일을 단순히 ‘배아픈데 빨간 약 발라주는 것’이라고 여겨서는 곤란하다. 『한밤중 톰의 정원에서』 『사자왕 형제의 모험』 『끝없는 이야기』 같은 판타지의 명작을 쓴 필리파 피어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미하엘 엔데 같은 작가들도 유년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학교에 간 사자』 『엄지소년 닐스』 『마법의 설탕 두 조각』 같은 동화를 썼다. 이것들도 채인선과 임정자 동화처럼 아이들이 일상에서 겪는 억압과 결핍을 공상의 세계에서 해결하는 짧은 이야기들이다.
물론 도피의 동화, 허황한 공상을 그린 동화도 많다. 동화의 환상성을 강조해온 하나의 흐름을 보여주는 자료집으로 김요섭이 책임편집한 『환상과 현실』(아동문학사상 1, 보진제, 1970)이란 책이 있는데, 여기 논리라고 하는 것은 환상․공상․판타지․동심 따위의 말들을 가닥 없이 늘어놓은 관념의 토로에 가깝고(김요섭의 「환상공학」과 김영일의 「생활동화 속의 환상세계」), 수록동화 세 편도 조잡한 상상력과 뜬구름 잡기 식의 내용들이다. 이를테면, 성탄절을 맞이해서 바람들이 서로 의논해가며 좋은 일을 하고 다닌다든지(김요섭의 「바람이 만드는 눈물」), 양계장에서 일하는 아이가 언덕 저편의 황금빛 집에 대해 선망한다든지(최효섭, 「황금의 집」), 한밤중에 소년이 혼자 바닷가에서 별나라를 공상하다가 뒷산 나무에 올라가 장대로 별을 딴다든지(권용철, 「별성」) 하는 작품이 환상을 지닌 동화로 소개되어 있다. 지금도 신춘문예 동화 응모작품들 가운데에는 별님․달님․해님․구름․바람․꽃씨․시냇물․무지개 따위 동심주의의 상투적인 소재를 의인화해서 교훈을 전하고자 억지스런 상상력을 구사하는 작품들, 어른의 퇴행 심리나 감상 취향을 고백하는 데 지나지 않는 막연한 몽상의 분위기를 피워내는 작품들이 숱하다.
공상의 표현, 곧 규범에서의 이탈은 자연의 본성에 바탕을 두어야 할 것이며, 작품의 통일성을 이루는 내적 리얼리티가 확보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점과 관련해서 채인선과 임정자 동화는 만족스러운 편이다. 내가 보기에 이들 동화의 한계는, 모험의 요소가 모자라서 공상이라고 해도 여전히 일상의 테두리에 머물러 있고, 장차 아이들이 대결해야 할 인생의 더 큰 문제를 제시하는 이야기의 힘이 약하다는 것이다. 김이구가 채인선 동화를 ‘공존’과 ‘이해’라는 적응의 차원으로 바라본 것은, 이런 제한된 작가의식 때문이 아닐까 여겨진다. 그렇지만 동화의 전통이 취약한 우리 형편에서는 작가의식이나 작품의 주제로 비평의 시선을 제한할 게 아니라, 작가의 의도를 얼마든지 뛰어넘을 수 있고 전복의 잠재력을 지닌 환상과 공상의 방법론을 더 주목해 보는 게 어떨까 싶다. 환상과 공상은 김이구의 표현을 빌릴 때, “제도를 뒤흔들고 갱신”하는 일의 수단과 자극이 될 수 있다.
기법과 스타일의 새로움을 어느 수준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작품에 대한 의미 부여와 평가도 달라진다. 그렇다면 이오덕이 채인선과 임정자 동화에 대해서 김이구와 정반대로 평가하는 이유가 기법과 스타일의 문제일 것인가? 좀더 근본적인 다른 이유는 없을까? 억압된 심리의 분방한 펼침으로 해서 난센스의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공상동화의 경우, 사건 전개의 현실성에 대한 판단은 어느 정도 평자의 직관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과거에 이오덕이 긍정의 눈으로 바라본 공상동화는 대개 의인동화인데 이원수, 권정생, 이현주 작품들이다. 여기에서 한 가지 공통점이 발견되고 있으니, 그것은 도시문명을 비판하고 자연과 농촌을 지향하는 태도다. 이점에 관한 한, 이오덕의 비평에는 타협을 모르는 근본주의자의 논리가 깔려 있다.
