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숙 오정아 정을병 님!(교과서 역사왜곡 규탄대회-속초-2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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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숙/단편"꽃을 위하여"외
-오정아/단편/"관용"외
-정을병/장편/"마지막 날의 한강"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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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경아 님이 논산을 상징하는 은진미륵과 황산벌 전투에서 5000여 군사를 이끌고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계백 장군 묘소 앞에서 찰칵 기념사진을 -------------------
-한소협은 1월 14일 오후 2시 명동입구에서 "고구려사 지키기 결의대회를 개최한다.
-만리장성을 펜으로 후벼파서 작은 고추가 왜 그렇게 매운지를 전 세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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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도서관에서 퍼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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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정을 붙이고 사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으리라. 하는 일이 좋아서, 살고있는 곳이 좋아서, 같이 있는 사람이 좋아서, 그러나 얼마큼씩 세월이 지나면 좋았던 것도 싫어지는 것이 인간의 생리가 아니던가. 하물며 40년간 한 가지 일만 하고, 한 곳에서만 산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닐 것 같다.
헌데 정을병 선생 댁을 찾은 내가 받은 첫 인상은 선생의 체취가 배인 채 그냥 집과 사람이 하나라는 느낌이었다. 특별히 단장을 하거나 손을 보지 않아도 되는, 그냥 가만 두어도 편한 곳, 선생은 이 집에서만 40년을 살면서 40년간 한결같이 소설을 써오셨다고 한다.
토요일 오후 2시로 약속이 되었기에 그보다 조금 일찍 북가좌동의 선생 댁에 도착했는데 집은 비어 있었다. 차를 대고 다시 전화를 걸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약속을 잊으셨을까? 그러나 15분쯤 지났을까, 외출에서 돌아오시는 선생과 만났다. 밖에서 점심 약속이 있으셔서 나가셨다가 급하게 마치고 돌아오시는 길이란다.
문을 열자 집안 가득 차있던 난향이 먼저 나를 맞는다. 한국자생란보존회를 창립하신 분임을 알기에 당연하다고 생각이 되었지만 창가 쪽으로 가지런히 정돈되어 있는 작은 난분(蘭盆)들을 보니 정겨움이 한껏 더했고, 그들 모두가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아 자못 기분이 우쭐해진다. 현관문에서 정면으로 놓여있는 책장 가득이엔 선생의 작품집들이 꽂혀있고, 그곳에서 맞은 편이 되는 현관 옆방이 집필실이란다. 컴퓨터 앞에는 앉은뱅이 의자 하나가 주인의 자리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소설문학의 대가로 그만한 작품을 쓰는 작가의 집이라기보다 그저 보통의 가정으로 보이는 집, 출가한 딸을 빼고 선생 내외분과 아들이 함께 살고 계시단다.
난이 있는 창가의 소파에 마주 보고 앉았다. 오후의 햇살이 난이 있는 창가를 비켜가고 있었다. 난향속에서 선생의 말씀을 듣게 되었으니 이 또한 얼마나 멋진 일인가.
정을병(鄭乙炳)선생은 1934년 7월 5일 경상남도 남해에서 태어나셨단다. 50년대 중반에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신 것을 알기에 어떻게 신학 쪽을 택하시게 되었느냐고 여쭤봤더니 당시 집안이 모두 기독교 집안이셨단다. 누님도 신학대학을 졸업했고, 매형도 목사이며 신학대학 교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선생은 신앙촌(박태선), 통일교(문선명) 등 신흥종교가 성하던 때에 어머니께서 그런 종교에 빠지게 되셨고, 그 영향 속에 종교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되어 삶의 의미와 존재성에 대한 문제를 문학에서 찾고자 했다 한다. 26세때인 1959년 <자유공론>(주간 이종환) 창간 10주년 기념 제1회 신인문학상에 당선(심사위원 : 김동리.백철.최정희) 했지만 잡지가 곧 폐간되는 바람에 28세가 되던 1961년 <현대문학>에 김동리 선생의 추천을 받아 다시 등단하게 되었단다.
그러나 선생의 삶은 그렇게 소설만 쓰도록 되어있진 못했나보다. 1973년부터 문협 소설분과회장으로 있을 때인데 유신헌법 반대 지지를 했다는 이유로 74년 반공법으로 체포되고 곧 문인간첩단(5명)으로 몰려 투옥되었다. 어쩌면 선생이 문학의 사회참여에 더욱 적극이게 된 것은 바로 이 때를 기점으로 하였을 것 같다.
