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노래/황의종(부산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인생길, 고향 진달래
우리 춤/정승천(부산민예총)/보릿대 춤
김성식 시낭송/한국해양대학교 해사수송과학부 1년 이세은/ 1년 정보해
/出港Ⅰ
김성식
아침 햇살은
빌딩 창문마다 무늬를 놓지
朝刊新聞 또한
골목길을 뛰어다닌 연후에야
새벽을 가득 싣고 出港하기는
그른 이야기니
해 뜨기 前
모두들
부지런히 닻을 감아 들여라
선창마다 이 나라 흙덩이는
차 있는가
선창마다 이 나라 말소리는
제대로 쌓여 있는가
야 일등항해사
모두 몇 톤의 짐을 실었나
지킴이
자넨 어디 있었지
빨리 發港의 깃발을 올리고
아무렴
리마 밑에 액스 레이
그 위에
5番旗를 붙여라
메인 마스트
게양대가 비어 있구나
표상을 세워라
해와 달이 꼬리를 물어
강강수월래를 하고 있는
이 나라 표상을
자이로 콤파스
레이다
航海計器는 이상이 없겠지
밧줄을 풀어
앞뒤 모두 밧줄을 사리고
솟구치는 불덩이에
아침을 빨아 널기 앞서
바다 소리를 만지러
피가 머루알처럼 툭툭 튀는
물개 그곳을 짤라
정력을 돋군 후
스러져 가는 샛별을 향해
舵輪을 움켜 잡아
한시 바삐
海草가 숨쉬는 곳으로 빠지자꾸나
햇님이 눈을 흘긴 다음엔
새벽을 가득 담아
出帆하기는
힘든 이야기니
닻을 감아라 다 함께
저 넓은 바다로 나가
땅위에
그득 찬 안개 걷어다
온 세상 바다에다
골고루 던져 버리자
그렇지
船首 마스트에
블루 피터를 나부끼어
全員 歸船
出港이라고
크게 크게 뱃고동을 울리려무나.
주) 리마 엑스 레이 5番旗 : 船名을 표시한 旗 이름. 出港시에 마스트 위에 단다.
블루 피터 : 출항기
/섬
―어떤 사랑의 비밀노래
강은교
한 섬의 보채는 아픔이
다른 섬의 보채는 아픔에게로 가네.
한 섬의 아픔이 어둠이라면
다른 섬의 아픔은 빛
어둠과 빛은 보이지 않아서
서로 어제는
가장 어여쁜
꿈이라는 집을 지었네.
지었네,
공기는 왜 사이에 흐르는가.
지었네,
물이여 왜 사이에 넘치는가.
우리여 왜,
이를 수 없는가.
한 섬이 흘리는 눈물이
다른 섬이 흘리는 눈물에게로 가네.
한 섬의 눈물이 불이라면
다른 섬의 눈물은 재(灰).
불과 재가 만나서
보이지 않게
빛나며 어제는 가장 따스한
한 바다의 하늘을 꿰매고 있었네.
/여름 저녁 오후 여섯시
―너무 짧은 사랑 이미지
강은교
시간이 느릿느릿 걸어오며 끙끙거리는 나무의 팔이며 뺨을 쓰다듬는다,
우리가 기다리는 건 우리를 결코 기다리지 않는 시간을 기다리는 것.