현대의 공상동화는 주인공 아이가 생활에서 받은 억압을 공상으로 분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이 많다. 이럴 경우 공상동화는 삶다운 삶, 또는 모험을 잃어버린 도시문명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외부현실에 대한 경험이, 기복이 뚜렷한 서사구조를 만들어내기 힘들게끔 획일화․왜소화할수록 이야기는 내면의 영역으로 파고든다. 현대의 공상동화는 말하자면 모더니즘의 한 표현인 셈인데, 심리주의 소설에서처럼 주인공의 내면을 그대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뚜렷한 서사구조를 지닌 이야기로 바꿔낸다는 점이 다르다. 리얼리즘의 흐름에서 현대의 공상동화를 낯설게 여기는 까닭도 이런 모더니티의 속성과 관련될 것이다. 예전처럼 삶이 생존권 차원에 걸려 있던 시절에는 아이들의 일상현실을 좌우하는 힘이 사회현실의 문제들과 구체적으로 닿아 있었다. 아이들이라 해서 어른과 동떨어진 사회현실을 경험하지 않았다. 이렇게 일상현실과 사회현실이 한 몸을 이루는 곳에서는 리얼리즘이 총체성을 구현하는 왕도였다. 그러나 오늘의 아이들은 일상현실이란 게 소비 차원으로 국한되어 아주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에도 크게 반응한다. 예컨대 먹느냐 굶느냐의 문제는 무엇을 먹느냐의 문제로, 옷과 신발과 가방을 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는 어떤 옷과 신발과 가방을 사느냐의 문제로 바뀌었다. 현실의 부대낌이 이렇듯 사소한 것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아이들이 겪는 심리적 갈등도 따라서 작아졌다고 할 수는 없다.
헐벗고 굶주리던 ‘일하는 아이들’이 소비 주체가 된 것은 어느 면으로 다행한 일이겠으나, 인간의 이기심이 자연을 고갈시키면서 아이들의 미래를 빼앗고 있는 건 문제겠다. 어른들한테는 과거의 불행에 대한 보상심리 같은 것이 크게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과 자발성의 문제를 끌어안은 새로운 삶의 질서는 오히려 ‘이후’ 세대가 주체적으로 해결할 때 더욱 현실성을 띠게 될 것이다. 인터넷을 생활화함에 따라 아이와 어른의 분리 현상이 또 다른 차원에서 극복되고 있다는 흥미로운 얘기를 김경연에게 들었다. 비단 아이와 어른의 분리 현상뿐이랴. 혈연, 지연, 학연 따위 우리 사회의 오랜 병폐가 인터넷 세대에 와서 빠른 속도로 해결되는 모습을 2002년의 월드컵과 대통령선거는 보여주었다. 세대가 내려갈수록 인터넷 체험의 잠재력은 커질 것이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이 과연 ‘일하는 아이들’인가?
