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남자 주인공 이병헌은 숟가락과 젓가락의 표기법 차이를 묻는 여주인공에게 우물쭈물하며 "그건 대학교 4학년이 되어서 배우는 어려운 거" 라 대답한다. 극중 이병헌이 '사이시옷' 의 용법을 알았다면 어땠을까. 이 영화는 복잡한 사이시옷의 용법을 설명하는 재료가 된다. 학생들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아이유의 노래 '좋은 날' 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발견하기도 한다. 신문 방송 노래 광고 영화 등 대중매체가 수업 속으로 들어왔다. 재미있고 살아 있는 국어 수업을 이끄는 경기 과학고 공규택 교사의 창의적 국어 수업 이야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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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어려워하는 아이들, 신문 기사로 접근하다 |
경기과학고 공규택(42) 교사는 올해 교직 생활 19년 차다. 경기도 외곽의 고등학교에서 교직을 시작했을 때 학생들이 수능 언어 영역 지문을 버거워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지문을 쉽게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신문 기사를 지문으로 수능 문제를 만들어 보충수업에서 가르쳐 봤다. 아이들의 반응은 기대 이상. 이해하기 쉽고,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흥미로워했다. NIE 개념도 없던 시절, 길을 가다 신문에서 눈에 띄는 기사를 발견하면 오려두고 수업 시간에 써먹었다.
"대도시에서 근무했으면 아이들이 '에이, 시시해요' 했을 것이고, 저 역시 이런 시도조차 안 했겠죠." 그의 회고다. 그다음 부임한 중학교는 이전 학교보다 시골이었다. 아이들이 책을 안 읽었다. 책 읽기를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다독여 신문부터 읽자고 권했다. 아이들이 흥미를 느끼는 연예기사나 만화, 광고부터 시작했다. 네 컷 만화의 마지막을 생략하고 그다음에 어떤 그림이 올까 유추해보기, 관련 기사 후속기사 찾기, 사건의 원인 찾아보기 등 신문을 국어 수업에 적극 활용했다. 매체를 이용한 국어 수업을 시작한 공 교사의 생각은 무엇일까. "처음부터 국어 교육의 원대한 목표를 가지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일단 제가 재미있었어요. 아이들이 흥미 있게 글을 읽는 것을 보면 신이 났고요. 똑같은 수업을 네다섯 반 돌아가면서 하면 '차라리 녹음기 틀어놓는 것이 낫지' 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같은 수업을 반복하는 게 정말 힘들었죠. 하지만 아이들이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수업이 달라져요. 매체 활용 수업은 학생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저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일반고에 부임했을 때는 논술 광풍이 분 2000년대 초반. 현장에서는 전혀 대비가 안 되어 있었다. 논술 수업을 했는데 이전 학교에서 국어 수업하던 패턴과 똑같았다. 학생들은 기출 문제 제시문이 어려워 이해하지도 못했고, 제시문에서 막히니 논제를 풀 수 없었다. 이번에도 쉬운 신문 기사로 접근했다. 신문 기사를 읽고 주장을 쓴 다음 타당한 이유와 근거를 대는 훈련을 했다. 경기과학고에 와서도 아이들과 신문으로 토론을 했지만, 수업 모델에 대한 외부 강의를 계속하다 보니 어느 순간 매너리즘에 빠진 자신을 발견했다. 신문에 매몰되는 게 싫어 영화 방송 광고 등 다른 매체에 눈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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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과학고 국어 수업 장면. 학생들은 TV 프로그램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해 수업에 참여한다. |
'으르렁' 과 '좋은 날', 문학작품으로 바라보기 |
