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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四聖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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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성제(四聖諦)
사성제(四聖諦) :
[고(苦) · 집(集) · 멸(滅) · 도(道)]의 "네가지의 성스러운 진리" 라는 뜻이다. 십이연기설(十二緣起說)에 입각해 설명 되어지는 실천적 교설(敎說)로서, 부처님 자신이 깨달으신 내용 즉 '직관순수자증내용(直觀純粹自證內容)'을 다섯 비구들에게 최초로 설법을 한 것이 이 '사성제'의 법문이며, 그로인해 원시불교 교리의 대강(大綱)이 된 교설[敎說: 최승법설(最勝法說)]이다. 고제(苦諦) · 집제(集諦) · 멸제(滅諦) · 도제(道諦)인 사제(四諦)의 내용을 살펴보면,
_ ① 고제 (苦諦) :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 현실 세계의 현상 · 삶의 모습은 괴로움(苦)이라는 것으로, 여기서의 괴로움이란 [근본적 · 필연적인 고(苦)]를 말하는 것 입니다.
몸에 상처를 입어서, 아니면 피해를 당해서 생기는 아품과 고통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삶을 지탱해 나아가야 하는 지속적인 노력·힘들임(힘듬)'을 뜻하는 것이다.
※ 이 '현실세계의 현상'이라 함은 결국 우리들 삶을 말하게 되며, 여기서의 고(苦)는 다시 4고(四苦) · 8고(八苦)로 표현이 됩니다.
㉮ 4고(四苦)는 생(生: 태어나고) · 노(老: 늙고) · 병(病: 병들고) · 사(死: 죽음)의 4가지로, 이들 네가지는 모두 벗어나려 해도 벗어날 수 없는 필연적인 고(苦)라는 것입니다. 즉, <四苦: ① 生苦 · ② 老苦 · ③ 病苦 · ④ 死苦>를 말하는 것이다.
㉯ 8고(八苦)는 위의 4고(四苦)에, ⑤ 원증회고(怨憎會苦: 미운 것과 만나게 되는 힘듬)
· ⑥ 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고, 아끼는 것과 헤어지는 힘듬) · ⑦ 구부득고(求不得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힘듬·어려움)이며, ⑧ 이러한 것들 모두가 괴로움이니 오온[五蘊: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의 작용 또한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괴로움이 따른다는 것이다⇒오음성고(五陰盛苦)⑧
그러므로 고성제(苦諦)란 현실 세계의 [①생고(生苦) · ②노고(老苦) · ③병고(病苦) · ④사고(死苦) · ⑤원증회고(怨憎會苦) · ⑥애별리고(愛別離苦) · ⑦구부득고(求不得苦) · ⑧오음성고(五陰盛苦)=오온고(五蘊苦)]인 8고(八苦)의 설명과 함께,
생사(生死)의 괴로움은 무명(無明)에서 연(緣起) 한다는 연기(緣起)의 설명과, 일체는 고(一切皆苦)라는 삼법인(三法印)의 설명과 함께, - 현실에 존재하는 것(삶) 자체가 커다란 하나의 고(苦: 힘들고 · 괴로운 · 버릴 수 없는 · 받아들여야 하는 것) 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 고성제(苦聖諦)입니다.
※ 위에서 오온(五蘊)은 '색(色) · 수(受) · 상(想) · 행(行) · 식(識)'을 말하는 것으로 불교에서 일체의 존재를 표현하는 용어가 있다. - '십이처(十二處: 안 · 이 · 비 · 설 · 신 · 의 · 색 · 성 · 향 · 미 · 촉 · 법)'와.,
사문유관
또 하나는 '오온(五蘊: 색온 · 수온 · 상온 · 행온 · 식온)'으로 구분 표현하는 것으로., 오온(五蘊)은 '존재하는 것'의 구성 요소를 다섯 가지로 분류한 것이다.
여기서 '존재하는 것'을 '지(地) · 수(水) · 화(火) · 풍(風)'의 사대(四大)로 이루어진, 물질적(物質的)인 부분을 [색온(色蘊)]이라 하고., 정신적(精神的)인 부분을 다시 수온(受蘊) · 상온(想蘊) · 행온(行蘊) · 식온(識蘊)의 네가지(四蘊)로 분류하여, 전체를 '색 · 수 · 상 · 행 · 식'의 오온(五蘊)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한다.
이때 사온(四蘊)이란 [색온(色蘊)]을 바탕으로 이를 '지속 · 존속' 시키려는 -'수온(受蘊: 느끼고 · 감수하는 것)과 상온(想蘊 :생각하고) · 행온(行蘊 :작용하며) · 식온(識蘊 :인식, 식별, 선택)'의 정신적 기능을 4가지로 분류(구분)한 것으로., [정신과 육체] 즉 인간을 대상으로 말한 것이다.
_ ② 집제 (集諦) : (集_결합하여 상승함, 모임, 쌓임)을 뜻함.
집제는., 왜 괴로움(苦:힘이 듬)이라 하는가 ? _이 괴로움의 실체를 밝히는 것으로, 탐애(貪愛)와 갈애(渴愛)로 인하여 모든 괴로움(어려움)이 일어 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괴로움(苦)이 되는 원인을 밝히는 것이 '집성제(集聖諦)'입니다.
모든 괴로움은 우연적이거나 그냥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다 원인이 있다고 하는 연기의 설명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설명 되어지고 있습니다.
즉 "탐(貪 :탐내고) · 진(瞋 :분노하고) · 치(癡 :어리석음)"의 세가지 나쁜 요소[삼독(三毒)]심이., 괴로움을 낳는 원인(뿌리·바탕)이 된다는 것 입니다. _탐내는 마음이 한이 없고, 울컥 성내는 마음을 없애지 못하여, 어리석음에 둘러 쌓여 있다는 것 입니다.
