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풍수지리에서 음택(陰宅)중 최고의 명당(明堂)으로 꼽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 남연군묘다.
남연군묘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5-28 가야산 아래에 있다.남연군묘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 이구(李球)의
묘다. 남연군묘는 원래 경기도 연천 땅에 있었다고 한다. 이하응은 지관 정만인을 만나 명당자리를 소개 받고 이장을 결심하게 된다. 그 명당자리가 가야산 자락에 있는 이대천자(二代天子)의 땅과 오서산 자락에 있는 만대영화(萬代榮華)의 땅이다.
그 중 이하응은 이대천자의 땅을 선택했다고 한다. 이번 설연휴 동안 JTBC에서 명화특집으로 방영된 영화 <明堂>을 다시 감상할
수 있었다. 그 영화에서 이곳 남연군의 묘가 등장한다.
밝을 명(明) 집 당(堂) 명당은 한국의 풍수지리설이다. 사람이 살면서 부귀영화와 권력을 누리기 위해서 조상을 잘 모시려는
‘효도’(孝道)에서 시작된 학문이다. 영화 명당은 조승우, 지성이 주연했다. 조승우는 지관, 지성은 흥성대원군 역할을 맡았다.
흥선대원군은 ‘2대 천자지지’(天子之地) 명당터를 찾았다. 실제로 흥선대원군은 가야산에 있는 곳에 자신의 아버지 남연군의
묘터를 삼았다. 이곳에 묘를 하게 되면 2대에 걸쳐서 왕손이 나오는 권력을 유지하지만 그 이후에는 왕손이 끊김으로 국가의
명운이 막혀서 절이 세워져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었다.
영화에서는 ‘탐욕’이 국가를 망하게 한다는 주제로 흥선대원군이 절을 불태우면서 결국 남연군을 그곳에 이장(移葬)하고
고종과 순종의 2대 임금을 얻고 식민지 치하로 들어선다는 내용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풍수지리설이 현실로 적용되었다는
거짓말같은 실화로 스토리를 전개했고, 영화에 나오는 장동 김씨는 ‘안동 김씨’를 말한다.
남연군은 본래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의 6대손이다. 왕손과는 거리가 먼 촌수였다. 어릴 때 사도세자의 서자이자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신군이 아들이 없자 양자로 입적되어 가게를 이었다. 즉 영조의 손자가 된 것이다. 정조의 유일한 직계인 제24대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당시 세도가인 안동김씨들은 헌종의 7촌 아저씨뻘인 강화도령 원범을 제25대 왕 철종에 오르게 한다.
그리고 세도정치를 강화하기 위해 왕족 중에서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 만한 인물들은 모두 제거하였다. 대표적인 사람이 흥선군의
형 이하전이다. 그는 기개가 있어 왕위계승권자로 자주 물망에 오르내렸다. 그러자 안동김씨들은 그를 역모로 몰아 사사하였다.
이에 흥선군은 호신책으로 시정의 무뢰한들과 어울리며 파락호 생활을 하였다. 심지어는 안동김씨 집안을 찾아다니며 구걸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목숨을 부지하면서 안동김씨를 꺾을 궁리만 하였다. 가장 좋은 방법이 안동김씨 조상 묘보다 더 좋은 곳에
아버지 묘를 이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스스로 풍수공부를 했고 이 과정에서 전국의 지관들과 친분을 쌓았다.
전국 지관들은 자기 고장의 명당자리를 흥선군에게 소개하였다. 그러나 안동김씨를 꺾을 만한 대명당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충청도 홍성에 사는 정만인이라는 지관이 찾아왔다. 그는 흥선군에게 덕산 가야산에 2대천자지지와 광천 오서산에
만대영화지지 두 자리가 있는데 어느 것을 선택하겠냐고 물었다. 2대천자지지는 천자가 2대에 걸쳐 나오지만 곧 망할 자리이고,
만대영화지지는 왕은 될 수 없지만 만대에 걸쳐 자손들이 부귀영화를 누리며 편하게 살 수 있는 자리라고 하는 것이었다.
흥선군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2대천자지지를 선택했다. 그리고 정만인을 따라 가야산으로 가보았다. 그곳은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고 명당자리에는 석탑이 서있었다. 정만인은 탑 자리에 묘를 쓰면 십년 안에 틀림없이 제왕이 날 것이라고 장담하였다.
흥선군도 풍수를 배웠기 때문에 그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절 자리에 어떻게 묘를 이장할 수 있느냐다. 당시 가야사는 수덕사보다 더 큰 절이었다.
한양으로 올라온 흥선군은 며칠을 고민하다가 대제학 김병학 집을 찾아갔다. 그 집에는 가보로 내려오는 옥벼루가 있었다.
이를 잠시 빌린 그는 영의정 김좌근을 찾아가 마치 자기 것인 양 뇌물로 주었다. 그리고 충청감사에게 가야산 탑 자리에 묘를
쓸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편지 한통만 써달라고 하였다. 벼루가 마음에 든 김좌근은 쾌히 승낙했다.
