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이천시족구협회
카페 가입하기
 
 
 
 

회원 알림

 
  • 방문
    1. 이한규(사무국장)
    2. 임종선
  • 가입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용인현암
    2. 현섭
    3. 이범기
    4. 원주그린 이진우
    5. 리베로
    1. 정세종
    2. 한울족구 총무
    3. 배정흠
    4. 후니
    5. 코디사랑
 
 

자주가는 링크

 
등록된 링크가 없습니다
 
카페 게시글
족구기사방송 스크랩 [27호](칼럼)우리 족구의 역사를 찾아서
족구를세계로정석현 추천 0 조회 35 15.02.03 15:5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필자는 얼마 전, '우리 족구에도 역사가 있다.'( http://blog.daum.net/hyjokgu/32 )는 제목의 글을 썼다. 우리 족구의 소중한 역사를 잊지 말고, 더 늦기 전에 찾아보자는 취지의 글이었다. 이 글의 말미엔 우리 족구의 규칙을 처음으로 창안한 것으로 알려진 정덕진, 안택순 선생과 함께 근무하셨던 이은귀 선생을 만나 많은 것을 묻겠다며 마무리 지었다.

 

 하지만 게으르기 그지 없는 필자보다 훨씬 더 부지런한 분들이 먼저 선생을 찾아가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 부지런한 분들은 홍기용 미주족구 회장, 박종빈 이천시청 감독, 원주화랑의 백신 선수였다. 이들은 선생을 찾아 족구가 만들어진 과정 및 뒷 이야기들을 자세히 들었다. 먼저 이은귀 선생을 잠시 소개하면 당시 11전투 비행단의 군무원으로 근무하셨고, 우리가 지금 즐기고 있는 4인제 족구를 처음으로 창안하신 분이다. 이후 광주족구연합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지금은 전남과학대 족구학과 교수로서 우리의 족구를 전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계신다. 또한 우리가 잊어버린 많은 족구의 역사적인 자료들(사진, 문서)을 정리해 보관하고 계신다. 이는 머지 않은 훗날 꼭 기부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한가지 더, 박종빈 감독의 수고로 족구의 창안자로 알려진 안택순 선생의 근황 또한 알아내어 선생과도 아주 뜻 깊은 만남이 이루어졌다.

 

 오늘 칼럼은 이 분들과 나눈 대화내용을 녹음한 파일을 듣고, 필자가 정리한 우리 족구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필자의 생각이 아닌 선생들이 어려운 시간 내어 이야기해준 귀한 역사적인 자료임을 알고 족구가 창안되는 과정 가운데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뒷 이야기들을 알아보자.

 

 1. 우리 족구의 기원

 

 1960년대, 이 시기는 동서 두 진영간의 냉전이 첨예하게 고조되던 시기로서 자유진영과 공산진영간의 긴장과 대립이 심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동평화를 모색하기 위한 대화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반도에 있는 남북한도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갈등과 대립 일변도의 관계를 유지하였던 시기였다.

 

 이에 맞춰 우리나라의 전(全)군은 항상 비상대기 체제를 갖춘 상태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했다. 이에 가장 민감했던 군은 바로 '공군'이었다. 전쟁이 일어나면 초반 공중전이 그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그들은 언제라도 출동할 수 있도록 대비를 해야했기 때문에 3분,5분,7분대기조가 순번을 바꿔가며 항상 비상대기를 하고 있었다.

 

 이는 당시 김포에 위치해 있었던 공군 11전투비행단 101전투비행대대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이곳에 근무하고 있던 조종사들은 항상 조종사복을 입은채로 활주로 끝에 위치한 작은 막사에서 24시간을 갇혀 지내있다 시피하며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했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냉전시대였다고는 하나 언제 일어날지 기약할 수 없는 '북의 도발'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매일 같이 좁은 막사 안에서의 '24시간 대기'는 병사들을 지쳐가게 하고 있었다.

