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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배울 내용이 로마에 관한것이라 로마문화에 대해 조금 조사해봤습니다.
로마의 문화
19세기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 랑케는 로마 문화를 호수로 비교하면서 고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라는
호수로 흘러 들어갔고, 근대의 모든 역사가 로마의 역사로부터 다시 흘러 나왔다고 하였다. 또한 예링은
{로마법의 정신} 제 1권 제 1면의 첫머리에서 "로마는 정치제도, 법률, 기독교로 세계를 세 번
정복하였다고 갈파한 바 있었다. 이처럼 로마는 서양 고대사의 집약적 대성을 이룸으로써 지중해 연안의
세계 문화를 완성한 문화사적인 의의를 지니고 있다. 종전에는 로마의 문화를 그리스 문화의 단순한
모방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였으나, 지금은 로마 문화에 보다 더 넓은 문화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로마 문화의 전체적 특성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절충적 성격인데, 로마인들은 선진 문화권이던
에트루리아인의 문화에 그리스 문화를 받아 들이는 등 선행하는 모든 문화를 거의 다 흡수하여 폭과
깊이를 부여하였다. 둘째, 실용적, 실제적인 성격을 들 수 있다. 로마인들은 추상적이고 명상적인
면보다는 실용적인 토목 공법이나 의학을, 창작과 미학적인 면보다는 현실적인 과학 기술과 법률을
발달시켰다. 예컨대, 로마의 외과의들은 정교한 핀셋과 수술용 기구를 사용하고, 갑상선 종양, 편도선,
결석 등의 치료에 상당한 성과를 보였으며, 제왕절개 수술도 개발하였다. 세 번째는 로마 문화의 교량적
역할을 들 수 있다. 로마에 의해 그리스 및 그 이전의 고전 문명의 '유럽화'가 달성되었다. 철학은 그리스
철학을 보존하였으며, 법개념은 오늘날까지 통용된다. 또한 라틴어는 많은 유럽 언어의 모태가 되었는데,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어나 프랑스어 등은 말할 것도 없고, 앵그로 색슨어에서 유래된 영어도
라틴어와 깊은 관련을 갖는다. 예컨대 영어 language는 혀를 의미하는 라틴어 lingua에서 유래한 것이다.
로마의 문화유산 가운데서도, 로마의 정치제도와 로마법은 오늘날의 유럽의 정치체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회계 연도, 상원제도, 시민권, 지방자치, 국세조사와도 같은 용어는 물론 재산(property),
계약(contract), 대리인(agent), 유언(testament), 재판관(judge), 배심(jury), 범죄(crime) 등 경제, 법률,
사법상의 많은 용어들이 로마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사회계약설, 인민 주권 개념 및 견제와 균형을
내용으로 하는 삼권 분립의 원리 , 법치주의 등 후세에 확립된 정치사상의 기저는 로마의 유산이다. 특히
로마의 법률은 미, 영국을 제외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그리스, 일본, 스코틀랜드, 남아메리카 제국
등, 그리고 우리나라 등 여러 근대 국가의 법률적 기저가 되었다.
로마법의 발달단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불문법의 단계인데, 이는 종교적 관습과 혼합된
매우 엄격한 神法의 시대를 말한다. 그 다음이 12표법이다. 그리스인의 교과서가 호메로스라면, 로마인의
것은 12표법이라 할 정도로 이것은 중요하다. 이는 신법이 시민법으로 바뀌는 법의 세속화 현상과 법과
관습의 성문화의 시작을 의미한다. 재산의 사유권과 노예 제도, 계약, 동업 및 구매와 판매의 원칙 등의
민법과 약간의 공법을 포함하고 있다. 이에 따라 로마의 법률 기관이 확장되고 법무관(Praetor)직
창설된다. 시민법은 근본적으로 로마와 로마 시민들의 법으로서 성문법과 불문법의 형태로 존재한다.
