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月, 음 7월 11일) 광복절

2005년 - 8. 15 대축전, 민족통일대회 열려
8.15 민족대축전에 참가하고 있는 남·북·해외 대표단 4천여명은 오늘 오전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민족통일대회'를 열고 민족화합과 통일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교류와 협력을 더욱 확대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대표단은 대회에서 남과 북의 협력과 교류를 발전시키고 민족공조의 폭을 넓혀 6.15가 보여준 통일의 설계도를 현실로 만들자는 내용의 '7천만 겨레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채택해 발표했습니다. 남.북.해외 대표단은 이어 서대문형무소로 이동해 역사관 등을 둘러본 뒤 일본의 역사왜곡과 군국주의화 움직임을 비판하는 '대일 특별성명'을 공동 발표했습니다. 남북 당국 대표단은 오후에 백범기념관에서 공동행사를, 그리고 민간 대표단은 저녁 7시까지 장충체육관에서 태권도·노래경연 등의 체육·오락행사를 계속합니다. 이어 당국·민간 대표단 모두 저녁 7시 반부터 공동준비위원회가 마련한 축하연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하루 일정을 마칠 예정입니다. <YTN>
2005년 - 남북 이산가족 화상상봉 시작
광복 60주년을 맞은 오늘 분단 사상 처음으로 남과 북의 이산가족들이 컴퓨터 화상을 통해 헤어진 혈육을 만나고 있습니다. 분단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화상상봉은 기대와 함께 우려도 안은채 시작이 됐지만 생각보다 더 큰 감동을 안겨주며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반백년 이상 떨어져 있던 가족들의 얼굴을 과연 컴퓨터 화상을 통해 알아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화질이 선명하고 대화의 시간 차가 없어 혈육을 알아보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오늘 화상 상봉은 오전 8시와 10시, 그리고 오후 2시와 4시 등 모두 4차례에 걸쳐 두 시간씩 진행되는데요. 각 시간대 마다 10가족씩 모두 40가족이 상봉을 합니다. 화상 상봉 부스는 이곳 대한적십자사 본부에 5개를 비롯해 인천과 대구, 부산과 대전, 그리고 수원과 광주 등 모두 6개 지방 도시에 마련돼 있습니다. <YTN>

2005년 - 국립고궁박물관 개관
국립고궁박물관이 광복 60주년을 맞아 오늘 경복궁 옛 국립중앙박물관 자리에서 문을 엽니다.
개관식은 오후 2시, 이해찬 국무총리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며 일반관람은 4시부터 7시까지입니다.
개관을 기념해 다음 달 30일까지 45일 동안은 무료로 개방되며 매주 월요일에 휴관합니다.
고궁박물관에는 역대 왕들의 도장인 어보와 초상화인 어진 그리고 궁중복식을 비롯해 가구와 장신구 등 조선왕조의 권위와 품격을 보여주는 700여 점의 왕실보물이 전시됩니다. <KBS>

1987년 - 독립기념관 개관
국난을 극복하고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조상들이 남긴 자취와 자료를 수집·전시함으로써 후손들에게 민족의 얼과 긍지를 심어 주기 위하여 1982년 8월 23일 독립기념관 건립 발기 대회를 개최하고 8월 31일 국민의 성금모금을 시작하였으며, 10월 5일 독립기념관 건립추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1986년 5월 9일 독립기념관법(법률 제3820호)을 공포·시행하였고, 1987년 8월 15일 충청남도 천안시 목천면(木川面) 흑성산록(黑城山麓)의 120만 8135평의 대지에 37동(1만 6959평)의 독립기념관을 세웠다.
1995년 8월 15일 ‘통일염원의 동산’을 준공하였고, 1998년 8월 11일 구(舊) 조선총독부 부재공원 조성을 개막하였다.