우리들의 삶 속에서 이러한 탐애(貪愛)와 갈애(渴愛)로 인하여 모든 괴로움(힘듬)이 생기며, 자제력을 잃어 어리석어진 마음자리(치심)으로., 벗어나지 못하고 더욱 커져만 가는 현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모든 것, 대상들은, 그 어느 것도 탐내고 집착할 만한 '불멸의 고유한 존재'가 없는 것으로, 영원히 소유할 수도·내것이 될 수도 없는 것으로, 이 또한 인연에 의해 모였다가, 그 연(緣)이 다하면 흩어지기 마련인 것인데, 우리들은 번뇌망상에 쌓여 고(苦)의 원인이 되는 '탐애와 갈애'에
집착하기 때문이며, 또한 이것에 집착하면 할수록 (유지하려는)괴로움은 더욱 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카사파는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다.
"어떻습니까. 고타마시여, '괴로움은 자기가 지은 것인가'라고 물어도 무기라고 대답하시고, '남이 지은 것인가, 자기와 남이 지은 것인가,
자기도 아니요 남도 아니며 원인이 없이 지어진 것인가'라고 물어도 무기라고 대답하시니 그러면 이제 이 괴로움은 없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카사파에게 말씀하시었다. "이 괴로움은 없는 것이 아니다. 이 괴로움은 있는 것이다"
카사파는 부처님께 여쭈었다. "장하십니다 ! 고타마시여, 이 괴로움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를 위해 설법하시어 저로 하여금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을 보게 하십시요."
부처님께서는 카사파에게 말씀하시었다
"만일 느낌이 곧 자기의 느낌이라면 괴로움은 자기가 짓는 것이라고 나는 마땅히 말하겠다. 만일 남의 느낌이라면 남이 받는 자이므로 그것은 곧 남이 짓는 것이다.
만일 느낌이 자기의 느낌이자 남의 느낌으로서 다시 괴로움을 준다면 이러한 것은 자기와 남이 지은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모든 것을 말하지 않으며, 다시 나와 남을 인(因)하지 않고 인이 없이 괴로움이 생긴다고도 나는 또한 말하지 않는다.
이 모든 치우친 극단을 떠나 그 중도를 말하여 여래는 이렇게 설법한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남으로 저것이 일어난다.
곧 무명을 인연하여 행이 있고 나아가서는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모이며,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고 나아가서는 순수한 큰 괴로움의 무더기가 멸한다'라고."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시자 아첼라 카사파는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 법의 눈이 깨끗하게 되었다.<잡아함 권 12, 아지라경(阿支羅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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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성제(四聖諦)
고집멸도 사성제(苦集滅道 四聖諦)의 진리
고집멸도 苦集滅道 이 네가지는 성스러운 진리라 하여 사성제
四聖諦 또는 주려서 사제四諦라고도 한다.
四는 고집멸도苦集滅道의 네 가지 법을 말하는 것이고, 체諦는
체관諦觀 한다는 말로써 사물의 참다운 실상을 명확하고 자세하게
꿰뚫어 본다는 말이다. 이 사제의 진리는 바로 불교의 인생관이며
생활관이다.
첫째 인생은 괴로움이다.
둘째 그 괴로움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셋째 괴로움을 제거하는 방법과
넷째 괴로움을 벗고 해탈에 이르는 길 이 네 가지 진리가 사성제
이다.
첫 번째 진리 고성제苦聖諦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는 여러 가지 피할 수 없는 고통이 따르게
된다. 불교에서 인간의 근본 고뇌苦惱를 사고四苦와 팔고八苦로
보고 있다.
생고生苦 인간이 살아가자면 모두가 고뇌덩어리다.
노고老苦 늙음에 대한 슬픔의 고통.
병고病苦 병들면 심신의 불편과 고독함을 느끼는 고통.
사고死苦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허망함의 고통이다.
구부득고 求不得苦 구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 때 오는 고통.
애별이고 愛別離苦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고통
원증회고 怨憎會苦 미운사람과 만나는 괴로움.
오음성고 五陰盛苦 육체로 인하여 따르게 되는 고통 등.
이상을 사고四苦와 팔고八苦라 하는데 그야말로 인간이 산다.
는 자체가 고뇌요 생 그대로가 고통이므로 고성제 라 한다.
옛날 페르샤에 제미르 왕은 즉위한 후 곧바로 나라의 학자들에게
정밀한 인류역사를 편찬 하도록 지시하였다.
임금의 명에 따라 많은 학자들은 긴 세월을 소비하여 쓴 인류사
의 결론은“사람은 태어나서 사람은 괴로워하고 사람은 죽는다.”
는 것이 인류사의 결론이었다.
저유명한 법화경에서 부처님은“삼계는 편치 않아 마치 불타는
집과도 같다. 고뇌가 가득 차있으니 심히 두려워할 만 하도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마치 활활 타고 있는 화택과 같다
는 부처님의 이 체험이야 말로 인간 고뇌에 대한 귀중한 경고이다.
두 번째 진리 집성제集聖諦
그러면 이 괴로움과 고통은 어째서 생기고 어디서 오는 것인가?
이것이 불교의 번뇌론煩惱論이다.
괴로움과 고통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어떤 원
인이 있어서 오는 것이고, 그 원이이란 바로 인간의 번뇌 때문인
것이다.
즉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의 대경을 통하여 탐욕을 이러키어
고 분노를 이러키며, 어리석고 우치한 생각을 이러 어 그 삼독심
三毒心에서 번뇌 妄想이 생기고 그 번뇌 망상이 원인原因이 되어
고통이 오고 쌓이게 됨으로 이를集제라 하는 것이다.
세 번째 진리 멸성제 (滅聖諦)
멸성제의 멸이란 고뇌[苦惱]에서 해탈하는 깨달음과 열반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다. 왜? 열반涅槃[깨달음][을 멸제라고 하느냐 하면 열
반을 범어로<니르바나>로서“불어서 끄다.”라는 뜻이다.
무엇을 불어서 끄고, 무엇을 멸하는가? 괴로움을 불어서 끄고, 고뇌
를 멸한다는 말이다.
