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파인더 인천] 기고/본문 200자 14.4매/2009.2.27
이야기가 있는 인천
덕적도
이 원 규/소설가
인천은 이야깃거리가 많은 도시다. 식민지 지배와 한국전쟁의 중심무대로서 피압박 수탈과 분단 문제 등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는 이야기, 워터프론트의 낭만과 항구의 이별을 담은 이야기, 아름다운 섬들의 이야기, 고단한 어부들의 삶 이야기, 근대화 이후 부의 재분배와 노동자의 애환을 담은 이야기, 그리고 수도 서울의 주변으로서 주변적 삶을 담은 이야기 등 참으로 많다. 그래서 20여 년 전, 필자는 고향인 인천을 무대로 많은 소설들을 썼다.
영상예술을 서사성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요소를 품고 있는 곳으로 가장 먼저 추천할 만한 곳은 덕적도이다. 연안부두에서 쾌속선으로 한 시간 만에 갈 수 있는 섬, 아침에 떠나 몇 시간 머물고 저녁에 돌아오기에 딱 알맞은 섬이다. 옹진군 최고의 해수욕장이라는 명성을 갖고 있는 서포리 백사장을 비롯해 밭지름, 자갈마당, 적송해변 등 해수욕장들이 있고 국수봉이란 산도 하루 등산 코스로 적당하다. 그리고 인천항 출입 안전항로인 ‘플라잉 피시’ 수로 입구가 가깝게 있어서 외항선들이 그 섬 앞을 지나간다. 게다가 역사와 전설이 되어버린 가슴 아픈 이야기가 있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서해에서 조기가 무진장하게 많이 잡혔다. 조기 어군은 철쭉이 필 이른봄, 전라도 영광 법성포 앞바다에서 잡히기 시작해 철쭉꽃 개화를 따라 서해 연안을 타고 북으로 이동, 평안도 앞까지 올라갔고 수백 척의 배가 그것을 따라 이동했다.
조기잡이 하면 연평도를 떠올리지만 덕적도도 유명했다. 그 영화로웠던 시절 100척 이상의 조기잡이 어선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파시(波市)가 열렸다. 40명 정도의 선주들이 부를 쌓았으며 400명 정도의 동사(하급선원)들이 고용되고 신분은 세습되었다.
동사들은 자신은 굶주리면서 자식을 신분상승을 위해 선주들처럼 도회지로 유학시켰다. 그래서 1930~40년대에 인구 비례당 대학과 전문학교 학생이 서울보다 많았다. 덕적도 사람들이 하도 유식해 ‘덕적에서 온 새우젓 장수 앞에서 공자 왈 하지 말라’는 속담도 있었다. 양반어른이 아들 앞에서 책을 읽으며 풀이해 주는 것을 넘겨다본 새우젓 장수가 지게를 받쳐놓고 “나리, 그게 아닙니다.”하고 지적해준다는 것이었다. 이 섬이 유배지였다는 유래와 그 속담을 생각하면 더 먼 옛날부터 교육열이 높았던 것 같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 인도주의 정신이 강한 한 선주가 유약한 자기 아들을 돌보게 하기 위해 총명하고 강인한 동사의 아들을 함께 인천과 서울로 유학시켰다. 8 ․ 15 광복이 오고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서울에서 대학을 나온 동사의 아들은 고향의 계급 구조를 뒤엎는 봉기를 주도했고, 한국전쟁 중 인공 치하에서 선주들을 처단했다. 미군은 인천상륙작전에 앞서 전략상 안전항로인 플라잉 피시 수로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상륙작전 이틀 전 기습적으로 덕적도를 점령해 공산당원들을 제압해 처단했다.
덕적도에 상륙을 감행한 것은 한국 육군의 중대급 부대, 지원 군함은 캐나다 해군 소속이었다. 그리고 상륙군보다 한 발 앞서 유진 클라크 대위 휘하의 공작대가 섬에 잠입했다. 유진 클라크는 상륙작전 그 날 팔미도 등대에 불을 켠 공로로 뒷날 한국에서 유명해진 미군 첩보장교다. 공작대원들 중에는 숙청당한 선주의 아들이 있었다. 그는 무전기로 덕적도의 함포사격 지점을 짚어 타전하고 상륙군을 유도해 섬을 도로 찾았다.
필자는 그런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붙여 20년 전에『황해』라는 장편소설을 썼다. 그 때의 격동과 가슴 아픈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은 지금 덕적도에도 많지 않다.
선주들이 살았던 곳은 진리 마을의 웃개이고 하급동사들이 살았던 곳은 거기와 붙어 있는 아랫개였다. 필자가 20년 전『황해』를 쓰기 위해 통통선을 타고 네 시간을 걸려 찾아갔던 마을, 그때는 이미 조기의 회유가 사라져 버림받은 섬처럼 고요했는데 지금은 펜션과 음식점이 즐비하고 길도 포장되어 있다.
인천에서 떠난 덕적도행 쾌속선, 혹은 대청도에서 출항해 인천으로 가는 쾌속선이 진리 선착장에 기항하기 위해서는 소용돌이치는 해역을 지나야 한다. 1천 톤 가량 되는 배이니까 큰 위협이 되지 못하지만 옛날 돛단배 시절에는 위험한 곳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전날 이 섬에 상륙한 국군에 생포된 좌익청년들은 목에 자기 집 맷돌을 걸고 이곳으로 실려 나가 왼쪽 등에 총탄을 맞아 심장이 관통당한 채 파도 위로 고꾸라져 소용돌이에 휩쓸려 버렸다.
공작대가 고무보트로 심야에 상륙한 곳은 서포리 해변이고 주력부대의 상륙작전이 벌어진 곳은 밭지름 해변이었다. 밭지름 앞바다가 진리 인민군 막사에 함포를 조준하기에 쉬웠던 때문이었다.
덕적도는 지난해 인천 시민들이 쾌속선 선료를 반액 할인 받기 시작하면서 관광객이 많아졌다. 필자는 지난 20년, 도시에서 번잡해진 머리를 식히려고 찾아가곤 했는데 숙박시설과 음식점이 늘어났지만 여전히 바다는 푸르고 공기는 맑다.
필자는 서포리 백사장 위를 맨발로 걷기를, 그리고 적송(赤松) 숲 속에 기막히게 만들어진 오솔길을 걷는 것을 좋아한다. 작년에는 그러다가 화사(花蛇) 몇 마리와 누런색 능구렁이를 보아 깜짝 놀라기도 했다. 그놈들이 이 섬이 오염이 안됐음을 증명하는 듯해 반갑기도 했다.
봄이 오면 천막을 배낭 밑에 달아매고 서포리 적송 숲으로 가고 싶다. 꿈결처럼 들리는 파도소리를 들으면서 책을 읽고, 저녁이 되면 서포리 해변 끝 작은 포구에 들어오는 고깃배에서 도시보다 1/5도 안 되는 값에 매운탕거리를 몇 마리 사서 낯익은 식당 아주머니에게 끓여 달라 해서 소주 몇 잔 마시고 싶다. 그러면 그 옛날 이 섬에서 광풍처럼 몰아쳤던 비극이 아닌, 도시인의 삶을 이야기 소재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