나는 지금도 30년 전이나 50년 전이나 다름없이, 우리 아이들과 우리 겨레를 살리는 길은, 일과 놀이와 공부가 하나로 된 삶을 어릴 때부터 즐기도록 하는 데 있다고 믿고 있다.(『문학의 길 교육의 길』, 5면)
일하는 아이들은 죽어 버린 관념이 아니고 엄연히 살아 있는 실체다.(같은 책, 144면)
첫 번째 인용문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두 번째 인용문은 누구도 선뜻 동의할 수 없는 모호한 내용이다. ‘실체’라는 말이 어쩔 수 없이 일할 수밖에 없는 극소수 아이들을 가리키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이건 목표지향의 신념체계를 드러내는 말이 된다. 이오덕은 일과 자연에서 멀어진 이 시대 아이들의 현실을 전면 부정하는 신념의 자리에 서서 문제를 풀어간다. 그렇기 때문에 일과 자연에서 멀어진 도시 아이들의 일상을 ‘무기력한’ 공상으로 풀어간 채인선과 임정자 동화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동화를 대하는 이오덕의 잣대는 ‘일하는 아이들’에 대한 신념체계다. 또 농촌공동체로의 지향이다. 이오덕의 비판은 근본적이고 총체적인 문제의식이기 때문에 글마다 분명하고 시원스럽다. 그런데 ‘현실의 아이들’ 또는 ‘아이들의 현실’은 어디로 간 것일까? 두 번째 인용문을 나는 이렇게 바꿔 쓸 수도 있다고 본다. “일하는 아이들은 보편의 현실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개인의 신념이다.” 리얼리즘에서 중요한 것은 신념 이전에 현실이다. 현실과 이상의 긴장관계를 속 편하게 이상으로 해소해 버리는 순간, 리얼리즘은 아이디얼리즘으로 증발한다.
4.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비평은 작품(text)을 여러 관계들의 맥락(context)에서 독해하는 일이다. 이건 해석의 다원성과는 다른 문제다. 맥락과 더불어 작품의 상대적이고 객관적인 자리매김이 가능해진다. 평론문 또한 마찬가지다. 비평에 대한 비평, 곧 평론에 대한 비평적 독서는 그것이 나왔던 전후좌우의 맥락을 중요하게 고려해야 한다. 김이구가 이오덕의 비평을 독해하는 가운데 ‘일하는 아이들’을 ‘시대의 발견’이라고 말한 것도 맥락을 중요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일하는 아이들’이라는 말에는 따옴표를 쳐야 하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특정한 계기에 특정한 문맥으로 쓰였던 역사적 개념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와 짝을 이루는 ‘유희정신’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오덕은 ‘시정신과 유희정신’이라는 말을 ‘리얼리즘과 반리얼리즘(동심주의)’으로 정식화했다. 이것 역시 시대의 산물이다. ‘유희정신’에 관한 이오덕의 용법은 사전적 의미와도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유희정신’에 따옴표를 치되 그 사전적 의미만은 따로 호출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안이한 작가정신과 현실도피로 의미가 부여된 ‘유희정신’을 따옴표로 묶는 대신에, 리얼리즘과 스스럼없이 뒤섞일 수 있는 건강한 놀이정신을 풀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놀이정신이라고 하면 별 문제가 없는데도 유희정신이라고 하면 부정의 뉘앙스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유희정신’에 발목 잡혀서 놀이정신을 풀어놓지 못하는 동안, 우리 아동문학은 ‘삐노끼오’ 경향에 눈길조차 주기 어려웠다. 역사적인 맥락에서 마땅히 감수했어야 할 불편함이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대성을 핵심으로 삼는 비평에서 ‘유희정신’의 개념을 다시 조정하지 않고 쓴다면, 이제는 불편함의 차원이 아니라, 우리 아동문학의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일과 놀이가 하나인 삶이라 할 때도 실상은 서로 기대고 있는 삶의 두 측면이 아닐까한다. 일이 의무의 성격이라면, 놀이는 권리의 성격이다. 다수 서민의 삶이 생산자이기만 하고 소비자가 못되었던, 그리하여 생존권 차원에서 삶이 문제로 되었던 시대에는 아이들 역시 자신의 권리를 유보해야 했다. 말하자면 ‘일하는 아이들’은 헌신과 희생이 더 요구되던 시대의 산물이다. 이럴 때 ‘즐거움’의 요소는 아무래도 둘째 문제가 된다. 하지만 아이들의 표정 변화에 무심한 채 우리 아동문학은 너무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으로 굳어지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헌신과 희생에 대한 요구, 그리고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 때문에, 정작 자신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아이들이 통속적인 ‘명랑동화’나 단순한 전자오락물로 달려가는 것은 아닌지?