공 교사는 대중매체에 무척 관심이 많다. 영화를 보고 광고를 봐도, 아이돌 가수가 신곡을 내도 여러 번 듣고 보면서 수업에 어떻게 접목할지 골똘히 생각한다. 최근에는 대중가요를 수업에 활용할 방법을 고민 중이다. 예컨대 한창 인기 있는 아이돌 그룹 엑소의 '으르렁'이라는 노래는 이육사 시인의 '교목'이라는 시와 비교할 수 있다. 요즘 아이들이 워낙 좋아하는 노래라 궁금해서 계속 듣다 보니 이육사 시인의 '교목'이라는 시가 퍼뜩 떠올랐다고. " '으르렁' 은 자기가 마음에 드는 여자 친구를 다른 사람에게 뺏길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한 남자의 심정을 대변하는 노래죠. 주변의 남자들에게 나 지금 엄청 화났으니까 건드리지 말라고 으르렁대는 거예요. 죽을 각오로 이 여자를 지킨다는 의미를 담았죠. 그런데 저항 시인 이육사의 '교목' 이라는 시에는 '내가 거꾸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목숨 걸고 지킨다' 는 내용이 있어요. '으르렁' 이라는 노래와 비교하면 화자의 태도나 의지가 유사하죠. 이육사의 시와 '으르렁' 에는 똑같이 '검은 그림자' 라는 단어가 나오기도 해요. 내용은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비유가 쓰인 두가지를 비교하며 감상할 수 있는 경우입니다."
아이유의 노래 '좋은 날' 은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과 묘하게 맞아떨어진다. " '좋은 날' 속 주인공은 사랑하는 오빠와 헤어진 심정을 노래하고 있어요. 아이들에게 이런 얘길 해주면 놀라요. 아이들은 오빠하고 재미있게 데이트하는 노래라고 생각하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화자가 울고 있거든요. <운수 좋은 날>도 마지막에는 아내가 죽는 상당히 슬픈 소설이고요. 소설과 가요 제목에 반어적인 의미가 있죠. 나중에 찾아보니 작사가가 실제로 현진건의<운수 좋은 날> 에서 모티프를 따왔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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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고에서 국어 교사는 무엇을 해야 할까 |
과학고 학생들은 대체로 국어 과목에 관심이 없다. 국어를 못해도 대학에 갈 수 있어 성취동기가 크지 않다. 대다수가 수시로 합격하고, 수능 최저 학력 기준도 수학과 과학만 잘하면 충분히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과학고 분위기는 입시의 부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수업할 여건을 마련해줬다. 공 교사에겐 커다란 날개를 달아준 셈. 수능 국어 문제집을 풀어주던 시간을 고스란히 수업 모델을 연구하는 시간으로 활용했다. 물론 고민이 없지 않았다. "과학고로 부임할 때 '과학고에서 국어 교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고민했습니다. 처음에는 대학별 논술 시험 준비를 했는데, 논술 전형의 비중이 줄고 특기자 전형으로 합격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점점 국어 수업이 설 자리가 줄었죠. 학생들이 대학교나 대학원에 가서 과학자가 되고 교수가 되고 연구원이 되었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자문해봤습니다. 국어의 본질적 기능인 상대방과 잘 대화하고, 자신을 잘 표현하는 것을 가르쳐야겠다는 결론을 얻었어요. 제가 고등학교 3년 동안 가르치지 않으면 사회 어디에서도 이런 것을 배울 기회가 없을 테니까요."
공 교사는 국어 시간에 학생들에게 강연을 해보도록 한 것을 가장 인상적인 수업으로 꼽았다. 교과서 '과학기술과 미래' 단원을 가르칠 때였다. 일반고 학생들에게는 의미 있는 내용이지만, 과학고 학생들에게는 아주 쉬운 단원이다. '나노'와 관련해서 학생이 교사보다 잘 아는 상황. 공 교사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냈다. "지금까지 일방적으로 선생님들의 강의나 강연을 들었을 너희가 이번엔 직접 강의나 강연을 해보라" 는 제안이었다. 수업 시간에 강연을 잘하기로 소문난 혜민 스님, 도올 김용옥, 개그맨 김국진 등의 강연을 들려주고 어떤 점이 좋았는지, 어떻게 해야 흡입력 있는 강연인지 학생들이 판단하도록 했다.