일반적으로 알기를 육체를 불어서 끄고 몸을 멸하는 것. 즉 인간의
나고 죽음과 무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열반이나 성불[成佛]이라 함은 인간고의 근본으로 되어있는 무명과
탐욕[貪慾] 진애[瞋愛] 우치[愚癡]가 멸하고 일체의 번뇌가 다 멸
한 세계를 열반이라 하는데 이를 멸성제라 하는 것이다.
네 번째 진리 도성제 (道聖諦)
도성제는 열반의 세계로 가는 길, 즉 멸제에 이르는 방법이다. 그런
데 부처님께서는 이 열반의 세계로 가는 방법에 있어 여덟 가지 바른
길이 있다.“ 고하셨다.
이 여덟 가지 바른 길 팔정도[八正道]이야 말로 모든 괴로움을 해결
하고 열반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부처님은 가르쳐주셨다.
(1) 정견正見 올바른 견해
(2) 정사正思 올바른 사유
(3) 정어正語 올바른 말
(4) 정업正業 올바른 직업
(5) 정명正命 올바른 삶
(6) 정정진正精進 올바른 노력
(7) 정념正念 올바른 기억과 신념
(8) 정정正定 마음의 안정과 정신의 집중
이 팔정도는 곧 멋진 인생을 만드는 수행인 동시에 큰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다.
그럼 이 여덟 가지 바른 길을 어떻게 수행 하여야 하는가?
두 가지 치우친 길을 피해야만 된다. 고행苦行과 쾌락快樂 이 둘
중의 어느 하나에도 치우치거나 빠지지 않는 중도中道의 길이 열반
에 이르는 올바른 수행이라고 전법륜 경에 말씀하고 있다.
특히 이 여덟 가지 정도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정견正見이다.
즉 사제[四諦]의 도리를 바로보고 분명히 인식하라는 것이다.
인연의 진리를 참으로 알면 그야말로 평안하다. 그저 알았다고해서
그 인연을 행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다. 인연을 바로 인식하고 살려
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이것이 정정진[正精進]이다.
이 여덟 가지 바른길은 열반에 이르는 중요한 길이기는 하나 그 중
에서도 정견正見과 正精進정정진이다.
사성제[四聖諦]와 인연법의 진리를 올바로 인식하고 깨달음의 멸제
에 이르도록 부단히 노력하고 정진할 때 고뇌를 멸하고 열반에 도에
들게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고집멸도"의 사성제를 수없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는 한 순간에 "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차원을 달리한 경지입니다. 이런 경지를 뛰어 넘을 때 공부의 진척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달을 보더라도 어릴 때 보는 것과 청년 시절에 보는 것과 노년이 되었을 때 보는 것이 다르듯이 같은 대상이지만 차원을 달리한 견해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실상이 공이기 때문 입니다.
사성제의 견해도 서론에서 언급한 유와 무와 성(性)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유의 입장은 그대로 "고집멸도"가 있다는 견해입니다. 무의 입장은 "무고집멸도"가 됩니다. 또한 성의 차원에서는 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가 됩니다. 다시 말해서 "고" 그대로가 성스러운 진리라는 견해입니다.
<반야심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공의 이치는 부정을 넘은 부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정의 부정은 다시 강한 긍정이 됩니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무"를 통한 강한 긍정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8. 꿈을 깨는 순간 사라진다
무지 역무득
無智 亦無得
<옮김>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다.
<풀이>
지혜의 안목으로 인생과 세상을 보았을 때 텅 비어 아무것도 없다고 해서 지혜란 어떤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으로 안다면 큰 잘못이다. 그리고 지혜를 통하여 무엇인가 얻을 것이 있다고 여기는 것도 큰 잘못이다. 그러므로 지혜마저 없고, 얻을 것마저 없는 것이 진실이다.
<해설>
<반야심경>은 지혜의 가르침입니다. 앞에서 십이인연도 없고, 사성제도 없다는 이치를 가르치고 여기서는 인식의 주체가 되는 지혜도 없고, 인식되는 실체가 얻어짐도 없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오온개공\'이라 하여 인식의 주체인 자기 자신의 존재가 텅 빈 것으로 보아 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는 깨달음을 성취하는데 있어서 필요불가결한 지혜인 직관지(直觀智)마저 부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잠 속에서 아무리 훌륭한 꿈을 꾼다고 해도 꿈을 깨는 순간 다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깨달음을 향하는 최상의 열쇠가 되는 지혜마저도 의식의 잠을 깨는 순간, 즉 깨달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에는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인 것입니다.
또한 지혜로써 얻어지는 바가 굉장히 큰 것처럼 생각하는 그것마저 부정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득"이라고 한 것입니다.
불교에는 완성이 없습니다. 끝이 없습니다. 완성된 상태에서 얻어지는 것마저 부정하는 순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깊이 들어가면 얻는 것마저 없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곧 "무득" 입니다.
<반야심경>에서 말하는 마음은 곧 얻을 바가 없는 마음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착되지 않는 마음을 통해서 오히려 무한의 얻어짐이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4장 반야는 이렇게 나타난다
1. 꿈을 깨면 완전한 자유는 저절로 온다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고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以無所得故 菩提薩? 依般若波羅蜜多故 心無罣碍 無罣碍故 無有恐怖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옮김>
얻을 것이 없는 까닭에 보리살타는 반야바라밀다를 의지하여 마음에 가애가 없으며, 가애가 없는 까닭에 공포가 없으며, 전도몽상을 멀리 떠나서 구경에는 열반인 것이다.
<풀이>
철저히 텅 비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이 도리, 이 도리를 써야 한다.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는 이 도리가 반야다. 그러므로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 삶을 살기에 마음에 아무런 걸릴 것이 없다. 마음에 아무런 걸릴 것이 없으므로 일체 두려움 또한 있을 수 없다. 걸릴 것이 없고 두려움 없는 삶이란 꿈 속을 헤매듯 전도된 삶을 다 떠난 삶이다. 모든 뒤바뀐 상태를 떠나서 바른 삶을 산다는 것은 결국 열반의 삶이요, 보살의 삶이다.