이번 이야기는 아이들이 재미있게 읽으라고 조금 익살을 떨어보았습니다. 늑대 할머니의 원수 갚기는 어떻게 끝날까요?(권정생, 『밥데기 죽데기』 머리말, 바오로딸, 1999)
‘한눈파는 즐거움’을 모르고 사는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 ‘독서의 즐거움’이란 원래 성실한 인간에 대한 ‘한눈팔기의 권유’가 아닐까?
안타깝게도 현대는 ‘한눈팔기의 사상’보다 ‘근면 성실의 사상’이 활개치는 시대이며, 인간을 비좁은 상자 속에 틀어넣고 그것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짙은 시대이다. 왜 우리는 지칠 대로 지친 어른들의 세계로 그토록 서둘러 어린이들을 끌어들이려 하는 것일까.(우에노 료 지음, 햇살과나무꾼 옮김, 『현대 어린이문학』, 사계절, 2002, 205면)
1990년대 들어서면서 ‘발상의 전환, 전복, 도발, 탈주, 위반, 해체, 일탈’ 따위의 말들이 부쩍 눈에 띄는데, 여기에서도 나름대로 시대정신을 읽을 수 있다. 시대정신의 표현으로서 현대 아동문학은 동시대 아이들이 호흡하는 문화양식과 주고받는 관계에 있어야 마땅하다. 오늘날 아이들이 맺고 있는 문화양식은 확실히 과거와 차이가 난다. 그 동안 본의 아니게 억제되고 주변부로 여겨지던 것들 속에서 건강한 요소들을 불러오는 일은 우리 시대 작가와 비평가의 임무다. 환상, 공상, 난센스, 패러디, 유머 등등 ‘삐노끼오’의 경향으로 통하는 자유분방함과 일탈의 상상력이 우리 아동문학에는 너무 빈약하다. 나는 본디 민중의 것이고 아이들의 속성 자체인 ‘놀이정신’을 오늘의 시점에서 재평가하고 적극 확장해나감으로써 우리 아동문학에 걸린 문제를 푸는 한 단서를 마련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놀이정신’은 바흐찐 서사이론의 핵심이 되는 ‘축제문화’(카니발과 다성성)라든지, 일본의 비평가 우에노 료가 ‘헌신’의 발상과 대조시켜 의미를 부여한 ‘즐거움’의 발상을 떠올려주는 것이기도 해서 아동문학의 주요 개념으로 이론화하는 데 별 무리는 없다. 사실 ‘놀이정신’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라곤 없는 누구한테나 익숙한 개념이다. 하지만 이 개념을 시대의 요청과 더불어 탄력 있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적용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새로운 눈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일하는 아이들’(리얼리즘)과 ‘유희정신’(반리얼리즘)을 동시에 극복하는 눈이다. 본디 일과 놀이는 하나여야 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진실성이 없어 현실도피로 전락한 동심주의의 빈 껍질뿐인 말장난과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 시대의 ‘놀이정신’은 복안(複眼)의 지혜를 필요로 한다. 이른바 ‘기우뚱한 균형’의 어려움은 아동문학이라고 해서 예외가 아니다.
우리가 관점을 조금 달리한다면 과거에 무심코 지나친 것들이 새로운 얼굴로 다가올 것이다. 발상의 전환은 기법과 스타일의 변화를 가져온다. 나는 최근의 반전평화 운동에서 보게 된 두 개의 표정을 통해 기법과 스타일이란 게 단순히 형식의 문제가 아님을 알았다. 두 개의 표정이란 ‘정보 전달’의 발상으로 움직이는 흐름과 ‘자기 표현’의 발상으로 움직이는 흐름을 가리킨다. 대중의 참여가 쉽고 훨씬 호소력이 있는 것은 ‘자기 표현’의 발상으로 움직이는 흐름이었다. 나름대로 준비한 소도구와 분장들은 그 자체로 반전평화의 몸짓이기에, 거기에서 반전평화의 이념 또한 한껏 발산되고 있었다. 이 흐름은 의무라기보다 권리였고, 일이라기보다 놀이였다. 아니, 한쪽이 의무와 일로 편향되었다면, 다른 한쪽은 의무와 권리, 일과 놀이가 한 몸이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군사문화가 지배했던 과거에는 이런 새로운 문화양식이 뿌리내릴 자리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평화를 폭력적으로 전한다든지, 자유를 억압적으로 전한다는 자기모순을 정당화하기 힘들다. 요컨대 ‘방법’을 고민해야 할 때인 것이다.