/섬
강영환
뭍을 언제 떠났는가
섬은 떠다니는 마침표
외로운 이의 가슴에 정박한다
저 바닥끝에 수평선이 긴장해 서있고
이쪽 하늘 아래 잠 못 든 집이 등불을 켠다
그 사이로 지나가는 물때마다
섬은 불려 갔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돌아온다
늘 아랫도리가 젖어 있다
/방파제
강영환
방파제에서
출렁일 때마다 파도는 빛이 된다
무너지는 소리가 된다
바닥에 갈아 앉지 못하는 젊은 넋들이
솟구쳐 오르며 울부짖는다
집을 향한 그리움을 누가 가로막는가
건져 올리지 못한 난파선의 오랜
허기가 몸 부딪혀 오는 아아,
무너지는 빛이다
일어서는 소리다
내 가서 닿은 흔들림은
힘 빠진 채 돌아가는 그림자일 뿐
밀려오는 가슴을 터뜨리지 못한다
▲ 강 영 환 약력
7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 [공중의 꽃] 입선. 79년 [현대문학] 시 천료, 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조 [남해] 당선. 시집「눈물」, [놈-철들무렵],「뒷강물」,「푸른 짝사랑에 들다」외 다수. 시조집 [북창을 열고] 가 있으며, 월간 [열린시] 주간 역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부산민족예술인총연합 회장
/섬
최영철
바다 너머 연 날리는 아이들 여럿
멀리 가물대는 수평선 너머
갈매기는 반가워 끼룩끼룩 이리로 날고
파도는 신이나 넘실넘실 저리로 춤추네
은비늘 눈부신 하늘을 타고
자꾸만 푸르게 날아간 아이들
방패연 가오리연 연줄을 끊어버렸네
금방 가벼워진 방패구름 가오리구름
수평선 그 어디쯤 내려앉았네
바닷가 아이들 날려보낸
먼 바다 조각배 몇 점
/포구
최영철
오랫동안 걸어 당도한 포구
낡은 여인숙 하나 비스듬히 서 있다
아무렇게 으깬 배경으로 바다를 푸르게 하는 윗그림
굽은 인생의 마지막 처소를 더 어둡게 하려는 밑그림
씩씩한 사내들이 욕지거리로 와서
하룻밤 아랫도리를 담그고 간 여인숙
벽지 상형 문자로 찍힌 생선 비늘이
선풍기 바람에 날을 세운다
언젠가 여기 누워 파도에게 긴 밤을 청한 적이
고개를 만나면 해 지고
해 뜨면 쉼 없이 걷던 내륙을 다 지나
무거운 시간 벗고 기다리면
때 전 이불 사이
조바의 부름을 받은 작은 꼬까참새
멋 적게 들어서곤 했지
노을은 붉은 자궁
은근히 방을 묻는 사내를 맞아
하룻밤 풋사랑을 거두어들이는 시린 등을
이슥토록 집어등이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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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철/ 1956년 경남 창녕 생.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제2회 백석문학상 수상. 시집『그림자 호수』『개망초가 쥐꼬리망초에게』『일광욕하는 가구』『야성은 빛나다』외. 산문집『나들이 부산』외. 어른 동화 『사랑하게 되면 자유를 잃게 돼』.
http://gamangcho.hihome.com
/수프 접시 안의 바다
노혜경
눈부신 아기 고래 한 마리
머리에 보트를 이고
갓 구워낸 말랑말랑한 빵 같은 바닷가를 걸어갑니다
에메랄드빛 방울 조약돌들이
새 바닷가에
길을 만들고 있습니다
고래는 바닷가를 뜯어 바다에 찍어먹으며
자꾸만 더 걸어갑니다
새 빵 냄새가 풍기는 바닷가 복판에
희디흰 아기 두 명이 앉아 있습니다
아기들도 바닷가를 뜯어먹습니다
말랑거리는 빵의 속살이
아기들의 손에서 바다의 입으로
건너갑니다
아기들은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막 태어나는 바닷가를 쩝쩝 삼키고
조금씩 배가 늘어납니다
고래가 아기들에게 말을 겁니다
걷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고 말합니다
아기들은 웃으며
고래야 배를 저어가 보렴
고래는 다시 웃으며
우리는 사막으로 가야한다고 합니다
사막,
노랗고,
따끈따끈하고,
고래는 거기가 고향이라고,
바나나껍질을 엮어서 만든 보트를 머리에 쓰고
한참을 걸어서 가야 한다고,
아이들은 바닷가 가장자리에 흰 빵처럼 서 있습니다
파도가 발목을 적시자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녹습니다
고래, 눈부신 아기 고래는,
아이들을 적셔서 뜯어먹고는 다시 보트를 입니다
커다란 수프접시 안의, 얼음처럼 단단한 하얀 접시 안의
커다란 바다, 바다,
모든 새 열매의 맛이 다 나는
빛나는
새파란 결정 같은
바다가, 맑은 수프처럼 고여 있습니다
/ 엄마와의 전쟁·8
―새벽잠
노혜경
새벽 바다에 안개가 깔리는 것을 본다. 반쯤 뜬 눈이 졸음에 취해 한숨쉬며, 바다는 아주 조용히 당신의 발밑을 적시고 젖은 모래가 가볍게 신음하는 것을. 비몽사몽, 꿈도 아니고 생시도 아닌 바로 그 절묘한 타이밍을 당신이 맞출 수만 있다면, 새벽 안개를 은밀히 밀어젖히며 은비늘 같은 반짝임이 침투해 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다, 커다란 엄마의 복부처럼 오르내리는 들숨과 날숨, 들끓는 자궁의 우아함, 맛조개들이 길다란 입을 벌려 하품을 하고, 손가락 같은 물거품을 내고, 검정 바위는 행여 빛깔을 갈아볼까 하여 조금씩 바다 쪽으로 자리를 옮기고, 사물들이 털거럭거리는 나사를 조이고 엄마의 바다 위에 제 자리를 잡는 것을. 이 짧은 완벽, 이 짧은, 잠들지 않으려고 뻗대는 모가지가 꺾이고, 바다에서 커다란 손이 솟아올라와 내 가슴에 구멍을 내고, 구멍이 길다란 동굴이 되고, 손이 되고, 필사적으로 손을 뻗고, 이 모든 일들이 안개에 싸여 보이지 않는다.