 

 이러던 조종사들은 나가서 공이나 차자며, 조종사복을 입고, 군화를 신은 상태로 축구공을 들고 나갔다. 가운데 선을 그어 놓고 양쪽에서 공을 넘기는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그 공놀이의 규칙은 간단했다. 발로 탁구를 친다고 생각하면 된다. 탁구와 똑같이 한 번에 바닥의 선을 넘겨야 했으며, 탁구에 단식과 복식이 있는 것처럼 한 팀에 1명 혹은 2명이 팀을 이뤄 경기를 했다. 이는 당시 경남 사천에 위치해 있었던 공군훈련비행단에서 훈련 생도들이 틈 날 때마다 했던 공놀이로서 무릎미만의 발만 사용해야 한다는 간단한 규칙만 있었던 놀이였다. 역사적인(?) 이 공놀이의 이름은 발로 탁구를 친다고 해서, '족탁구' 줄여서 '족탁'이라고 불리우던 공놀이였다.

 

 한명, 두명 족탁에 재미가 들린 병사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이를 즐겼다. 나름 운동도 되고 조종사복을 입은 상태에서 간단하게 즐기기엔 그야말로 안성마춤인 운동이었다. 그런데 즐기는 인원이 많아지다 보니 이번엔 좀 더 많은 사람들이 같이 해보도록 하자며 막사 옆에 있던 배구코트에서 배구네트를 땅에 내려 놓고 경기를 했다. 없었던 네트가 생겨 한 번에 넘기기 어려우니 배구와 같이 세 번안에 넘기는 규칙을 만들어 즐겼다. 지금과 달리 당시엔 손을 제외한 모든 신체부위를 사용하였다. 안택순, 이은귀 선생이 이구동성으로 말씀하신 족구의 시작이 바로 이 '족탁구'였다.

 

 2. 불고기 회식을 위해 탄생한 족구

 

 한편, 당시 101전투비행대대의 대대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김진섭 중령(공사2기)은 대대장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던 중 배구장에서 공을 차는 소리가 들려 나가보았다. 새로 부임한 장교들이 배구네트를 땅에 내려 놓고 뭔가 처음 보는 공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장교를 불러 그 운동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그 장교가 이렇게 대답했다.

 

 "요즘 부대원들이 비상대기 시간에 심심할때 하고 있는 운동입니다. 사천에 있는 훈련비행단에서 유행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발로 탁구를 친다고 해서 이 운동의 이름을 '족탁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기, 마침 공군본부에서 '창안제도'라는 것이 있었다. 이 창안제도란 병사들의 건강증진과 복지향상등을 위한 이아디어를 모집하는 것을 말한다. 1등 상금은 30만원. 이를 본 김진섭 중령은 '왔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이거 상금타서 고생하는 우리 대대원들 배부르게 불고기 회식이나 한 번 해야겠다.'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마침 공군본부 통신감(계급: 소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그의 숙부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천에 있는 훈련비행단에서 요즘 유행하고 있는 공놀이가 있는데, 이를 이번 창안제도에 올리려고 합니다. 글로써 조직화하여 제출하겠으니 심사위원분들께 잘 좀 말씀해 주셔서 많은 지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를 들은 통신감은 "좋다. 안 그래도 창안제도 공문을 전(全) 공군에 보냈는데 아직 아무도 제출을 안하고 있다. 내 심사위원들에게 잘 이야기 해놓을테니 한 번 보내봐라."라고 말했다.

 

 이 날부터 김진섭 중령은 운동에 일가견 있는 장교들을 모아 함께 하나하나 세부적인 규칙들에 대해 의견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이를 함께한 이들이 바로 정덕진 대위와 안택순 중위 등이었다.