어려움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시는 분, 선생은 그 해에 한국소설가협회를 만드셨다. 그 동기를 여쭤봤다.
"당시 조연현 선생과 김동리 선생이 문협 이사장과 관련한 갈등과 대립으로 소설가들이 구심점을 찾지 못하고 있어서 뜻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한국소설가협회를 창설했습니다. 그 때 그러한 사정이 있는 만큼 김동리 선생은 개입시키지 않고 유주현 선생을 회장으로 추대하고 내가 중앙상무위원을 맡았었지요."
그런 선생이 30여년이 지난 지금 한국소설가협회 회장이시다. 그러면 지금의 소설가협회는 어떨까?
"사단법인 한국소설가협회는 문인 중 소설가로만 구성된 단체로 목적은 소설가의 권익옹호, 친목도모와 신인 발굴 및 후진 양성 등에 있지만 소설가협회의 특징은 문인 중에서도 프로작가 즉, 전업 작가 집단이라는 점입니다. 시나 수필 등은 직업을 가지고 해나갈 수 있지만 소설은 전업으로 몰두하지 않으면 어렵기 때문에 전업작가로서의 생활보장과 신분보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창작여건의 조성이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소설가협회는 아까 얘기한 데로 1974년 3월에 발족하여 초대 유주현(柳周鉉) 회장을 시작으로 김동리(金東里), 한무숙(韓戊淑), 김광식(金光植), 홍성유(洪性裕) 선생 등 우리 나라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분들이 회장을 맡아 해왔고, 1997년부터 대표위원으로 있다가 지난 1999년 1월부터 제가 회장 일을 보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문인 단체는 예총 산하 한국문인협회가 있고,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가 있고, 민족문학작가회의, 또 민예총 등이 있지만 이들 단체는 문학의 모든 장르 - 시·시조·소설·수필·아동문학·희곡·평론 등 - 를 포괄하고 있어 회원 수가 수 천명에 이르는 만큼 규모 또한 비대해서 각개 회원의 개인적 권익이나 친목 면에서는 효과적인 기능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렇게 되자 회원이 많은 장르는 지연이나 학연 또는 출신에 근거한 소단위 동아리로 나뉘고, 회원이 적은 분야는 별도의 협회를 결성하고, 보다 실질적으로 권익을 옹호하고 친목을 도모하게 되는데 한국소설가협회도 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문학을 대표하는 것이 산문이요, 산문을 대표하는 것이 소설이라는 논리에서 보면 한국 문학인의 정서를 대표하는 단체라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정을병 선생이 회장으로 취임 후 소설가협회는 더욱 실리적으로 힘을 확보하고 또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 우리 소설가협회는 회원이 약 700명이고, 연회비 수입이 5천만원이 넘게 되고 여러 가지 사업들도 추진해서 지금은 1년 예산이 10억 정도 됩니다. 스토리 뱅크 구축과 함께 우리 회원들에게 실질적인 도움도 되고 있습니다. 정기적으로 일년에 두 차례 이상의 세미나를 개최하는데 1회는 해외에서 국제 문학교류를 겸하고 있습니다. 또 봄.가을 두 차례의 문학기행이 있고, 계간이던《韓國小說》을 월간으로 발간하고 있는데 원고료도 지급하고 있습니다. 또 지난 1997년에는 호주의 시드니 작가마을에서 호주 작가들과 세미나를 가졌었고, 1998년에는 터키의 수도 이스탄불에서 터키 작가들과 함께 양국 문학을 서로 알리고 이해하는 토론회도 가졌습니다."
스토리 뱅크를 말씀 하셨는데 그건 어떤 동기로 만들어진 것입니까?
"제가 펜클럽 부회장을 3번 그러니까 9년을 했고, 그 동안에 1988년 제52회 세계작가대회(국제PEN서울대회)를 치렀는데 그 준비위원장을 했지요. 그 때 소련이나 중공 및 동구권의 공산진영 작가들은 거의 PEN에 가입하지 않았었는데 그들을 서울PEN에 불러들임으로 올림픽 이상으로 국제화합과 동서진영의 문화 교류에 큰 역할을 하게된 셈이지요. 그 행사를 치르고 한 1억 정도 비용을 남겨서 그걸로 펜클럽 사무실을 구입하여 셋방살이에서 해방시켰고요. 그런데 소설가협회 회장이 되어서 보니 1년에 회비가 천여만원 정도 들어오는데 그걸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책도 안 팔리는 상황이라 무언가 직접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이 있어야겠다 생각해서 만든 것이 스토리 뱅크입니다. 전업작가를 위한 방편으로 정부로부터 10억원 정도를 지원받아 스토리 뱅크에 스토리를 넣으면 10만원씩 지급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1만5천 건 정도 입력이 되어 있습니다. 이건 세계에서 우리 나라만 있는 유일하고 특수한 제도입니다."