바다 같은 엄마가 잠자리에서 뒤척이며 신음한다. 고단한 새벽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나는 홀로 일어나 도시락을 싼다. 새벽, 이때는 별이 태어나는 시간.
/자전거의 해안선
손택수
썰물이 지면 모래밭 위로
자전거가 씽씽 굴러갈 수 있다
젖어 뭉쳐진 모래알들이
자전거 바퀴를 뽈끈 들어올려주는 것이다
물속에 잠겼다 드러나는 자전거길은
굳지 않고도 딴딴하다
일만번의 파도가 일만번의 다짐질로
길 표면을 반듯하게 깔아놓은 것이다
굴러가는 바퀴 밑에서 도르르
풀어져나오는 해안선,
치마끈처럼
풀어져내리는 해안선
그 끝이 밀물에 들면,
길을 품고 뒤척이는 바다 위로 해가 뜬다
금빛 바퀴살이 쨍쨍 경적을 울리며
바다 위를 굴러간다
바다는 하루에 두 번씩 공사중이다
뚝딱뚝딱 물속에 잠겨 새로 길을 닦고 있다
싱싱한 해초 이파리를 물고 씽씽
떠오르는 자전거길
/ 서쪽, 낡은 자전거가 있는 바다
손택수
외갓집 소금창고 구석진 자리에 낡은 자전거 한 대가 있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지고 녹이 슬었지만, 수리하면 쓸만하겠는걸. 아마도 나는 길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쌩쌩 미끄러져다녔을 은륜의 눈부신 전성기를 생각했는지 모른다. 논둑길 밭둑길로 새참을 나르고 포플러 푸른 방둑길 따라 바다에 이르던 시절, 그는 아마도 내 이모들의 풋풋한 젊은날을 빠짐없이 지켜보았으리라. 읍내 영화관 앞에서 빵집 앞에서 참을성 있게 주인을 기다리다, 아카시아 향기 어지러운 방둑길로 푸르릉 푸르릉 바큇살마다 파도를 끼고 굴러다니기도 했을, 어쩌면 그는 열아홉 꽃된 처녀아이를 태우고 두근두근 내 아버지가 될 청년을 만나러 가기도 했으리라. 바다가 보이는 풀밭에 누워 클레맨타인, 클레맨타인, 썰물져가는 하모니카 소리에 하염없이 젖어들기도 하였으리라. 그때 풀밭과 바다는 잘 구분이 되질 않아, 멀리서보면 그는 마치 바다에 누워 즐겨 꿈에 젖는 행복한 몽상가로 보이지는 않았을까. 첫사랑처럼 한 번 익히고 나면 여간해선 잘 잊혀지질 않은 자전거, 손잡이 위의 거울 먼지를 닦아본다. 거울은 오래 전부터 그렇게 나를 품고 있었다는 눈치다. 턱없이 높은 안장 위에서 페달이 발에 잘 닿지 않는다고 툭하면 투정을 부리던 철부지 아이를, 맥빠진 앞바퀴 뒷바퀴 타이어에 바람 빵빵 밤늦도록 소금자루같은 달을 태우고 비틀대던 방둑길을.
/청어를 굽다
전다형
1
청어 살을 발라먹으며 용서를 생각한다.