채인선 동화는 이런 문제에 대한 시금석이라고 보인다. 내가 알기로 채인선 동화 가운데 가장 많은 이들이 이질감을 느낀 작품은 「그 도마뱀 친구가 뜨개질을 하게 된 사연」(『그 도마뱀 친구가 뜨개질을 하게 된 사연』, 창작과비평사, 1999)이었다. 태평양 한가운데 떠있는 열대의 섬, 심심해서 쓰레기통이나 뒤지고 사는 도마뱀에게 뜨개질을 가르쳐주게 된 사연을 전하는 이 짤막한 작품에서 무슨 주제의식 같은 걸 찾으려 들자면 별 소용에 닿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아무런 주제의식도 찾아볼 수 없는 이런 동화가 왜 씌어졌는지 모르겠다는 반응과, 도마뱀이 심심하다는 게 도대체 말이 안 될 뿐더러 더욱이 옷이 필요 없는 도마뱀에게 ‘유용성’을 들이대면서 뜨개질을 가르치려 드는 작가의식이 의심스럽다는 반응이 나오곤 했다. 이 작품은 선명하게 다가오는 열대의 이국 풍경과, 조금 우스꽝스럽게 행동하지만 그래서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커다란 도마뱀의 이미지가 거의 전부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제목에서 벌써 호기심을 느끼고 이야기를 따라 작품 내용을 즐기게 된다. 일상을 떠난 자리에서 맛보는 이 즐거움엔 그 이상의 의미가 없는 걸까? 자연의 심성을 불러일으킨다거나 다른 세계와 친숙해진다는 것은 나이가 적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짤막한 동화로서 충분한 보상이라고 생각한다. 주제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는 반응은 설교형 동화에 익숙한 탓이고, 작가의식을 의심하는 것은 동화를 현실논리로 바꾸어가면서 읽는 습관에 매인 탓이다. 동화의 상상력은 곧잘 난센스와 만나는데, 옷이 필요 없는 도마뱀이 뜨개질을 하니까 독자에게 흥미를 주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동화가 되지도 않았으리라고 바꿔 생각할 수 있다. 나는 이 작품을 읽은 아이들이 ‘유용성’의 포로가 될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지 않는다. 도마뱀에게 뜨개질은 놀이나 다름없다는 걸 아이들은 다 안다. 그러므로 아이들이 도마뱀의 뜨개질에서 느끼게 되는 것은 일탈의 상상력, 다름 아닌 자유의 감각일 것이다.
「바다에 떨어진 모자」는 이와 연작을 이루는 작품이다.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는, 도마뱀에게 뜨개질을 가르쳐준 아이가 배를 타고 돌아오는 도중에 바다로 뛰어내린 아이의 모자다. 휴가를 즐기기로 결심한 모자는 ‘일부러’ 태평양 한가운데로 떨어진다. 여기서 ‘일부러’라는 말에 유의해야 하는데, 왜냐면 사람 많은 서울을 떠올리고 머리가 핑핑 돌 지경에서 ‘휴가’를 즐기기로 한 것이 줄거리를 이끄는 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내용은 모자의 바다 여행이다. 햇빛과 바람과 파도, 밤하늘과 별, 소낙비, 물고기들……. 아이들은 모자와 함께 출렁이면서 자기 내면에서 자연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바다 한복판에서 외로움을 느끼게 될 즈음 모자는 야자나무 섬 해변에 가 닿게 되고 뜨거운 모래밭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있는 도마뱀과 만난다. 모자가 필요했던 도마뱀의 머리에 앉게 된 모자는 더없이 행복해진다. 천연덕스럽게 전개되는 내용이고 유쾌한 공상이다. 같은 동화집의 다른 이야기들도 자연의 생명이 서로 ‘차이’를 극복하고 똑같은 무게로 살아가는 내용들이다. 채인선의 공상은 뒤죽박죽인 것 같아도 아이들 마음과 자연의 질서에 가깝기 때문에, 그 느낌이 자유롭고 편안하다. 일탈의 상상력이고, 놀이와 즐거움의 세계다.