<해설>
이 대목에서는 "무소득"으로 인해서 보살이 궁극적으로 열반을 얻는 내용입니다. " 소득"이기 때문에 최상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무소득"은 <반야심경>에서 가장 중심되는 구절입니다. 뜻으로 볼때 "조견오온개공"이 제일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핵심 구절은 이 "무소득"입니다.
"무소득"은 곧 앞의 "무득"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얻을 바가 없다는 것은 공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얻을 바가 없는 깊은 도리 때문에 보살은 깨달음을 성취한 것입니다.
"보리살타"는 줄여서 보살이라고 부릅니다. 그 뜻은 각유정(覺有情)이라고 할 수 있는데, 깨달은 중생이라는 말입니다. 보살은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제도한다는 자리이타(自利利他)를 그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불교 수행을 하는 모든 사람을 보살이라 지칭해도 별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팔정도(八正道)
팔정도(八正道)는 괴로움의 소멸을 이루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로서 4성제중 도성제에 해당합니다.
팔정도는 중도(中道) 수행입니다. 양 극단(쾌락과 고행)을 버리고 8정도의 중도수행으로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8정도의 시작은 알아차림(정념)이며, 알아차림이 있는 여덟 가지의 바른 길이 8정도입니다. 8정도는 이미 戒의 바탕위에서 定이 성립되고 그다음 智慧가 완성되는 계정혜 3학의 세 가지 요소를 다 갖추고 있습니다.
계의 항목으로는 정어, 정업, 정명이며,
정의 항목으로는 정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혜의 항목으로는 정견과 정사유입니다.
** 1) 정견(正見. Samma ditthi.)은 바른 견해이지만 무엇이 바른 견해인가가 궁금합니다.
세간의 바른 견해는 업의 원인과 결과를 분명하게 인식하는 지혜입니다. 그래서 불선업을 자제하고 선업을 증장시키는 것입니다.
출세간의 바른 견해는 고집멸도 사성제를 아는 지혜로, 삼법인에 대한 앎과 연기에 대한 앎으로 도성제인 8정도 수행을 해서 갈애와 삿된 견해(유신견, 상견, 단견, 무인견, 비업견)를 제거하고 궁극에는 열반인 멸성재를 체험하여 아는 지혜입니다.
** 2) 정사유(正思惟. Samma sankappa. )는 지혜로 대상에 마음을 기울이는 것입니다
1) 출리사유(出離思惟) - 감각적 욕망으로 일어나는 탐심을 극복하는 사유를 하는 것.
2) 무에사유(無恚思惟) - 분노를 극복하고 자애의 마음을 일으키는 사유를 하는 것.
3) 무해사유(無害思惟) -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극복하고 연민의 마음을 일으키는 사유를 하는 것. 남에게 해를 끼치려하는 생각이 바로 자신에게 해가 된다는 사유를 한다.
결국 바른 사유는 이것저것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지혜에 바탕을 둔 자비심의 함양을 말합니다.
1)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다스리는 마음가짐.
2) 다른 사람이 잘 되길 바라는 자비의 마음가짐.
3) 고통 받는 사람이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길 바라는 연민의 마음가짐.
정견과 정사유는 혜(慧)에 속하는데, 정견은 어리석음을 해결하는 것이고 정사유는 탐심과 성냄을 해결하는 것으로 둘 다 탐진치를 해결하는 지혜의 항목입니다. 곧 지혜로 자신을 보호하고 자비로 남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어, 정업, 정명은 계율의 항목으로, 계율을 지키면 수행자의 마음이 안정과 평온을 얻게하는 바탕이 됩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길로 가고자 하는 수행자는 기본 바탕에 계청정을 갖추어야 합니다. 이것은 8정도 중에서 정어, 정업, 정명의 세 가지 항목입니다.
** 3) 정어(正語. Samma vaca. )는 바른 말로 거짓말이나 악담이나 이간질이나 쓸데없는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말을 삼가하는 것입니다.
** 4) 정업(正業. Samma kammanta.)은 몸으로 짓는 불선업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살생이나 도둑질 사음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 5) 정명(正命. Samma ajiva)은 바른 생계수단으로 나와 남 모두에게 이로운 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계를 버리고 바른 생계에 의해서 생활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잘못된 생계란 출가자의 경우 사기행위, 배신, 점, 예언, 속임수, 고리대금업에 의한 생계를 말한다. 재가자의 경우는 무기거래. 살아있는 동물거래, 고기나 술 독극물의 상거래, 직업 군인, 어부, 사냥꾼등도 잘못된 생계입니다.
바른 생계는 자신의 업을 맑혀줄 수 있는 직업을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재가자는 생계 수단이 있어야 하는데 자기의 직업이 나와 남에게 이익이 있는 것인가, 탐진치를 키우는 것인가, 또한 열반을 얻는데 도움이 되는가, 업을 맑히는가, 불선업을 짓게 하는가, 직업 자체가 계율에 어긋나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직업 때문에 습관적으로 불선업을 짓는다면 그는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없고 그래서 지혜도 생길 수 없습니다.
** 6) 정정진(正精進. Samma Vayama.)은 바른 노력으로 탐진치에 의한 불선법들(다섯 장애)는 끊으려는 노력을 하고 껂어내고, 선법인 칠각지(념각지, 택법각지, 정진각지, 희각지, 경안각지, 정각지, 평등각지) 를 일으키는 노력으로 자주 일으켜 완성해야 합니다.
** 7) 정념(正念. Samma sati. )은 바른 알아차림으로 신수신법 4념처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하여, 매순간 탐진치에 휘둘리지 않고, 항상 깨어있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을 정념 (삼마사띠)라고 합니다.
몸과 느낌과 마음과 법인 4념처를 대상으로 알아차림이란 마음의 작용을 일으켜, 대상을 객관적으로, 비작용으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 대상의 성품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1) 몸에 대한 알아차림-호흡에 대한 알아차림, 행주좌와에 대한 알아차림, 일상생활에서 세세한 동작에 대한 분명한 앎, 몸의 32가지에 대한 알아차림, 몸의 4대 요소에 대한 알아차림을 화는 것이 신념처입니다.