 

 

▲당시 족구 창안에 참여한 전투조종사(출처: 대한족구협회 홈페이지)

 

 이들의 운동실력을 잠깐 소개하자면, 당시 삼군(三軍)사관학교체육대회가 있었다. 1954년 시작된 이 대회는 육·해·공 각 군 사관학교의 친목을 도모하고, 국군의 날을 기념하기 위해 행하는 사관들간의 정기체육대회였다. 하지만 친목도모만큼이나 치열한 삼군간의 자존심 대결이 펼쳐지는 대회이기도 했다. 각 군의 사관학교 재학생들은 물론, 졸업생과 그들의 가족들까지 모두 모여 응원하며 열띤 경기를 펼쳤다. 정식 종목은 럭비와 축구였으며 지금은 없어진 동대문운동장에서 매년 개최되다가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중단되었다.

 대대장인 김진섭 중령은 이 대회 공군 럭비대표선수 출신이었고, 중대장 정덕진 대위는 공군 축구대표팀의 주장을 맡을 정도로 축구 실력이 뛰어났다. 또한 안택순 중위는 태권도 4단으로 대대 태권도 교관을 역임하고 있었으며 대대 내에서 족탁구의 1인자로서 김진섭 중령에게 '안탁구'라는 별명으로 불렸다고 한다.

 

 이후 김진섭 중령은 업무를 하면서 틈틈이 시간 날 때마다 공군본부에 제출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 글의 서문에는 '사천에 있는 훈련생도들이 틈 날 때마다 하는 운동인데 아직까지 세부적인 규칙이나 룰이 없어, 이를 규칙으로 만들어 전(全)군에 전파하여 장병들의 건강과 체력 증진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고 기록했으며 다음의 내용이 이어진다.

 

 이 운동은 돈이 들지 않으며, 배구공이 가장 좋지만 축구공이든 어떤 공이든 사용이 가능하며, 어느 정도의 공간만 있으면 물주전자로 라인을 그려도 되고, 그나마도 없으면 근처에 굴러다니는 돌 하나 주워서 그려도 된다. 그러므로 운동시설이 열악한 백령도와 같은 지방에 위치한 부대에서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네트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코트 사이에 30센티 정도의 이격거리를 두어 '파울존'을 만들고, 가운데 원을 그려 그 안에 들어가면 실점인 룰로 해도 상관 없다.(필자 주. 예전에 우리가 많이 했던 '똥통족구'인듯 함.)

 손을 제외한 신체 어느 부위든 터치가 가능하고, 세 번 안에 상대에게 공을 넘겨주면 된다. 사람 수에 따라 코트의 넓이는 언제든지 조정해도 된다. 4명에서 6명이 가장 적당하지만 인원이 많으면 많은데로 적으면 적은데로 즐길 수 있다. 모든 것이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지만 이 운동의 단점은 '단점이 없다.'는 것이다.

 

 함께 했던 장교들은 이 자료가 더 이상 손댈 것이 없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을 정도로 확실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저기서 이런 말들이 나왔다.

 "이거 진짜 대박이다."

 

 그리고 김진섭 중령은 당시 정확한 이름이 없어 '족탁구'라 불리우던 이 놀이의 이름을 '족구'라고 명명했다.

 

 정덕진 대위와 안택순 중위는 김진섭 중령의 지시에 따라 이를 1968년 5월 공군 본부에 제출했고, 이를 검토한 공군본부는 바로 이 '족구'를 1등으로 표창, 101전투비행대대에 30만원의 상금을 수여한다. 이후 101전투비행대대원들은 물론 11전투비행단 전원이 배터지게 불고기 회식을 즐겼다고 한다.

 

 이후에도 많은 규칙의 조정이 있었다. 인원은 몇 명으로 할 것이냐면서 6인제, 4인제등이 거론되기도 했었고, 코트의 넓이는 9m×9m, 8m×8m등등, 머리는 사용하지 말고 발과 가슴만 사용하자고 했다가 그냥 다 사용하자고 했다가, 서브는 원바운드 혹은 다이렉트 여부, 발이 네트를 넘어가도 되네 마네등 수 많은 규칙의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어떠랴. 지금도 족구의 규칙을 정확히 모르는 동호인 이외의 사람들도 동네족구에서 이같은 설전을 펼치지 않는가...