살보다 가시가 많은 청어
가시 속에 숨은 푸른 속살을 더듬어 나가면
내 혀끝에 풀리는 바다
어제 그대의 말에 가시가 많았다
오늘 하루종일 말의 가시가 걸려 목이 아팠다
그러나 저녁젓가락으로 집어내는 청어의 가시
가시 속에 감추어진
부드러운 속살을 찾아가다 만나는 바다의 선물
어쩌면 가시 속에 숨은
그대 말의 속살을 듣지 못 했는지 몰라
가시 속에 숨은 사랑을 발라내지 못 했는지 몰라
오늘밤 이불 속에서 그대에게
화해의 따뜻한 긴 편지를 써야겠다
가시 속에서 빛나는 청어 한 마리
어느새 마음의 지느러미를 달고 바다로 달아난다
2
저녁 식탁 위에서 마음의 지느러미를 달고 바다로 돌아간 청어 한 마리처럼, 어제 띄운 화해의 긴 편지 그대가 사는 번지를 잘 찾아갔는지, 생각한다. 어쩌면 나에게 말의 가시가 더 많았는지 몰라, 가시를 감추어둔 나의 말이 그대 목구멍에 상처를 남겼는지 몰라. 다시 청어를 구우며 서툴게 발음해 보는 용서와 화해, 내 말속에 가시를 걷어내고 그대 가시 속에 숨은 말을 찾아 싱싱한 소금을 뿌려 절인다. 보라, 내 마음의 바다로 푸른 손수건을 흔들며 돌아오는 청어떼들!
3
한 통의 편지가 헤엄쳐왔다. 또박또박 눌려 쓴 글씨 속에 잠긴 깊고 넓은 마음의 바다, 그리고 그대가 내게 보내 준 청어 한 마리를 다듬는다. 어쩌면 세상 살아가는 일은 상처투성이, 때로는 그 청어도 무늬로 남아 아름다운 용서의 무늬가 될 수 있다. 다시 청어를 굽는다. 아픈 상처들이 따뜻하게 익는다.
/노을
전다형
임종하던 아버지 각혈이었다 온 세상이 빈혈을 앓았다 내가 당도할 무렵 핼쑥한 서녘 입술은 굳게 닫혀 있었고 입가에는 평생을 비틀거리던 길들이 붉은 피를 물고 널브러져 있었다 꼬리를 길게 끌고 지나가던 저녁 해가 서녘 이마를 짚으며 혀를 껄껄 찼다 그때 피맺힌 목소리 한 짐 부려 놓고 북으로 떠나던 완행열차는 목이 터져라 쉰 기적을 울리며 터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리를 절룩이며 뒤따르던 늙은 구름이 서녘 굽은 등을 가만 가만 쓸어주었다
나는 바다에 불을 질러버렸다 푸른 슬픔이 파도치던 내 가슴으로 불길이 옮겨 붙었다 풍을 맞고 떠 있던 폐선 한 척 하반신을 물 속에 뺏기고 방파제에 머리를 쳐 박았다 술 취한 사내가 술렁이는 밤바다를 앞자리에 앉혀놓고 절망의 다리를 물어뜯었다 시뻘겋게 타고 있는 불길 속으로 부러진 길을 던져 넣었다 바다를 다 태워버렸다 불타오르는 바다 끝자락을 잡아당겼다 아버지 길 한복판이 뚝 부러졌다 온 세상이 정전이었다
약력/ 전다형 시인은 2001년 제 3회 사이버 신춘문예 우수, 2002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현재 부산시인협회. 부산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가을비 내리자 온 세월이 따라 내린다
길 위로 길로 엎어져 걸었던 길
무수한 치욕들이 잔잔히 내린다 길 위로
길 사이사이로 젖어들며 잔잔히 따라온다
삶을 부를 수 없었던 나의 이름들이 비를 맞으며 운다
치욕마저도 삶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들이 온다면
삶은 치욕이었다고 치욕은 삶이었다고
유연히 주장할 수 있을까 가을비 내리며 걷는다
길가로 모여들며 경악스럽게 처박힐 하수구로 모여들며
쏴악쏴악 걷는다 저 물들의 어깨동무를 따라서
비 한 가운데로 침투하여 서럽게 저들처럼 울 수 있다면
여름이 지나 온 가을날 앞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삶을 고백할 수 있을까 가을비 내리자 가을이
태연히 걸어와 어깨동무를 하며 울며 무너진다
메마른 마음들이 불안으로 모여들자 비는 쭉쭉
다리 세우고 달음질을 친다 결국 달려가서 끊을 오색테이프
