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기 그대가 불러서
-도봉산 우이암에 올라
권 옥 희
우리 고향 임동산우회의 유월 정기산행일이 까페공지에 떴다.
여름의 초입인데도 연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그에 따라 나이는 못 속이는지 몸 컨디션도 별로라서
숨차고 땀 바가지로 흘리는 여름산행을
가야하나, 말아야하나~
연일 괜한 갈등이 마음을 지배해서 무겁게 내려앉았다.
은희는 내가 쓴 까페 답글마다 권여사, 권선생, 권시인, 친구야,
힘들더라도 둘이서 손잡고 북한산에 샤방샤방 갔다오자
가다가 힘들면 계곡에서 발 담그고...
안 보여도 전해지는 그 마음이 내 마음을 녹이게 했다.
그래서 더 일주일이 다 되도록
간다, 안 간다 아무 말 못했는지도 모른다.
산에는 왜 갈까?
거기 그 산이 불러서 간다고 하지만
우리는 거기 그대가 불러서
보고 싶은 사람들을 보지 않으면 마음이 휑해서 가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는 산에 올라가면서 먹는 홍어와 서울장수막걸리맛 때문에 간다고도 하고
또 누구는 산을 오르고 내려오면서 꿀맛 같은 점심밥 먹는 재미에,
또 또 누구는 산행을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즐기는
뒷풀이 재미 때문에 간다고도 한다.
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고향의 언니, 오빠 동생들을 보고
내 친구 은희에게 힘을 실어 주러 산에 간다.
하나 보다는 둘이 좋고 둘 보다는 셋이 더
좋은 게 친구가 아니던가.
더구나 이번 산행은 향우회와 산우회의
새로운 회장님들을 모시고 하는 산행이니 만큼
빠질 수 없는 이유가 더 컸다.
이번에는 선후배님들 많이 오겠지~
일요일이면 11시까지 자야 직성이 풀리는데
반찬 몇가지 준비한다고 새벽녘에 자고도
여섯시에 기상했다.
어제까지도 간다, 안 간다 답을 안 줬는데도
내 마음 너무나 잘 아는 우리 은희는
네가 안 가고 배기겠냐는 듯 7시에 카톡이 왔다.
옥희야, 준비하고 있지?
1호선으로 갈아타고 1번 출구로 나와. 부침개 부친다~
덥다고 아무것도 안 한다더니 분명
이거라도 없으면 막걸리 안주는 뭘로 할까 하는
걱정스런 마음이 앞섰을 거다.
야아~ 이 더운데 부침개는 무슨...
하여튼 우리 은희 바지런한건 알아줘야 한다.
고향사람들 생각하는 그 정성, 그 사랑 누가 말려.
그러니까 은희가 있는 곳엔 내가 가야하는 거다.
화장을 끝내고 가방이 빵빵하도록 챙기는데
산에 가면서 뭘 그리 챙기냐고, 어디 소풍가냐고 하면서도
도봉역까지 남편이 태워다 준단다. 얼씨구~
진작 그랬으면 한 시간은 더 잤을걸. 에구 아까워라 내 잠~
그래서 느긋하게 꼼자락거리다 9시 30분까지 가야하는데
9시에 집을 나섰으니 큰일났다!
화곡동에서 내부순환로 타면 차가 막혀서 지각은 불보듯 뻔하고
외곽도로를 타고 쌩 달려 의정부로 빠져나가니
휴~ 많이 늦지 않아 다행이다.
은희도 아직 석계역,
옥희 떼놓고는 절대로 못간다는 카톡의 말이 안심이다.
도봉역에는 한 50여 명 모인 정다운 얼굴들
이상석향우회장님과 박성수산우회장님 다 오셨는데
류필휴 전 향우회장님은 안 보이신다.
무거운 짐 내려놓으시고 어깨가 너무 가벼워서
우릴 잊고 딴 데로 날아가신 건 아닐까?
후덕하고 상냥해뵈는 산우회장님의 사모님은
우리 밥 안 먹고 온 것은 어찌 알으셔서 백설기떡을 돌리셨다.
따끈따끈한 그 마음이 달달한 백설기맛으로 전해진다.
부창부수~고향 사람들 생각하는 마음은
산우회장님이나 사모님이나 한결 같은 것 같다.
남편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라고 해도 안 할 일~
치악산인가, 주왕산 갈 때 이미 뵈었으니
떡 한 덩어리 받았다고 아부가 아닌 진심이다.
