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대시
절대시에 가까이 가려는 안간힘 중이다
곁을 내줄까 저어하면서
경자년, 맑은 날 기다리며 이현애
해설 // 김은전 문학평론가. 서울대 명예교수
절대시의 추구와 구현
- 혼돈과 질서가 공존하는 판타지의 시세계
절대시는, 틸틸과 미틸 오누이가 찾아 나섰던 행복의 ‘파랑새’인가? 이현애 시인은 21세기 한국판 ‘이상한 나라’의 소녀 앨리스인가?
1. 머리말
이현애 시인은, 이번 시집에 「앞에 있는 오월과 뒤에 있는 오월 사이」라는 제명을 달았다. 어쩌면 어느 시절의 5월에서 또 어느 때의 5월 사이에 써 모았던 시의 묶음이란 뜻일까 하고 나는 받아들인다.
이 시집 원고를 받은 것이 금년 5월 초였으니, 내 해석이 옳을 듯도 싶다. 권말에 수록할 ‘해설’ 집필을 7월 말인 지금까지도 내가 탈고하지 못한 것은, 내 두뇌가 원래 우둔할 뿐 아니라, 글재주 역시 치졸하기 때문임을 고백한다.
하지만 탈고 지연은, 내 글솜씨 부족으로 붓대가 전진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되풀이한 탓뿐 아니라, 이현애시가 이제까지 내가 읽어왔던 여타 시인들의 시에 비해, 너무나 해독하기 어려운 고차원의 난해시였기 때문이라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싶다.
내가 우선 주목한 것은, 이현애 시인이 이 시집 권두에 붙인 자서,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절대시에 가까이 가려는 안간힘 중이다
곁을 내줄까 저어하면서
- 정자년, 「맑은 날 기다리며」 이현애
그리고 보니, 이현애시의 난해성은 곧 ‘절대시’의 추구 때문이 아니었는가 하는 것이 나의 손끝에 잡히는 해독의 실마리이기도 하다.
이 시인이 말하는 절대시가 어떤 유의 시를 가리키는지는 모르나 그것의 부재를 안타까워하는 모습에서 이 시인이 시를 쓰면서 추구해온 시의 궁극적 존재 양식이 절대시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절대시는 과연 어떤 모양의 시일까?
미학의 분야에서 자국인 일본에서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그 권위가 인정되는 도쿄대학의 교수이던 다케우치도시오가 편수한 「미학사전」(弘文堂新社 1967)에 의하면 ‘절대시(abslute poetry, poe⃐sie absolue)’는 순수시(pure poetry, poe⃐sie pure)와 거의 동일시하고 있다(P.386 R). 해당 항목에는 다음과 같은 풀이가 나온다.
순수시란 언어의 의미전달의 기능보다는 감동을 주는 작용, 특히 음악적 효과를 중시하고 일상의 용어에서 격리되어 산문과는 세심히 구별된 시적 세계를 구성하는 것이며 ‘절대시(poe⃐sie absolue)’라고도 일컬어진다. 이와 같은 시작은 실질적으로는 포(Edgar. A. Poe)에 비롯되고 보들레르에서 말라르메에게 계승되었는데 1920년 이후 발레리나 브레몽(Henry Bremond, 1865~1933)에 의해 강하게 창도된 이래 근대시의 하나의 극을 가리키는 것으로 되어 있다(「미학사전」, P.386. R).
나는 위에 예거한 다케우치 교수의 ‘절대시’ 해설과 이현애 시인이 추구해온 ‘절대시’가 과연 일치되는지 혹 일치되지는 않아도 접합되는 면은 있는지 그것조차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브레몽이, 시가 마침내 도달하고 찯아낸 경지가 ‘순수시’라 말한 것이나, 말라르메에서 그의 제자 격인 발레리의 ‘절대시’가 ‘순수시’ 개념의 연장 선상에 있음을 볼 때 이현애 시인이 추구해온 ‘절대시’도 시가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이상의 완벽한 ‘시의 경지’이리라 생각한다.
2. 이현애 시인의 시력과 근황
이현애 시인의 시력은 1998년 시전문 계간지 「시와 산문」을 통해 등단했고 이어 「가끔 길을 잃어버린다」,「모든 것들은 뒤에 머문다」, 「뜨거운 발톱의 저녁」, 「시계의 혓바늘」, 「이렇게 새로운 껍질이 생긴다」 등 개인 시집을 간행해 왔으며 이러는 동안 제8회 ‘한국 녹색시인상’, 제3회 ‘한국시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시와 산문 」2020년 봄 105호 참조).
내게 보내온 이 계간지 「시와 산문」 최근 호인 105호 권두에 실린 이현애 시인의 수필 「버림과 채움의 미학」에는 계절의 추이와 함께 겪는 자신의 삶의 진행에 대한 깊은 사색이 담겨있는 듯이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이제까지 간행되었던 이 시인의 시집 제명도 가끔 길을 잃어버린다」를 비롯해 「모든 것들은 뒤에 머문다」, 「뜨거운 발톱의 저녁」, 「시계의 혓바늘」, 「이렇게 새로운 껍질이 생긴다」에서 보듯 현재 진행형의 인생의 나날이 고스란히 시로 승화한 것으로 간주된다.
남아있는 삶이 있다고 생각하는 한 꼭 간직해 두고 싶은 것이 있고 다음, 자신도 모르는 내일이 계속된다는 것을 저들도 알고 있는 게다.
이현애, 「버림과 채움의 미학」
(「시와 산문」 2020 봄 105호 p.3)
위에 인용한 이현애 시인의 글 중의 ‘그들’은 ‘서서히 가을을 갈아입고 있는 앞산 나뭇잎’을 가리킨 말이나 앞산에 서 있는 수목들이 계절 따라 모습을 바꾸어가고 있는 모습들에 나이를 먹어가는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인생을 투영하여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간직해 갈 것인가 고뇌하는 시인으로서의 가치관’이, 시인으로서의 숙성도를 짐작케 한다.
어쩌니저쩌니해도 삶이란 참 재미있다. 버릴 것이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뭔가로 채우려 한다. 편리하니 채우고 아름다워 보이니 간직한다. 나 또한 지나갈 나날이 아직 남아있다는 생각 때문인가.
(위와 같은 글, 「시와 산문」 2020 봄 105호 p.8)
위에 인용한 이현애 시인의 글을 보면 이 시인이 얼마나 겸허한 자세로 자신의 삶을 엮어가려고 다짐하고 노력하는가 여실히 드러난다. ‘문체는 곧 그 사람이다(Le style est l’homme même - Leclere de Buffon, 1707~1788).’라는 말이 있거니와 위에서 살펴본 이현애 시인의 수필 「버림과 채움의 미학」의 문장과 문체로 미루어볼 때 나는 글쓴이인 이현애 시인의 인품과 인생의 나날이 유순하기 짝이 없고 ‘앞산의 수목’들처럼 계절 따라 아름답게 치장을 바꾸어가며 향기를 뿜는 것처럼도 느껴진다.
3. 이현애시, 해독의 열쇠
사람의 성품이 유순하니 시의 조사 역시 유순하고 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것은 겉보기 인상일 뿐이다. 까다롭거나 도발적이거나 하지는 않으나 무엇인지 모를 심지랄까 깡다구 같은 것이 감지된다.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아 일회한의 통독으로 지나쳐 버리지 못하고 거듭거듭 반복해서 읽어가며 뜻을 되짚게도 된다.