없더라도 이 지상을 흐르는 메마름의 그대 나의 이름에게
펑펑 솟구친 울음 던질 수만 있다면 가을비 내린다
모든 집과 집들을 껴안아 가을 속에서 운다
나의 이름들을 불러주지 않아도 가을 속을 걸으며
가을비 한 가운데서 운다 펑펑 삶의 치욕들을 가을 하늘로
띄우며 운다 쭉쭉 발길 내닫는 가을비 앞으로
/ 발아래 비의 눈들이 모여 나를 씻을 수 있다면
이찬
비의 눈들이 모여 옹기종기 모여 나의 구두 굽을 핥고
비의 눈들은 눈을 감았다가 동그랗게 뜨며 옷 속 실타래 사이로 침투한다
나는 나의 살갗은 비의 눈을 마주치며 전율한다 무엇이
비의 눈길 마주보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젖지 못하는 것이다 온몸 비의 눈길 받아 소름끼치게 젖지 못한 것이다
발아래 옹기종기 모여 비의 눈들이 구두 굽과 마주쳐 흙탕물을 튕기면
냅다 비의 눈으로 주먹질을 해대고 싶어도 비 비는 땅과 나무와 모든 사물을
만나면 모든 것들 통통 뛰게 튀게 한다 난 통통 튀면서 팔랑거리지도
못하고 엉금엉금 비와 공기가 만나 생긴 불치병이 무서워
우산만 꺼낸다 우산만 꺼내어 비의 눈빛 바리케이드 친다
지금 이대로 비를 맞고 쓰러지긴 내 그리움의 질량은 너무 가볍기 때문이다
발아래 옹기종기 모여 간지럼 태우는 비의 눈 돌림이 버거우면
비의 추억 속으로 숨는다 깜깜한 미로 속으로 나를 디밀고
비의 눈짓 눈치채지 못하는 나의 무감각의 정수리에다 네온의 빛살을 주사한다
아아 무너지는 비 이젠 비도 안경을 준비해야 하는지 내가 안경을 벗어야 하는지
비의 눈들 옹기종기 땅을 훑고 나면 땅은 폴폴 살아나고 아스팔트도
미끈하게 맨 얼굴을 치장하는데 비의 눈살 찌푸리게 만드는 어쭙잖은 사내
나의 정체는 무엇인가 아아 무너지는 사내의 어깨 비의 눈길 통통 내려앉아
옹기종기 모여앉아 그 찌든 세월의 먼지 깡그리 씻어낼 수 있는가
나는 내가 두렵다
나는 내가 아프다
/ 할머니의 누드
이찬
할머니를 따라 옛날 텃밭에 갔습니다 삐죽이 솟은 옥수수들이 덜 익은 가슴을 달고 묵묵히 더위를 견디고 있습니다 바람은 온데간데없습니다 바스락거리는 콩잎들이 제 열매를 키우지 못해 반쯤은 쓰러졌습니다 할머니의 일흔 여덟의 생애마냥 콩잎들이 주름졌습니다 아니 얼굴이 파래졌습니다 할머니는 텃밭에 콩처럼 쭈그리고 앉아 쓰잘데없는 콩의 뿌리를 홱홱 뽑아버렸습니다 바쁜 손길 피해 무럭무럭 자라난 잡풀들도 제 생애를 마감합니다 한마디로 할머니의 고사작전에 걸려?! 榕? 푸른 제 생애를 말리는 것입니다 들길 따라 오가는 사람은 볼 수가 없습니다 할머니가 밭 전부를 독차지한 것입니다 부끄럼도 없나 봅니다 햇살을 마주하며 윗저고리를 확 벗어버렸습니다 할머니의 쪼그라진 가슴이 탱탱 말라붙어 있습니다 할머니의 몸에서 아웅다웅거리던 살들이 모두 빠져나간 지 오래입니다 할아버지가 주던 그리움들이 길을 잃은 지 오십 년을 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텃밭에 가면 할머니의 옛집에 가면 할아버지를 담아 옵니다 가난한 뼈마디마다 전해져 오는 할아버지에 대한 통증을 자랑스럽게 견디어옵니다 우리 살던 옛집 텃밭에 가서 할머니는 할아버지가 남긴 옥수수와 깨깨거리며 자라나는&nb! sp;깨들과 막 가을을 담는 배추 잎사귀와 ? サ欲? 무슨 사연들을 주고받는지도 모릅니다 한참이나 자리를 뜰 줄 모르고 배추마냥 땅바닥에 퍼질러앉아 있으니까요 해가 뉘엿뉘엿 산을 넘어갑니다 해는 빨갛게 달아오르는 할머니의 그리움 싣고 저 멀리 할아버지의 묘를 한 바퀴 돌아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할머니도 텃밭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사무침이 이젠 뼈로 앙상한 가난한 몸을 씻습니다 오늘밤 오랜만에 할아버지를 맞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움으로 마른 젖무덤과 사무침으로 굽은 허리를 살짝 보여주기 위해 찬물을 들이붓습니다 뼈에 부딪히는 물들이 쨍그랑쨍그랑거립니다 오늘밤 할머니는 완벽한 누드입니다 오늘밤 할머니의 누드는 밤새도록 할아버지에게 ! 소곤거릴 것입니다 정말입니다