이는 원로원과 민회의 결정, 황제의 칙령, 법무관의 훈령, 일반 법관의 판례, 고대 관습 등을 포함하는
것이다. 그 후 로마는 영토를 확대해가면서 이민족의 관습을 법체계 속에 섭렵하기 시작했다. 독자적인
시민법의 범위를 벗어나서 인간의 법률관계를 보편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발생하게 된
것이 만민법이다. 만민법은 국적에 관계 없이 모든 지역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법으로서,
재산의 사유권, 노예 제도와 계약, 상거래 등을 내용으로 하고있다. 이 법은 시민법보다 우위에 있지는
않으나, 로마제국 내 이민족들에게 적용되어 시민법을 보충하였다.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활약한 법학자인
라베오와 카피토, 하드리아누스 시대의 율리아누스, 폼포니우스, 가이우스, 알렉산더 세베루스 치세하에
활약한 울피아누스 등의 영향하에 로마법은 더욱 발달하게 된다. 마침내 제정 초기의 몇 세기를 경과하는
동안에 각 지역의 법률 사조와 학문의 경향을 흡수하여 자연법이 발달한다.
자연법은 모든 개별성과 특수성을 초월한 자연계의 이치와도 같이 영원 불변한 보편적 법률이라는
뜻으로 여기에서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법률이 유래한다. 자연법은 사법적 관행의 산물이 아니라, 철학적
사고의 산물이며 스토아 철학에 그 근원을 둔다. 모든 사람은 본질적으로 동등하며, 국가가 침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권리를 소유하고 있다는 이론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로마 자연법의 아버지는 황제로서,
그는 진실한 법은 모든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그리고 영구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자연과 일치하는
올바른 이성이라고 정의한다. 이 법은 국가보다 우위에 있어서, 이를 무시한 통치자는 자연히 독재자로
전락하는 것이다. 어쨋든 법적 원리로서의 자연법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발전은 로마법의 탁월한
업적에 속한다. 자연법은 실정법보다 우월한 만고불변의 자연권에 연결된 고정법이다. 현실적으로는
원로원 등 전통 기득권층의 특권을 초월하여 황제의 명령권, 입법권등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기능을
가졌다. 이같은 과정으로 발달한 로마법은 시민법, 만민법, 자연법 등의 3개의 커다란 줄기로 한다.
로마법은 6세기 전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대에 이르러 법학자 트리보리아누스(?-545) 등에 의해
학설집, 법학제요, 칙령집 등으로 이루어진 로마법 대전으로 집대성된다.
로마 문화의 특색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분야는 건축이다. 로마의 건축은 국가 생활의 표현으로서 확고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로마는 정복자로서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역으로부터 수많은 조각, 구조물, 대리석
기둥 등을 약탈하여 그들의 호화스러운 저택을 장식하였다. 원수정 초기에 제국을 에워싸고 있던 국가적
영광의 분위기 속에서, 건축 분야는 비약적인 성장과 함께 라틴적인 특징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이리하여
로마의 권력과 영광을 기념하기 위한 거대한 구조물들이 주를 이루었다. 또한 로마인들이 대규모의 토목
건축, 예컨대 도로, 교량, 댐, 저수지, 항만, 상하수도 시설 등을 축조하게 된 동기는 광범한 제국의 통치상
필요한 실용성이다. 건축 양식은 그리스, 에트루리아 혹은 메소포타미아 등의 양식들을 모방하였으나, 그
구조가 견고하며 착상의 규모가 크며 장식적인 특색이 있다.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로부터 배운 원형
아아취를, 기둥에는 그리스의 세양식을 사용하고, 로마인 독자적인 것으로는 도옴, 특히 궁륭(穹?)을
독특한 교차형으로 발전시켰다. 건축의 주재료는 석재, 콘크리트, 벽돌, 대리석 등이었다. 로마인이 처음
시작한 콘크리트법(이탈리아 지질이 화산질 지형으로 주위에 흔한 화산재와 석회석을 혼합)은 건축물을
매우 견고하게 하는 공법이었으며, 근세에 부활되었다. 로마인이 만든 교량이나 도로는 전대의 어떠한
민족도 능가하는 것이었는데, 예를 들면 스페인의 세고비아의 水道라든지 로마의 아피아路는
오늘날까지도 아직 사용되고 있다. 그외 신전, 포룸, 극장, 투기장, 경마장, 욕탕, 기념 건조물, 바실리카
와 같은 대규모 공공 건물이 있다. 로마의 대표적인 신전은 돔 양식의 판테온 신전(아그리파 건축,
하드리아누스 개축)인데, 직경 43.2미터의 거대한 원형 신전으로 북쪽 입구 부분에 코린트 양식의 기둥을
붙박은 돌출부를 갖추었다. 내부는 천장에 있는 직경 9미터의 天窓에서 원형의 공간에 쏟아지는 ㅂ이
대리석 바닥의 구석구석까지 비추고 있으며, 주위에는 일곱 개의 커다란 벽감(壁龕)이 있어, 마르스,
비너스 등의 신상이 세워져 있다. 그 외 목욕탕과 경기장(앞 장 참고) 등이 유명하다.