가령 이번에 간행되는 시집 「앞에 있는 오월과 뒤에 있는 오월 사이」의 1부 제명 「마른 풀더미 닦다」의 ‘말뜻’부터가 그렇다. ‘마른 풀더미 닦다’는 구문(構文, syntax)상 하자가 없다. 문장의 기둥인 주어와 서술어를 갖추었으며 주어에 수식어가 붙어 형식상 완벽하다. 그런데 ‘?’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된다.
‘닦다’는 문지르거나 훔치거나 하여 깨끗이 하는 일을 일컫는 말이다(「동아 새국어 사전」 동아출판, 2017 참조 ). 그러니 ‘풀더미 닦다’는 제명부터가 매우 수상쩍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도 이 말뜻이 궁금하여 시 본문(텍스트)을 눈여겨보게 된다. 1부 「마른 풀더미 닦다」 시편에 첫째로 고개를 내민 작품 「그랬다」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시제는 일반적으로 체언으로 제시되는 것이지 동사나 형용사 등 서술어로 쓰이는 용언이 단발單發로 즉 외마디로 발성되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다.
손 떨렸다 칼깃에 바람들 무렵, 한 패거리 된 잔뿌리 헤치다 그랬다 덤불 밭에 내린 잔설을 태우다 그랬다 뜨거워진 목덜미에 잘 길러 올려지지 않는 물줄기 잡느라 빠지는 손, 너덜거리는 사내 몸에 물 채우다 포도나무 타는 줄 몰랐다 기울어진 잠 속 헤매던 해, 궤짝 속에 넣어둔 흰빛 돌려준다 무언가에 뽑혀 나갈 듯 흔들리는 메타포 통로, 어떻게든 사랑해야 했고 밑동 굵은 우물 만들어야 했다 아직도 제 몸 두드리고 있고, 안개나 구름이 녹조처럼 매달려 웃어 젖힌다 더 흘릴 푸른 피 남았을까 중심점을 가늠할 수 없는 채 손 떨렸다 계속 그랬다
(1-1 「그랬다」 전문)
이 시의 제목 「그랬다」는 이 시를 이루는 텍스트 중간중간에 십입된 간투사 ‘그랬다’에 유래된 것임을 알게 되나. 이 시의 화자(話者, 작중인물)가 누구이며 어떤 상황에서 이 시가 쓰인 것인지 알기 어렵다. 그래서도 속편이 궁금해진다.
흩날리는 별 무리 기다린다 나침반 들고, 이번에는 어떨까 어쩌면 예언 이루어질지도,
(1-2 「마른 풀더미 닦다」 서두)
별하늘을 바라보는 행위, 나침반 들여다보는 행위는 모두 대해를 항행하며 방향을 바로잡고 현재의 위치를 확인하는 뱃사랍, 항해사, 항법사의 업무다.
그러고 보니 이번 시집은 이 시인의 인생사를, 이 땅 위에서 누리는 삶의 고비 고비에서 누리고, 느끼고, 치르고, 부대끼는 낱낱의 사연들을 노래한 시의 묶음이요 시의 꽃다발이려니 하는 풀이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나는 여기서 걸음을 되돌려 1-1. 「그랬다」의 중·후반부를 찬찬히 들여다본다.
너덜거리는 사내 몸에 물 채우다 포도나무 타는 줄 몰랐다 기울어진 잠 속 헤매던 해, 궤짝 속에 넣어둔 흰빛 돌려준다 무언가에 뽑혀 나갈 듯 흔들리는 메타포 통로, 어떻게든 사랑해야 했고 밑동 굵은 우물 만들어야 했다 아직도 제 몸 두드리고 있고, 안개나 구름이 녹조처럼 매달려 웃어 젖힌다 더 흘릴 푸른 피는 남았을까 중심점을 가늠할 수 없는 채 손 떨렸다 계속 그랬다
(1-1. 「그랬다」 중반부, 결미부)
나는 이 시작품 해독의 열쇠를 ‘메타포 통로’에서 구해본다. ‘메타포’ 아니고서는 이 시에 출몰하는 ‘너덜거리는 사내’가 누구인지 ‘사내 몸에 물 채우다’가 어떤 행위를 말하는지 ‘사내’와 ‘포도나무’가 어떤 관계인지 전혀 알 길이 없기 때문이다.
‘샘이 깊은 우물은 마르지 않는다’는 비유는 낯이 익으나 ‘밑둥 굵은 우물’은 마치 ‘우물을 한 그루의 나무’에 가탁한 것 같은 낌새가 있다.
‘푸른 피’라니 유럽의 유서 깊은 고귀한 귀족의 혈통을, 잡동사니 서민, 천민들과 구별하여 ‘블루 블랏(blue blood)’이라 비유한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있다. ‘푸른 피’라니 혹시 엽록소로 인해 초록빛을 띤 잎사귀로 치장한 나무들의 수액을 가리켰는가도 싶다.
이현애 시인은 이 시집의 곳곳에서 ‘모른다’는 말을 토하고 있다. 6부에서는 이곳에 한데 묶은 시 다발의 총 제목으로 「우리, 모두 잘 모른다」고 까지 고백하고 있다. 따지고 보면, 여기서 ‘모른다’고 한 것은 ‘우리는 서로 간에 인적사항을 모른다’는 뜻인지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사물의 본질과 현상을 모른다’는 뜻인지 아리송하다.
시인 스스로가 ‘모른다’고 실토하고 있으니 하물며 독자인 우리가 알 까닭이 없다.
여기서 비평가나 평론가가 개입하게 된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관람객들을 이끌고 전시된 회화나 조각, 혹은 출토된 도자기나 부장품, 서적, 민속자료등에 관해 설명을 하는 큐레이터들을 보게 된다. 화가나 조각가의 생애와 작품이 제작된 유래, 예술작품으로서의 가치와 미술사상의 위상 등 간결하나 핵심을 찔러 관람객의 이해를 돕는다.
그러니 비록 이현애 시가 ‘난해’한 시이면 그럴수록 평론가인 필자도 기를 쓰고 달겨들게 된다.
‘키 큰 새벽’이라니 사람 아닌 ‘새벽’의 키를 어떻게 잰단 말인가. 잴만한 눈금이 새겨진 줄자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다음 시행들을 찬찬히 뜯어보면 안개가 뒤덮인 세상, 구름이 널려있는 동녘 하늘에 불끈 솟아오를 태양이 느껴진다.
물기 머금고 있는 얼굴에서 햇빛 냄새가 난다 네모난 강물 언제 둥근 기둥이 될지 생각 중이다
(6-1. 「키 큰 새벽을 그리다」 중에서)
이날, 새벽을 기다리는 이 시인은 이렇게 마음을 가다듬으며 새벽을 기다린다
같이 오르던 키 큰 새벽 그린다
웃지 않아도 달려오는 거품 속 얼굴 늘어난다
시계가 멈추어도 꽃잎 멈추지 않고 소리 낸다
자신을 전시하며 너무 작다고 깨닫는다 잠에서 깨어난다
늘상 있었다 아직 스무 살이었다
언제부터 와 있었을까 아이, 옆에 앉아있다
(같은 시 중에서)
이 시인에게 찾아오는 새벽은 ‘아이’의 모습, 그리고 시인이 생각하는 자신의 나이는 ‘스물’, 간밤의 ‘어둠’은 ‘지느러미 꼬리’를 접으며 시인의 머릿속에서 자취를 감출 것인가.
