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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배는 기골이 장대하고 손목뼈가 굵어. 통뼈라고 그러잖아. 그래서 그런지 이○○ 선배는 육체적 고통을 견뎌내는 인내심이 대단했던 모양이야. 그래도 그렇지 손발톱 스무 개가 시커메서 결국 다 빠지도록 고문을 견뎌내면서 동지들 이름을 끝내 발설하지 않은 건 범인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않아? 일정 시대 독립투사들이 거꾸로 매달려 쇠좆매에 살점이 툭툭 튀어 나가도 끝내 동지들과의 거사를 감추었던 영화 같은 장면을 이○○ 선배는 실제로 연출했던 거야. 나는 이○○ 선배를 존경해. 그리고 이○○ 선배를 생각할 때마다 부끄러워. 고작 이틀 밤낮 약간의 고문에 저들이 원하는 말이 무엇일까, 무슨 말을 하면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머리 굴렸던 내 약골이 말이야. 강골이냐 약골이냐가 중요한 건 아니겠지. 이○○ 선배의 굳건한 신념과 나의 신념이랄 것도 없는 허약한 동기의 차이라고 해야겠지. 강력한 신념과 강건한 신체, 죽음이라도 불사하겠다는 의리 정신, 이런 것들이 그를 그렇게 버틸 수 있게 했겠지.
어찌 되었든 이○○ 선배는 80년대 중반 출소한 후 ○○ 국문과에 복학하여 졸업하게 돼. ○○으로 내려가서 ○○동부사회연구소를 차리고 ○○댐 반대 운동, ○○사건 피해자 조사를 활발히 전개하지. 시도 곧잘 써서 시인으로 등단도 하고 말이야. 이러다가 정○○ 선배가 ○○ YMCA 총무로 있다가 ○○ Y로 옮기자 그 후임으로 ○○ Y 총무로 일하게 돼. 얼마나 성실하고 열심히 했던지 ○○ Y 회원이 두 배로 늘었다더구만. 그러고도 남았을 거야. 이 소문이 전국 YMCA에 알려져서 이○○ 선배는 결국에는 YMCA 전국연맹 총무로 선출돼. 그때가 아마 2003년이었을 거야. 노무현 정부 때에는 주로 Y 운동에 열성이었지. 이명박 정부 아래서는 YMCA가 주도하는 시민운동에 뛰어들었어. 2011년까지 다양한 시민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다고 해.
일부 호사가들은 이○○ 선배의 시민운동 참여를 두고 입방아를 찧기도 했어. 폭력적 전위 조직 관련자가 시민운동에 앞장서는 것은 변절 아니냐는 거지. 또 한편에서는 이념적 전위 조직 운동 경력자가 시민운동을 주도하는 것이 시민운동 자체를 오염시키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었어. 그런 우려는 사실 기우에 불과하지. 박정희 시대와 같은 폭력적 억압적 정권 아래에서는 자연히 그에 대한 저항도 폭력적일 수밖에 없고 운동 방식도 비합법적인 조직을 포함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 반면에 형식적 절차적 민주주의가 원칙적으로나마 보장된 정부 아래에서는 합법적인 방식으로 권력의 주체인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를 실현하려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겠어?
좌우지간에 2012년 이○○ 선배는 정계에 진출하지. 더불어민주당(?) ○○지구 국회의원이 되었어. 파란만장한 일생이랄까. 이○○ 선배는 매년 말이 되면 한 번씩 연락해오고는 했어. 정치후원금 부탁한다고 말이야. 작년에는 웬일인지 아무런 연락이 없더라고. 언론지상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어지고 말이지. 몇 년 전에 아들을 잃었거든. 대학 다니던 아들이 영암 호수에서 경비행기를 타다가 추락 사고를 당해 요절하고 말았어. 얼마나 상심이 컸겠어.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아니면 고문 후유증으로 어디 병이라도 얻었나 좀 걱정이 되기는 해. 차마 먼저 연락해서 물어보지는 못하고 있어. 그런데 혹시나 다른 정치적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혼자 상상하는 게 하나 있어.
문재인 정부 초기에 조그마한 사건이 하나 있었지. 2018년이던가 지방선거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송철호 변호사를 울산시장 후보로 추천하는 의견을 말했다는 기사가 실린 거야. 엄밀히 말하면 현직 대통령이 정당의 자율권을 침해하여 정치에 개입한 거지. 지금 윤석렬이 하는 것을 보면 껌값이지만, 당시 야당에서는 이것을 큰 사건으로 몰아갈 만했어. 당연히 당시 야당은 관련자를 경찰에 고발했겠지. 그런데 당시 울산경찰서장이었던 황운하는 이것을 불문에 부쳐버려. 그러자 검찰에서 직접 나서서 수사에 착수하게 되고 당시 청와대 비서관과 울산경찰서장을 기소했어. 검찰의 공세에도 황운하는 승승장구하다가 정계에 투신해버리지. 대전에서 당시 여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당히 당선되는 거야. 그리고는 문재인 정부와 당시 검찰총장 윤석렬과의 갈등이 심해지자 당내 반검찰 운동의 선봉에 섰던 거지. 나는 이 장면을 떠올릴 때마다 경찰의 잔혹한 고문을 받았던 이○○ 선배는 당내에서 경찰 출신 황운하에 대해 어떤 태도를 보였을까? 경찰은 선이고 검찰은 악이라는 당내 일부의 주장에 이○○ 선배는 어떤 관점을 취했을까? 좀 어리석은 질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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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재인이라는 사람을 높이 평가해. 인간적으로 그 사람만큼 훌륭한 인물은 우리 정치사에서 찾아보기 드물다고 생각해. 적어도 도덕적인 면에서만 본다면 거의 유일한 성인급 인물이라고 봐. 만일 우리가 선한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그 권력 역시 선한 권력이 된다는 공식을 받아들인다면, 문재인 정권은 선했을 거야. 박정희라는 인물이 악인이라 박정희 정권도 악했다는 가정에 동의한다면 말이지.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선하고 악한 인간은 있을 수 있겠지만(물론 이것도 관계 속에서만), 이 세상에 선하고 악한 권력은 없어. 권력은 그 자체 악이야. 성인군자를 찾아 그에게 권력을 맡겨 정치를 통해 선을 추구하려는 건 연목구어야.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권력을 분산시키는 것뿐이지. 내가 문재인 정부에 비판적인 것은 그토록 선한 인물이 추구했던 정치가 권력을 분산시키기보다는 권력을 확대하려는 것이었기 때문이야. 자기들 진영을 선한 편이라고 믿고 그들과 합세해서 권력을 더 키워 선을 실을 실현하려는 착각에 몰두했다는 것이지. 혹시라도 이○○ 선배도 이런 정치에 환멸을 느끼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아예 정치 활동을 멈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냥 혼자 중얼거려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