흥선군은 곧바로 충청감사에게 달려갔다. 세도가인 영의정의 편지에다 왕족인 흥선군이 정중하게 부탁하자 충청감사는
석탑을 헐고 묘를 쓸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물론 이것은 전해져오는 일화 중의 하나다. 또 다른 일화는 2만 냥의 돈을 주지승에게
뇌물로 주고 절을 불사른 뒤 이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가야사는 폐사되고 흥선군은 경기도 연천에 있는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였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2대천자지지에 아버지를 모시는 꿈을 이루었다.
풍수지리에서 완벽한 명당(明堂)은 없다고 했다. 결점이 없는 명당 전미지지(全美之地)는 없다는 이야기다.
이대천자의 땅 이곳에 남연군을 모신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7년 후 차남 명복을 얻었다. 그가 곧 제26대 고종으로 대한제국의
첫 황제가 되었다. 그리고 고종의 아들 순종이 조선의 27대 왕이면서 대한제국 두 번째 황제에 올라 이대천자의 땅임을 실감케 한다. 명당의 위세는 여기까지다. 고종은 1919년 '의문의 죽음' 독살 당하고 순종도 의문의 죽음으로 세상을 떠난다. 조선은 일본에 망한다.
명당에서 말하는 명당은 흉지가 될 수도 있다는 교훈을 알아야한다. 흥선대원군이 쓴 묘터는 명당이었으나, 흉지였다.
자신의 권력은 2대의 후손에게 이어졌으나 결국 나라 전체를 일본에게 넘겨주고, 나라가 일본밑에 종속하는 흉지엿다.
안동김씨를 없애려고 왕의 권력을 회복했으나, 나라가 일본에게 넘겨지므로 국가의 운명이 다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김좌근의 경우, 자신의 탐욕으로 모든 왕릉을 파헤치면서 자신의 조상을 그곳에 이장했는데, 그렇게 해서 권력의 세도를 누리는 것
같았으나, 암장하듯 암살을 당함으로 비참한 운명을 맞이했고, 자신이 아들에게 죽임을 당해서 땅에 묻히는 운명이 되었으니
결국 암장이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다.
남연군 묘는 외국인들에게 도굴의 위협에 빠진다. 고종실록 5권, 고종 5년에 기록된 그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달 18일 오시에 세 돛을 단 이양선 1척이 행담도에 정박했다. 병졸 100여 명이 관청 건물을 파괴하고 남연군 묘소로 달려갔다.
아전, 군교, 군노와 백성들이 죽기 살기로 맞섰으나 칼과 총을 대적할 수 없었다. 서양 도적들이 묘를 훼손하고, 19일 묘시에
큰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갔다". "本月十八日午時, 三帆異船一隻, 從西而來, 來泊於洪州 行擔島. …중략… 十九日卯時,
洋賊旋向九萬浦行船, 會合大船, 向西而去"
남연군 이구(李球)의 묘에 도굴을 시도한 건 프랑스 신부 페롱(Feron)과 조선인 천주교도 최선일 등의 안내를 받은 오페르트
(Oppert E.J) 일행이다. 100여명이 묘소를 파헤쳤으나 곡괭이가 튕겨 나갔다. 도굴의 위험이 있어 이장 때 흥선군은 묘 둘레를
강회(剛灰)로 덮었다. 굳으면 쇠처럼 단단해진다. 명당을 훼손해 흥선대원군의 권력의 힘을 약화시키고 통상교섭 협상도 유리하게
이끌려는 오페르트 일행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독일인 오페르트는 1868년 4월 21일 야음을 틈타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묘
도굴을 시도했다. 대원권의 강력한 권력은 아버지 묘가 명당에 묻혔기 때문이라는 조선 천주교인들의 말을 믿었기 때문이다.
오페르트는 미국인 젠킨스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프랑스인 선교사 페롱을 통역관으로 삼고, 약 100여명의 중국청년을
러시아병사로 위장하여 도굴단을 구성하였다. 길 안내는 조선 천주교인이 맡았다. 그들은 남연군묘를 파헤친 후 유골을 확보하여
대원군과 협상카드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이 소식을 접한 흥선대원군은 크게 노하였다. 조상숭배 사상 때문에 묘를 신성시하는
조선이었다. 심지어 국왕의 할아버지 묘까지 파헤치는 오랑캐들과는 상종할 수 없다며 척화비를 세우고 더욱 강력한 쇄국정책을
시행하였다. 또 천주교인들이 개입하였다는 이유로 이 지역 교인 천여 명이 해미읍성에서 처형을 당하였다.
이 사건은 흥선대원군이 천주교인들에게 더욱 적대감을 지니게 되고 쇄국정책을 강화하는 계기가 된다.
“그대는 조상의 묘를 어디에 썼는가. 그대가 복을 누리는 묘터를 썼는가”
영화 <명당> 마지막 장면은 흥선대원군이 정지관에게 이렇게 물으면서 죽여버린다.
명당의 의미가 현실과 다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람을 묻는 명당보다 사람을 살리는 명당을 찾으리라!”
박제상 지관은 명당이 불어오는 인간의 탐욕에 염증을 느끼면서면서 백두산 근처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짓는데 독립운동가들에게 군자금을 투자하면서 영화가 끝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