1975년 - 라만 방글라데시 대통령 피살 1975년 오늘 라만(Rahman) 방글라데시 대통령이 피살됐다. 라만은 이날 군부 쿠데타 세력에 의해 가족과 함께 살해당했다. 라만은 죽기 3년 전인 1972년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한 신생국 방글라데시의 초대 총리를 지냈고 1975년 대통령이 돼 국정의 기초를 다지던 중 비운을 맞이하고 말았다. <YTN>

1974년 - 육영수(陸英修, 1925~1974) 여사 세상 떠남 광복 29주년 기념식이 거행되던 1974년 오늘 서울 국립극장! 경축사를 낭독하던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청중석에서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이 뛰어나와 권총을 발사했다. 박 대통령은 연설대 뒤로 피신해 화를 면했지만 탄알이 단상에 앉아 있던 영부인 육영수 여사의 머리에 명중했다. 범인 문세광은 현장에서 체포됐다. 육 여사는 서울대병원으로 후송돼 응급수술을 받았지만 오후 7시에 49살을 일기로 타계했다. <YTN>

1974년 - 서울 지하철 1호선 개통
서울지하철 1호선이 1974년 8월 15일 개통됐다. 이날 오전 11시 청량리 지하철역에서 개통식을 갖고 첫열차 108호가 청량리-서울역간의 역사적인 첫운행을 시작하면서 지하철시대가 시작됐다.
서울에 고속대량수송수단인 지하철의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였다. 그러다 1971년 4월 12일에 착공, 3년4개월 만에 완공된 서울 지하철은 내자 2백36억원과 외자 94억원 등 총3백30억이 소요됐다.
지하15m를 달리는 지하철은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서울역-청량리 간 7.8km를 18분에 주파한다. 이로써 우리는 일본, 중국에 이어 아시아에서 3번째로 지하철을 보유한 나라가 됐다. <조선>

1969년 - 우드스톡 축제
미국이 베트남 전쟁의 수렁 속으로 한창 빠져들던 1969년 8월15일, 사랑과 평화를 호소하는 젊은이들이 뉴욕 북서쪽의 작은 마을 베델의 한 농장에 몰려들었다. 훗날 ‘우드스톡 축제((Woodstock Art and Music Fair)’로 불린 ‘평화와 음악의 사흘’이라는 록 축제가 15일부터 3일간 열리고 있는 곳이었다.
참가자는 당초 주최측이 예상한 5만명을 훨씬 뛰어넘어 40만명을 헤아렸고, 대회장 주변 32km는 이들이 타고온 자동차ㆍ자전거 등으로 가득 메워졌다. 조운 바에즈, 재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 등 당대 최고의 포크ㆍ록의 영웅들이 참가해 흥을 돋우는 가운데 학생운동가ㆍ히피 등 축제 참가자들은 반나(半裸) 상태로 강렬한 비트에 몸을 맡긴 채 사흘 밤낮동안 평화를 노래하고 반전을 부르짖었다. 히피이즘적 저항문화가 록과 결합한 절정의 자리였다. LSD와 마리화나가 공공연하게 매매됐고, 출산 여성과 심장마비로 죽는 사람도 생겨났다.
2번의 폭우, 어설픈 설비, 빈약한 식ㆍ음료 어느것 하나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젊은이들은 훗날 ‘평화운동의 전설’로 불릴 축제의 추억을 가슴에 안고 돌아갔다. 그리고 축제의 성공을 그들의 승리로 해석했다. 조운 바에즈가 ’60년대 진흙탕의 반영’이라고 평한 것처럼 축제는 반항적이고 낙관적이며 방종한 60년대를 상징했다. 젊은이들은 ‘우드스톡 축제’를 자신 세대의 연대(連帶)의 상징으로 받아들였고, 스스로를 ‘우드스톡 세대’라고 불렀다. 법정에 선 한 젊은이는 자신은 미국인이 아니고 ‘우드스톡 네이션의 일원’ 즉 ‘소외된 젊은이 나라의 국민’이라고 진술할 정도였다. <조선>

1950년 - 영국의 앤 공주(Anne Elizabeth Alice Louise, 1950~ ) 태어남
여왕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공(公)의 장녀. 켄트주(州) 베넨든여자학원을 졸업하고, 1973년 대위 M.A.P.필립스와 결혼하였다.
승마술에 뛰어나,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마술경기에 영국대표로 출전하였다. 1981년 런던대학교 총장에 취임하고, 1986년 국제승마연맹회장이 되었으며, 1988년에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위원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1948년 - 대한민국 정부 수립 해방 3주년을 맞이한 1948년 오늘 3년 동안의 미 군정을 끝내고 대한민국 정부가 출범한다. 이승만 박사와 이시영 선생을 정·부통령으로 한 우리 나라의 제1공화국이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영향력을 키우려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38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이 분단된 상태에서 수립된 남한만의 단독정부다. 결국 2년 뒤에는 민족상잔의 대참극인 6.25전쟁이 일어난다. <YTN>