머릿속 자리 잡은 어둠의 지느러미 꼬리 접으며
흐르는 구름 위에 다리 한쪽 올린다
그사이에 놓아줄 수 있는 간주곡 하나 만들어 낸다
누군들 그러고 싶지 않을까
(같은 시 결미부)
새벽의 다가옴은 찬란한 태양의 승천으로 결판이 나는 것이나 이 결정적 현상은 이 시인에게는 ‘간주곡’으로 청각적 이미지로 지각된다.
이현애 시인이 작곡가라면 새벽의 도래는 관현악곡으로 구현되리라 여겨진다.
4. 이현애 시의 미학, 은유(metaphor)
이현애 시의 화법은 얼핏 1930년대에 우리 시단에 큰 발자취를 남긴 모더니스트 감광균의 시풍을 떠올리게 한다. 김광균시의 특징은 구미 전래 문명의 이기로 채워져 가던 그 무렵 경성(京城, 지금의 서울) 도심지대를 노래하며 그 배후에 감지되던 먼 이역, 서구를 동경하는 엑조티시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시에는 차집 미모사, 호텔의 풍속계, 바닷가 노대, 공원의 동상과 분수, 고가선과 와사등, 요트, 아스피린 분말 같은 눈 등이 널려있다. 우산 받고 서 있는 여자아이도 ‘나타샤 같은 계집애’로 변한다.
김광균의 시 기법은 감각적 표현으로 집약된다. 시각적 회화적시의 화면이 독자의 눈 앞에 펼쳐진다. 청각을 통해 포착된 음향도 이 화폭에 수렴되고 만다.
풀닙 사이로 새어 오는 / 해맑은 별빛을 줍고 있었다
(「호반의 인상」 중에서 )
어디서 날너온 피아노의 졸닌 여음이
고요한 물방울이 되어 푸른 하늘에 스러진다
(「산상정」 중에서)
‘별빛을 줍고’도 그러하거니와 피아노의 ‘졸닌 여음이 … 물방울이 되어 푸른 하늘에 스러지’는 체험은 일찍이 우리 한국 사람들은 해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김광균의 시각적, 촉각적 감수성을 다음 세대 시인인 박목월에 이르면 청각적 감수성의 두드러짐으로 ‘음악성’을 띠고 만다. 시각적 심상도 노래의 악음으로 변하는 모양새가 된다. 그의 대표작으로 지목되는 「나그네」가 그 한 예다.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 // 그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 놀 // 그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 「나그네」 전문)
이 시의 음악성은 주로 7·5조의 리듬감에 의지한다. 그리고 시에서는 한 개의 단어라도 낭비가 없어야 하는데 한 개의 단어는 커녕 하나의 시행, 아니 한 연을 고스란히 들어 올려 끝 연으로 삼아 반복하는 강심장을 보이기까지 한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는 노래의 한 구절 같기만 하다.
다음 시에도 이 시인의 대담무쌍한 창작 기법이 그대로 드러난다.
배꽃 가지 / 반쯤 가리고 / 달이 가네 // 경주군 내동면/ 혹은 외동면 // 불국사 터를 잡은 / 그 언저리로 // 배꽃 가지 / 반쯤 가리고 / 달이 가네
(박목월 「달」 전문)
위의 시에서도 지은이는 7.5조의 기본율을 고수한다. 이 시의 음악성은 불과 3개 연으로 구성된 시작품에서 첫째 연의 전 새행을 종결부인 셋째 연에 그대로 반복한 데서 더없이 강렬해진다. 이 시에서는 경주군(지금은 경주시로 승격되었음)이니 혹은 외동면(지금은 없어짐)이니 혹은 외동면(지금은 외동읍) 등 무미건조한 행정구역의 지명까지도 목소리를 가다듬어 노래 부르는 듯이 보인다.
나는 이 대목에 이르러 ‘순수시’를 발설한 앙리 브레몽 신부의 다음 발언을 되새김질 한다
노련한 펜은 ‘한 작은 갈대,… 숲’과 같은 페이지로 하여금 노래 부르게 만든다.
나는 위에 예시한 두 편의 시를, 이 시인 박목월이 그린 자화상으로 본다. 밤하늘, 구름을 헤치고 한없이 길을 가는 달은 지상으로 옮기면 ‘강나루 건너서 밀밭길을 걷고 또 걷는 나그네’가 된다. 박목월의 필명에도 ‘달’ 이 들어있거니와 박목월은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외로운 길손’으로 보았을 듯 싶다.
앙리 브레몽의 ‘순수시’ 논의는 말라르메를 거쳐 P. 발레리에 이르면 ‘절대시’라는 용어로 바뀐다. 우리의 이현애 시인이 내세우는 ‘절대시’의 개념과 발레리의 ‘절대시’와는 별개의 것일 수 있겠으나 양자의 ‘절대시’는 앞에서 말했듯이 각각 시가 도달할 수 있는 극한의 완벽한 이상의 경지를 지향했으리라는 심증은 있다
나는 이현애 시인이 자신의 기법으로 언급한 ‘메타포’와 관련해 수사학 내지 미학의 견지에서 살펴볼 필요를 느낀다.
메타포, 즉 은유는 ‘본 뜻은 숨기고 비유하는 형상만 드러내어 표현하려는 대상을 설명하거나 그 특질을 표시하는 표현 방법’으로 풀이된다(동아 새국어사전, 동아 출판. 2003). 이 사전에는 그 용례로 김동명의 시 「내 마음은」의 첫구를 뽑아 보인다. ‘내 마음은 호수요’가 그 보기라 한다. 이 경우 ‘마음’과 ‘호수’는
1대1로 대응하며 겉에 드러난 ‘호수’와 밑에 숨은 ‘마음’ 사이에 기차길의 레일처럼 평행한다.
은유가 발전해서 시간의 흐름을 타는 사건으로 진전하면 우유(寓喩.諷喩, allegory)가 된다. 「이솝 우화」는 겉에 드러나는 등장 인물들의 행위나 이들이 일으키는 사건의 이면에 이야기꾼이나 혹은 글쓴이가 전하려는 ‘교훈’ 즉 메시지가 평행선을 그으며 제시된다.
유의와 본의사이에 설정된 1대1의 대응관계는 직유(直喩, simile)를 비롯해 은유, 우유, 제유 등에 공통되나 이에 대해 유의와 본의 사이에 1대1이 아니라 ‘1대 다(多,multipul)’의 대응 관계를 지닌 것이 상징(象徵, symbol)이다.
상징주의 문예사조는 시 분야에나 있지 소설의 영역에서 상징주의를 표방한 작가는 없었다. 하지만 미국의 H. 멜빌의 「모비 딕」(번역소설 제목은 「백경」) 은 상징주의 소설로 지목되고 있다. 그 까닭은 어느 포경선의 선원(작살꾼)으로 승선했던 이스마엘이라는 청년의 끔찍했던 체험담을 통하여 작가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그 메시지 풀이가 어렵기 때문이다.
