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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인디고 유니콘 원문보기 글쓴이: 봄날isu
빵과 십자가2
1-3. 피터 모린의 푸른혁명(Green Revolution)
도로시 데이에게 영감을 주었던, 피터 모린은 1877년 프랑스 남부 랑그도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23남매의 장남이었고, 한 소작농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리스도형제회’에서 교육을 받고 당시에 혼란에 빠져 있던 프랑스에서 가톨릭 인민주의를 주장했다. 1909년 아메리카로 건너와 캐나다에서 농장경영에 실패한 뒤에 불법으로 국경을 넘어 뉴욕주로 왔다. 그후 20년 동안 미국 동부와 중서부를 가로지르는 유랑생활을 하며 닥치는 대로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피터는 그러한 힘겨운 노동을 하느님의 선물이라고 믿고 그러한 자신의 삶에 만족했다. 성프란치스꼬처럼 ’거룩한 가난‘을 신부로 받아들여 빈민가 싸구려 식당에서 밥을 사먹고 어디서든 잠을 잤다. 그렇게 하여 번 돈으로 책을 사보거나 자기보다 더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가톨릭 급진주의자였던 피터 모린은 성경과 성인들의 삶, 그리고 교황회칙 등을 근거하여 새로운 사회질서를 세우기 위한 종합적인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있었다.1) 피터 모린은 자본주의를 경멸하면서도 역사법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지배라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신념, 이른바 산업주의와 진보에 대한 견해를 불신했다. 오히려 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란 폐지되어야 하며, 노동자들이 기계부속처럼 일하고 모두 공장 굴뚝만 바라보는 산업사회 역시 전부 해체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대신에 그 자리에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 사이의 올바른 균형을 꾀한다는 측면에서 분산화된 경제체제가 들어서기를 희망했다. 이러한 견해는 중세시대의 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인데, 경신(敬神: Cult), 경문(敬文: Culture), 경작(耕作: Cultivation)의 종합을 이상으로 삼았다.
피터 모린은 강제가 없는 협동하는 사회, 공예가와 장인들이 스스로 조그만 공장의 주인이 되는 사회를 꿈꾸었다. 농경공동체에서 학자와 노동자가 함께 땀을 흘리고 함께 생각하는 ‘노동자-학자의 융합’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불평만 하고 고발에 치중할 것이 아니라 인간이 더 선해지기 쉬운 사회를 ‘낡은 사회의 껍질 안쪽’에 만들 수 있는 행동을 하도록 부추겼다. 따라서 이러한 행동은 ‘객관적 상황’이 올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으며, 그리스도의 계명이 우리 앞에 있으므로 우리는 이 말씀에 살을 붙이고 복음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뭇 사람들을 끌어당기자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피터 모린이 제안한 3단계 프로그램은 ① 사고의 정화를 위한 원탁 토론 ② 애덕 실천을 위한 환대의 집 운영 ③ 노동자가 학자도 될 수 있고 학자도 노동자가 될 수 있는 농경공동체의 건립이다.2) 그리고 이러한 생각들을 선전하는 급진적인 가톨릭 신문을 만들자고 하였다.
1-4. 목소리 없는 자의 목소리, ‘가톨릭일꾼’ 신문
피터가 처음에 제안한 신문의 이름은 <가톨릭 급진주의자>였다.3) 겉치레 해결책에 만족하지 않고 개인적, 사회적 문제를 뿌리까지 찾아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로시 데이는 편집자의 태도를 나타내기보다 독자를 대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가톨릭일꾼(Workers 노동자)>이라는 이름을 택했다.4) 두 사람은 모두 신앙을 당시의 사회문제와 결부시킬 방법을 찾고 있었지만 유사한 성향의 공동협조자로 보기엔 힘들다. 피터와 도로시는 전혀 다른 문화, 다른 시대의 사람이었다. 피터의 뿌리는 땅에 있었고, 그의 사상은 개인적이고 지역적이라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피터는 중세 아일랜드 수도사들에게서 모델을 찾았다. 그러나 그보다 스무살이나 어렸던 도로시는 도시 출신으로 노동조합, 대단위 정치운동, 계급투쟁의 세례를 받은 세대였다. 그러한 두 사람을 동역자로 삼으신 하느님의 섭리가 오묘하다.