1947년 - 인도공화국 수립-초대 수상 네루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6월 3일 인도와 파키스탄을 분리해 독립시키겠다는 마운트배튼 영국주재 인도 총독의 발표가 시작이었다. 마운트배튼 계획은 영국령 인도를 이슬람교 신봉 주와 힌두교 신봉 주의 2개 자치령으로 분리, 각각 제헌국회를 설립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전날 네루(J. Nehru)는 국회의사당에서 행한 연설에서 '세계가 고요할 때, 한밤의 종소리가 울릴 때, 인도는 생명과 자유를 향해 잠을 깬다.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한 나라의 혼이 크게 울려퍼질 것이다'고 역설했다.
독립과 동시에 네루를 수상 겸 외무장관으로 하는 내각이 발족하고 제헌의회도 탄생했다. 인도를 지배해 온 영국의 총독은 명목상의 지위로 되어 마운트배튼은 1948년 6월까지 그 지위를 유지했다.
한편 파키스탄은 하루전 인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 양쪽 2지역으로 갈라진 영토를 소유한 국가가 되었다. <조선>

1945년 - 8·15 광복 1945년 오늘 우리 나라는 35년 동안의 일제 치하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한다. 히로히토 일본 국왕이 이날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방송을 통해 선언하고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면서 우리 나라가 일본의 강점으로부터 해방됐다. 히로히토는 미국이 앞서 같은 달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의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선언을 수락한다고 전날인 8월 14일 연합국들에게 통고했다. 일본의 항복문서는 9월 2일 미국 군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공식조인되고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다. <YTN>

1945년 -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결성
일제가 패망한 1945년 8월 15일, 여운형 등 국내에서 활동하던 항일독립운동세력을 중심으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약칭 건준)를 결성했다. 이들은 일제하인 1944년 8월 이미 국내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한 바 있다. 위원장에는 여운형, 부위원장에는 안재홍을 선출했다.
여운형은 이날 아침 조선총독부 엔도 정무총감과 회담하고 국내정치범 석방, 치안유지, 재한일본인의 생명과 재산보호 등을 합의하고 사실상의 치안권을 인수했다.
8월 21일에는 건국강령을 발표하고 중앙과 지방조직에 박차를 가해 전국적으로 조직을 확충하면서 박헌영 등 공산주의자들과도 제휴했다. 9월15일에는 '조선인민공화국' 수립을 발표하는 등 해방공간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으나 미군이 이들을 인정하지 않고 우익 진영이 참여를 거부해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
<조선>

1945년 - 프랑스 페탱 장군 사형선고 1945년 오늘 프랑스의 전쟁영웅 페탱 장군에게 사형선고가 내려진다. 페탱은 제1차 세계대전 중 아르투아(Artois) 전투와 베르??(Verdun)전투에서 무훈을 세워 전쟁 영웅이 됐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때인 1940년 5월 프랑스가 독일에 점령당하자 히틀러에 협조해 같은 해 7월 독일에 대한 협력정책으로 괴뢰 '비시정권'을 장악했다. 그는 결국 대전이 끝난 뒤 전범으로 몰려 89살의 나이에 사형선고를 받게 됐다. 하지만 드골은 곧바로 페탱을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해준다. 페탱은 1951년 7월 23일 복역 중에 사망한다. <YTN>