2) 느낌에 대한 알아차림-6근과 6경이 촉할 때 3가지 느낌이 일어난다.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림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느낌이든지 느낌에서 갈애로 진행되지 않게 알아차리는 것이 수념처입니다.
3)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8쌍 16가지 마음에 대한 알아차림을 말합니다. 탐심, 관용의 마음, 성냄의 마음, 자애심, 어리석음의 마음, 지혜의 마음, 침체된 마음, 산란한 마음, 커진 마음, 위축된 마음, 향상된 마음, 향상이 안 된 마음, 집중된 마음, 집중이 안 된 마음, 일시적으로 해탈한 마음, 일시적으로 해탈이 안 된 마음 등이 일어날 때 알아차린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주로 탐심, 관용, 성냄, 자애, 어리석음, 지혜, 들뜸, 침체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4) 법에 대한 알아차림-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육체적 정신적 현상들에 대한 알아차림을 말합니다. 다섯 장애, 오온의 집착된 무더기, 6근과 6경이 촉할 때 일어나는 족쇄, 깨달음의 일곱 가지 요인, 사성제들이 있을 때 그들을 법으로 맞이하여 알아차리고 거기에서 무상, 고, 무아의 법의 성품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바르게 알아차린다는 것은 신수심법의 네 가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바르게 안다는 것입니다. 수행은 먼저 바른 견해와 알아차리려는 노력이 바탕이 되어, 바른 알아차림을 하는 것으로, 8정도의 어느 항목이든 정정진과 정견과 정념의 3가지가 함께 수행을 이끌어 갑니다.
** 8) 바른 집중(正定. Samma samadhi. )은 정념(알아차림)이 계속 유지됨으로써 마음이 고요해져 찰나마다 마음이 대상에 잘 집중되어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바른 집중으로 바른 견해(正見)와,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노력(正精進)이 있을 때 바른 집중(正定)에 이르게 됩니다.
사마디에는 세 종류의 사마디가 있습니다. 깊은 집중과 근접 집중과 찰나 집중이 있습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한 대상에 깊은 집중상태를 유지하여 번뇌가 없는 고요함이 유지됩니다. 사마타 수행의 선정에는 초선에서 4선까지의 깊은 집중( 근본삼매)의 단계가 있습니다.
위빠싸나 수행에서는 깊은 집중을 하지 않고, 찰나 집중(찰나삼매)을 해서 대상의 성품을 통찰하여 삼법인의 지혜를 성숙시키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렇게 찰나 집중된 마음상태에서만 대상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지혜가 일어납니다.
집중에는 바른 집중과 바르지 못한 삿된 집중도 있습니다. 도둑이나 불건전한 도박도 대단한 집중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바른 집중이 아닙니다.
바른 집중은 수행자가 탐진치의 번뇌를 해결하기 위해, 또 대상의 성품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 마음을 대상에 지속적으로 기울여 알아차릴 때 마음에 번뇌가 없고, 이런 상태를 바른 집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야심경(般若心經)
대반야바라밀다경의 요점을 간결하게 설명한 짧은 경전입니다.
당나라 현장법사가 번역하였으며 260자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말 풀이로 뜻을 새기며 반야심경을 독송하며 반야의 세계로 깊이 몰입하시기 바랍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摩 訶 般 若 波 羅 密 多 心 經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도리를 밝힌 핵심이 되는 경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觀自在菩薩 行深般若波羅密多時 照見五蘊皆空 度一切苦厄
관자재보살님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할 때 오온이 모두 공함을 비춰보시고
모든 고액을 건넜느니라.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물질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물질과 다르지 않으니 물질이 곧 공이요
공이 곧 물질이며, 수상행식도 또한 그러하니라.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舍利子 是諸法空相 不生不滅 不垢不淨 不增不減
사리자여! 이 모든 법(물질)의 공한 모양은 생기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시고 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是故 空中無色 無受想行識 無眼耳鼻舌身意 無色聲香味觸法
이러한 까닭에 공에는 물질이 없고, 수상행식도 없으며, 안이비설신의가 없어
색성향미촉법도 없고,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無眼界 乃至 無意識界 無無明 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
안계 내지 의식계까지 없고,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 다함도 없고 내지 늙고 죽음도 없고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역무득
亦無老死盡 無苦集滅道 無智亦無得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도 없으며, 고집멸도도 없고, 지혜도 없고 또한 얻음도 없느니라.
이무소득고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以無所得故 菩提薩陀 依般若波羅密多 故心無罣碍
얻음이 없는 까닭에 보살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므로 마음 걸림이 없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無罣碍故 無有恐怖 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없어 헛된 생각에서 멀리 떠나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며,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고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
三世諸佛 依般若波羅密多故 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
삼세의 모든 부처님도 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고지 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故知 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고로 알라. 반야바라밀다는 가장 신비로운 주문이며, 가장 밝은 주문이며,
가장 높은 주문이며,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 반야바라밀다주
是無等等呪 能除一切苦 眞實不虛 故說 般若波羅密多呪
견줄 데 없는 주문이니 능히 일체의 괴로움을 없애고 진실하여 헛되지 않느니라. 고로
반야바라밀다 주문을 말하노니
즉설주왈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 사바하"
卽說呪曰 "偈諦 偈諦 波羅偈諦 波羅僧偈諦 菩提 娑婆訶"
주문은 이러하니라. "건너가자 건너가자 넘어서 건너가자 모든 것을 넘어서 건너가자
그 곳에 공의 깨달음이 있느니라".
반야심경의 용어해설
1.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르는 도리를 밝힌 핵심이 되는 경전", 넓은 의미로는 "큰
지혜로 우리에게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이 되는 말씀"을 말한다. 여기서,
마하는 크다, 많다, 승리하다. 반야는 생명 내부의 움직임 속에서 절로 솟아나는
지혜. 법의 이치를 깨달은 최상의 지혜. 따라서 반야를 얻은 사람은 성불하여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다. 바라밀다는 깨달음의 저 언덕에 이르는 상태, 심경은 핵심이 되는
경전을 말한다.
2. 관자재보살
중생을 고통에서 구원코자하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마음의 화신.