 

 이후 타 부대의 초청으로 김포에서 가장 가까웠던 기지였던 용문산 레이더사이트(Rader Site)에서 타부대원들 앞에서 시범경기도 열었다. 또한 육군, 해군과 함께 합동작전을 많이 펼치는 공군의 특성 때문에 서로 만날 일이 많이 이를 타 군에도 전했다. 그리하여 이 족구는 국방부 체육교본 과목 중 하나로 들어갔고, 공군을 넘어 육군, 해군에도 전파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군 복무시절, 이를 접했던 전역자들이 사회에 나와 이를 즐기며 90년대 협회 창립과 함께 정확한 규칙과 규격, 공인구 등이 만들어지며, 우리 족구는 지금에 이르렀다.

 

 3. 잊을뻔 한 족구의 대부 김진섭 선생

 

 우리는 지금까지 족구의 창안자라고 이야기 하면 정덕진, 안택순 선생만을 기억했다. 하지만 이 분들의 위에는 이를 지시하고 직접 규칙을 창안한 인물이 따로 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바로 당시 대대장으로 근무하였던 김진섭 선생이다. 선생은 위와 같이 최초로 족구의 규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고, 세상에 족구를 태어나게 하신 이다. 이런 분이 진정한 족구의 '대부'가 아닐까? 

 

▲이은귀 선생, 정말 열정적으로 당시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해 주셨다.

(사진제공: 홍기용 미주족구 회장)

 

 이은귀 선생과의 만남을 가졌을때, 선생은 잠시나마 김진섭 선생과 통화하며 당시 이야기들을 들었다. 김진섭 선생은 현재 86세, 서울에 거주하고 계시며 대상포진에 따른 합병증을 앓고 계신다. 통화하시면서도 호흡이 곤란해 힘들어 하셨지만 기억나는 모든 이야기를 말씀해 주셨다. 녹음내용을 듣기만 해도 선생의 건강이 많이 안 좋으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더 늦기 전에 이분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 다행이었으며, 선생의 건강을 기원한다.

 

 이은귀 선생은 김진섭 선생과 통화 말미에 이런 말씀을 하였다.

 "장군님! 장군님께서 당시 대대장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신 것도 큰 중책이었지만 이렇게 우리 족구를 만들어 주셔서 생활체육의 발전과 국민건강 증진에 이바지하셨음도 큰 공로라 생각합니다. 돌아가신 이후에도 우리 후배들은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은귀 선생의 이 말씀이 우리 족구인들 모두가 김진섭 선생에게 보내는 메시지이길 바란다.

 

 4. Epilogue

 

 안택순 선생과의 만남을 위해 선생에게 전화를 걸었을때 선생은 만남을 꺼려하셨다. 이유는 족구를 만들기만 했을 뿐, 족구 발전을 위해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족구라는 이름으로 나서기가 미안하다는 것이었다.

 

▲안택순 선생, 멋쟁이 노신사가 되어 있으셨다.

(사진제공: 홍기용 미주족구 회장)

 

 그러다 현 우리 족구인들의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자신이 족구 1세대다, 자신이 아니면 안된다고 말하는 이들이 자신들의 위치에 연연하며 족구의 발전을 저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족구를 만드신 분은 오히려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계신데, 족구를 발전시켜야 하는 다음세대인 우리들은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많은 족구인들게 묻고 싶다.

 

 힘들게 고생하고 있는 대대원들에게 불고기 회식이라도 시켜주자는 한 대대장의 '사랑의 마음'이 지금 우리 족구의 시작이었다. 우리 족구인 모두가 선생의 그 뜻을 받들어 서로 감싸주고, 족구의 발전을 위해 힘을 합쳐 나아가는 것이 우리 후배들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ps.) 힘든 시간 내어주셔서 소중한 이야기 들려주신 김진섭 선생님, 안택순 선생님, 이은귀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선생님들께 부끄럽지 않은 후배들이 되겠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아울러 힘들게 먼 길 다녀오신 홍기용 미주족구 회장님, 이천시청 박종빈 감독님, 원주화랑의 백신선수에게도 감사의 말씀 전하겠습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