상징주의 소설은 그 제재가 심각하고 의미의 함축성이 풍부하며 분위기가 숭고하기까지 하다. 상징주의 계열의 소설이 F. 카프카의 「변신」, 「성」 등 알레고리 소설과 구별되는 기준은, 전자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극히 자연스러운 사건이나, 알레고리 소설은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이치에 맞지 않은 꾸며낸 이야기로 어떤 교훈이나 작가의 메시지 전달을 위한 방편이라는 점이다. 전자의 분위기의 웅숭깊음에 대비해 후자가 경박한 인상을 풍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알레고리는 이솝 우화에서 보듯이 표면에 진행되는 사건의 줄거리와 이면에 평행선을 그리며 제시되는 교훈 사이에 1대1의 대응관계를 보인다. 이러한 관행에 일대 변혁을 초래한 것이 앞에 언급한 F. 카프카의 「변신」, 「성」 등 알레고리 소설이다. 사건의 불합리성은 알레고리의 본질이니 하등 달라질 리 없으나 표면에 진행되는 사건과 그와 평행해서 포착되어야 할 작가의 메시지 파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독자들의 두뇌는 혼란에 빠지고 만다.
알레고리 소설은 기껏해야 이솝 우화의 연장 선상에 있고 그 구조는 이미 정답이 주어진 수수께끼이어야 한다. 그런데 F. 카프카의 알레고리 소설에서는 정답이 실종된 상태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變身, Metamorphosis)」의 주인공, 잠자는, 별볼 일 없는 평범한 일개 월급쟁이, 어느날 아침 평소 늘 하듯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려 하는데 어째 몸이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한 마리 벌레로 변한 것을 깨닫는다(알레고리 소설의 특징인 실제로는 일어날 수 없는, 자연법칙에는 어긋나는 불합리한 사건). 그의 수입에 기대어 먹고살던 가족들의 당황해하는 모습, 그리고 그들이 내뿜는 혐오의 표정과 적의, 증오로 매일 되풀이되는 학대.
일반 독자는 말할 것 없고 그것이 직업인 평론가들도 터무니없으나 예사로 넘겨버릴 수 없는 이 끔찍한 사건을 다룬 소설에 사로잡히고 만다.
어떤 이는 근대사회의 모순과 비리, 인간 간의 부조리가 생생하고 심각하게 다루어지고 고발된 획기적 명작소설이라 평할 것이다. 악몽에 시달리고 신음하는 듯한 독후감을 떨쳐버리지 못하면서.
이현애 시를 논하면서 뜬금없이 H. 멜빌의 「모비딕」이니 F. 카프카의 「변신」 등 소설 탐색에 시간과 지면을 소비한 까닭은 이현애 시인이 시의 창작원리요 기법이라 실토한 ‘메타포’가 단순한 ‘메타포’의 경지를 뛰어넘어 이미 ‘알레고리’의 단계에 진입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현애의 고차원의 난해성을 F. 카프카의 일련의 알레고리 소설에다 견주고 있는 것이다.
5. 혼돈과 질서, 착란과 이성의 공존
독자와의 평범한 일상적 대화를 거부하고 자의식 속에 침잠하여 그것을 기호화하여 문장으로 꾸며내는 이현애 시의 수수께끼, 그것은 나에게 고대 이집트의 스핑크스를 연상케 한다.
스핑크스는 여자의 머리에 몸은 날개 달린 사자로 구상화된다. 어떤 학자는 설명한다. 야수의 생명력 넘치는, 그러나 야만스러운 충동에 견줄 수 있는 에술가의 창작의욕이 문명과 문화에 의해 다듬어지고 세련되어 지극히 아름다운 젊은 여인의 얼굴에 비할 만한 예술작품으로 출현하는 과정과 흡사하다고.
하지만 스핑크스에 얽힌 이야기, 스핑크스의 행적은 그게 아니다. 길의 요지에 버티고 서서 행인에게 수수께끼를 던지고 정답을 알아맞히지 못하면 잡아먹거나 벼랑에서 밀쳐 떨어져 죽게 만든다.
수수께끼의 정답은 비밀, 아름다운 여인이 지닌 비밀은 남자들의 궁금증을 유발하는 매력이요 자산으로 존재하고 작용할 수도 있으나 더러는 ‘판도라의 상자’일 수도 있다.
이 위험을 무릅쓰고 이현애 시의 수수께끼는 밝혀져야 한다. 우리가 읽고 풀어야 할 수수께끼의 하나로 나는 다음 시를 눈앞에 놓고 독자 제현과 읽어가기로 한다.
거꾸로 매달렸다 얼룩진 날개 달고
항로 기억하지 못하는 얼룩, 배에
오르는 일, 정말 우연이었을까
계단 쉬지 않고 휘몰아쳐 가며 항상
왼쪽에 있던 모든 증거, 오른쪽으로 옮긴다
불쑥 말 걸어온다
저 모퉁이 돌아 어느 틈새로 끼어 들고 있는,
물음표 향해 머리에 썼던 얼굴,
벗어 던지듯 씌워 놓고 지나가는 파도에
썩 괜찮은 이름 하나 붙여준다
물어봤으나 고개, 저었다
가운데 중 한가운데로 나아가려 했을까
검게 빛날 수 있다는, 처음 알게 된 며칠
괜찮지 않았던 종소리 지붕 떠받치고
몰아쉬는 숨 속에 머문다
말, 아니었을지 모른다
어디쯤 떨어뜨렸던 조각 바람, 누르스름한
입술 물고 있던 말 세워 놓는다
달은 머리 위에서 떠올라 금방
넘쳐나며 강 건넌다 잠시 뒤돌아왔다가
반짝이는 반음계와 만난다 그의 이름 잊지
않으려 같이 보았던 파도에 이름 새겼다
거꾸로 매달린 곳에서 내려올 수 없었다
(1-4. 「거꾸로 매달린 곳에서 내려올 수 없다」 전문)
시의 해독은 그림이나 음악 혹은 연극과 영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제목에서부터 시작된다. 제목은 사람으로 치면 얼굴에 해당한다.
이 시의 제목 ‘거꾸로 매달린 곳에서 내려올 수 없다’는 얼핏 보기에 김수영의 시 「하, 그림자가 없다」를 연상케 한다. 그림자 없는 실체가 없기에 제목부터가 심상치 않다. 제목부터가 독자의 궁금증을 유발한다.
이현애시가 「거꾸로 매달린 곳에서 내려올 수 없다」는 독자에게 ‘궁금증’ 정도를 지나 ‘비극적 상황 설정’으로 심리적으로 피학대 망상적 심리상태를 예감케 한다. ‘거꾸로 매달린 상태는 박쥐 아니고서는 다른 동물에게는 고문의 고통스러운 현장일 뿐이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주어’가 분명치 않다. ‘거꾸로 매달린’ 이가 시인 자신인지 혹은 등장인물인지, 이 거꾸로 매달린 자가 ‘얼룩진 날개를 달고’ 있으니 그냥 사람은 아닐 성도 싶다. 그래서 이 시의 독해를 위해서는 이 시에 쓰인 낱말들을 추려서 종류별로 묶어보기로 한다. 그 이치는 예컨대 자동차라는 기계의 실체를 알아보려면 일단 이 기계전체를 분해해서 그 구조를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견줄 수 있다.
자동차는 ① 동력의 근본인 엔진과 그 힘을 차륜에 전달하는 장치 ② 방향을 결정하는 조종장치 ③ 속도를 증폭하거나 억제하는 장치 ④ 각 장치에 전달되는 전기장치 등으로 구별된다.
이현애 시인의 「거꾸로 매달린…」에 쓰인 어휘를 유형별로 분류하면 다음과 같다.
