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사상>, 2023년 5월호.
노동문학을 한다는 것은
맹문재
1.
나는 지금까지 여섯 권의 시집을 간행했는데, 각 시집의 결은 다소 다르지만 일관되게 추구해온 주제는 ‘노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아홉 권의 시론 및 평론집에서도 노동에 관한 글이 압도적으로 많다.
나는 이십대에 포항에 있는 제철소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남자들은 흔히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할 때 학교 시절이나 군대 시절을 많이 이야기하지만, 나는 제철소의 시절을 많이 이야기한다. 그만큼 제철소에서 노동자로서 지낸 기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깊은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나는 꿈속에서도 제철소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만난다. 3조 3교대 근무라는 힘들고 불안한 환경이었지만, 그들에게 늘 고마움을 가지고 있다. 나를 많이 배려해준 박 주임, 유 반장, 반원들, 협력업체 직원인 최 형과 김 형. 그중에서도 윤유식 선배와 친형제처럼 지냈던 최영근 친구가 특히 그립다. 어느 해 윤 선배가 회사에서 연장 근무를 하다가 과로로 세상을 떴다는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6년이 지나 선배가 묻힌 대원공원묘원을 찾아갔는데, 무성한 풀들이 적막한 공기를 채우고 있어 그지없이 슬프고 안타까웠다.
내가 제철소에 다닐 때 월세로 살았던 인덕동 인덕주택 B-23호, D-149호, 나를 정성껏 돌보아주셨던 주인집 아저씨와 아주머니.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던 그 사택의 골목길, 출퇴근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우르르 달려가던 노동자들, 내가 작업하던 열연1부 2후판 공장의 야적장과 냉간 교정실 등이 눈에 선하다. 나는 텔레비전을 비롯해 방송매체 등에서 내가 일했던 그곳의 이름이 나오면 그냥 지나치지 못한다. 사회생활을 하다가 그곳 사람들을 만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노동자로서 걸었던 길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다.
2.
나는 노동자로서 겪어야 했던 일들과 감정을 담아 1996년 첫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를 간행했다. 수록된 작품 수는 건설 현장에서 겪은 일들이 더 많지만, 시집의 정서는 제철소의 체험이 토대를 이루었다. “이 공단길을 걸어가서 부러지고 째지고 심지어는/영원히 못 돌아온 작업복 명찰들/나는 세월이란 망각에 젖어/미루나무 잎이나 슬쩍 흔드는 여린 바람이었다”(「버들 아래를 지나며」)라고 했듯이 당차게 맞서지 못한 나를 반성하고 있다.
2002년에 간행한 두 번째 시집 『물고기에게 배우다』에서는 노동 문제를 좀 더 넓게 인식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했듯이 국가 부도 사태로 인해 많은 기업이 도산하는 바람에 노동자들이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는 모습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았다. 그리하여 노동 문제를 공장이나 공사 현장의 영역을 넘어 생각해보았다. 이 시집에는 ‘이자’라는 시어가 많이 등장하는데, 거대한 금융 자본의 점령으로 무너지는 노동자들의 실정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면서도 “야근 끝내고 돌아오는 남편을 맞기 위해 사택(社宅) 골목 어귀에 다소곳이 서 있는 새색시의 스웨터”(「첫눈」)라는 구절이 있듯이 제철소에 다닐 때의 정서가 여전히 시집의 토대를 이루고 있다. 2005년에 간행한 시집 『책이 무거운 이유』, 2012년에 간행한 시집 『사과를 내밀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2013년에 간행한 다섯 번째 시집 『기룬 어린 양들』은 이전의 시집과는 성격이 많이 다르다. 1970년 전태일 열사 이후 68명의 노동 열사를 집중적으로 호명한 것이다. 그 한 예가 “나는 완전에 가까운 그의 결단을 믿네/지천명처럼 믿네//그에게는 하루 44시간의 작업이나/단수(斷水) 같은 월급이/문제가 아니었네/위장병이나/화장실조차 막는 금지도/문제가 아니었네//바늘로 졸음을 찌르며/배고파하는 어린 여공들에게/풀빵을 사준 일이/문제였네//내게 인정으로 배수진 치는 법을/처음으로 알려준 사람//최후까지 알려줄 것이네”(「전태일」 전문)이다. 전태일 열사처럼 노동하다가 또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노동자들의 생애와 의미를 세상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었다. 이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았기에 계속하고 있다.