환상이나 공상은 현실도피의 위험이 있는 반대급부로 현실 너머의 세상을 보게 하는 힘이 있다. 현실의 규제, 곧 근대의 시간이나 공간에 대한 관념에서도 자유롭다. 『삼촌과 함께 자전거 타기』(재미마주, 1998)는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뒤덮인 도시의 공간에서 자전거를 타고 시간을 가로질러 과거의 오솔길과 시냇물을 경험하고 오는 이야기다. 현실은 삼촌과 함께 자전거를 타고 달리면서 삼촌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듣는 것이지만, 자연스럽게 공상을 도입함으로써 작품의 줄거리를 새롭게 새겨 넣을 수 있었다. 아동문학은 단순성의 원리에서 출발하는데, 여기에 일탈의 상상력이 보태지면, 현실의 모순을 분명하게 드러내면서 왜소화에 저항하는 수단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늘이고 줄이고 바꾸고 뒤집고 건너뛰는’ 과장과 비약을 적극 활용한 작품들이 요즘에는 더 눈에 띈다. 이를테면 허은순의 「솔숲마을 이야기」(『솔숲마을 이야기』, 창작과비평사, 2002)는 한적한 ‘솔숲마을’이 어떻게 ‘울트라나이스슈퍼골드타운’으로 바뀌게 되는지를 마주이야기 형식으로 간결하게 보여준다. 윤태규의 ‘이상한……’ 연작 동화(『이상한 학교』, 한겨레아이들, 2001)는 모두가 당연하게 여기고 있는 익숙한 현실을 백팔십도 뒤집어 놓는데, 현실을 물구나무 세움으로써 비정상이 정상으로 된 고정관념을 깨고 있다.
김기정의 『바나나가 뭐에유?』(시공사, 2002)는 속된 말로 ‘뻥이 센 작품’이지만, 사회․역사적 경험을 놀이정신으로 풀어내고 있어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보인다. 능란한 이야기 솜씨와 익살스런 해학은, 방정환에서 이주홍으로 이어지는 웃음의 계보를 떠올려주기에 충분하다. 작품의 무대는 아홉 봉우리로 둘러싸인 지오라는 산골마을이다. 이 마을에서는 집채만한 수박이 자라서 심심치않게 사건을 일으키고, 놀다가 배고픈 아이들이 기어 들어가서 파먹을 수 있는 몸통 크기의 참외가 자란다. 지오마을은 말하자면 근대문명으로 오염되기 이전의 세상이고, 잃어버린 낙원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은 바나나 소동을 축으로 해서 근대문명이 가져온 삶의 변화를 보여준다.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고, 표준말을 쓰기 시작한다. 바깥 세상에서는 총소리와 대포소리가 요란한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별 두 개 짜리 장군이 하루아침에 대통령이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산모퉁이가 깎이고 고속도로가 마을을 가른다. 마을사람들은 놀란 나머지 턱이 빠지고 이상한 눈병이 난다. 모르는 사이에 집채만한 수박과 아이들 몸통 만한 참외도 점점 작아진다. 몇 대째 내려오면서 사회가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작가는 재치 있게 시간의 경과를 표현했다. 할아버지가 콧물 흘리던 시절, 아버지가 콧물 흘리던 시절, 또 삼촌이랑 이모가 똥오줌을 못 가리던 시절……. 옛이야기의 틀을 빌려 쓰고 있기 때문에, 자연의 혜택 속에서 소박하지만 평화롭게 살던 때가 언젯적이냐고 묻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바나나 소동이 한판 벌어지고 난 뒤에 마을사람들은 바나나를 집집마다 아궁이에 넣고 태우는데, 그때부터 이 마을 뻐꾸기들은 ‘뻐내너, 뻐내너’ 하고 울었다는 유래담의 형식으로 결말이 처리되었다. ‘바나나는 맛있다’고 하는 아이들 노래를 이야기의 씨앗으로 삼았지만, 바나나로 상징되는 근대문명이란 것이 괴물이 아니라 달콤한 과일의 얼굴을 지녔다는 사실도 예사롭지 않다. 이 작품은 근대 경험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이고 민중에 대한 따뜻한 감싸안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놀이정신과 현실의식이 어우러진 민중연희의 전통에 닿아 있다.