회장님 임기 동안 주욱 부부산행으로 함께 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고향에서 단오날에 옥례가 직접 수리취를 뜯어 만들어서 올려보낸
수리취떡을 은희가 가져와서 다들 아주 맛있게 먹었다.
배도 든든하겠다.
이제 북한산과의 경계에 있는 도봉산 우이암으로 출발이다.
도봉역, 도봉산역 서로 길이 엇갈려 늦는 동기들에게
몇몇이 서로 연락을 주고받느라 휴대폰들이 불이 나는 걸 보면서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나 젊음이 좋다고, 젊은이와 함께 하면
절로 젊어지는 것 같다는 김용진선배님을 비롯해서
박수생, 류건덕선배님, 명희언니, 금자언니도 보이고
진짜 고향의 아재처럼 정겨워뵈는 고촌아재도 오시고
오랜만에 작은 김용진이라 불리는 거성선배님,
내년의 주관기수인 사룡이도 함께 발걸음을 옮기고
안동산우회총무를 맡고 있는 길안출신의 친구들도
은희의 초청으로 세분이나 오셨다.
그런데 막내동생들이 안 보인다.
짱구아빠, 이쁜이명화, 명원이 등등
산에서 얼굴 보는 게 즐거움이던 친구들이 안 보이니
뭔가 구멍이 난 듯 허전하다.
그래도 봐도 봐도 좋은 사람들과
삼삼오오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며 오르는 계곡길은
30도의 무더위도 가라앉힐 기세다.
오늘의 목적지는 원통사 지나서 우이암.
기룡이가 저기 산꼭대기 우뚝 솟은 바위를 가리키며
거기까지 가야한다고 했는데 과연 내가 갈 수 있을까?
아싸~ 나는 할 수 있다. 가 보는 데까지 가보자!
혼자 화이팅을 외쳐본다.
은희네 홍제천처럼 맑은 물에 송사리인지, 피라미인지
거슬러 오르는 작은 물고기떼들의 환영인사를 받으며
개천의 징검다리를 건너 계곡 초입에 다다르자
주말농장의 아기자기한 푯말 안에
상추며 쑥갓이며 오이 가지 감자 등등
온갖 채소들이 무공해로 예쁘게 자라고 있다.
하얀꽃에 하얀 감자, 자주꽃에 자주감자~
캐보면 진짜 꽃 색깔과 같은 감자가 있으려나?
상추를 좋아하는 난 햇볕을 받아서 쌉싸름하고
맛있을 것 같은 상추가 제일 탐났다.
붉고 소담스런 저 적상추에 고등어자반 노릇노릇 구워서 한점 올리고
입이 미어져라 한쌈 잘 싸먹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미치자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간다.
인근의 초등학생들이 직접 무공해로 생태를 공부하면서
짓는 개구리논앤
벼들이 생글생글 잘 자라고 있고
엄마따라 나들이 나온 아이들은
논가에서 올챙이를 잡느라 계속 손수제비를 뜬다.
자연이 주는 선물을 우린 너무 당연해서
제대로 못 챙기고 사는 것 같다.
은희가 우리도 어디 작은 땅에 상추 심고 고추 심고
주말마다 와서 땀 흘리고 삼겹살 구워먹고
그러면 참 좋겠다고 한다.
에구~ 바쁜 우리한텐 꿈이지,
꼬부랑할머니가 되면 또 모르겠다.
푸른나무 우거진 계곡길을 따라 땀방울로 목욕을 하며
숨이 턱에 차오를 만큼 한참을 올랐나 싶다.
풍덩 담그면 그야말로 신선이 될 것 같은
물의 유혹이 몇 번이고 발걸음을 더디게 할 무렵
달현이 그냥 가면 섭하지.
“고마 쉬었다 가시더~ 누가 쫓아오니껴?”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너도 나도 배낭을 내려놓고
그 안에 넣어둔 막걸리병을 꺼낸다.
은희는 자연스럽게 홍어와 묵은지,
그리고 아침에 고소하고 얼큰하게 부쳐낸 부침개를 내놓았다.
언제나 떠들썩한 우리의 호프, 기룡이는 그냥 있나?
오이와 고추, 마늘꼬깨이(마늘쫑)를 준비해서 안주하라고 했다.
저 오이와 마늘꼬께이 때문에 또 웃지못할 에피소드가 있는데
기껏 장봐가지고 와서 냉장고에 넣어놓을 때까지는 괜찮았다.