공간 감각;
거꾸로, 왼쪽, 오른쪽, 모퉁이, 틈새, 한가운데, 어디쯤.
시간의 추이와 움직임;
내려오다, 매달리다, 휘몰아쳐 가다, 옮기다, 걸어온다, 끼어들다, 지나가다, 나아가다, 넘쳐나다, 건너다, 뒤돌아오다.
기호; 물음표, 반음계.
위에 예거한 단어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사용하는 것들로, 뜻이 명확하여 이 시가 구조상 견고함을 일깨워준다. 이 시의 견고성은 구문(構文, syntex) 상으로도 확인 된다
* 거꾸로 매달린 곳에서 내려올 수 없다
* 불쑥 말 걸어온다
* 썩 괜찮은 이름 하나 붙여준다
이상으로 볼 때 문장의 구조상 문제될 것은 하나도 없다. 문장상으로 볼 때 이 시는 문법상 어법상으로 질서가 정연한 완벽한 상태다.
그런데 읽기가 꺼끄러운 것은 어찌된 일일까? 나는 앞에서 이 시인의 시에는 주어가 생략되고 서술어만으로 매듭되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난해성은 한 문장 속에 도저히 연결될 수 없는 이질적 사물이 은유나 우유 등 형식으로 결부되는 데서 발생한다.
이현애시를 이루는 각 시행은 어법상, 구문상 매우 정상적이며 특별한 하자가 눈에 띄지 않는다. 형식상으로는 완벽하다. 그러나 의미 해독이 난감해서 독자는 읽기를 전진시키지 못하고 한 문장에 매달려 제자리 걸음을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거꾸로 매달려…」의 둘째 연을 옮겨 적으면 다음과 같다.
항로 기억하지 못하는 얼룩, 배에
오르는 일, 정말 우연이었을까
계단 쉬지 않고 휘몰아쳐 가며 항상
왼쪽에 있던 모든 증거, 오른쪽으로 옮긴다
위에 인용한 둘째 연에서 문맥상 주어는 ‘얼룩’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얼룩’이 주인공이 되어 ‘배에 오르는 일’을 행할 수 있는 것인지 의심이 생긴다
또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얼룩의 정체다. ‘얼룩’은 그 앞 연의 ‘얼룩진 날개를 달고’의 ‘얼룩’과 결부되는데 이 곳에서는 ‘얼룩’은 명사 즉 체언이 아니라 ‘형용사’로 ‘날개가 얼룩져 있다’는 뜻이니 동일한 얼룩이라는 말도 어쩐지 서로 어울리지 못하는 인상을 풍긴다.
더구나 ‘항로 기억하지 못하는’이라면 이는 배의 방향과 진로를 통제하는 항해사나 선장의 직무이지 정체불명의 ’얼룩‘일 리가 없지 않은가 싶다.
이 시구의 해석이 난감한데 후속되는 시행 역시 해독이 까다롭기는 마찬가지다, ‘왼쪽에 있는 모든 증거, 오른쪽으로 옮긴다’는 재판에 회부된 범법자나 그의 변호인이 혐의 사실을 부인하려고 위증을 시도하는 것과 같은 인상을 풍기므로 그 앞의 선박을 운항하는 행위와 전혀관련이 되지 않는 별개의 사항이다.
그 다음의 단행련의 ‘불쑥 말 걸어 온다’ 역시 ‘누구가 누구에게?’ 말을 걸어온다는 뜻인지 분명치 않다. ‘누가 누구에게’ 묻고 대답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은 다섯째 연(단행연)의 ‘물어봤으나 고개, 저었다’ 에서도 되풀이 된다.
넷째연의 ‘물음표’ 또한 문맥상으로는 ‘저 모퉁이 돌아 어느 틈새로 끼어 들고’ 있으니 ‘무엇에 대한 물음표’인지 파악하기 어렵다. ‘머리에 썼던 얼굴’이라는 싯구는 얼굴은 머리의 앞쪽, 즉 전면을 가리키는 어휘이니 이치상 머리에 얹어쓸 수는 없다.
괜찮지 않았던 종소리 지붕 떠 받치고
몰아쉬는 숨 속에 머문다
말, 아니었을지 모른다
위에 든 여섯째 연, 역시 해독에 어려움이 있다.
일곱째 연의 ‘조각바람’, ‘반짝이는 반음계’, ‘그의 이름’ 등 역시 서로 연결되지 않는다.
이현애 시가 독자에게 묻는 수수께끼는 한마디로 말해 스핑크스가 행인에게 던지는 수수께끼에 해당하는 난해성을 지니고 있다. 서로 연결되지 않는 사물들을 고도의 시적 상상력으로 시화하는 이현애 시인의 시의 미학을, 나는 ‘착란과 질서의 공존’이라 명명할 수밖에 없다.
나는 이현애시의 비밀, ‘혼돈과 질서’, ‘착란과 이성’이 공존하는 시세계의 또 하나의 실례로 다음 시를 읽어보려고 한다,
벽, 누군가의 발길질에 흔들리다 휘어지다 했다
아무리 다가가도 힘겨루기 미뤄지지 않았다
달 속, 물 비워내고 물러설 자리 만든다
속임수 걷어내고 뒤꿈치 딛는다 갈림
길 지나가며 가벼운 어깨, 땅속에 묻어둔 알
틈에서 바람 지느러미 붙들어 지층을 만든다
(5- 5, 바람의 날개, 첫 두연)
‘날개 달린 바람’이라니 이것은 활유법의 한 사례이거니와 이시에 큰 활기를 제공한다. ‘바람’은 자연계의 한 현상에 불과하나 그것은 억수같은 비를 몰고 오는 동아시아 지역의 태풍, 미국 남부에 발생하여 엄청난 피해를 일으키는 회오리 바람 토네이도처럼 그것은 그곳 주민들에겐 조류나 인격을 지나쳐 풍신으로 신격화되다시피 되어 있다.
이현애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조류로 변신한 ‘바람’을 연달아 ‘지느러미’ 달린 어족으로까지 비약시키고 있다.
이현애시의 강점은 비유를 통해 만들어진 심상(이미지)이 매우 구체적이고 견고하다는 사실이다.
이현애시에서 ‘바람’은 허공에서 일어나는 대기의 이동이라는 ‘자연계의 한 현상’이라는 한계를 뛰어넘어 ‘달’의 세계나 ‘땅속’ 세계와도 관련된다. 이 시는 다음 연으로 완결된다.
허술한 어깨 드러낸 아침의 주파수, 부풀기
기다려 본다 그가 더 숨차다 휘어져 보이는
그 숨 속에서 쩍 갈라져 나온 가스 덩어리,
하고 싶은 말 모두 다 쏟아 새기게 할 수 있을까
이번에도 정확히 구별되지 않으나 고개 끄덕이는
남자의 발아래 주춤거리던 봉우리 모여든다
(5-5 「바람의 날개」, 결미부)
‘주파수’는 전파에 의하여 음성이나 영상의 신호를 포착하는 물리학의 용어다. 아침이나 낮 혹은 저녁 등 시각에 각각 특이한 주파수가 있는지 모르나 그 ‘아침’이 ‘허술한 어깨 드러낸’ 모습으로 다가오니, 이것은 분명 ‘시적 심상’이 아닐 수 없다.