1907년 - 헝가리 태생의 독일 바이올리니스트 요아힘(Joseph Joachim, 1831~1907) 세상 떠남
헝가리 서부의 프레스부르크(현 슬로바키아브라티슬라바)부근 키투제 출생. 8세 때 페스트에서 최초의 공개연주회를 열었으며, 10세 때 빈으로 옮겨 음악원에서 J.뵘에게 사사하였다. 또한 1843년부터는 라이프치히에서 종합적인 음악교육을 받으면서 F.멘델스존, F.다비트, M.하우프트만, R.슈만 등에게도 사사하였다.
이때 J.S.바흐의 무반주소나타를 비롯하여 베토벤, 슈포아, 멘델스존 등의 독일계 음악을 많이 배웠기 때문에 그후의 활동은 화려한 기교보다는 음악적 구조가 건전한 작품에 치중하였다. 1847∼1849년 라이프치히음악원 교수, 1849∼1853년에는 리스트 밑에서 바이마르궁정악단 합주장, 1853∼1866년에는 하노버궁정악단 지휘자 겸 독주자로 있으면서 각지로 연주여행을 하였다.
1869년 베를린에 신설된 국립고등음악학교의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여 만년까지 그 직위에 있었으며 독일악단의 지도자로 활약하였다. 브람스와 특히 가까운 친구였으며, 그 문하에서 L.아우어, J.후보이, A.모저 등 뛰어난 음악가들이 나왔다.

1892년 - 프랑스의 이론물리학자 드 브로이(Louis Victor de Broglie, 1892~1987) 태어남
디에프 출생. 명문 귀족 브로이가(家) 출신으로, 1877년 쿠데타에 의해 수상이 된 정치가 J.V.A.드브로이의 손자이다. 처음에는 문학·역사에 흥미가 있었으나, 후에 물리학에 관심을 가져 1913년 소르본대학에서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육군의 무선부에 들어가 에펠탑에서 근무하며 물리학의 기술적 문제를 연구하였다. 대전 후에 실험물리학자인 형 모리스의 연구에 자극을 받아 양자(量子)에 관한 이론적 연구를 시작하여 1924년 〈양자론의 연구〉라는 논문에 물질파(物質波:드브로이파라고도 불린다)에 관한 견해를 제시하였다.
이것은 모리스가 품고 있던 ‘X선이 파동(波動)과 입자(粒子)의 복합체가 아닐까’라는 견해를 다시 전개하여 물질입자라고 보는 전자(電子)도 파동으로서의 성질을 가진다고 주장한 설이다. 전자와 이에 따르는 파동과의 관계(드브로이의 관계)는 A.아인슈타인 등의 지지를 받았다.
전자파(電子波)의 실재에 대해서는 1927년 C.J.데이비슨과 L.H.저머가 니켈의 결정을 사용해 전자파의 회절(回折)을 실증함으로써, 물리학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아 파동역학(波動力學)의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 후 소르본대학 강사, 푸앵카레연구소 교수, 1932년 파리대학 교수가 되어, 파동역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P.디랙의 전자론, 빛의 이론, 스핀을 가진 입자의 일반론, 핵물리의 응용 등을 논하였고, 양자론에서 인과율(因果律)의 문제를 다시 제기하여 주목을 끌었다. 1929년 파동역학 연구의 업적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프랑스 최고의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수상했다.
- 'Widow and Child'
1883년 - 유고슬라비아 태생의 미국 조각가 메슈트로비치(Ivan Me?trovi?, 1883~1962) 태어남
크로아티아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3세 때부터 스플리트에서 대리석공의 제자가 되어 조각기술을 익혔다.
1899∼1904년 빈의 아카데미에서 수학, 그 후 빈 ·런던 ·뮌헨 ·파리 ·로마 등지에서 작품을 발표하여 A.로댕의 주목을 끌었다. 특히 조국의 애국운동을 반영하는 코소보 신전의 건축을 위하여 무수한 조상(彫像) ·부조(浮彫) ·인신주(人身柱) ·기마상(騎馬像) 등을 만들었고, 이것을 출품한 1911년의 로마 국제미술전에서 세계적인 조각가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1947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시민권을 얻고 1955년에는 노트르담대학 교수가 되었다.
작풍은 대담한 선과 강한 힘을 바탕으로 중세적 장식성의 신비와 슬라브적 웅대함을 나타내어 독자적 경지를 이루었다. 주요작품에 《토머스 비참 경상(像)》(1915)이 있다.