그런데 냉장고문을 꽉 닫지 않아
아침에 마누라한테 욕을 바가지로 먹고
전기요금이 얼만데 그런 것도 신경 안 쓰냐고
한바탕 잔소리 듣고 나니 정신이 얼얼하더라나.
한번도 그냥 넘어갈 때가 없다. 흐흐~ 저 귀여운 섬머슴!
기룡이가 없으면 우리 고향 사람들 심심할 거야.
목 마른 자에게 막걸리 한 사발은
그야말로 숨쉴 틈 없이 꿀꺽꿀꺽 넘어간다.
거기에 코가 톡 쏘게 삭힌 홍어 한점. 으아~
금방이라도 푸른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여름숲에서
이미 마음에 푸른물이 들어버린 우리 얼굴은
붉은 홍조와 함께 너도 나도 함박웃음이 피었다.
우리는 겉모습이 중요해서 날마다 꾸미려 들지만
산은 꾸미지 않는다.
작은 풀꽃, 작은 벌레 한 마리까지도
있는 그대로 품어주고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푸름이 가득 차서 더 넉넉해 보이는 여름산에 올 때마다 나는 느낀다.
이 드넓은 세상에 내가 얼마나 작고 외로운 존재인지,
그래서 산의 품에 안겨 함께한 인연들이 소중하고
한번이라도 더 눈 맞추고 마음 맞추려고 노력하게 된다.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발걸음이 무거워질 때마다
침 한 방 놓듯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간다.
죽기보다 사는 게 더 힘들다고 푸념했던 날들도 씻겨간다.
우리네 삶이 이렇듯 오르기 위한 힘든 코스만 있다면
살아낼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고
때때로 큰 숨 쉬라고 불어오는 바람을 묶어두는 그늘도 있고
나를 위해 흘린 땀 씻을 계곡도 있고
산은 우리네 인생을 송두리째 껴안고
하나하나 보물 꺼내주듯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쫓아오지도 않는데 쉬엄쉬엄 쉬며 가지 뭐~
한줄로 주욱 좁은 산길을 오르는 모습들이
한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가는 중간중간 해동오빠가 카메라를 들이대면
자연스럽게 입이 헤~
서로가 다시 취하지 못할 포즈를 취하면서 사진도 찍는다.
그런데 몸이 건강하지 못한 우리 사룡이 동생,
얼굴에 열이 오르면서 길가에 주저앉는다.
함께온 연시에게 “야야, 사룡이 장가질라 옆에서 지켜줘라.”하며
시학이 동생이 걱정한다.
장가져? 마늘쫑도 꼬갱이가 아니고 꼬깨이라고 그러더니
장가지는게 뭔데? 아하~쓰러지는 거란다.
내가 가진 부채로 얼른 열을 식히라고 건네줬다.
사룡이는 거기서 그냥 쉬어도 될 것을
군대 간 아들은 이 더위에 40키로 행군을 했다는데
아버지로서 그냥 주저앉을 수 없다며
끝까지 원통사까지 올랐다.
아들을 생각하는 좋은 아버지는 역시 다르구나.
그런데 아들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줄까?
알아주겠지.
나는 원통해서 원통사인 줄 알았다.
무슨 절 이름이 하필이면 원통이야 했는데
절대의 진리는 모든 것에 두루 통한다는
관음보살의 덕을 기리는 이름이었다. 그럼 그렇지.
원통사는 작은 절이지만 우이암을 등에 업고
관음의 덕을 베풀며 천 년 고찰의 큰 뜻을 품고 있었다.
그런데 절 뒤의 큰 바위, 작은 바위가 심상치 않다.
꼭 거시기처럼 생겼다. 문득 재수오빠가 사패산행때
거시기잔에 따라준 술을 홀짝 마셨던 생각이 나서
기분이 묘했다. 그리고 난 속았다.
이정표에 우이암까지 0.4키로~ 얼마 안 남았다.
여기까지 왔는데 꼭 저 우이암에 가서 부처님을 뵈어야지
결코 포기하지 않을 마음으로 우이암을 보겠다고
가도가도 줄어들지 않는 0.4키로를 원망하며
숨이 멎을 것처럼 기를 쓰고 올랐다.
은희도 패잔병처럼 밑에 남아버리고 우리 산행대장 철현이도
뒤에 남은 사람들 때문에 오르고 싶어도 못 올라온 곳을
오르고 보니 우이암은 암자가 아니라 소 귀를 닮은 바위였다.
