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례1리는 남원읍 서부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위미1리, 서쪽으로는 하례1, 2리, 남쪽으로는 신례2리와 접해있다. 북쪽은 한라산에서 완만한 경사로 이승악, 수악, 흑악, 성길악 등 여러 개의 군소산악 등이 있으며 수악 서쪽에 천연기념물인 왕벚나무 자생지가 있다. 하천은 마을 서쪽으로 신례천이 있으며 이 하천 상류에는 제1횡단도로변에 수악계곡이 있어 많은 관광객이 찾아 울창한 상록수림과 가을단풍을 조망하는 아름다운 곳이다. 또한 마을 동쪽으로 종남천이 있으나 건천이다.
신례천 샘물 웅덩이 물이 맑고 차갑기 때문에
이 일대 주민들에는 피서지로 각광을 받는다.
이승악 가는 길...
신례1리의 토지는 논이 전혀 없으며 대부분의 토지는 감귤과수와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용암층 밑을 복류하는 지하수는 해안지대의 용암층 말단부에서 용출되므로 주민들에게 음료수로써 제공되고 있다. 광활한 중산간지대 초지를 보유하고 있어 목장지대를 이용한 축산과 감귤산업이 주 소득원이다.
마을약사
옛날부터 집단촌락을 형성하는데 지형과 지세가 좋고 식수, 기후, 풍토, 농경지 등 진취성 있고, 생활조건의 호적한 곳을 골랐었다.
신례리의 위치를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뒤로는 이승악이 든든히 자리해 있고, 마가미 줄기가 용이 꿈틀거리는 모습으로 이어지고 있다. 좌측으로는 성길악이 마을을 감싸듯이 위치해 있고 우측으로는 갈악산(칠오름)과 영천악이 지켜보는 안으로 수려한 하천이 있어 장관을 이루었다. 또한 앞으로는 지귀도 너머로 큰 희망을 안겨주는 태평양의 대해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선인들은 정착했음을 알 수 있다.
촌락의 형성은 구전에 의하면 지금부터 1000년 전인 고려 태조 때 성. 문. 조 삼성이 설촌하여 호촌(狐村)이라 이름하고 살았다는 설이 있다. 현재의 지명으로는「성구성이왓」(1002번지경) 「문세운의 터」(1005번지경) 「조조기 돌래」(992번지경)등 지명이 내려오고 있다. 신례리가 호촌으로 부르게 된 배경으로 현촌의 설치에 대하여 고찰해 보면, 제주도 현촌은 고려조의 말단행정 단위로써 숙종 10년인 서기 1005년에 탐라국이 군으로 개편되어 고려의 하나의 군으로서 탐라군이 되었다. 그 후 고려 18대 의종 7년인 서기 1153년에는 군이 다시 현으로 개편되고 현련제가 실시되었다. 고려 21대 희종 때에는 전도내에 14현을 두어 다스렸으니 그 현촌명은 귀일, 고내, 곽지, 귀덕, 명월, 신촌, 함덕, 김녕은 산북이고, 토산, 호촌, 홍로, 예래 및 차귀, 고산 등은 산남지역이다. 예촌(禮村)」이라 촌명한 것은「예촌망(禮村望)」의 「여우」와 비슷한 데서 기인한 것으로 보며 옛날의 촌명은 동물의 이름 "여우"자를 따서 촌명했음을 역시 동물의 이름을 딴것으로써 공통성을 지니고 있다.
그후 이조 태종 16년 서기 1415년 정의군 설치에 따라 서중면 예촌(禮村)으로 불리운 것은 예조부터 예절바르고 양순한 사람들의 모여지는 양촌(良村)이라 하며 예촌을 지명하였다가 서기 1915년 제주도제 실시에 의하여 신례리(新禮里)로 개칭되었다. 당시 신례리는 정의군 소재지인 성읍리로 부터 가시리, 토산리, 신흥리, 의귀리(서중면 소재지), 한남리를 경우 우면으로 이어지는 교통 상 중심지에 위치하였던 것이다. 그 후 신례리는 현 중산간도로를 분계선으로 하여 북쪽은 일구라하고 남쪽은 현재의 신례2리 포함 2주로 나누어졌다가 서기 1949년 9월 1일 도제 실시에 따라 현재의 구역대로 확정되었다
주요지명 유래
◈ 성널오름/성판악(城板岳)
한라산을 가로지르는 제1횡단도로 가에 자리잡은 오름으로 높이 1,215m 이며 한라산 진입로에 있다.