<가톨릭일꾼> 신문은 도로시의 부엌을 편집실 삼아 시작하였다. 자금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걱정할 때, 피터 모린은 이렇게 말했다. “성인의 역사를 보면 자본은 기도를 통해서 얻어집니다. 하느님께서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보내 주십니다. 인쇄비를 댈 수 있을 거예요. 성인들의 일생을 읽으면 알게 됩니다.” 이 말은 신문뿐 아니라 가톨릭일꾼운동의 역사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가톨릭일꾼운동은 규정도 없고 재단도 이사회도 없다. 불안전함 가운데, 취약함 가운데 자신을 놓음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의존(의탁)을 가능케 한다.
<가톨릭일꾼> 신문은 누구나 사 볼 수 있도록 1페니에 팔고 있는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1페니에 팔린다. 이 신문은 1933년 5월 1일에 2천 5백부가 유니언 광장에서 공산주의 집회 때에 뿌려졌다. 그런데 2년도 안 되어 발행부수가 15만부로 껑충 뛰었다. 가톨릭신앙의 눈으로 사회문제를 다루는 신문에 호응하는 사람들의 수가 급속히 불어났다. 그 지역의 신학교와 교회에서도 수십 부를 주문했다. 열성 청년들이 길거리로 나가 신문을 팔았다. 독자들은 다른 종교, 정치 계통의 신문에서 볼 수 없는, 특별히 가깝고 가정적인 느낌의 <가톨릭일꾼> 신문만이 갖고 있는 목소리를 발견하였다. 원칙이 있고 뉴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친구끼리 편지라도 교환하듯이 쓴 글이었다. 전국적인 규모의 신문들이 소홀히 하기 쉬운 특정한 동네 그리고 지역의 냄새와 소리와 작은 사건들에 깊은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로시 데이는 1952년 4월 <가톨릭일꾼>신문에 “도움이 필요한 이들의 비참함과 가난한 이들의 신음은 그리스도의 고통을 만드는 세계 고통의 한 부분”이라고 하면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그는 특별히 리지외 소화 데레사 성인의 ‘작은 길의 영성’을 소중하게 여겼는데, 데레사의 가르침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우리의 작은 행동이 지닌 의미! 우리가 실행하지 못한 작은 것들의 의미! 우리가 하지 못한 항의들, 우리가 선택하지 못한 기준들! 세상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작은 행동의 의미에 대하여 숙고가 필요하다. 우리는 생명을 선호한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인간의 형제애를 위하여 일하고자 한다. 소수인들, 소수의 사람들만이라도 불의에 저항하여 외칠 수 있고, 이 세상에서 인간이 만든 고통에 대항하여 굶주리고 집 없는 이들, 일이 없는 이들, 죽어가는 이들을 대신하여 외칠 수 있다고 믿는 ‘고집 센’ 소수의 사람들과 함께 행동하려고 노력한다.”고 하면서 소리 내어 울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대신하여 “말해야 하고 써야 한다.”고 천명한다.