즉 내가 밑에서 봤던 거시기 닮은 그 바위였던 거다.
밑에서는 그렇게 보여도 정상에 올라 보는 바위는 또다른 모습이었다.
자연이 빚어놓은 신비, 고스란히 눈에 담으면서
저 밑의 세상을 내려다 보는 세상에 서 있는 나도
이 순간만큼은 산이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으잉? 우리 회장님 언제 이 힘든 곳까지
올라오셔서 바위 위에 신선처럼 앉아 쉬고 계셨다.
나는 자동으로 카메라셔텨를 눌렀다.
아직 체력 든든하시니 우리 향우회 이끌어가시는데 뭘 못하실까?
수애당 지원이와 용진선배님, 그리고 연진이가 옆에 있어서
셋이 인증샷을 찍는다고 갖은 폼을 다 잡았다.
그리고 내려와서 먹는 점심밥은 그야말로 꿀맛
산에선 간단히 싸와서 간단히 먹는다고 하지만 아니다.
너도나도 펼쳐놓고 보면 없는 게 없다.
더구나 이번엔 연진이와 도수동생의
집사람도 함께 했으니 더 맛난게 많았을 거다.
목적지까지 무사히 올랐다는 쾌감, 배부른 쾌감,
그리고 시원한 계곡에 발 담글 때의 그 시원한 쾌감은
누구든 해보지 않고 직접 느껴보지 않으면 모른다.
오를 때는 저기 목적지가 있어서 기를 쓰고 앞만 보고 가지만
내려올 때는 천천히 둘러보면서 산이 품은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고
다 눈에 담아와야 하는데 왠 걸음들이 그렇게 빠른지
신발 끈이 풀려 묶는 동안에도 하마 저기까지 간격이 벌어진다.
그러니까 어디 둘러보고 할 것도 없이 바람처럼 쌩~
앞 사람의 뒷꽁무니만 보고 내달려야 한다.
난 그게 싫다. 헐떡거리며 올랐으면 내려올 때만이라도
빨리빨리를 던져버리고 조금 느긋했으면 한다.
꼴찌로 철현대장의 보호를 받으며 한참을 달려내려오니
아침에 안 보였던 후남이언니가 계곡에 있다.
그렇지, 우리 산행에 언니가 안 올 리가 없지.
먼 시흥에서 이곳까지 헐레벌떡 달려왔다가
일행들 다 산에 올라가버리고 내려올 때까지
기다리느라 얼마나 지루했을까?
언니의 고향사람들 사랑하는 마음도 대단하다.
절반은 다 내려갔는지 안 보이고
절반은 계곡에 발을 담그고 신선놀음을 한다.
우리 고천아재는 얼음 같은 물에 발을 담근 채
아예 신선이 된듯 정신을 놓았다.
먼저 간 사람들이 밑에서 기다리니까
물에 발 담그기는 늦었고
그래서 그냥 작은 바위에 올라서서 물의 느낌만 느끼고 있는데
와우~ 49회 진우동생,
남한산성에서 빛을 보았던 그 우유샤베트를 만든다.
얼린 우유에 역시 얼린 후르츠칵테일을
비닐봉지에 함께 넣어서 섞어 한그릇 담아주는데
젖었던 온몸이 한꺼번에 오그라들면서
정신이 다 나가는 것 같았다.
다들 일어나기 싫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무숫골 가든식당으로 향한다.
산행에서 뒷풀이가 빠지면 뭔가 허전하다.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계곡으로 내려가
나의 오늘 하루를 즐겁게 해주느라 고생한 발을 담궜다.
내가 흘린 땀방울은 다 나를 위한 보약이라고 생각한다.
집에서 뒹굴뒹굴해도 역시 휴식은 되겠지만
이렇게 더운 날에도 산에 올라 땀을 흘리고
산의 기운을 느끼고 푸름에 내 몸을 맡긴 채 흘려보낸 시간은
내게 황금시간이었다.
거기 산이 있고 거기 그대가 불러서 만든 추억의 시간들이
내일 또 똑같지 않기 때문에
나는 이런 시간이, 이런 추억이 황금같이 소중하다고 생각한다.
오늘 함께했던 언니 오빠, 동생들
서로의 가슴에 저장된 추억의 시간들을 엿볼 때마다
새록새록 살아나와서 이 친구 그때 그랬지 하며
서로를 웃게 하고 서로에게 힘을 주리라고 믿는다.
그게 준게 없는 고향이 우리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