2020년에 간행한 『사북 골목에서』는 사북항쟁 40주년을 기념해 출간한 시집이다. 광산촌과 광부들을 담은 작품들로 한때 사북에서 일했던 아버지를 떠올리며 쓴 것이었다. 표제작에서 “지난날의 항쟁을 지도 삼아/길을 알려주는 토민(土民)을 만나기도 하지만/작업복을 입은 아버지가 없기에/골목은 추상적이다//폭죽처럼 터지는 카지노의 불빛도/골목을 밝혀주지 못한다//폴짝폴짝 탄 먼지를 일으키며 걸어가던 아이들/사택 문을 열고 나오던 해진 옷 같은 아이들//나는 그 골목에서 아버지가 끓여주는 김치찌개를 먹으며/입갱하는 광차를/석탄이 달라붙은 도랑물을/“우리는 산업역군 보람에 산다”는 표어를/낯설게 바라보았다//마지막 방문이라고 다짐하고/골목 끝에서 뒤돌아보았을 때/아버지는 개집처럼 서 있었다”(「사북 골목에서」 전문)라며 아버지를 그리워했다.
내가 광부가 아니면서 광부의 생활을 쓴다는 것이 다소 망설여진다. 요즘 내가 시를 쓰면서 고민하는 면이기도 하다. 노동자가 쓴 시가 더 구체적이고 절실한 것인데, 그렇다고 노동자가 아니면 노동시를 쓸 수 없는 것도 아니기에 갈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나의 뿌리를 좀 더 견고하게 인식하면서 작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아버지께서 일하시던 광산촌을 중심으로 광부들의 이야기를 좀 더 쓰려고 한다. 광산 노동자들의 작업 상황, 산업재해, 진폐 및 규폐, 임금, 복지, 노동조합, 석탄합리화 등의 문제를 사북항쟁 속에 담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1980년 사북 광산 노동자들의 항쟁은 노동 강요, 임금 착취, 비인간적인 처우, 어용 노조, 암행독찰대에 의한 일상생활 감시, 영세한 주거 환경, 전무한 문화 환경, 열악한 교육 환경, 부실한 의료시설 등의 비참한 처지에 맞선 것이었다. 노동자들은 자신의 요구가 개선될 기미가 없자 인간답게 살아보자고 노동조합의 결성을 추구했다.
광산 노동자들의 진폐 및 규폐 재해 또한 큰 아픔이다. 진폐증은 유해한 분진을 오랫동안 흡입함으로써 분진이 폐에 달라붙어 호흡이 마비되는 치명적인 직업병이다. 굳은 폐는 현대 의학으로 소생시킬 수 없어 산소호흡기로 생명을 연명해야 한다. 대개 광산에서 5년 이상 일한 광부들이 걸린다.
1989년 정부의 석탄합리화 정책으로 광산촌은 급속하게 무너졌다. 국제 및 국내 에너지 환경의 변화로 인해 많은 광산이 문을 닫았고, 광부들이 일터를 떠났다. 부상자나 진폐 및 규폐 환자들만 남아 있는데, 그들의 생활을 보장하고 폐광지역의 경제를 회생시켜야 하는 정책이 필요하다. 나는 이러한 면들을 사북항쟁 속에 담아보려고 하는 것이다.
3.
노동문학이란 용어가 학계나 문단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이다.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어 높은 경제 성장을 이룩했지만, 노동자들의 노동 여건은 열악했다. 노동 시간이 세계에서 가장 길었고, 임금은 매우 낮았으며, 학력이나 성별 등에 따라 임금의 차이가 컸다. 사회적 처우도 달랐다.
노동자들은 이와 같은 처지를 극복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나섰다. 그 일환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노동조합의 소식지에 싣거나 집회의 홍보물로 사용했다. 문단에도 등장해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 결과 박노해의 시집 『노동의 새벽』, 백무산의 시집 『만국의 노동자여』, 안재성의 소설집 『파업』 등에 독자들이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지식인이 아니라 노동자 출신 시인이나 작가의 활동이 문단에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특히 시를 중심으로 노동문학이 꽃을 피웠다. 시가 소설이나 기록문학보다 압도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체험적인 토대나 전문 학습이나 창작 시간에서 보다 유리한 점을 가지고 있는 장르의 특성 때문이었다. 물론 노동운동의 현장에 시인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한 점도 들 수 있다.