◈ 성구성밭/성구성이왓
신례 1리 설촌터의 하나. 성(成)구성이란 이가 맨 처음 정착한 터인 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 생길오름/생길악(生吉岳)/성길악(成吉岳)/생기악(生氣岳)
공천미 동북쪽에 자리 잡은 오름의 이름이다. 높이 260m
◈ 상산마루
옛날「예촌」사람들이 한라산으로 가는데 첫 오름이 높게 보였으므로 불리워진 이름이다. <상산(上山) >은 높은 오름, 즉 한라산을 일컫는다. 이곳에는 마을의 포제를 지내는 제단이 있다
◈ 빌레냇도
하천 바닥이 암반으로 깔려있는 내를 가로질러 나 있는 길인데서 연유한 이름이다.
마을에 내려오는 전설
도훈장(都訓長) 양공 국장(梁公 國璋)의 일화
지금으로부터 200여년 전인 1780년 경, 계속되는 흉년으로 인하여 식량난이 심한 때여서 식량을 탈취하려는 강도들이 성행했었다. 이 무렵 한 강도는 역기통(逆歸統) 양치룡(梁致龍)의 집에 식량을 탈취할 목적으로 그로부터 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속칭「갈남통」어느 집을 밤중에 방화하였다. 도둑은 동네 사람들이 불을 끄기 위해 출동한 틈을 이용하여 양치룡 집에 침입하였다. 식량을 약탈하는 중에 “도둑이야”라고 소리치는 아기업개를 무참히 죽이고 도둑은 도망쳐 버렸다.
집 주인은 불을 진화한 후 귀가하여 방문을 열고 들어서니 피냄새가 나면서 발에 무엇인가 걸려서 불길한 예감에서 불을 켜 보니 아기업개는 목이 잘린 채 죽어있고 방안은 피가 낭자하였고 그때 다섯살인 아기(국장-國璋)도 없어졌다. 아기를 부르며 한참 찾다보니 굴묵(방 때는 곳)속에 숨어서 화를 면하여 살아있었다. 이때 집주인은 이 사실을 정의고을 관가에 고발하니 관가에서 직접 현장 조사해 본 결과 너무나도 잔인 흉악한 범행이었으므로 범인을 잡기 위해 전도에 범인의 인상착의를 알리고 범인을 잡은 사람에게 벼슬을 주기로 하는 현상까지 걸었다.
그 후 사방에서 용의자가 잡혀왔는데 이때마다 아기를 관가로 불러서 원님 무릎에 앉힌 채 이놈이냐고 물으면 고개를 저으면서 아니라고 또렷또렷하게 대답했다. 용의자 여럿을 대질시켜도 아니라 함으로 범인 잡기를 포기한 상태에 이르렀을 무렵, 하례리에 사는 허(許)모란 사람도 힘이 장사였는데 범인을 잡을 목적으로 유심히 거리를 살피면서 돌아다니고 있을때였다. 하루는 이 허(許)씨가 지금의 호근리와 홍리사이에 있는 속칭 “원통과원”쪽의 샘물가에 흉악하게 보이는 사람을 발견하였다. 곱슬머리에 얼굴이 시벌겋고 눈도 붉은 놈이 웃옷을 벗고 이를 뚝뚝 잡고 있었다. 허(許)씨는 이놈이 범인일 것으로 단정하여 붙잡을 계획으로 숨을 죽여 접근하여 큰 돌로 그놈의 어깨를 내려치니 힘이 센 강도였지만 갑자기 당한 일이라 기진하여 쓰러지니 이놈을 포박하여 정의고을 관가에 받쳤다. 이에 또 다시 5세인 아기국장(國璋)이 불려가게 되었다.