구체적인 생활 장면도 동화의 상상력을 만나면 따분함을 멈추고 즐거움의 세계로 나간다. 올해 위기철이 내놓은 『무기 팔지 마세요!』(청년사, 2002)도 발상이 새롭다. 작가는 장난감 ‘비비탄’ 총알 하나가 아이들의 평화 모임과 시위로 발전하고, 급기야 바다 건너 미국 땅에서 총기반대법안을 둘러싼 어른의 선거를 좌우하게 되는 과정을 속도감 있게 그려낸다. 추리소설과는 또 다른 의미로, 어떤 행위의 논리적인 연관관계를 쫓아가는 재미가 있다. 여기서 도무지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능한 일로 바꾼 힘은 옛이야기에서 많이 봐왔던 비약의 상상력이다. 달걀 하나가 황소 한 마리로 둔갑하는 그런 황당한 발상의 묘미다. 이 작품을 굳이 분류하려 든다면 ‘공상동화’가 아니라 ‘생활동화’일 테지만, 사건의 현실성을 문제삼는 이는 아마도 어린이가 아니라 이야기를 즐길 줄 모르는 어른일 것이다. 수많은 ‘생활동화’들이 오늘을 시대배경으로 오늘의 아이들을 그리고 있는데도, 이 작품처럼 실감을 주는 경우는 만나기 어렵다. 오늘의 아이들이 진짜 오늘의 아이들이 되려면 바로 오늘의 소통방식과 육체를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보는 것처럼 아이들은 아이들 방식대로 자기들 세상을 만들어 간다.
5.마무리
세계체제의 바깥은 없다고 하는 시대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문학에 거는 기대는 더 커진다. 우리 아동문학도 발상을 새롭게 한다면, 일상에서 경험하는 왜소화에 대한 저항이자, 바깥을 보게 하는 힘으로 얼마든지 작품이 나올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이 해리포터에 열광하는 속을 들여다보면 이점이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무엇을 쓰려고 하는가’의 문제는 손에 쥐어지는 의미나 관념만을 말함이 아니다. 맛있는 과육을 다 쥐어 짜내고 남은 팍팍한 알맹이가 과연 과일이기나 한 것일까?
자신을 자유롭게 하려는 지향이 숨쉬고 있다는 점에서 즐거움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사상이 된다. 방정환-이주홍-권정생 문학의 한쪽을 관통하는 해학과 익살의 계보에도 응분의 조명이 필요하다. 물론 김중미와 박기범처럼 진실하게 이 땅의 소외계층에 눈을 돌리는 작품은 여전히 중요하다. 이 글은 김중미와 박기범을 높이면서 동시에 채인선과 임정자를 높이는 걸 모순으로 여기는 인식에 대한 문제제기다.
20세기 우리 아동문학이 그 시대 아이들을 둘러싼 역사현실로부터 제약되었다면, 21세기 우리 아동문학은 20세기 이론으로부터 제약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품어봄직하다. 따라서 진짜 문제는 20세기 이론이 아니라 21세기 이론의 빈약함일 것이며, 이는 이오덕의 책임이 아니라 그 ‘이후’ 세대의 책임이다. ‘이후’의 문제의식이 ‘이후’의 세대로 와서도 핍박받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창비어린이’, 창간호, 2003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