마지막으로 로마인들의 의복생활을 살펴보도록 하자. 로마의 복식은 그리스와 에트루리아 양식을
그대로 수용하여, 로마의 시대 상황에 맞게 변화되었다. 영토가 확장되면서, 복식의 재료와 형태도
다양해졌다. 로마인들이 의복을 입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 였는데,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기
보다는, 자신이 속한 사회계급을 나타내고, 자신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로마인들은 자신이
속한 계급, 부, 나이 등을 자신들의 의복으로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토가는 시민의 유軀馨걋?/p>
것이었는데, 점차 의례용의 관복이 되면서 색과 장식선, 입는 방법등이 엄격해졌다. 대개 표백하지 않는
양모(후일 실크가 수입되면서 실크도 사용)로 된 키의 세배(약 8.3제곱미터 가량)나 되는 타원형의 긴
천으로 어깨에서 발 끝까지 감싸게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로마인들의 회합에는 보통 베이지나 갈색의
토가의 물결을 이루었는데, 다만 입후보한 사람들만이 눈에 두드러지게 새하얀 토가를 입었으므로, 흰
색깔을 의미하는 'candidus'라는 라틴어에서 후보자 'candid'라는 말이 나타났다. 원로원 의원이나
집정관들은 진홍색 혹은 자주색의 띠로 장식하여, 서열에 따라 휘장을 달리하여 신분을 구별하였다.
지붕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을 가지는 토가는 공공 생활에서 덮어주고 감싸주고 점잔을 떠는 옷이었으나,
그리 편리하지는 못하였다. 여름에는 무겁고 겨울에는 추웠는데다가, 무엇보다도 왼손으로는 토가의 왼쪽
자락 끝을 잡고 있어야 하였으므로 오른 손만이 자유로왔던 것이다. 이는 즉 평화시의 옷이라는 의미로서
전쟁시의 병사들의 옷과는 아주 대조적인 것이었다. 로마인들은 그리스 인들처럼 육체를 자랑하지 않았고
드러내지 않았는데, 토가를 입었을 경우 머리와 손만 노출되게 마련이었다. 그리하여 로마 인들은 '머리와
토가와 오른 손'의 세가지로 대표되어 졌다. 그외 토가 아래 입는 튜니카 등이 대표적인 의상이었는데,
남녀 어느 계급에서나 보편적으로 착용되었다. 튜니카는 길이가 무릎에 미치는 셔어츠로서, 초기에는
넉넉한 실루엣에 소매없이 허리띠를 맨 형태에서, 후기에는 간단한 T자형의 원피스 형태가 되고, 신분에
따라 지위나 계급을 상징하기 위해 끌라비라는 수직선 장식을 하였다. 일을 할 때나 걸어다닐 때는 남자는
튜니카만을 입으면 되었는데, 잠옷으로도 사용되었다. 떼베나는 프릴이 달린 소형의 숄로 튜니카위에
걸쳐 입는 상류 계급의 복식이었다. 형태는 만원형, 장방형, 원형 등이 있었다. 그 외 팔루다멘툼은 귀족
계급이 착용하는 일종의 망토형의 군복으로 제정시대 중기 부텨 착용되었으며, 울이나 실크가 주로
쓰여졌다. 여자들은 스톨라라는 긴 겉옷을 걸치고 있었는데, 이를 튜니카 위에 입고 허리께를 벨트로
묶었다. 귀부인들은 파라솔과 부채를 아울러 갖고 다녔다.
첫댓글 유리님 좋은 자료 올려 주셔서 고마워요 잘읽었어요^^ 그런데 글씨 크기 늘려주세요 다 읽으니 눈이 너무 아파요ㅜ_ㅜ 글씨 포인트 조금만 올려주세요~
진짜 글자의 압박이 너무심한데요?ㅋ
글씨 수정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