전과같이 원님은 무릎에 앉힌 채 저 놈이냐고 물으니 쳐다보고는 “으앙”하고 울면서 기절하여 버렸다. 원님은 이놈이 범인임을 알아차리고 문초를 하여 범행 일체를 자백받고 처형하였다. 강도를 잡은 허(許)씨에게는 “성장 (成長)”이라는 벼슬을 주어 치하하였으니 그 분의 묘는 신례리에 “허가의 산좌전”이라 하여 지금도 그 이름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국장(國璋)아기에게는 붓과 벼루, 먹을 상으로 주시면서 아기가 성장하면 한양으로 보내어 공부시키라는 당부까지 하였다. 이 후 국장씨(國璋氏)는 공부는 제주에서 했으나 신례에서는 처음으로 도훈장(都訓長)을 지냈고, 한양을 자주왕래하면서 관·혼·상·례의 모든 예법을 배워와서 보급하니 예촌하면 예법이 밝은 고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지금도 200여년 전에 쓴 가승(家承)이 가보로 전해지고 있으며 이 가승(家承)에 근거해서 실묘(失墓)했던 14세, 15세 선대의 선묘(先墓)도 찾게 되었다.
또한 서기 1601년 (이조 선조 34년)에 문충기(文忠基)가 주동으로 반란하여 문씨가문이 역적으로 몰리게 되자 후손들이 화를 면하기 위해 비석을 숨겨 버림으로 실묘했던 성주공(星主公) 18세 양수진(梁壽津)의 배(配)인 문씨할머니 묘도 이 양국장씨(梁國長氏)가 퇴메동산에 소를 먹이러 갔다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서 산담 위에 앉아 부싯돌을 찾기 위해 돌담을 꺼내다가 숨겨두었던 문씨 할머니의 비석을 발견하여 실묘(失墓)했던 묘를 찾게 되었다 한다.【자료제공- 6세손 양석주(梁錫周), 정리- 8세종손 양정보(梁正寶)】
신례리 왕벚나무자생지(천연기념물 제156호)
지정일 : 1964년 1월 31일
남제주군 남원읍 신례리 산 2-1번지.
왕벚나무는 장미과에 속하는 낙엽활엽의 교목이다. 이웃나라 일본에서는 국화로 지정하여 공원, 학교 등지에 널리 심는 나무이나, 아직까지 일본에서는 자생지를 발견하지 못하였다.
따께신부
자생의 왕벚나무가 처음 발견된 것은 1908년 4월15일 서귀포시 서홍리 소재 성당에 와있던 프랑스인 따께신부가 제주도에서 채집된 표본을 당시 장미과 식물의 권위자인 독일의 베르린대학 코헤네박사에게 보냄으로써 그에 의해 제주도가 왕벚나무 자생지임이 처음으로 밝혀졌다.
그 후 미국의 하바드대학 윌슨박사가 일본에서 왕벚나무 자생지를 찾으려 했으나 실패하자 산벚나무와 올벚나무의 교배에서 생긴다는 잡종설을 발표하여 일본학자들의 많은 지지를 받았다.
1993년 4월 경도제국대학 고이즈미 겐이찌박사가 한라산 남쪽 수림속에서 왕벚나무를 찾아내고 확인 발표함으로써 오랫동안 학계에서 논쟁 대상이 되었던 것을 해소시켰다. 이 신례리 왕벚나무 자생지는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가는 5·16도로 수악교 남쪽 해발 500m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신례리 자생 왕벚나무
남제주군 수악교 남쪽 해발 600m 지점 5·16도로에서 서쪽으로 약 200m 떨어진 숲 속에 세 그루의 왕벚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곳은 1932년 4월 20일 일본 경도대학(京都大學) 교수였던 코이즈미(小泉源一)가 왕벚나무 한 그루와 제주벚나무(P.yedoensis Matsum. var. mudiflora Koehne) 한 그루를 확인하였다고 한 지점과 거의 일치되는 곳이다. 코이즈미와 1933년에 이곳을 방문하여 왕벚나무를 확인한 타케나카(竹中)의 보고서에 의하면, 이곳은 당시 목장지대로서 계곡 등에는 잡목림이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주변에 구실잣밤나무가 남아 있으나, 대부분은 수령이 오래지 않은 잡목림으로 탈바꿈되었다.