스토리 뱅크는 문예작품을 DB로 구축하는 문화산업 전반의 콘텐츠 사업으로 상상력이 풍부한 문인들의 창작 스토리와 작품을 데이터베이스에 담아 영화, 에니매이션, 게임, 뮤지컬 등 문화산업의 콘텐츠로 활용한다는 것이다.
한국소설가협회 회장으로서 선생이 시작한 스토리 뱅크는 매우 독창적이고 획기적인 사업으로 '모든 문화상품의 모태는 창의력'이라는 전제하에 원작과 스토리를 수집 분류하여 소재빈곤으로 곤란을 겪고 있는 관련분야에 제공한다는 것인데 인터넷 공모도 병행해 창작 소프트웨어와 부가서비스도 개발할 것이라고 한다. 문화산업의 기획과 생산, 마케팅을 연계시키는 산학 협동 체제, 어쩌면 우리 나라 문화 산업의 가장 취약한 부분에 선생이 뛰어드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토리뱅크에 저장된 작품은 영어로도 번역될 것이며, 온라인과 오프라인이 결합된 이러한 사업은 TV, 만화, 디지털 북, 에니메이션 등 이를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부분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소설의 날도 제정하셨는데 그건 또 무슨 동기가 있으셨습니까?
"소설의 날은 2000년 11월 3일에 제1회 행사를 가졌고, 지난 해 11월 3일에 제2회 소설의 날 행사를 가진 바 있습니다. 소설의 날은《홍길동》의 작가 '허균'의 출생일인 11월 3일로 정했는데, 우리 소설의 전통을 되새길만한 기념일이 없었다는 것은 자못 유감 천만한 일로서 '우리 소설의 정통성을 확인하고 소설가의 창작 의욕을 고취하는 한편 소설 문학이 나아가야 할 이정표를 제시하고자 한다'는 취지에 따라 제정된 것입니다."
얼마 전 한국갤럽이 전국의 만 18세 이상 남녀 1,605명을 대상으로 '우리 나라 독서실태와 의식에 관한 조사'를 했는데, 가장 읽고 싶어하는 장르별 선호도는 현대소설 30.4%, 수필 18.9%, 역사 및 시대소설 18.2%, 추리 및 공상소설 16.3%, 취미 및 실용서적 11.4%의 순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문인으로는 우리 나라에선 이문열, 김소월, 황순원, 김진명, 윤동주의 순이고, 외국 작가로는 시드니 셀던, 헤르만 헤세, 톨스토이, 헤밍웨이, 펄벅 등의 순이었다고 한다.
책을 읽는 사람들은 소설을 가장 많이 읽을 만큼 소설은 문학 장르 중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설가의 양성이나 소설가를 지원해서 큰 작가로 키우는 제도적 장치 같은 것이 우리 나라에 없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선생은 말씀하셨다. 그런 중에 이와 같은 '스토리 뱅크'나 '소설의 날' 제정 등으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신 선생의 혜안이 놀랍기만 하다.
1976년엔가 문장용 타자기도 개발하셨던 것으로 아는데 그건 어떤 것이었나요?
"당시 공병우 박사가 타자기를 개발했었는데 공병우 박사와 친했지만 타자기를 갖고 있진 못했어요. 그런데 마침 월부장수에게서 그걸 살 기회가 생겨 구입해서 쓰는데 그건 사업용이어서 글쓰는 사람들에겐 많은 불편함이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문장용 자판을 개발해서 공병우 박사를 주어서 문장용 타자기란 이름으로 판매하기에 이르렀는데 '3벌식2'라는 문장용 자판으로 굉장히 속도가 빨라 타자 경연대회 같은 데선 이것을 써야만 우승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손가락의 사용 빈도와 글자의 사용빈도를 맞추어 개발해 낸 것인데, 그 시대는 원고지에 원고를 써다 줄 때인데도 내가 타자기로 쳐다 주니 신문사에서도 그 때부터 받아주기 시작했지요."
난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셨습니까?
"원래 식물에 관심이 많았는데 분재를 좋아해서 온 마당이 분재원이 되다싶이 했어요. 그런데 친구들이 외국에서 난을 가져다 키우면서 자꾸 죽이고, 또 외국 것만 들여오는 것도 그렇고 해서 식물도감을 보면서 자생란 산채를 시작했지요."