1879년 - 미국의 연극, 영화배우 배리모어(Ethel Barrymore, 1879~1959) 태어남
독특한 스타일과 목소리, 재치로 그녀의 추종자들에게 미국 연극의 '퍼스트 레이디'로 통했다. 배우인 모리스와 조지애나 배리모어의 딸로, 1894년 뉴욕에서 또다른 유명한 연극 가문의 일원인 그녀의 할머니 루이자 레인 드루가 이끄는 극단에 들어가 직업배우로 데뷔했다.
런던에서 〈종 The Bells〉·〈표트르 대제 Peter the Great〉에 출연해(1897~98) 첫 성공을 거두었다. 브로드웨이에서 처음으로 〈Captain Jinks of the Horse Marines〉(1901)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중요한 출연 작품으로는 〈불 곁에 앉은 앨리스 Alice-Sit-by-the-Fire〉·〈미드채널 Mid-Channel〉·〈'웰스'의 트렐로니 Trelawny of the 'Wells'〉등이 있다. ...
배리모어가(Barrymore Family)는 미국의 유명한 배우집안으로 아버지 M.배리모어(1847∼1905)는 인도 출생의 영국인으로 영국과 미국 무대에서 활약한 배우이다. 어머니 G.배리모어(1856∼1893)도 엘리자베스조(朝) 시대부터 전통 있는 영국무대의 명문 드루 일가(一家) 출신으로 소녀시절부터 무대배우였다. 이 양친 사이에 태어난 장남 L.배리모어(1878∼1954), 장녀 E.배리모어(1879∼1959), 차남 J.배리모어(1882∼1942)도 모두 명우로 이름을 떨쳤다. 15세에 첫 무대를 밟은 L.배리모어는 한때 그림공부를 위하여 파리유학을 했으나 그후 무대에 복귀하여 브로드웨이의 명우로 명성을 떨쳤고, 후년에는 영화계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가족에 관한 회상록(回想錄)도 썼다. E.배리모어는 용모가 아름답고 장신(長身)으로 오랫동안 무대와 영화에서 명여우로서 관록을 자랑하였다. 《오필리아》 《줄리엣》 《춘희(椿姬)》 등에서 명연기를 보였다. 1928년 뉴욕에 에셀배리모어극장을 개설하였다. 미남 배우 J.배리모어는 음성이 아름다웠다. 특히 22년에 연기한 햄릿역(役)은 일세를 풍미(風靡)하였다. 그러나 만년에 불운하여 무대활동에서 멀어지고 영화나 라디오에만 출연하였다. E.배리모어의 세 아들이나 존의 딸 다이아나(1921∼1960) 등도 배우로 무대 ·영화에서 활동하였다. 배리모어 일가에는 기행(奇行)을 하는 자가 많았고 그것을 다룬 G.카우프만의 희곡 《무대의 왕족 Royal Family/Theatre Royal》(1927)도 있다.