현재 이곳에 남아있는 왕벚나무는 세 그루다. 이들 중에서 가장 큰 나무는 높이가 10m이고 흉고(胸高) 둘레는 98㎝, 수관폭(樹冠幅)은 13m이며, 붉은색의 꽃이 핀다. 다른 나무는 높이가 9m이고, 흉고둘레는 96㎝이며, 근원부에서 1m 되는 곳에서 싹이 나와 갈라지며, 수관폭은 10m이고, 꽃잎은 백색계열이다. 가장 작은 나무는 높이가 6m이고, 흉고둘레는 30㎝, 수관폭은 3m이며, 꽃잎은 백색계열이다.
현재까지 알려진 왕벚나무의 자생지는 대부분 한라산 북쪽의 관음사를 중심으로 한 산북지방에 집중되고 있으나, 이곳은 산남지방에서는 유일하게 왕벚나무 소집단이 발견된 곳이다. 이곳의 식생은 난대림의 구성요인들이 많으며, 특히 굴거리나무·새덕이·사스레피나무 등 상록활엽수와 낙엽활엽수가 뒤섞여 자라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왕벚나무
키는 15m에 이른다. 잎은 어긋나는데 끝은 뾰족하며, 가장자리에는 날카로운 톱니들이 있다. 잎자루 양쪽에 2개의 선점이 있으며 턱잎[托葉]이 2장 달린다. 꽃은 잎이 나오기 전인 4월에 하얀색 또는 연한 분홍색으로 핀다. 꽃잎은 5장이며, 암술대에 털이 있다. 열매는 6~7월경 검은색의 둥근 장과로 익는다.
제주도와 전라남도 대둔산에서 자생하며, 제주도 남제주군 남원읍 신례리의 왕벚나무 자생지는 천연기념물 제156호로, 제주시 봉개동의 왕벚나무 자생지는 제159호로, 전라남도 해남군 산삼면 구림리의 왕벚나무 자생지는 천연기념물제173호로 지정되어 보호받고 있다.
일본에서는 나라꽃으로 지정하고 있으며, 다른 벚나무 종류들과 함께 정원·공원에 심고 있다. 양지 바르고 배수가 좋은 곳에서 잘 자라지만 대기 오염에 약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수명은 약 60년 정도이다.
생태
키는 10~15미터쯤 되며 줄기는 회갈색이거나, 짙은 회색이며 가로로 긴 껍질눈이 있고, 나이가 많이 든 나무는 세로로 껍질이 갈라진다. 잎은 어긋나고 타원상 난형 또는 도란형이며, 가장 자리에 예리한 톱니가 있고 잎자루 끝에 2개의 꿀샘이 있다. 꽃은 잎보다 먼저 피고 3-6개가 산형으로 달린다. 꽃봉오리는 분홍색이 돌고 활짝 피면 백색이다. 열매는 둥글고 6-7월에 적홍색에서 자흑색으로 익는다. 씨를 맺는 것이 매우 부실하여 자연적으로는 많이 퍼지지 못한다.
분류학적 계통
한라산에서 왕벚나무는 해발 500미터 정도에서 자라는데, 좀 더 높은 곳에서 자라는 산벚나무와 더 낮은 곳에서 자라는 올벚나무와의 자연 잡종으로 생긴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잎자루와 꽃이 연결되는 부분의 모양과 털의 특성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Harn et al.(1977)도 이소짐(Isozyme) 연구를 통해 왕벚나무가 올벚나무와 산벚나무 사이에서 만들어진 중간잡종임을 제시했다. 한편 계통유전학 연구를 해서 한라산 자생 왕벚나무와 흔히 심어 기르는 재배종 왕벚나무가 다른 분류군일 가능성이 있다는 설이 제시되었다.
자생지
1908년 서귀포에 살던 프랑스인 신부 타케가 한라산 자락에 있는 관음사 뒤 해발 600미터 지점에서 채집한 것을 당시 장미과의 권위자인 독일 베를린 대학 교수 괴네가 확인하여 자생지가 제주도임이 밝혀졌다. 왕벚나무의 자생지는 대한민국에서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 봉개동의 왕벚나무 자생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 신예리 왕벚나무 자생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 대둔산 왕벚나무 자생지: 전라남도 해남군
양금석 가옥[梁錦錫家屋]
(제주특별자치도 민속자료 제3-45호 )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신예1리 1313
60여년 전에 지은 양씨 종가댁이다. 600여 평의 대지 한가운데 안채(안거리)가 있으며 바깥채(밧거리)는 안채와 마주보게 배치되어 있다.
