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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문화류씨시랑공파미재공(提學)종중 원문보기 글쓴이: 재욱
문화류씨의 기원 | 외사씨의류씨평 | 류씨의 관향 | 문화현의 연혁 |
문화류씨분파도 | 문화류씨의 세덕 | 문화류씨 집단세거지 | 문화류씨의 수보연혁 |
항렬도 | 문화류씨 시조 류차달 | ||
◈ 문화류씨의 기원(起源) ◈ 우리나라에서 류씨(柳氏)로서 국사(國史)나 공가문헌(公家文獻)에 처음 등재된것은 고려사(高麗史)와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이다. 고려사 열전(列傳)의 문간공 류공권(文簡公 柳公權)의 주(註)에 『 공의 6 세조 차달(車達)은 고려태조의 개국(開國)을 도와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관직은 대승(大丞)이었다.』고 하였다. 동국여지승랑의 황해도 문화현(黃海道 文化縣)의 인물편에 『 류차달(柳車達)은 고려 태조가 남방(南方)을 정벌 을 정벌할 때 수레를 많이 내어 군량을 공급함으로써 그 공으로 대승에 제수함과 아울러 삼한공신으로 사호(賜號)하였다.』 고 하였으며, 그 아들 좌윤 효금(左尹孝金)이 일찌기 구월산을 유람하다가 대호(大虎)를 만나 그 입속에 걸려있던 비녀를 빼줌으로써 그 음덕(蔭德)으로 자손이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고 산신이 현몽했다는 이야기가 실려있고 , 또한 좌윤공의 5 세손 문간공 공권(文簡公 公權)이하 수대의 사행(事行)이 휼륭히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류씨는 고려 개국 이후 조선을 거쳐 우금 천여년 동안 많은 명경석학(名卿碩學)이 계속 배출되어 국가와 휴척(休戚)을 함께 한 명벌(名閥)로써 옛부터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 왔다. | |
회현리 충신 열녀문(향토유적 제3호) 문화류씨 가문의 정문 |
◈ 외사씨(外史氏)의 류씨평(柳氏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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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씨의 관향(貫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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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사눌의 문화류씨 중시조로서 자는 이행이다. 기념물제 5 호 소재: 인천 서구 경서동 |
◈ 문화현(文化縣)의 연혁 ◈ 고대 단군조선(檀君朝鮮)때 당장경(唐藏京)이었는데 고구려 (高句麗)때에 이르러 궐구현(闕口縣)으로 고쳤다. 고종 32년을미1895에 군(郡)이 되었더니 경무(庚戊)1910한일합방이 된후 신천군(信川郡)에 병합되어 문화면(文化面)이 되었다. 단군(檀君)께서 처음 평양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이곳 당장산(唐藏山: 구월산) 으로 옮겨 당장경(唐藏京)이라 일컬었는데 조선조에 이르러서도 이곳에 삼성사 를 지어 환인(桓因).환웅(桓雄).단군(檀君)3위를 모시고 향사하였다. 이곳 문화에서 동쪽으로 안악군계(安岳郡界)까지 19리요, 남쪽으로 신천군계 (信川郡界)까지 13리요. 서쪽으로 송화현계(松禾縣界)까지 47리요, 은율현계(殷栗縣界)40리요. 북쪽으로 장연현계(長連縣界)까지42리요, 경도한양까지는477리이다. 이 문화 고을의 풍광을 읊은 제영중에 조선조의 문신이 이초는 [류차달 : 고려 태조조 공신 문화류씨 시조] 이에 태조께서 공에게 삼한공신(三韓功臣)에 봉함과 아울러 대승(大丞)의 관작을 내리고, 차운달량(車運達糧)의 뜻을 취하여 차달(車達)이라 사명하시었다. 배위 김씨(金氏)는 신라 태부 알지(太傅 閼智)의 후손 균의 따님으로 2남을 두어 효전(孝全)은 대광백(大匡伯)에 추봉되고, 효금(효금)은 좌윤(左尹)을 지내었다. 동사(東史)에 의하면, 고려태조가 장차 견휜을 치려하는데 군량이 부족함을 걱정하니 장수들이 남방(南方)은 토지가 비옥하여 백성들의 남은 곡식이 많습니다. 하였다. 이 때 공께서 백성들의 곡식을 약탈한다면 어찌 날리를 평정하고 포악무도한 적도를 무찌르는 명분이 설수 있습니까 저의 집에 비축된 곡식이 있으니 그것으로써 군량의 공급을 돕겠읍니다. 하고, 하룻밤 사이에 수레 일천 대를 만들어 군량을 보급하였다. 구월산에 흥률사(興栗寺)란 절이 있는데, 이는 신라 헌덕왕(憲德王)이 도의선사 (道義禪師)로 하여금 자리를 잡아 창건케 한 절이다. 그 후 고려 공민왕(恭愍王) 5년 丙申(1356)4월 법원선사(법원선사)가 중수하고 조선(조선) 숙종(숙종)10년 갑자(1684)애 또 중수 되었다. 이 절에 한 신인(神人)이 있었으니 눈섭이 그린 것 같고 머리는 검으며 살결은 눈처럼 희고 마음씨는 해처럼 밝으며 주공(周公)의 뜻과 공자 의 생각 같아 인의의 은혜가 있고 도덕이 빛났다. 어느날 정자 와서 왕장군의 진중에 군량이 떨어져 전공을 이룰지 알수 없는데 이런 위급한 때를 당하여 한가히 졸고 계십니까? 하였다. 신인이 잠을 깨어 내심으로 충절을 하 할 것을 다짐하고 하룻 밤 사이에 수레 천 대를 제작하여 군량을 실었는데 운전하기가 극히 어려웠다. 이 때에 이절의 부처의 신력으로 청의 와 홍의를 입은 신군 일천여명을 동구 밖에 출동시켜잠시에 그들로 하여금 군량을 운반하여 전공을 크게 세우고, 삼한(三韓)을 통합하게 하니 그 공이 은탕왕(殷 湯王) 때 이윤(伊尹)과, 주 무왕(周 武王) 때 여상과 같은지라, 이로 인하여 신인에게 차달이란 이름을 주었다. 이 절의 영험이 아니었다면 왕장군이 삼한 통합의 대업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하였다. |
◈문화류씨분파도(文化柳氏分派圖)◈ 一 世 류차달(柳 車達) 大丞公 | 二 世 효금(孝金)左尹公 | 三世 김환(金奐)中尹 |
◈ 문화류씨 세덕(世德) ◈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등재된 문과 급제자는, 고려조에 문간공 공권을 비롯하여 복야공 택, 문정공 경, 장경공 돈, 문간공 관, 충경공 량 등 6인이며, 조선조에 들어서는 문숙공 사눌을 비롯하여 134인 도합140인이다. 그 밖에 무과와 생원. 진사에 급제한 이는 헤아릴수 없이 많다. 족보는 그 씨족의 계보로서 우리 나라에서 가장 처음 우리 류문에서 발간 되었으니 이른바 영락보(永樂譜)이다.
◎ 을유보(乙酉譜) |
◈항렬도(行列圖)◈ 본 항렬도는 고종 원년(1864)에 간행된 갑자보 당시에 전 종종의 결의로 제정된 항렬로써 그후 간행된 병인보(1926년 간)에도 역시 그대로 준수하였다. 오행상생으로 배열하여 통운을 마춘것이 타성씨와 다른 특징이다. 항렬은 종중의 규약인만큼 후손된자 마땅히 선세의 유 훈을 쫒아 대대로 준행해야 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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