1-5. 자비의 실천, 환대의 집
피터 모린은 5세기의 교회 공의회가 주교들로 하여금 교구마다 ‘환대의 집’을 만들게 했다는 기록을 보고 기뻐했다. ‘환대의 집’은 가난한 이, 병든 이, 고아, 노인, 여행자, 순례자 그밖의 여러 종류의 곤궁한 사람들에게 열려 있었다. 이 집은 “내가 낯선 사람이었을 때 네가 받아들였다”는 성경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다.1) 피터가 보기에 ‘환대의 집’은 따뜻한 안식처 노릇을 할 수 있으며, 독서실과 직업훈련을 제공할 수 있고 기도와 토론과 공부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다. 교구에서 그런 집을 후원해야 하고 교구생활에 필수적인 것으로 삼아야 한다고 여겼다.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친구만을 환영하고, 낯선 이를 돌보는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반대하였다. 사랑과 자비의 일은 모두가 해야 할 일이며 생활의 한 부분으로 여겨야 한다. 어느 집이나 하느님의 대사를 받아들일 ‘그리스도의 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낯선 얼굴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라고 그리스도가 말씀하셨다.2)
‘환대의 집’을 요청하는 기사가 신문에 실리자 집 없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찾아와 신문에 실린 집을 찾으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물었다. 도로시는 즉시 아파트를 빌렸고 얼마 안 가 아파트가 더 필요하게 되자 찰스가에 건물을 갖게 되었다. 급식행렬도 마찬가지여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시작되었다. 환대의 집에는 항상 따뜻한 커피와 수프와 빵이 준비되어 있어 누구든지 들어와 함께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이 소문이 퍼져, 1936년엔 수백 명의 사람이 도로시의 집 앞에 줄을 섰다. 가톨릭교회에서 세운 다른 많은 단체들과 달리 ‘가톨릭일꾼의 집’에선 아무도 설교를 하지 않아서 사람들은 의아해 하였다. 다만 벽에 걸린 십자고상만이 유일한 직원들의 신앙의 표시였다. 자원 봉사자인 직원들은 숙식과 가끔 용돈 정도만 제공받고 월급 없이 일하는 사람들이다. 점차 다른 지역에도 이런 집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여 10년 만에 30채 이상으로 불어났는데, 각각의 집들은 뉴욕 본부와 관계를 맺으면서 신문을 통해 함께 준수해야할 원칙을 천명하면서, 환경과 필요에 따라서 나름의 조직과 방식을 채택하여 독립적으로 운영되었다.
일꾼의 집에 자주 오는 사람들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는데, 담배 피는 조, 이탈리아 사람 마이크, 미친 폴 등이다. 그 사람들은 일꾼의 집을 제 집으로 생각하여 잡일을 돕기도 하고 항상 똑같은 의자나 구석에 앉기도 하고 같은 침대에서 자기도 했다. 일꾼의 집은 무정부적 경향이 있어서 단속과 제한, 규칙을 철저히 거부했으며, 온갖 배경을 갖고 있는 개인들에 대하여 너그러웠다. 이 공동체에선 구성원의 개인적, 이념적 대립을 세심하게 감싸 안으며 그들에게 오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한 식구로 맞아들였다. 언젠가 사회사업가 한 사람이 도로시 데이에게 밑바닥 사람들이 얼마나 오래 이 집에 머물 수 있는지 물었다. “영원히요. 우리와 살고 우리와 죽고, 우리는 가톨릭식 장례를 지내줍니다. 죽은 후에 필요한 비용도 대줍니다. 일단 들어오면 가족의 일원이 되지요. 아니면 과거에 가족의 일원이었던 사람이 되고요. 그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형제자매입니다.”3)
1-6. 학자-노동자 융합, 농경공동체
피터 모린이 제안했던 다른 중요한 프로그램은 시골에 농경공동체-농경대학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도로시 데이는 훨씬 도시적이었으나 농촌에 자리를 잡아야 한다는 피터의 생각에 동의하였다. 뉴욕 가톨릭일꾼운동은 1936년 펜실바니아주의 이스톤에 22에이커의 땅을 샀다. 이 농장에 사는 사람들은 학자들, 노동자, 집 없는 사람, 대학생, 엄마와 아이들이었는데, 작물을 키우고, 주말엔 원탁토론을 하였으며, 여러 가지 주제를 공부하기 위해 여름학교를 열기도 하였다. 공부하러 오는 사람들 역시 머무는 동안 농장일을 도울 것이었다. 이때는 공황의 시기였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산업화와 도시화가 사회에 가져오는 심각한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피터 모린은 농촌에서 태어나 자라난 사람이었으며 땅에 되돌아가는 것을 그 해답으로 보았다.4)
