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4일 홍련암을 찾았다. 예전에 찾은 적이 있지만 사진자료가 없어 다시 들렀다.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나라 4대 관음도량을 글로써 마무리해야 한다는 일종의 의무감도 있었다. 흔히 4대 관음도량하면 여수 향일암, 남해 금산 보리암, 강화 보문사, 그리고 이곳 홍련암을 일컫는다. 홍련암을 끝으로 관음도량 사진 답사는 마무리될 듯하다.
여행은 낙산사에서 시작되었다. 몇 년 전 화재로 불타버린 낙산사는 공사로 어수선했다. 어수선함은 비단 공사 때문만은 아니었다. 건물을 복원하고 새로 짓는 과정에서 과연 전문가의 견해가 들어갔을까 하는 의구심마저 들 정도로 볼썽사나운 모습들이 곳곳에서 보였다. 예전의 아늑하고 정갈한 맛은 간데없었다.
도망치듯 빠져나와 의상대로 향했다. 홍련암 관음굴 가는 해안언덕에 있는 의상대는 신라 시대의 고승 의상이 문무왕 16년인 676년에 낙산사를 창건할 때 좌선하였던 곳에 세운 정자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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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상대 지금의 정자는 1925년에 만해 한용운이 낙산사에 머물 때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중간에 개축을 하였다. |
ⓒ 김종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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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정자는 1925년에 만해 한용운이 낙산사에 머물 때 세운 것으로 전해지며 중간에 개축을 하였다. 다행히 의상대 주위의 노송들은 화재에도 건재하여 바다와 기암절벽과 어우러져 해변 절경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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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상대 의상대 주위의 노송들은 화재에도 건재하여 바다와 기암절벽과 어우러져 해변 절승을 이루고 있다. |
ⓒ 김종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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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대에서 맞은 편 해안절벽을 보니 암벽 위에 턱하니 앉아 있는 홍련암이 보였다. 바람이 거세서 소나무 가지가 휘어지기를 몇 번, 요사를 지나 절벽을 따라 암자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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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련암 화재로 그루터기만 남은 소나무와 새 생명 해국 |
ⓒ 김종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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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련암 가는 길 언덕에 해국이 강한 바람을 견디며 피어 있었다. 5년 전 낙산사를 완전히 불타게 했던 화마도 홍련암은 어쩌지 못했다. 다만 암자 옆의 요사채만 불에 탔다. 관세음보살을 보았다는 의상대사의 법력이 이곳까지 미쳐서일까.
의상대사가 동해안에 관음보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이곳에 왔는데, 파랑새를 만나 뒤를 따라갔다. 파랑새가 석굴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이상히 여겨 굴 앞에서 밤낮으로 7일 동안 기도를 했다. 이윽고 7일 후 바다 위에서 붉은 연꽃(紅蓮)이 솟아나더니 관음보살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이곳에 암자를 짓고 홍련암이라 하고 파랑새가 사라진 굴을 관음굴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창건 설화에 대한 이야기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른 양상을 띠고 있다. 어떤 곳에서는 의상대사가 이곳에서 수정 염주와 여의주를 얻고 암자를 지었고, 이곳을 찾은 원효가 파랑새를 보았지만 관세음보살을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진다.
전하는 이야기야 어찌 됐든 높은 절벽 위에 지어진 홍련암은 보기만 해도 대단하다. 법당 마루 밑으로 보면 출렁이는 바다를 볼 수 있다고 하나 여행자가 간 이날은 마침 예불 중이어서 법당 안에조차 들어갈 수 없었다.
강한 바람에도 이곳을 찾은 이들의 기도 행렬은 끝이 없었다. 암자 바로 뒷산에는 아직도 5년 전 화재에 불타고 그루터기만 남은 소나무 둥치가 곳곳에 보였다. 자연에 한없이 약한 인간이 자연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지난 화재는 말하고 있었다.
명승 제27호인 낙산사 의상대와 홍련암은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 소개된 관동팔경 가운데 하나로 동해 일출 경관으로 매우 유명한 곳이다. 의상대와 홍련암 주변은 해안 절벽이 발달하여 다행히도 2005년의 화재를 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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