선생은 한국자생란보존회를 창립했고, 월간《난과 생활》을 창간했다. 그리고 한국자생란보존회 제2대 회장이 되자 1983년 1월 12일 한국 난 용어를 제정하기도 했다. 갓줄무늬, 얼룩무늬, 빗살무늬, 녹색갓줄무늬, 안개무늬, 그물무늬, 잎끝무늬, 가운데무늬 등이 그 때 제정된 이름들이라고 한다. 그렇게 선생은 매사에 진취적으로 시작과 완성을 정확히 했고, 하나를 이루면 또 새로운 일을 찾아 그 일을 해내곤 했다.
대표작 또는 가장 아끼시는 작품은 어떤 것인가 여쭤봤다.
"책을 68권 냈는데, 작품 중 40편은 장편이고, 150편 정도가 단편이지요. 《아테나이의 비명》 《피임사회》《인동덩굴》《마지막 날의 한강》《까치가 날다》《오월 놀이》등이 비교적 의미를 많이 두는 작품이라 할까요? "
정을병 문학의 작품경향을 보면 크게 몇 가지로 나누어지는 것 같다. 그러니까《아테나이의 碑銘》이나《카토의 자유》같은 데서는 역사와 권력이 인간의 자유에 미치는 영향을 다루었고, 《개새끼들》《유의촌》《육조기》등에서는 정치 및 사회 현상의 모순과 부도덕을 그의 특유의 거침없음으로 고발했는가 하면, 《서울사냥》《아첨꾼은 오래 산다》《남자 두꺼비시대》등에선 생활 속의 문제에 집착하는 등의 작품 경향을 보이고 있다. 소위 아카데믹하면서도 사회참여적인 고발류의 작품들이 초창기에는 많다가 사는 문제 곧 어떻게 사는 것이 보다 즐겁고 행복한 삶인가에 관심을 갖는 탈이데올로기적 인간의 원초적 삶의 문제로 눈길을 돌리더니, 근래에는 명상적인 작품 곧 깨달음의 문학쪽에 관심이 옮겨가는 추세인 것 같다.
최근에 소설집《꽃과 그늘》로 제7회 한무숙문학상도 수상하셨는데 우리 문단 및 후배 문인들에게 한 말씀 주시지요.
"가장 큰 문제 곧 결점은 글을 쓴다는 작가들이 너무 책을 안 읽는다는 것이예요. 수필가도 그렇고 소설가도 그렇고 남의 작품을 읽지 않는다는 것은 작가들이 좋은 작품을 쓰지 못한다는 책임 곧 작품이 재미가 없다는 것도 되지요. 곧 읽고싶어지는 좋은 작품을 작가가 써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이지만 역으로 생각하면 작가들이 책을 읽지 않으니 좋은 글을 쓸 수가 없는 것이지요. 나도 시내에 나갈 때마다 서점에 들러 너댓권씩 꼭 책을 사다 읽습니다. 둘째는 속독하는 기술을 배워서 빨리 읽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작가들은 늘 시간이 부족하니 책을 읽기가 어렵지요. 그러니 빨리 읽을 수 있는 기술을 가져야 쉽게 그리고 많이 읽을 수 있는 것이지요. 셋째는 출판사가 문단이나 문학 생각을 안하고 작품보다도 인기작가에 치우쳐서 출판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출판사는 판매 위주의 출판을 지양하고, 언론사도 인기 위주의 작가에 편중하는 그런 편파적인 평가보다는 참으로 좋은 작품을 독자에게 소개할 수 있는 바른 평가의 문화가 이뤄져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의 삶과 작품에 대한 계획은 어떠신지요?
"아무나 쓰지 못하는 작품을 쓸 생각입니다. 깨달음과 관계가 있는 작품 곧 명상이야기 같은 것을 쓰고 싶습니다. 제가 10여년 전부터 명상을 하고 있어서 그런 책들을 좀 보고 싶은데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 명상에 관한 책을 한 권 써야겠다 생각이 들어서 <21세기의 생활 명상>(범우사)이란 책을 하나 썼지요. 앞으로는 누구나 쓰는 그런 책이 아닌 책을 쓸 생각입니다."
건강 관리는 어떻게 하시는지요?