‘시적 심상’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깃발처럼 ‘날개 달린 말(馬)’일 수도 있고 혹은 J. R. R. 토킨의 소설 「호빗에 등장하는 ‘입에서 불을 뿜으며 하늘을 나는 독룡으로 각색될 수도 있다. 이현애의 시세계는 수수께끼로 만들어진, 앨리스가 헤매고 다니는 이상한 나라와도 유사하다.
이현애 시인은 21세기 한국의 시단에 등장한 ‘변신한 F. 카프카’라 나는 생각한다.
나는 E. 카시러나 그의 제자 S. 랭거의 학설을 받아들여 모든 예술작품은 하나의 상징(象徵, symbol)으로 본다. 상징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어느 불가견의 본질의 유일의 가능한 표현(W. B. 예이츠).
조응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어떤) 의미의 응축물(conden
sation of meaning of unexpressed reference) (M. 어밴)
한 개의 상징으로서의 예술작품, 그것은 응축된 의미이기에 예술작품으로서의 시 해독은 난해성을 띠게 마련이다. ‘상징’은 의미를 분비하면서 생존한다. 그러기에 만약 쉽게 읽혀 ‘아, 이런 뜻이군’하고 정답을 얼른 깨닫게 된다면 그 시는 생명을 다하여 존재 가치를 상실하고 사멸하고 만다. 한 개의 상징으로서의 시 작품은 필연적으로 다의성을 지니게 된다. 상징의 묘미는 사람들을 마주 보며 ‘내 본체가 무엇인지 알아맟추어 보라’고 대들며 해답의 열쇠를 얼핏얼핏 드러내 보이면서도 한 편으로 몸을 무엇으로 가리고 숨기는 이중의 몸짓을 하는 데 있다. T. 칼라일은, ‘상징에는 은폐와 계시가 동시에 작용한다(In a symbol, there is concealment and yet revelation)’고 말했다.
단순한 수수께끼는 ‘묻는 말 안에 이미 정답의 열쇠가 주어진 상태’이나 ‘상징’으로서의 수수께끼에는 이렇다 할 정답이 있을 수 없다. 예컨대 H. 멜빌의 소설 「모비 딕」, 모습을 드러내는 ‘흰 고래’는 백인종의 잔학성을 표상하는 상징물로 풀이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에이합 선장’과 ‘백경’의 관계를, 자연계를 정복하려는 인류의 야심과 그것을 일격으로 무력화시키는 자연계의 보복과 위력을 표상화한 것 등, 납득할 수 있는 유사 정답이 부지기수로 전개된다.
이현애시의 난해성. 나는 이것을 약점이나 결함으로 보지 않는다. 어렵기 때문에 읽기를 반복하게 되고 읽고 풀이를 계속하면서 정서적으로 흥취를 느끼고 황홀경에 휩쓸리게도 된다.
수수께끼로서의 시작품, 나는 이와같은 시에 대한 관점에서, G. W. F. 헤겔의 ‘상징론’을 덧붙이고 싶다. 그는 그의 대저 「미학(美學, Aesthetics)」에서 스핑크스를 ‘상징 그 자체의 상징(The symbol of the symbolic itself)’이라 해명했다(T. M. Knox 영역본「Aesthetics, Lectures of fine art」Oxford, The clarendon press, 1975, p.360).
이현애 시의 해독은 스핑크스가 걸어오는 수수께끼의 정답 알아 맟추기 보다 더 어렵다. 하지만 그러하기에 읽기가 재미있어진다. 이현애 시는 판타지의 세계다. 토끼 굴에 들어갔다가 트럼프놀이의 세계를 모험하고 다닌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했듯이 우리는 ‘날개 달린 바람’, ‘지느러미 달린 바람’이 배회하는 이상한 나라를 체험하고 다닌다. 판타지의 나라에는 불합리한 사물이나 현상이 널려있고 또 발생할 수 있다. 나는 6부의 4. 「2010 실종사건」을 읽으면서 이 시를 서울의 노량진이나 가락동 어물 시장의 정경을 노래했는가 하고 생각했다.
좌판에서 눈 부라린 선어 한 모금에 꿀꺽
바다, 던진다 허름한 비늘이 줄줄이
따라 털린다
(6-4 「2010 실종사건」 서두)
그런데, 이 ‘좌판에서 눈 부라린 선어’의 모습은 이 시의 끝에 가서 ‘입 부라린 선어’가 되어 내던져진다.
누구의 불씨인지 모르는 저만치 나둥그러진
해의 발 바퀴, 새벽마다 끓어오르는
해소 기침, 짜디짠 금빛 날개 기다린다
또다시 한 모금에 옆구리 접고, 뒷등 접어
시퍼런 꼬리 찬 바닥에서 견디어 본다
긁힌 서풍의 비린 눈이 어느 날 덩굴 사이
캄캄히 흩뿌리던 북풍을 줍고, 이번에
입 부라린 선어 꾹꾹 눌러 던지고 있을까
그렇더라도 그게 그것이고 아니고가 아니라
다 그럴 것이라는 2010 실종사건 때문인 거다
(6-4 「2010 실종사건」 결미)
나는 위의 시의 제목 「2010 실종사건」의 타당성을 끝 구의 ‘다 그럴 것이라는 2010 실종사건 때문인 거다’로 확인하긴 한다. 하지만 ‘이현애시’의 시세계는 견고한 자물통이 채워져 교전중인 적대국에 파견된 정보국 요원에게 발송하는 암호 문서의 글귀마냥 해독하기가 난감하기만 하다. 하지만 적대국가가 발신하는 난해한 암호문을 어렵게나마 이쪽에서 판독에 성공했다면 그 결과는 엄청난 기쁨과 이득을 안겨줄 것이다.
이현애시의 수수께끼를 풀 열쇠 꾸러미는 누가 주울 것인가. 다음 인용문으로 나의 해설을 끝맺어도 좋으리라.
아직은 날 수 있기에 꿈과 헤어진다 나무에 새겨진 돌과 돌에 빚어진 강 그득 담긴 열쇠 꾸러미 그를 가지기엔 제 몫의 목숨조차 먹여 살리지 못하는 쓸데없이 차가운 자물쇠 이름 잃어간다 거짓으로 된 몸통보다 무거운,
(6-5. 「자물쇠 이름 잃어간다」 서두 )
사족
루이스 캐롤(본명 C. L. Dodgson. 1832~98)이 지은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는 이른바 ‘난센스 판타지’로 분류되는 동화다. 1865년에 간행된 이 동화에 의해 ‘근대 동화’의 기점이 찍혔다고 평가된다(일본 아동 문학회 편 「세계의 동화」 호루푸 출판 1972. p.175 참조). 이 동화가 ‘근대 동화’의 효시로 지목되는 이유는 영국 아동문학의 고전으로 간주되는 「천로역정(天路歷程, Pilgrim’s progress)」이 당시의 청교도들이 어린이들에게 ‘인간 영혼의 구제’를 인생의 최대 목적으로 강요하려던 교훈성을 배제하고 그저 즐겁고 재미있기 때문에 읽게 되는 ‘이야기’를 제공했기 때문이라 한다. 즉 동화를 ‘교훈을 주기 위한 유목적적 도구’로서의 기능에서 벗어나 동화로 하여금 자기목적적, 자율자존하는 ‘순수한 동화’로 독립시킨 케이스였음을 인정한 사례가 될 것이다.