1771년 - 영국의 계관시인, 소설가, 역사가 스콧(Walter Scott, 1771~1832) 태어남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변호사, 어머니는 대학 의학부 교수의 딸이다. 생후 1년 반에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다리에 장애를 가져왔다. 에든버러대학교 고전과에 1년간 다녔으나, 신병으로 중퇴하고 아버지의 법률사무소에서 사무원으로 5년간 수업한 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21세에 변호사가 되어 법정에 섰으나 잉글랜드와의 국경지대에 전해오는 전설이나 민요에 관심을 가져 이를 수집·출판하였다. 독일 시인 뷔르거의 《사냥 Der Wilde J
ger》(1796)을 영역하고, 1802년 《변경 가요집 Minstrelsy of the Scottish Border》을 발표하였다.
1805년 《최후의 음유 시인의 노래 The Lay of the Last Minstrel》(3권), 1808년 《마미온 Marmion》, 1810년 《호수의 여인 The Lady of the Lake》의 3대 서사시로 시인의 명성을 얻었다. 그 사이 1806년 고등민사 법원의 서기관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1808년에는 《드라이든 전집》(18권)을 전기(傳記) 주석을 붙여 편집하였다. 1813년 서사시 《로크비 Rokeby》를 발표, 계관시인으로 내명(內命)을 받았으나 사퇴하였다. 시로부터 소설로 전향한 그의 역사소설은 1814년 익명으로 출판된 《웨이벌리 Waverley》로 시작된다. 영국의 웨이벌리 대위가 휴가여행 중 젊은 참왕(僭王)의 반란(1745)에 말려든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이 크게 호평을 얻어, 장편 걸작을 잇달아 발표, 유럽 전역에서 애독되었다.
대표작으로는 《가이 매너링 Guy Mannering》(1815) 《호고가(好古家) The Antiquary》(1815) 《묘지기 노인 Old Mortality》(1816) 《롭 로이 Rob Roy》(1818) 《미들로시언의 심장 The Heart of Mudlothian》(1818) 《라마무어의 새색시 The Bride of Lammamoor》(1819) 《아이반호 Ivanhoe》(1819) 《수도원 The Monastery》(1820) 《케닐워스 Kenilworth》(1821) 《나이젤의 운명 The Fortunes of Nigel》(1822) 《??틴 더워드 Quentin Durward》(1823) 《성(聖) 로난 광천(鑛泉) St. Ronan’s We11》(1823) 《부적(符籍) The Talisman》(1825) 등이 있다.
이상은 모두 ‘웨이벌리의 작자’라는 익명으로 출판되었다. 그 사이 《스위프트 전집》 19권을 편집·출판하였고, 한편 에든버러 왕립협회의 총재로 추대되고, 옥스퍼드·케임브리지 두 대학으로부터 명예학위를 받았다. 바이런과 워즈워스와 친교를 맺고, 미국의 작가 W.어빙을 자택에서 환대하기도 하였다. 1826년 공동 경영하던 밸런타인 인쇄 출판사가 돌연 도산함에 따라 떠맡게 된 당시 13만 파운드의 빚을 갚기 위해 《우드스톡 Wood stock》(1826) 《나폴레옹전 Life of Napoleon》(1827) 《퍼스의 미녀 The Fair Maid of Perth》(1828) 《가이어스타인의 앤 Anne of Geierstein》(1829) 《조부의 이야기 Tales of a Grandfather》(1829) 《파리의 로버트 백작 Count Robert of Paris》(1831) 등을 썼다. 정부는 많은 노작(勞作) 활동으로 신병을 앓게 된 그에게 순양함을 제공하여 이탈리아로 전지 요양시켰으나, 곧 귀국하여 숨을 거두었다.

