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의 향비(향향공주)
향비는 청나라 위구르족에 국보 였다.
몸에서 고운 향기가 난다고 해서 향비라 불렸으며, 건륭황제의 명으로 고향을 떠나 비(妃)가 되었지만 곧 죽게 되고 그 시신을 다시 고향으로 옮겨 안장하였다.
몇해 전, 북경에서 열리는 학술회의에 갔을 때, 일정 중에 청의 황제들이 잠들어 있는 동릉에 간 적이 있었다. 명의 황제들이 잠들어 있는 명13릉은 장성관광 일정에 있어서 갈 기회가 많지만, 청의 황제무덤인 동릉과 서릉은 외딴 곳에 떨어져 있는 관계로 보기가 쉽지 않다.
동릉에는 청의 초대 황제인 순치제를 비롯해서 강희제, 건륭제, 함풍제, 그리고 동치제의 무덤이 있다. 청말에 권세를 누렸다는 서태후, 즉 자희태 후도 이곳에 잠들어 있다. 살아 생전에 그녀가 권력을 다투었던 광서제와 함께 묻혀 있다는 것도 역사의 아이러니일 듯 싶다. 또 그곳에서 들은 바로는 마지막 황제 푸이의 무덤도 그곳으로 이장할 것이라 한다.
그러나 그곳에서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은 유릉비원침(裕陵妃園寢) 속에 잠들어 있는 향비(香妃)라는 여인이다. 유릉은 건륭제의 무덤이니, 향비는 건륭제의 비인 셈이다. 중국에서 부르는 정식 명칭은 용비(容妃)이다.
유릉비원침에는 36명에 이르는 건륭제의 황후, 2명의 황귀비, 5명의 귀비, 6명의 비, 6명의 빈, 12명의 귀인, 4명의 常, 모두 36명이 함께 잠들어 있는데 향비도 그 중의 하나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향비의 무덤이 이 동릉 뿐만 아니라 저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서쪽 끝에 자리잡은 카슈가르에도 있다는 점이다. 아마 이 세상에서 무덤 두개를 가지고 있는 사람도 드물거니와, 여인으로서 그런 경우는 더 그럴 것이다. 물론 카슈가르에 있는 향비묘는 개인묘가 아니라, 이 지역의 전통에 따른 가족묘로서, 17세기 중기에 호자가에서 시작되었는데, 대략 호자 일족 72명이 묻혀있다고 한다. 호자는 이 지역의 종교 귀족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향비묘라기 보다는 호자 가족묘라고 하는 것이 명실 상부하겠지만, 이곳 사람들은 향비묘라고 부른다고 한다.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항상 몸에서 향긋한 냄새가 났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향비의 고향은 바로 카슈가르. 정설은 없으나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향비는 이 지역 종교귀족 가문인 호쟈 가문의 딸이었는데, 청조가 건륭제 때 군사 침략을 단행한 뒤, 청의 장군이 황제에게 선물로 바치기 위해 그녀를 사로잡아 북경에 보냈다고 한다. 그녀는 카슈가르에서 한 족장의 부인이라고도 했고, 또 정혼한 사람이 있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22살 때(1756년?), 혹은 26살 때(1760) 청나라의 자금성에 들어온 뒤, 29세 때 사망하였다. 어떤 이는 25년간(혹은 28년간) 자금성에서 살았다고도 한다. 생활은 무척 힘들었던 듯하다. 망향병에 시달렸다는 흔적도 있다. 궁중 음식을 거의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에 건륭제는 이를 위해 그곳에서 나오는 재료로 음식을 만들었을 정도였고, 그녀가 위구르의 전통 복장도 입을 수 있도록 배려하였으며, 특별히 그녀를 위해 위구르의 조복(朝服)까지 제작하였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녀는 이 궁정에 적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향비의 실존 근거는 이탈리아 사람으로서 청나라에 벼슬을 지낸 카스틸리오네가 그렸다는 <향비융장상(香妃戎裝像)>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다. 이 그림에는 투구를 쓰고 무장 차림을 한 여인이 있는데 이 그림에 찬자불명(撰者不明, 글 쓴 이가 분명치 않음)의 사략이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쓰여 있다.
<<향비는 회부(回部, 신강성 남부)의 왕비로서 자색이 뛰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그녀의 몸에서는 특이한 향기가 있어 나라 사람들이 이름하여 향비라 불렀다. 청나라 건륭제가 이 소문을 듣고 회부에 출정하는 장군 조혜에게 기필코 향비를 데려오도록 명하였다. 회부를 평정한 조혜는 과연 향비를 데리고 북경에 이르렀다.>>
향비를 본 건륭제는 한눈에 매료되고 말았다. 확실히 향비는 건륭제의 마음을 사로잡을 만한 뛰어난 미모와 이국적인 체취를 간직하고 있었다.
그런데 북경에 온 향비는 항시 칼을 빼어들고 죽음으로써 건륭제의 접근을 거부하였다.
그녀가 제 명대로 살지 못하고 죽은 것은 독살하였거나 자살하였기 때문이이라고 한다. 자살설은 그녀 자신이 이미 정혼한 몸이었기 때문에 항상 칼을 가슴에 품고 황제의 접근을 불허하였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황태후가 이 사실을 알고는 그녀를 불러 들여 소원을 묻자, 죽는 것 뿐이라고 말해서 결국 별실에서 자살케 하였다고 한다. 황태후가 환관들을 시켜 목졸라 숨지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어찌 되었든, 향비에 얽힌 이야기는 청의 카슈가르 정복 과정에서 나타난 비극이고, 향비는 그에 저항한 여성인 셈이다. 때문에 그녀의 유해는 동릉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덤은 인간의 산물 중에서 가장 보수적인 산물일 것이다. 카슈가르의 향비 묘에도 그러한 의미가 담겨 있는 듯이 보인다. 아마 위구르인들은 향비를 통해 민족적 자존심을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고, 그 욕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