"일본 작가 '오에 겐자부로'도 그렇습니다만 저는 생활에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의식주를 간소화한다는 것인데 첫째 '주'(住)는 집을 안 늘린다. 둘째 '의'(衣)는 옷을 사지 않는다. 셋째 '식'(食)은 하루 한 끼만 한다(세끼에서 두끼로, 두끼에서 한끼로 줄임)는 것입니다. 내 체중이 55kg인데 '적정 체중 이상의 체중을 갖고 있는 것은 사치다'라는 생각입니다. 지금 살고있는 집에서 40년을 살았는데 앞으로도 계속 이곳에서 살 것입니다."
정을병 선생은 우리 나라 현대사를 산 지성인으로 그 역사의 현장에서 체험적인 삶을 산 작가다. 그가 있는 곳이 우리 현대사의 현장이었고, 그 현장은 우리가 감내해야 할 아픔과 고통과 슬픔이기도 했다.
선생은《아첨꾼은 오래 산다》라는 작품에서 주인공의 독백을 통해 작가가 어떤 삶의 현장에 있어야 하는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시대의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밥 한 번 굶어보지 않고, 직장 한 번 목이 날라 가 보지 않고..., 데모에 한 번 가담해 보지 않고, 감옥에 한 번 쳐 박혀 보지 않고, 책 한 번 판금 되어 보지 않고 순탄하게 지낸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겠지만 과연 그게 작가로서 시대를 올바로 음미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이냐고 묻는다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거야'
선생은 그렇게 살아왔다. 그러나 그의 이력을 보면 화려하다기보다 참으로 다양하다. 공병우 박사와 함께 문장용 타자기를 개발 제작 보급한 공으로 한글학회 공로상을 수상하는가 하면, 1968년부터 대한가족계획협회 홍보부장, 지도부장으로 있으면서 그 유명한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를 공모하여 전국적인 둘 낳기 운동을 전개하여 인구증가율 억제에 지대한 공을 세움으로 보사부장관 표창을 받는가 하면, 한국자생란보존회를 창립하여 한국의 자생란 찾기와 보급에 힘쓴 '난의 민족주의 운동'으로 산림청장의 표창을 받는 등 그는 늘 독특하고 새로운 일을 쉬지 않는 사람이었다.
선생은 현대문학상(1967), 한국창작문학상(1974), 한국소설문학상(1976), 서울시 문화상(1985), 대한민국문학상(1987), 대한민국 문화훈장(1990), 한국난문화대상(1990), 한무숙문학상(2002) 등 크고 많은 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월간《동서문학》창간 및 주간, 월간 《난과 생활》발행인, 한국기업문화협의회 회장, 한국방글라데시협회 이사, 한국이스라엘 친선협회 부회장 등도 역임하는 등 문학 외에도 활동 영역이 참으로 다양하다. 그러나 선생은 소설가다. 이 시대의 참 이야기꾼이다. 끊임없이 자신을 새롭게 하며, 작가들의 권익 확보에도 늘 앞장서신다.
글을 쓰는 것이 직업인 작가 특히 소설가에게 있어서 사회 참여는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선생께서 모 잡지와의 인터뷰에 '자유가 된 뒤에 자유를 부르짖는 것은 진정한 참여라 할 수 없다'라고 한 것이 기억난다. 그러나 이어서 '작가는 오직 작품으로 주장하고 논리를 얘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평생을 문학에 매달려온 작가 정을병 선생, 그는 사회 전반에 흐르고 있는 물질만능의 사조와 정신문명의 황폐화를 우려하고 있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역사의 흐름 속에 도덕성과 가치관이 점점 소멸되어 가는 것을 우려한다.
진정한 문학의 사명은 무엇인가. 역사적인 것인가. 정신적인 것인가. 그러나 작가 정을병은 어느 시대이던 그 시대 속에서 의연하게 그 시대를 살며 끊임없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 해냈다. 그래서 선생은 '시대를 사는 작가'인 것이다.
3시간여의 오랜 시간동안 귀한 말씀을 주시고, 문밖까지 나오셔서 배웅을 해 주시는 69세라는 선생의 눈빛이 젊은이보다도 빛난다고 생각한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그 눈빛은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무슨 일인가를 금방이라도 또 시작할 것 같다는 선입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헤어져 나오는 나의 마음 가득 이 시대에 선생 같은 작가가 계시다는 것이 참으로 든든하고 자랑스러움을 갖게 한다. 선생의 새로운 계획 속에 태어날 작품이 더욱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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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을병 회장님 안녕하세요.사모님도 안녕하시구요.
논산 탑정저수지에서 선생님 내외가 나란히 앉아 술 한 잔 기울이는 모습이 선합니다.
선생님과 공통점이 딱 한가지 있습니다. 제 몸무게가 55kg이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