‘난센스 판타지’의 ‘난센스’는 이 경우 터무니없는 황당무계하다는 등의 부정적 모멸적인 뉘앙스는 없고 겉보기에 ‘이치에 맞지 않는, 불합리한 비현실적인’ 정도의 뜻이 비치는 정도로 문학이나 예술의 한 갈래를 일컫는 정도의 용어로 통용된다. 그리고 이 ‘난센스 판타지’는 어쩌면 초현실파의 시나 회화에서 보듯 기발한 ‘상상력’의 소산의 극치라는 점에서 예술이 지향하는 또 하나의 극북으로 간주될 수도 있으리라 나는 본다.
나는 백철, 조연현등 문학사가들에 의해 한때 우리 현대시의 효시로 지목되던 주요한의 시 「불놀이」에도 판타지의 성분이 많이 섞여 있다고 본다.
이현애 시인이 의욕했던 ‘오늘의 시’가 쟁취하고 구현하려고 했던 ‘절대시’의 경지가 이제까지 억제되고 제한되었던 시의 원동력인 상상력의 완전 해방을 뜻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이 나의 우견
이다.
이현애시의 절대시는 극좌파의 계급투쟁의 나팔소리는 아니다. 이현애시는 예술지상적 순수시파 쪽에 가깝다. 하지만 순수시파의 ‘순수’가 음악과의 화합을 뜻하는 것과는 달리 이현애의 ‘절대시’는 현실세계의 사리에는 맞지 않고 일어날 법도 하지 않으나 뒤집으면 인간들의 일상생활의 참 모습이 드러나는 또 하나의 현실세계의 경이로운 이야기라는 심증을 얻게 된다. 겉보기에 ‘혼돈’과 ‘착란’으로 시의 주제 파악이 어렵고 시인의 시를 쓴 의도 즉 메시지를 잘 전달 받았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한 개의 조각상, 한 폭의 그림, 한 편의 시가 의미 심장한 상징물이라면 로도스 섬의 「라오콘」 군상이나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 김수영의 시 「병풍」 등은 독자나 평론가인 우리들이 그 속에 겹겹으로 포장되고 은페된 뜻을 파헤치고 햇볕 쪼이는 밝은 곳으로 길어 올려야만 한다.
6. 현대시의 좌표와 이현애 시인의 위상
시인은 정객은 아니다. 하지만 시인들에게도 죄파와 우파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의 좌표에서 좌와 우로 구분하는 기준은 정치적 이데올로기와는 별개의 것일 수도 있고 혹은 상통하는 면도 있다.
나는 시에서의 우파는 시의 순도를 극대화하여 시의 성분 99.9%의 순수시를 지향하는 시인들이라 생각한다. 순수시파들의 이데올로기는 시작원리로 시의 재료는 언어이나 시에서의 언어의 존재 양식은 산문에서의 언어의 쓰임과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신념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산문은 설명문이나 논설문에 그 특성이 드러난다. 의사소통을 위한 일상의 말이 산문의 특징이다. 산문에서의 언어는 의사소통을 위한 실용적 도구로 목적달성 후에는 존재이유를 상실하고 소멸되고 만다. P. 발레리의 말을 빌리자면 ‘결과가 원인을 먹어버리고 목적이 수단을 흡수해버리는’ 꼴이 되고 만다.
의사소통을 위한 일상의 언어의 쓰임은 일회한이다. 시인은 이 일회성 용도의 한계를 뛰어넘어 시작품 그 자체에 존재 이유를 지니게 하고 자율자존케 하려고 최선을 다한다.
예술지상적 순수시의 표본으로 나는 박목월의 다음 시를 지목한다.
(전략)
(어디서 은은한 / 열쇠 소리 // 은과 은의 쇠고리가 / 부딪는 소리)
한밤중 / 강설이 비롯하듯 // 마음은 가라앉고
또한 / 눈이 개이듯 / 설레는 희열감
어울려 / 종이 울고 / 어느 한 개는 / 늘 잠잠하고
찬놀 하늘에 / 고목이 수런대듯 // 잠자리는 / 외롭고
또한 한밤중 / 등불이 켜지듯 // 꿈은 부풀고
꽃송이 아래서 / 꽃송이가 이울고 그 위치에서 // 어느 송이는 봉오리를 갖고
사랑은 가고 / 아지랑이에 얼레꽃은 지고
또한 꿈은 이울고 / 비맞이 바람에 / 잎새는 떨리고
(어디서 은은한 / 열쇠 소리/ 은과 은의 쇠고리가 / 부딪는 소리……)
(박목월, 「아가」 중에서)
‘아가’는 곧 사랑노래를 뜻한다. 제목부터가 ‘노래’ 이거니와 시의 어조나 짜임새가 노랫말과 유사하다. 5음, 6음, 혹은 7음으로 다듬어진 리듬감 노래의 후렴처럼 두 개의 연 뒤마다에 괄호에 묶이어 삽입되는 ‘(어디서 은은한 / 열쇠 소리 / 은과 은의 쇠고리가 / 부딪는 소리……)’와 같은 지극히 오묘한 청각적 심상이 두드러진, 반복되는 동일한 연… 나는 위의 「아가」를 읽으면서 이것은 그냥 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별개의 오선지에 음부 아닌 단어가 위아래로 배치되고 연결된 하나의 악보라는 느낌을 품게 된다.
나는 박목월의 시와 관련해 일찍이 월터 페이퍼가 갈파한 다음의 명언을 떠올린다.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늘 갈구한다.(All art constantly aspires towards the condition of music)
내가 이 시를 시운동의 유파 중 최우단의 우파로 보는 이유는 이시가 시로 하여금 산문과는 극과 극으로 대치되는 적대 관계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H. 브레몽의 ‘순수 시론’은 시를 문학에서 해방시키자는 ‘독립선언’이었다는 견해가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literature는 letter에서 유래한다. 문자를 매개로 사용하면서도, 의사소통이라는 실용성을 배제하고 자율자존하는 자폐적 자기목적적 언어의 구축, 이것이 우파 시인들이 지향하는 극한의 완성도임이 드러난다.
박목월 류의 의사소통의 수단과 방편으로서의 언어의 실용성을 배제한 시의 정당성에 관해서 P. 사르트르의 다음 말은 법정에서의 재판장의 승소 판결 선언과도 같다.
시인들이란 언어를 이용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이다.
(Les poetes sont des hommes qui refusent d’utiliser le language. 「문학이란 무엇인가」의 책 중에서)
김영랑에서 박목월로 이어지는 예술지상적 순수시파를 시의 최우단의 ‘극우파’로 간주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들의 신분이 ‘정신적 귀족’이기 때문이다. 홍진만장의 속세와는 단절된 별천지에 이들은 스스로 은거하여 신선놀음에 골몰한다. 자하산 자락에 청운사가 있고 그 계곡에 청노루가 내려와 발을 씻는 그런 ‘선경’이 박목월의 ‘시세계’다.
그렇다면 우리 시사 또는 시단에서의 극좌파는 어떤 이들인가?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1930년을 전후한 신경향파 프롤레타리아 시운동의 영도자인 박영희와 이론분자 임화요, 이들의 후예요 계승자인 현금의 이른바 ‘운동권’ 시인군이다.
이들의 성향은 시의 영역보다는 정치적 권력의 향방에 더욱 민감한 표정과 몸짓을 보인다. 죄파 정권의 창출을 위한 별동대요, 전위로서의 성난 얼굴로 무리를 짓고 완장 차고 마이크를 잡고 고래고래 구호를 외쳐댄다. 다음 시가 그 보기다.