한두 달 준비 기간을 주고 마침내 발표 시간. 공 교사는 '동영상을 안 찍어둔 게 한이 될 정도' 로 감동을 받았다. 이명으로 친구들에게 사오정이라는 놀림을 받던 학생은 '내 귓속의 찌르레기'라는 제목으로 자신의 아픔을 친구들에게 털어놓는 용기를 냈고, '내 인생의 마지막 한 바퀴' 라는 강연을 한 학생은 쇼트트랙 선수에서 부상으로 꿈을 접고 공부에 매진한 끝에 과학고에 들어온 과정을 들려줬다. 강연의 기법을 교과서에서 배울 것이 아니라 모범적인 사례를 보여주고 직접 해보면서 배워가는 보람있는 수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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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외 받는 과목이 내실 다지는 과학고의 '역설' |
"학생들에게 이 수업을 하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려주는 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일반고에서 다양한 방식을 시도하려고 했을 때 '선생님, 이걸 굳이 왜 하는 거예요' 라는 반응이 가장 힘들었어요. 그런데 과학고에서도 똑같아요. '과학고에 국어 하려고 온 거 아니에요, 그거 하지 말아주세요' 라는 말을 합니다. 당장 대학 갈 때는 수학과 과학이 필요하겠지만, 저는 인생을 길게 볼때 필요한 걸 가르치고 싶어요. 새로운 형태로 수업했을 때 부담이 되지만, 이 수업을 하는 이유를 말해주고 시간이 걸리더라도 시도해보려 합니다."
학생들이 따분해하는 외래어나 로마법 표기법을 가르칠 때는 "앞으로 외국 잡지에 논문을 발표할 너희가 꼭 알아둬야 한다" 고 동기를 부여했다. 수행 평가로는 간판에서 잘못된 글자를 10개 찾아서 사진으로 찍어 오는 과제를 냈다. 시간이 없는 학생들을 위해 인터넷 '스트리트 뷰' 로 찍어 와도 된다고 했지만, 어김없이 몇몇 엄마들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 "공부하기 바쁜 아이들이 국어 숙제 한다며 하루 종일 밖에서 돌아다닌다. 한낱 국어 숙제에 시간을 허비해도 되느냐" 는 내용이다.
시 소설 등 문학작품을 읽고 작가와 인터뷰하라는 과제를 내준 선생님도 있었다. 이번에도 엄마들은 '난리' 가 났지만, 학생들 은 한 명도 빠짐없이 숙제를 완벽하게 했다. 대입 자기소개서를 쓸 때 수많은 대회에 나가 수많은 상을 탄 경험보다 작가를 만난 것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적은 아이들이 많았다. "아쉽게도 이런 창의성 수업을 부모님들이 받아들이지 못합니 다. 공부가 급한 심정을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수업입니다. 학부모들의 인내와 신뢰가 필요해요. 과학고에서 가장 많이 연구하는 교과가 무엇인지 아세요? 국어, 사회, 예체능 교과입니다. 수학, 과학은 시험에 들어가니 아이들이 다 열심히 하지만, 이들 교과는 노력하지 않고는 학생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내실 있는 인문 교육이 오히려 과학고에서 진행되는 겁니다. 과학고의 역설이죠."
공 교사는 지금까지 읽기·문법·문학 수업은 했지만, 쓰기 수업은 해본 적 없다. 국어 교사로 작은 소망이 있다면 쓰기 수업을 맡아 대중매체를 활용한 쓰기 교육을 하고, 학생들과 수업한 내용을 책으로 펴낸 뒤 교직을 마무리하는 것이라 했다. 장기 프로젝트를 위해 대중매체를 수업에 끌어오는 공 교사의 연구는 오늘도 계속된다.
| 미즈내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