3. 조견오온개공
몸과 마음이 모두 텅 비어있음을 비춰보다. 오온(五蘊)에는 인간을 구성하는 5가지의
구성요소[색(色)온, 수(受)온, 상(想)온, 행(行)온, 식(識)온]가 있다. 인간으로 말하면
몸과 마음. 이 오온은 불교의 인간관(人間觀)을 나타내며, 인간은 이 5가지 작용
때문에 인간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색온(色蘊)은 물질적 현상으로 존재하는 몸체 즉,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
인간으로 말하면 육신에 해당하는 부분, 수상행식(受想行識)은 몸체에서 활동하는
정신적인 작용, 수온(受蘊)은 몸체에 어떠한 일이 일어날 때 느끼는 것 즉, 즐거움과
괴로움을 느끼는 마음의 감수작용을 말한다.
공(空)~ 색(물질)을 형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근원적인 힘. 유(有)와 무(無)를
초월한 존재의 실상을 말한다.
4. 도일체고액, 사리자
도는 건너가다, 일체는 모든, 고액은 고난과 재액, 사리자는 석가모니 10대제자 중
가장 지혜가 많은 제자를 말한다.
5. 제법공상
제법(諸法)은 일반적인 사물을 나타내는 말로서 식물, 동물, 무생물을 비롯하여
여기에 인간도 포함된다. 공상(空相)은 모든 법이 빈 모양.
6.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십팔계의 하나인 육식을 말하며, 십팔계는 육근, 육경과 육식으로 구성된다.
육식(六識)에는 육근과 육경 사이에서 도출되는 인식작용인 안식계, 이식계, 비식계,
설식계, 신식계, 의식계가 있다.
여기서, 안식계(眼識界)는 눈으로 보아서 인식되는 것, 이식계(耳識界)는 귀로 들어서
인식되는 것, 비식계(鼻識界)는 코로 냄새를 맡고 인식되는 것, 설식계(舌識界)는
혀로 맛을 보아 인식되는 것, 신식계(身識界)는 몸으로 촉감을 느껴 인식되는 것,
의식계(意識界)는 의지로 지각을 느껴 인식되는 것을 말한다.
7.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 역무노사진
무명∼노사 즉, 12인연을 줄인 말. 십이인연(十二因緣)은 무명, 행, 식, 명색, 6입, 촉,
수, 애, 취, 유, 생과 노사를 말한다. 여기서, 무명과 행은 과거이인(過去二因)으로서
이로 인해 식, 명색, 육입, 촉, 수 5가지(현재오과)가 생긴다. 애(愛), 취(取)와 유(有)는
현재삼인(現在三因)으로서 이것이 현생의 씨앗이 되어 미래의 결과인 생과 노사를
낳게 된다.
무명(無明)은 어둠(暗)을 말하며, 이 때문에 생(生)과 사(死)의 윤회 수레바퀴가 되풀이
된다. 행(行)은 어두운 정신세계에서 무엇인가 요동하며, 움직이기 시작하는 단계.
잠재적인 무의식력이며, 충동력을 말한다.
업식(業識)이 있는 동안 우리는 끊임없이 윤회(輪廻)를 되풀이한다.
때때로 살아있는 동안 어느 한 곳에 너무 집착하면 영혼만 남게되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물질화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평소에 애(愛,) 취(取),
유(有)의 업(業)을 잘 지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인연을 어떻게 가꾸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생은 달라진다.
8. 무고집멸도
사성제(四聖諦)인 고제, 집제, 멸제, 도제를 말한다. 여기서, 고제(苦諦)는 인생은
괴로움으로 충만되어 있다는 견해로서 불교에서는 이 고에서 출발한다고 본다.
집제(集諦)는 고(苦)의 원인이 되는 것, 멸제(滅諦)는 괴로움이 소멸된 것으로
삼독(탐진치:욕심, 성냄, 어리석음)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 고통을 떠나 즐거움을
얻는 일은 불교의 목적이자 종교가 향하는 목표이다. 도제(道諦)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방법으로서 팔정도가 있다.
팔고(八苦)는 생, 노, 병, 사의 사고(四苦)와 애별리고, 원증회고, 구부득고,
오온성고를 말한다. 여기서, 애별리고(愛別離苦)는 좋아하는 것(사람)과 헤어짐으로서
괴로운 것, 원증회고(怨憎會苦)는 싫어하는 것(사람)과 만나서 괴로움것,
구부득고(求不得苦)는 자기가 구하려는 것이 얻어지지 않아 괴로운 것,
오온성고(五蘊盛苦)는 몸과 마음 그 자체가 하나의 고통이 되는 것.
팔정도(八正道)는 정견, 정사,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을 말한다.
여기서, 정견(正見)은 바른 소견. 존재의 실상을 바로 꿰뚫어 보는 것, 정사(正思)는
바른 생각. 정견이 이루어지면 바른 생각을 할 수 있다, 정어(正語)는 바른 언어.
올바르지 못한 말은 삼업중에서 구업(口業)을 짓는 것과 연관된다.
정업(正業)은 바른 행위. 삼업(신·구·의)을 통하여 바른 업을 짓는 것, 정명(正命)은
바른 생업. 생명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바른 수단, 정정진(正精進)은 바른 정진. 곧
바른 수행, 정념(正念)은 바른 기억. 부처님 말씀을 올바로 기억하여 전하는 것,
정정(正定)은 바른 명상. 올바른 삼매로서 앞의 7가지가 실천에 옮겨질 때 이루어지는
최상의 단계.
9. 무지역무득
깨달음을 향하는 최상의 열쇠가 되는 지혜마저도 깨달음의 문이 열리는 순간에 모두
사라져 버리기 때문에 이를 무지(無智)라 하며, 불교에서는 완성이 없고 끝이 없기
때문에 완성상태에서 얻어지는 것마저 부정하고 있어 참으로 깊이 들어가면 얻는
것마저 없는 순간이 되는데 이를 무득(無得)이라 한다.