/할머니 기계는 여전히 작동중이다
이찬
할머니 기계는 소주를 먹고산다 소주를 먹으며 알딸딸하게 굴러간다 간혹 그 기계를 건드리는 사람들 언제 갈꼬 편하게 갈끼다 소주를 먹인다 소주 먹은 기계 할머니는 이젠 덜커덕거린다 한다 소주를 부어도 담배를 삼켜도 기계가 윙윙거린다 한다 할머니를 꽂은 코드가 빠졌는지 모른다 청춘을 실어 나르는 전깃줄 전기를 마시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할머니 기계는 초록을 먹고산다 초록으로 떼를 두르는 그 기쁨의 나라 언젠가 끌려가 삶을 고백하는 그&! nbsp;날을 그리는지 모른다 할머니 기계는 이젠 작동이 쉽지 않다 한다 그 많은 전류들을 다 흘러보냈기 때문이다 아직도 할아버지의 전압으로 퓨즈가 나갈 때가 있다 여전히 할머니 초록기계는 작동중인가 보다
/돌탑
이찬
누군가 버리지 못한 마음 하나 있어 얹었다 마음 하나 버릴 수 없어 얹었다 버릴 수 없고 버리지 못한 마음들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위태로움 꿰어차고 모였다 비 내려와 마음들을 비집고 씨 하나 낳았다 미끌미끌 흔들리다 어두운 마음들을 붙잡았다 바람 한 자락 밀려오면 사그륵사그륵 부딪치며 껴안았다 그랬구나 지나가는 마음들이 제 멋대로 모여도 탑 하나 솟아오르니 산은 지나가는 마음의 짐들 꿈들 부려놓게 하였다 혹 누군가 버릴 수&nb! sp;없는 마음을 얹다 와르르 무너져버릴 저 탑이건만 돌 하나는 그대로 남았다 버릴 수 없고 버리지 못하는 마음 하나 짊어지고 가는 이 쉬어가라고 돌 하나는 마음 하나 열어 놓았다
/공기의 꿈
이찬
저 부유하는 무허가의 땅
공중을 출렁이는 마음의 눈들
웃음 주고받긴 켜켜이 쌓인 먼지
구름
먹구름
먹장구름
그
운명적 사랑으로
비를 만들고 싶다
눈을 낳고 싶다
/술탄아흐메트 사원을 훔치다
이찬
블루모스크라고 너의 이름을 불렀다 저녁이 내리면 실루엣은 온통 검게 빛나고 낯선 풍경을 착취하는 나의 사진기는 발을 씻고 예배드리는 사람들 발자국을 호명하였다 가난한 사람들의 기도는 화려한 모자이크와 타일조차 아랑곳 않는다 대답조차 흘리지 않는다 어느 제국의 시대가 있었기에 블루모스크는 아름다운 풍경으로 남았을까 경배함에 따르는 무수한 기원의 노역들이 숨쉬고 있는 건 아닐까 저녁을 따라 사람들의 발길이 돌아가자 몇몇 불빛으로 둥글게 몸을 굴리는&! nbsp;블루모스크의 뒤척임 끝내 아무 것도 팔지 못하고 돌아서는 어린 호객꾼의 귀가 구두닦이 소년의 막막함 몸무게를 달아 돈을 바꾸는 꼬마의 텅 빈 호주머니 술탄아흐메트 사원은 풍경들의 소용돌이였다 블루모스크라고 너의 이름을 호명하면 아름다움만이 남아 지울 수 없는 가난과 아픔을 덮었다 조용히 술탄아흐메트 사원은 씨줄과 날줄의 모하메드의 카펫을 팔기 위해 엎드리기 시작하였다 가난한 블루모스크를 착취하였던 이스탄불에서의 저녁 나는 풍경의 아름다움만 훔치듯 찍고 술탄아흐메트 사원은 등만 보이고 오래이 손을 내밀었다 경배하듯 터지는 저녁 불빛들 환하게 드러나는 블루모스크의 슬픔들
/약력: 이찬 시인은 1967년에 출생. 1997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풀의 감옥」 외 3편으로 등단. 시집으로 『발아래 비의 눈들이 모여 나를 씻을 수 있다면』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