눈물을 강철로 만드는 것은 당이다
강철로 심장을 만드는 것도 당이다
그러나 당을 만드는 것은 우리이다
(김정환 「치열한 만큼 넓다 - 기차에 대하여」 p. 32 중에서)
위의 시는 ‘시’이기를 아예 포기하고 ‘시’를 노동자 계급의 당의 ‘선동구호’로 도구화한 한 예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화살이 되어 온몸으로 가자 / 허공을 뚫고 온몸으로 가자 / 가서는 돌아오지 말자 // 박혀서 / 박힌 아픔과 함께 썩어서 돌아오지 말자
(고은 「화살」 중에서)
모 평론가는 이 시를 극찬하여 다음과 같이 부추기고 있다.
얼마나 당당하며 또 전투적인 선언인가?
나는 위의 인용문의 출처를, 까닭이 있어 밝히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를 어느 집단의 정치 행위의 방편으로 전락시키고 시인의 품위를 훼손하는 극단적 언행을 배척한다. 시인이 홍위병이 되어서는 안된다.
내가 위에서 우리 시의 ‘좌표’를 설정하고 극우파와 극좌파의 시의 양상을 살펴본 까닭은, 평론가로서의 나 자신의 입장과 견해를 밝히기 위해서는 결코 아니다. 이현애시의 시세계나 이현애 시인의 우리 시단에서의 자리매김을 위해서다. 이현애 그는 시인으로서의 언행이 매우 차분하여 정치적으로 좌나 우,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은 듯이 보인다. 하지만, 시인으로서의 그의 소신과 지향점은, 극좌파 못지않은 확고함이 감지된다. 그가 향하는 또 하나의 극북은 거듭 말하거니와 ‘절대시’의 경지다. 이 절대시의 특징은 ‘과거의 시’가 아닌 ‘오늘의 시’이기도 하다
예술지상적 순수시파가 외친 구호는 P. 베를렌의 「시법」의 서두에 내건 ‘무엇보다 먼저 음악을 ’에 선명히 집약되어 있고 그 결과는 우리나라에서는 앞에서 보인 박목월의 「아가」가 그 ‘보기’가 된다.
음악에 빼앗겼던 시의 재산을 되찾아오는 것을 사명으로 깨달았던 P. 베를렌의 자신의 존재이유와 함께, 나는 W. 페이터가 말했던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갈구한다’는 말을 되생각하게 된다.
나는 박목월의 ‘노래하는 시’가 실은 우리 고래의 시가문학의 정통성임을 의심치 않는다. 다음을 보라.
하 노피곰 도샤
어긔야 머리곰 비취오시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全져재 녀러신고요.
어긔야 즌 드욜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어느이다 노코시라.
어긔야 내가논 점그세라.
어긔야 어강됴리 아으 다롱디리
(「악학궤범」에 실린 「정읍사」 전문)
‘어긔야 어강도리 아으 다롱디리’등 무의미한 여음은, 악기의 울림을 적은 것이겠으나 실은 「정읍사」의 시로서의 완성도에 불가결한 요소라 나는 확신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시의 형태나 정서는, 완장 차고, 시위하는 군중의 선두에 서서 마이크 잡고 고래고래 죽기살기로 구호를 외쳐대는 성난 좌파 시인들에게는 일고의 가치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이현애 시인의 시가 차지하는 우리 현대시 좌표상의 위상은 어디쯤이 될까? 그가 지향하는 ‘절대시’의 권역은, 극좌도 극우도 아니다. 하지만 ‘절대시’가 시의 완벽성 내지 완성도와 관계가 있다면 ‘극좌편’ 보다는 ‘극우편’에 친근하리라 여겨진다.
그러나 이현애시의 특성은 ‘음악성’이나 ‘노래하는 시’와는 양태가 다르다. 많이 다르다. 이현애 시는 음악성보다는 회화성이 두드러진다.
이현애시는 풍경화이나 화면이 추상화와 비슷한 면이 있다.
추상화는 비구상화는 아니다. 자연계에 실제로 널려있는 사물의 형상을 인식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한계를 고수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내가 존중하는 일본의 니이무라 이즈루편 「고오지엔」, 이와나미 사전의 다음 해설을 반대한다.
추상 예술: 현실세계의 형상을 다루지 않고 순연한 선. 색, 형 - 에 의해 조형표현을 행하는 비구상적 예술의 총칭
내가 위의 용어해설에 의문을 제기하는 까닭은 추상예술·비구상 예술은 서로 유사한 점이 없지 않으나 양자 사이에는 엄연한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위의 용어해설 가운데 ‘추상적 양식’을 예술가의 ‘내면성’ 운운...하고 설명한 일에는 깊은 공감을 하게 된다.
이현애시는, 은유, 나의 생각으로는 ’알레고리‘로 짜여진 시인 자신의 일상의 내면세계를 표상한 일종의 풍경화라는 인상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이현애 시인은, 음악 연주자를 닮기보다는 화가의 심성과 솜씨를 지닌 시인이라 나는 본다. 다만 구상적 풍경화는 아니고 일상의 사물을 대담하게 추상화한 심상풍경의 화가라 생각한다.
7. 맺음말
이현애 시인이 이번에 간행하려는 시집 「앞에 있던 오월과 뒤에 있는 오월 사이」에서 추구하고 이루려고 하는 바는, ‘절대시’와 ‘오늘의 시’로 요약된다. 그런데 이 과업은 ‘절대시에 가까이 가려는 안간힘 중이다. 곁을 내줄까 저어하면서’이라는 시인의 고백으로 보아 본인은 ‘미완성’ 혹은 미득달로 자평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나 보기에 위의 고백은 이 시인의 겸손의 소치가 아닌가 여겨진다. 부끄러운 말이나 나는 노서생으로서 이미 완결되어 출판을 기다리는 이현애 시인의 조급한 마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석 달 넘게 밤잠을 자지 않고 이 시집의 원고를 읽고 또 읽고 한 까닭은 이 시고의 세계에 푹 빠져버렸기 때문임을 실토한다.
이 여름철 야반에 기상해서 시고를 넘기며 졸필을 휘두르다가 폐지만 수북이 쌓아놓는 나 자신을 돌아다 보며, 이현애시는 자양분이 많은 요리이나, 나의 마각이 맛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미처 소화하지 못해 난감해하는 나를 깨닫게 된다.
이현애시, 그것은 신비스러운 스핑크스가 나에게 던져오는 수수께끼와도 같다. 외디푸스가 되기에 나는 자신의 한계를 이미 알아차리고 있다. 내가 이현애시의 요체를 깨달아 알고 제대로 음미했다면 이렇게 장문의 횡설수설을 늘어놓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은, 동시에 이현애시가 나에게 얼마나 현묘하고 아름다운 시세계를 펼쳐 보였는가, 나는 지난 석달 동안 이 시에 심신이 사로잡혀 밤잠을 자지 못하고 푹 빠져 있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첫댓글 앞에 있는 오월과 뒤에 있는 오월사이
일상의 상을 회화적으로 추상화 하여 펼쳐 내고 있다는 평설이 맘에 남습니다.
절대시의 이력을 문학사에서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메타포를 통해 본 별은
흩날리는 눈이 되기도 하고
성글게 내리는 눈발을 바라 보며 시린 마음, 가난해서 드높아진 듯한 감성의 착각을 껴안고 뒹구는 흰 겨울 낯 같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