10. 보리살타, 심무가애
보리살타는 보살. 깨달은 중생을 말하며, 심무가애는 "마음에 아무 걸림이 없다"는
말로서 "지혜의 완성은 모든 장애를 없어지게 한다"는 뜻이다.
11. 무유공포
"두려움이 없다"는 말로서 마음에 아무 거리낌이 없으면 그 결과로 두려움이 걷히고
밝은 세계가 펼쳐짐을 말한다.
12. 원리전도몽상
몽상은 꿈과 같은 실현성 없는 헛된 생각. 헛된 생각을 멀리 한다는 말로서
올 바른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뜻이다.
여기서, 전도는 평상한 도리를 어기고 바른 이치를 위반하는 것,
13. 구경열반
보살이 지혜의 완성으로 얻게 되는 종착점으로서 최상의 경지를 말하며, "반야심경"이
추구하는 궁극적인 즐거움의 상태가 "구경열반"이다. 여기서, 열반은 인간에게
고통의 원인이 되는 온갖 삼독과 번뇌 망상을 불 끄듯이 완전히 소멸한 상태를
말한다. 3독(三毒)은 탐진치(貪瞋痴)로서 "욕심, 성냄, 어리석음"을 말한다.
14. 삼세제불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부처님
15.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범어를 그대로 음역한 깨달음의 절정을 나타내는 말로서 더 없이 충만한 깨달음.
16. 대신주, 대명주, 무상주
주(呪)는 주문 또는 진언. 대신주는 위대한 주문, 대명주는 심원한 지혜의 주문,
무상주는 최고의 주문
17.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
뜻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건너가자 건너가자 넘어서 건너가자 모든 것을 넘어서 건너가자
그 곳에 공의 깨달음이 있느니라"
===============================
#3. 사성제(四聖諦)
사성제(四聖諦, 산스크리트어: Āryasatya) 또는 사제(四諦)는 《아함경(阿含經)》에 나오는 원시 불교 가르침으로 불교 기본 교의 가운데 하나이다. "제(諦 · Satya)"는 진리 또는 깨우침을 뜻한다. 사성제는 "네 가지 높은 깨우침(Ārya: 높은, Satya: 깨우침)" 또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Four Noble Truths)"라는 뜻인데, 고제(苦諦) · 집제(集諦) · 멸제(滅諦) · 도제(道諦)의 4가지 진리 또는 깨우침을 의미한다. 흔히 이 네 가지를 간단히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부른다.
고집멸도(苦集滅道)는 집과 고라는 연기하는 항목과 도와 멸이라는 연기(緣起)하는 항목을 합하여 나란히 늘어놨다.[1] 여기에서 집은 고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되며, 도는 멸의 원인 또는 인연이 된다. 고집멸도는 고통의 원인이 집착 또는 갈애이며 고통을 소멸시키는 원인 또는 수단이 도라는 연기관계를 밝힌 것이다.
한편, 고타마 붓다는 "우주는 영원한가? 영원하지 않은가?"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인 십사무기(十四無記)는 사성제와는 달리 지혜(智) · 깨달음(覺) ·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가르치거나 배울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2]
목차
1 십사무기와 사성제
2 사성제 2.1 고제 2.1.1 삼고와 팔고
2.1.2 고고
2.1.3 괴고
2.1.4 행고
2.2 집제
2.3 멸제
2.4 도제
3 함께 보기
4 각주
5 참고 문헌
십사무기와 사성제
고타마 붓다는 십사무기(十四無記)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은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다운 길이 아니며, 반면 사성제는 열반으로 나아가게 하는 실제 길이라고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은 사성제에 대해 늘 말하고 가르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제자들에게도 십사무기와 같은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얽매이지 않아야 하며 사성제라는 실제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고타마 붓다 견해는 십사무기 줄거리가 들어 있는 《중아함경 제60권 전유경(箭喻經) 제10》에 잘 나타나 있다.[2]
「世有常者,有生、有老、有病、有死,愁慼、啼哭、
憂苦、懊惱,如是此淳大苦陰生。如是, 世無常,世有底,世無底,命即是身,為命異身異, 如來終,如來不終,如來終不終, 如來亦非終亦非不終者,有生、有老、有病、有死, 愁慼、啼哭、憂苦、懊惱,如是此淳大苦陰生。
「世有常,我不一向說此。以何等故, 我不一向說此?此非義相應,非法相應, 非梵行本,不趣智、不趣覺、不趣涅槃, 是故我不一向說此。如是,世無常,世有底, 世無底,命即是身,為命異身異,如來終, 如來不終,如來終不終,如來亦非終亦非不終, 我不一向說此。以何等故, 我不一向說此?此非義相應,非法相應,非梵行本, 不趣智、不趣覺、不趣涅槃, 是故我不一向說此也。
何等法我一向說耶?此義我一向說,苦、苦習、苦滅、苦滅道跡,我一向說。 以何等故,我一向說此?此是義相應, 是法相應,是梵行本,趣智、趣覺、趣於涅槃, 是故我一向說此。是為不可說者則不說, 可說者則說,當如是持,當如是學。」
"우주 시간은 영원하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도 남이 있고 늙음이 있으며 병이 있고 죽음이 있으며, 슬픔 · 울음 · 근심 · 괴로움 · 번민이 있으니, 이리하여 이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긴다. 이와 같이 "우주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우주 공간은 유한하다. 우주 공간은 무한하다. 자아와 육체는 같다. 자아와 육체는 다르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도 있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여기 없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없는 것도 아니고 없지 않는 것도 아니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에게도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으며, 슬픔 · 울음 · 근심 · 괴로움 · 번민이 있으니, 이리하여 이 순전히 괴로움뿐인 큰 무더기가 생긴다.
