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달아달아 밝은 달아>
1. 최인훈의 원작을 무대에 올린 <달아달아 밝은 달아>는 고전 소설 <심청전> 이야기를 근현대 한국사의 비극적 상황에 대입시켜 전개한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팔려간 심청이 간 곳은 바닷 속 ‘용궁’이 아닌 중국의 색주가 ‘용궁’이다. 심청은 무너져버리고 빼앗겨 버려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을 때 마지막으로 올려지는 희생제물이다. 심청의 아버지 심학규 또한 자신의 고통에만 매몰되어 타인의 가치에는 전혀 무관심한 진정 눈 먼(?) 인물의 상징이다. 조선이 무너져 내릴 때 중요한 가치를 망각한 관료들은 오로지 사적 이익을 위해 조선의 민중을 팔아버렸다.
2. 역사적 비극이 진행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가장 큰 개인적 고통을 경험하는 대상은 대부분 여성이다. 연극은 상징적인 몸짓과 강렬한 음악을 병행시켜 심청에게 가해지는 육체적 가학을 보여준다. 심청의 가녀린 육체 위로 다른 국적을 지닌 인간들의 욕망이 남긴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각인되었다. 그것은 중국이며, 일본이며, 소련이며, 미국이 우리 국토에 남긴 상처이기도 하다.
3. 그럼에도 희망은 저 멀리에 존재하고 있다. 하늘에 떠있는 둥근 달은 잔혹한 운명 속에서도 포기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은유이다. 온갖 핍박 속에서도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민중의 끈질긴 생명이다. 그러기에 ‘달’을 보고 부르는 노래는 삶에서 도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인간들의 슬픈 ‘희망가’이다. 역사의 운명적 전환 속에서 심청도 사람들도 노래한다. ‘달’이 선사할 평범한 행복을, 달과 함께 가질 소중한 시간을. 그러나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도 하나 둘 사라지고, 한때 심청과의 동반을 약속한 사람도 역사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달’은 여전히 밝게 떠있지만 이제 달은 ‘희망’을 약속하지 못한다.
4. 시간이 흘러 늙어버린 심청에게 젊은이들은 과거의 이야기를 요구한다. 하지만 그들에게 전달된 이야기는 어떤 공감도 없이 공허하게 흩어진다. 끊임없이 ‘왜’라고 질문하는 젊은이들의 목소리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 강요받고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심청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젊은이들의 조롱 끝에 공간 속에 홀로 남겨진 심청은 스스로 독백할 수밖에 없다. 아버지를 위해, 가장 소중했던 사람을 위해, 오랫동안 소중히 여겨온 가치를 위해, 커다란 치욕을 기꺼이 감수하며 살았던 삶이 어떤 가치를 지녔는가를? 그것은 어쩌면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일지 모른다. ‘순간’의 최선의 선택이 때론 ‘전체’적으론 최악의 결정이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만 운명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던 심청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하늘에 밝게 떠있는 달은 대답할 수 있을까?
5. 우리의 삶은 수많은 원인과 환경의 산물이다. 우리는 그것에 저항하고 도전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 그것을 극복하기 어려우며 결국은 적응하고 순응하고 합리화시키며 살아가게 된다. 때론 현명한 결정일 수도 있다. 역사가 우리에게 제시한 과제도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며 타인의 결정에 동조하게 된다.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은 최악으로 가지는 않을 것이다. ‘잘못된 결정’도 참여자가 많다면 최소한의 위로와 위안의 대상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정 후회하지 않는 선택은 자신의 의지를 명백하게 확인할 수 있는 결정이어야 하지 않을까? 행동의 근본적 원인을 외부에 두지 않고 자신의 결정임을 말할 수 있을 때, 어떤 강압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을지라도 최종적 선택은 자신에게 있음을 천명했을 때만이 삶의 ‘자유’를 살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비록 착각일 수 있더라도 끊임없이 삶을 결정할 수 있다는 믿음을 통해서 살아간다면 어떤 상황에서도 최소한의 인간적 자유를 누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그렇기에 심청의 고독과 공허 그리고 공감의 부재 속에서도 심청 스스로 삶의 주체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녀에게 닥친 수많은 부정적 요인들도 결코 그녀를 절망으로 이끌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사랑을 준 사람을 기다리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이다.
첫댓글 선택은 자신에게 있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