1769년 - 나폴레옹 1세(Napoleon I, 1769~1821) 태어남
이름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
on Bonaparte)로 지중해 코르시카섬 아작시오 출생이다. 카를로 보나파르테와 레티치아 라몰리노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혁명의 사회적 격동기 후의 안정에 편승하여, 제1제정을 건설하였다. 군사·정치적 천재로서 세계사상 알렉산드로스대황·카이사르와 비견된다. 아버지가 지도자 파올리를 따라 프랑스에 대한 코르시카 독립운동에 가담하나, 싸움에 진 뒤에는 도리어 프랑스 총독에게 접근하여 귀족의 대우를 받았다.
1779년 아버지를 따라 프랑스에 건너가, 10세 때 브리엔 유년학교에 입학하여 5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코르시카 방언으로 프랑스어 회화에 고민하며 혼자 도서실에서 역사책을 읽는 재미로 지냈으나, 수학만은 뛰어난 성적을 보였다. 1784년 파리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임관 뒤 포병소위로 지방연대에 부임하였다. 1789년 프랑스혁명 때 코르시카로 귀향하여, 파올리 아래서 코르시카국민군 부사령에 취임하였다. 프랑스 육군은 3회에 걸친 군대이탈과 2중군적에 대해 휴직을 명하였다.
1792년 파올리와 결별하고, 일가와 함께 프랑스로 이주하였다. 1793년 가을 툴롱항구 왕당파반란을 토벌하는 여단 부관으로 복귀하여, 최초의 무훈을 세웠다. F.로베스피에르의 아우와 지우(知遇)를 갖게 되어 이탈리아 국경군의 지휘를 맡았다. 테르미도르(Thermidor)의 반동 쿠데타로 로베스피에르파(派)로 몰려 체포되어 다시 실각, 1년간 허송세월을 보냈다. 1795년 10월 5일(방데미에르 13일), 파리에 반란이 일어나 국민공회(國民公會)가 위기에 직면하자, 바라스로부터 구원을 요청받고, 포격으로 폭도들을 물리쳤다.
이 기민한 조치로 재기의 기회를 포착, 1796년 3월 바라스의 정부(情婦)이자 사교계의 꽃이던 조제핀과 결혼, 총재정부로부터 이탈리아 원정군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여 5월에 밀라노에 입성, 1797년 2월에는 만토바를 점령하는 전과를 올렸다. 10월 오스트리아와 캄포포르미오(Campoformio)조약을 체결하여, 이탈리아 각지에 프랑스혁명의 이상을 도입한 인민공화국을 건설하였다. 그의 명성은 프랑스에서도 한층 높아졌다. 하루 3시간만 잔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비서 브리센에 의하면 건강에 항상 신경을 써서 하루 8시간은 잤다고 한다.
1798년 5월 5만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집트를 원정하여 결국 카이로에 입성하였다. 7월 해군이 아부키르만(灣)에서 영국함대에 패하여 본국과의 연락이 끊기자 혼자서 이집트를 탈출, 10월에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곧 그를 통해 총재정부를 타도하려는 셰이에스 ·탈레랑 등의 음모에 말려들었다. 1799년 11월 9일(브뤼메르 18일) 군을 동원, 500인회를 해산시켜 원로원으로부터 제1통령으로 임명되고, 군사독재가 시작되었다.
그는 평생 코르시카인의 거칠음·솔직함을 잃지 않아, 농민출신 사병들로부터 신뢰를 받고 있었으나, 역사적 영웅으로 보면 인간성을 무시하고 도덕성이 결여된 행동의 주인공이었다. 광대한 구상력, 끝없는 현실파악의 지적 능력, 감상성 없는 행동력은 마치 마력적이라고 할 정도였다. 이처럼 사상 유례 없는 개성이 혁명 후의 안정을 지향하는 과도기의 사회상황에서 보나파르티즘이라는 나폴레옹의 정치방식이 확립되었다. 제1통령으로서 국정정비 ·법전편찬에 임하고, 대(對)오스트리아와의 결전을 서둘러 1800년 알프스를 넘어 마렝고에서 전승을 이룩하였다.
1802년에는 영국과 아미앵화약을 맺고, 1804년 12월 인민투표로 황제에 즉위하여 제1제정을 폈다. 즉위소식을 들은 L.베토벤이 《영웅 교향곡》의 악보에서 펜을 던지고, ‘인민의 주권자도 역시 속물이었다’고 한탄하였다고 한다. 영국을 최대의 적으로 간주하던 그는 즉위하자, 곧 상륙작전을 계획하였다. 1805년 가을 프랑스함대는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H.넬슨의 영국해군에 다시 격파되어, 그의 웅도(雄圖)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아우스터리츠전투에서 오스트리아 ·러시아군을 꺾은 이래, 프랑스육군은 전유럽을 제압하여 위광을 전세계에 떨쳤다.
1809년 조제핀과 이혼, 이듬해 오스트리아 황녀 마리 루이즈와 재혼하였다. 그러나 1812년 러시아원정에 실패하면서 운세도 기울어져, 1814년 3월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군에 의해 파리를 점령당하고, 그는 엘바섬으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1815년 3월 다시 파리로 들어가 황제에 즉위하였으나, 6월 워털루전투에서 패하여 영국에 항복하였다. 그 뒤 대서양의 세인트 헬레나섬에 유배, 그곳에서 죽었다. 그가 구술하는 회상록을, 동행하던 옛 부하 E.라스카스가 기록하였다.

1740년 - 독일의 서정시인 클라우디우스(Matthias Claudius, 1740~1815) 태어남
남(南)홀슈타인 출생.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예나대학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한 후 한때 함부르크에서 신문기자 생활을 하였다. 생애의 대부분을 함부르크 근교의 시골마을 반츠베크에서 지내면서, 1771∼1775년 종합잡지 《반츠베크의 사자(使者) Der Wandsbecker Bote》를 발행, 그 잡지에 Asmus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시문(詩文)을 모아서 《Asmus omnia sua secum portans oder S
mtliche Werke des Wandsbecker Boten》(2권, 1775)을 출판, 후에 다시 6권을 추가하였다(1812).
건강한 그리스도교적 심정, 소박하고 청순한 정서, 자연스럽고 천진난만한 유머 등이 그의 시의 기반이다. 지금도 애송되는 것이 많은데, 특히 《자장가》와 《죽음과 소녀 Der Tod und das M
dchen》는 슈베르트의 작곡으로 유명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