"세상 시간은 영원하다"는 말을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로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는 까닭은, 이치(義)에 맞지 않고 법(法)에 맞지 않으며 또한 범행(梵行)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우주 시간은 영원하지 않다. 우주 공간은 유한하다. 우주 공간은 무한하다. 자아와 육체는 같다. 자아와 육체는 다르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도 있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없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다. 여래는 육체가 죽은 뒤에는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는 것도 아니다"느 따위 말을 나는 언제나 하지 않는다. 무슨 까닭으로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이치(義)에 맞지 않고 법(法)에 맞지 않으며 범행(梵行) 근본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 나는 어떤 법을 언제나 말하는가? 나는 다음과 같은 이치(義)를 언제나 말하는데, 그 이치란 괴로움(苦)과 괴로움의 원인(苦習)과 괴로움의 소멸(苦滅)과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苦滅道跡)이다(사성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을 말한다. 무슨 이유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을 말하는가? 이것들(사성제)을 말하는 것은, 이것들(사성제)은 이치(義)에 합당하고 법(法)에 합당하며 범행(梵行)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지혜(智)로 나아가게 하고 깨달음(覺)으로 나아가게 하며 열반(涅槃)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이것들(사성제)만을 말한다. 이와 같은 것이 바로 말하지 않아야 할 것은 말하지 않고 말하여야 할 것은 말한다고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마땅히 이러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이와 같이 진정 가져야 할 것을 가지고 진정 배워야 할 것을 배워야 한다.
사성제
고제
이 부분의 본문은 고제, 3고, 8고입니다.
고제(苦諦, Duhakaha Satya)는 범부(凡夫), 즉 깨치지 못한 사람의 삶은 고(苦)라고 하는 진리이다.[3] 즉, 인간은 색 · 수 · 상 · 행 · 식의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인데, 깨치지 못한 사람, 즉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사람에게 있어서 그의 삶은 고통이라는 통찰이다.
삼고와 팔고
고통은 크게 누구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생로병사의 고고(苦苦), 변화하고 무너지는 괴고(壞苦), 오온으로 이루어진 존재에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에 의해 비롯되는 행고(行苦)등의 3고(三苦)로 분류된다. 3고는 8고(八苦)로 세분되기도 한다.
고고
고고(苦苦)는 누구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고통인 생로병사의 고통을 말한다. 생로병사 중 특히 생과 사는 아직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윤회를 벗어나지 못하며, 깨달음을 성취할 때까지는 배움을 위해 다시 세상에 태어나는 일이 반복된다는 것을 뜻한다.
1.생고(生苦): 태어나는 고통
2.노고(老苦): 늙는 고통
3.병고(病苦): 병드는 고통
4.사고(死苦): 죽는 고통
괴고
괴고(壞苦)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무너지는 고통"인데, 모든 것이 인과 연에 의해 발생한다는 연기의 법칙 즉 인과의 법칙과 모든 존재가 고정됨이 없이 항상 변화한다는 무상(無常)의 법칙에 바탕하여 일어나는 "변화하고 무너지는 고통"이다.
5.애별리고(愛別離苦): 사랑하는 것과 헤어지는 고통
6.원증회고(怨憎會苦):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야 하는 고통
7.구부득고(求不得苦): 원하는 것을 성취하지 못하는 고통
행고
행고(行苦)는 오온(五蘊) 또는 오취온(五取蘊)으로 이루어진 존재인 인간 자신에 대하여 "나"라고 할 수 있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함에 의해 비롯되는 고통으로 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라고도 한다.
8.오취온고(五取蘊苦) 또는 오음성고(五陰盛苦)
오온(五蘊: Paňca Sakandha) 또는 오취온(五取蘊)은 다음과 같다.
색(色: Rūpa · 루파)
수(受: Vedanā · 베다나)
상(想: Samjňā · 삼즈나)
행(行: Samskāra · 삼스카라)
식(識: Vijňāna · 비즈나나)
집제
집제(集諦, Samudaya Satya)는 고통의 원인에 관한 진리로, 범부(凡夫), 즉 깨치지 못한 사람이 겪는 고고 · 괴고 · 행고 등 모든 고통의 원인은 업(業)과 번뇌(煩惱)에서 비롯됐다는 통찰이다. 남방상좌부 불교에서는 번뇌 중에서 인간의 갈애(渴愛, 갈망함) 또는 망집(妄執)[3]을 핵심적인 고통의 원인으로 본다. 반면 대승불교에서는 "나" 또는 "나의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는 무지(無知) · 무명(無明)에서 비롯된 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3]을 고통의 주 원인으로 본다.
멸제
멸제(滅諦, Nirodha Satya)는 고통의 소멸에 관한 진리, 혹은 고통의 원인의 완전한 소멸에 관한 진리다. 고통의 원인인 갈애(渴愛) · 아집(我集) 또는 망집(妄執)이 완전히 소멸될 수 있음을 통찰하는 것이다.[3] 고통의 원인이 완전히 소멸된 상태를 열반(涅槃) 또는 해탈(解脫)이라 한다.[3]
도제
이 부분의 본문은 팔정도입니다.
도제(道諦, Mārga Satya)는 고통을 소멸시키는 행을 하는 진리를 말한다. 즉, 도제를 행함으로써 실제로 멸제("고통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는 것")를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이런 면에서 도제는 멸제의 원인이 되는 실천 또는 수행을 의미한다. 불교의 모든 교의는 사실상 도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원시 불교에서는 도제를 정견(正見) · 정사(正思) · 정어(正語) · 정업(正業) · 정명(正命) · 정정진(正精進) · 정념(正念) · 정정(正定)의 팔정도(八正道)인 것으로 설명한다.[3]
남방상좌부 불교에서는 도제를 팔정도를 포함하는 사념처(四念處) · 사정근(四正勤) · 사여의족(四如意足) · 오근(五根) · 오력(五力) · 칠각지(七覺支) · 팔정도(八正道)의 37조도품(三十七助道品)인 것으로 설명한다.
대승불교에서는 도제를 37조도품 외에 보살의 원행(菩薩의 願行: 보살의 서원과 수행, 간단히 보살행 또는 보살도)을 담은 보시(布施) · 지계(持戒) · 인욕(忍辱) · 정진(精進) · 선정(禪定) · 반야(般若: 지혜)의 육바라밀(六波羅蜜) 또는 육바라밀에 방편(方便) · 원(願) · 역(力) · 지(智)의 네 가지를 추가한 십바라밀(十波羅蜜)을 포함하는 것으로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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