피터 모린의 생각에 의하면, 농경공동체는 공황시기에 머물 곳과 음식을 마련해 주어 사람들의 즉각적인 필요에 응답할 수 있으며, 산업경제 자체에 내재되었다고 생각한 순환적인 실업의 문제를 약화시키고, 나아가 보다 안정되고 정의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농경공동체는 농작법과 수공제조법을 도시거주자들에게 훈련시킬 것이며, 이러한 훈련과 양성은 또한 점차적으로 땅과 마을공동체 중심의 생활방식으로 되돌아갈 길을 마련할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농작과 손노동으로 이윤보다는 실용적 필요에 따라 생산하도록 이끌고, 나아가 협동의 가치관과 영적 차원을 다시 발견하는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피터 모린이 보기에, 농촌과 도시에서의 사람들의 태도가 다른 것은 중대한 의미를 가졌다. 땅에서 사는 것은 협력과 필요한 정도만큼의 경제를 장려한다. 도시의 인위적인 세계보다 땅에서 살적에 인생철학은 기계적이기보다 유기적이 되며, 개인적이기보다 가족 중심적이 된다. 아이들이 환영받으며 노인네들은 존경을 받는다. 이렇게 농작과 수공업 문명 속에서 책임감이 회복되고 노동의 전체성(통합성)이 살아나면 자기존중의 의식과 존엄성이 살아날 뿐만 아니라 노동자가 ‘배움’에 대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화는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의 인격적 상호의존성 때문에, 그리고 각자가 공동체에 중요한 봉사를 하겠다는 책임감을 인식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가톨릭일꾼운동 초기에, 이 농경공동체들은 미국 전역에서 싹을 틔웠다. 공동체들은 다양한 크기였으며 어떤 식으로든지 가까운 도시의 가톨릭일꾼 환대의 집과 연결을 가지려고 노력하였다. 이스톤에 있는 농장에는 1938년에 50명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오트밀, 옥수수, 감자, 복숭아와 사과나무, 그리고 각종 과일나무들을 키웠다. 그들은 마당에 빵 굽는 오븐을 걸어두려고 했고 신발을 수선하고 옷을 깁고 매일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경당도 세울 계획이었다. 또한 이러한 공동체 운영 과정에서 특별한 것은 이른바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농부와 목수, 전기 기술자들, 하수도 기술자 등의 사람들로부터 받은 도움이다. 이 전문가들은 공동체 구성원이기도 하고, 때로는 이웃사람들, 혹은 도시의 가톨릭일꾼 공동체의 친구들이기도 하였다. 함께 일을 하면서 그들은 친구가 되었고 서로에게서 배우며,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생활방식을 자신들의 삶에서 직접 만져볼 수 있는 것으로 느끼게 되었다.
1949년 피터가 세상을 떠날 무렵부터 도로시 데이는 이 농경공동체를 ‘땅에 있는 환대의 집’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시골에 마련했던 농장들이 정통성 시비 등 여러 가지 문제에 시달리자,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일꾼운동의 목표가 교회를 가운데 두고 여러 가족들이 평화롭게 모이는 모범적인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가난한 사람들이나 이런저런 장애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특별한 봉사를 하는 것이라고 인정하게 되었다. 도로시는 배가 고파서 줄을 섰다가 가톨릭일꾼운동을 알게 되어 거처를 시골로 옮겨 오게 된 사람들을 위한 ‘환대의 집’으로 농장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피터의 구상이 너무 높은 목표를 가졌던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동시에 농장은 집단이나 개인이 피정의 장소로 사용할 수 있었다.
첫댓글 읽으면서도 참 환대의집이나 공동체를 이루는 곳은 그 자체가 사랑이라 봅니다.좋은 상식 감사드립니다.
그리스도교의 사랑과 생활방식을 자신들의 삶으로 실천한 도로시 데이와 그의 친구들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비록 그들처럼 생활하진 못하더라도 그들이 추구했던 인간적인 형제애의 정신은 잊지 말아야 겠어요. 난초님~감사합니다~
하느님의 뜻은 정말 오묘하신 것 같아요. 두사람의 만남이라든가, 또 실패를 통해서 다른 길을 보여주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