1990년대 이후 노동문학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1980년대 말 동구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에 따라 자본주의가 전 세계로 확대되었는데, 노동문학도 영향을 받았다. 노동자들의 노동 환경은 여전히 열악한데, 지식인들이 주도하는 문단은 변화의 흐름을 무시하고 반영했다. 그 결과 노동문학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고, 투쟁의 목소리가 이전 시대에 비해 약해졌다. 거대한 자본주의에 함몰된 노동자들은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 것이다.
4.
21세기에 들어 노동문학은 더욱 소외되고 있다. 무엇보다 노동문학을 추구하는 시인이나 작가의 수가 급속히 줄어들었다. 노동 문제는 계속 일어나고 있는데, 시인이나 작가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는 이유는 어느덧 우리 사회가 풍요로워졌기 때문일까? 그리하여 노동 문제가 소수자의 영역에 해당되어 주목하지 않는 것일까? 노동의 영역이 육체노동에서 정신노동으로 바뀜에 따라 노동문학의 개념이 바뀌고 있는지 모른다. 사회가 다양화되고 전문화되어 많은 문제가 발생함으로써 상대적으로 노동 문제가 가려지는 면도 있다. 어느 것 한 가지로 단정할 수 없지만, 노동문학이 활발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어느덧 노동 환경도, 노동자의 일상생활도 컴퓨터에 적응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노동자는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가상 세계의 지시에 따라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고 수익을 창출한다. 그렇지만 변화한 환경에 제대로 적응하기란 쉽지 않다. 고용되는 노동자 수보다 해고되는 노동자가 점점 늘고 있고, 고용되더라도 비정규직이거나 저임금의 조건이다. 일터에 있는 노동자들도 언젠가는 해고될 것을 예상하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이므로 노동자들 간의 유대관계는 약할 수밖에 없고, 노동조합 활동도 활발하지 않다. 이러한 시대에 노동문학은 노동자의 해고, 실업난, 취업난, 비정규직 문제 등을 담아내야 하고, 개선을 위한 실천 행동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가 삶을 영위하고 있는 한 노동은 필요하고 그에 따라 노동 문제는 발생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처지와 단체 행동을 이해하고 연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노동문학은 그와 같은 역할을 주도적으로 하는 것이다. 노동자의 생활을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인식하고, 노동자가 바라는 세상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5.
21세기에 들어 자본의 힘이 절대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노동자는 의식주 해결은 물론이고 삶 자체를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자본이 요구하는 약속 시간을 지켜야 하고, 지시하는 작업을 마무리해야 한다. 자본의 눈치를 보며 지인에게 연락하고, 결재를 올린다. 자본이 추천하는 후보자에게 투표하고, 대출을 신청한다. 노동자의 삶은 철저히 자본의 요구에 맞춰진다. 노동자가 자본을 선택할 권리도, 소유할 기회도 갖기 힘들다. 노동자의 전망도 계획도 자본의 손안에 들어 있다.
따라서 노동문학은 자본과 맞서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다. 자본이 노동자를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있기에 대항해야 하는 것이다. 자본은 노동자들이 연대하지 못하도록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갈등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 그 결과 한쪽에서는 측은하게 여기고, 다른 한쪽에서는 부러워하면서, 서로는 호의를 갖지 않고 있다. 정규직 노동자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노동 시간이 가장 길다. 장시간 노동으로 피로감에 시달리고 안전에 불안감을 갖고 있다. 결국 비정규직 노동자는 물론이고 정규직 노동자도 노동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노동문학은 노동 문제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추구한다. 내가 노동문학을 하는 것은 이 개념을 성실하게 수행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내가 살아가는 이 자본주의 체제는 너무나 거대하고 복잡하고 전문화되고 급변하고 있어 그 본질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에 따라 나의 노동문학은 모기 소리밖에 내지 못한다. 그렇지만 내가 노동자가 되기 위해서는 모기 소리라도 내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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