안채는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에 큰방이 있고 오른쪽에는 부엌이 있다. 툇마루는 큰방과 마루 앞에만 있어 부엌 공간이 넓으며, 바깥채는 가운데 마루를 중심으로 왼쪽 앞에 방과 뒤쪽에 곡물을 보관하는 고팡이 있다. 마루방의 앞쪽과 뒤쪽에는 툇마루가 배치되어 있다.
(안거리와 밧거리 전경 )
(안거리)
양씨 종가댁은 안채·바깥채를 통틀어 방이 넷이고 툇마루가 셋이며, 마루방 셋이 배치되어 있는 제주도 전통 초가 양식 중에서도 다양한 공간구성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갈 때영 올 때영 말하지 않는 곳
양영자<제주의 소리> 2011. 1. 11
[제주여성 문화유적100] (45) 신례리 예촌 일레당
청명 지난 마을은 쥐죽은 듯 정적 속으로 빠져든다. 고사리를 꺾으러 산으로 들로 나가 버린 빈집을 지키고 있던 개들은 낯선 객의 인기척이 반가워서인지 짖는 것을 포기하고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다.
예촌일레당이 있는 마을 일대를 ‘당카름’이라 하고, 이 당을 ‘남밋당(나무밑의 당)’이라고 하며, 이 당에 좌정한 당신을 ‘남밋할망’이라고 한다. 200년 전에는 한 참 거리(4㎞)에 위치했는데 마을과 멀어서 다니기가 불편하여 이곳으로 옮겨왔다.
일레당의 도량 안에는 200여 년이 넘는 큰 대옥나무가 범상치 않게 둘러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대옥나무 아래 자연석은 신체(神體)구실을 한다. 신체 아래에 4군데의 궤가 있고 그 궤 위의 엉덕에 지전, 백지 등을 걸어 둔다. 그래서 이 당의 마당에는 바람에 불린 지전, 백지가 가득 널려 있다.
마을사람들 대부분은 매달 7일과 8일에 이 당에 간다. 당신의 제일은 유월 7일과 8일, 동짓달 7일과 8일이다. 당의 호칭은 분명 ‘일레당’이라고 하면서 8일에도 다니는 것이 궁금했는데 진성기『무가본풀이사전』에 ‘서당한집 일뤳도오(쌍아래아)돕아기단청마을청’이라고 되어 있어 의문이 풀린다. 당신의 내력과 신화를 잊어버렸으나 당골들은 제일과 의례를 통하여 신화의 맥을 잇고 있는 것이다.
일레할망은 마을사람들의 산육과 치병을 담당한다.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은 모두 이 당할망의 소관으로 마을사람들 대부분이 다닌다. 당에 갈 때는 곤밥 1기, 생선 한 마리, 지전, 천, 감주, 과일 등을 가지고 간다. 궤의 엉덕 쪽으로 각각 밥, 고기 등을 3번씩 케우리고 감주 한 잔을 비우고 나서 갖고 간 음식을 여기저기 뿌린다. 허물난 사람은 삶은 계란을 가져가기도 한다. 시험 때는 물론 아이의 운동회 때 달리기를 잘하게 해달라고 밥 한 사발, 제숙 한 마리를 들고 찾아간다. 외방 나가 사는 사람들도 당할망을 찾아와 문안 인사를 여쭙는다.
명절이나 제사가 끝난 후에는 마당 가득 음식이 ‘미삭하(아래아)게’ 쌓인다. 마을사람들 누구나 당할망 몫의 제물을 미리 차렸다가 제가 끝난 후 꼭 갖다 드리기 때문이다. 손님이 와서 유다른 음식을 마련해도 꼭 당할망 몫을 차려서 가져간다. 그렇게 쌓인 음식들은 개나 고양이들이 먹는다.
팔형제를 낳았으나 돌이 지날 무렵이 되면 부모를 버린 아기가 삼형제가 되고, 살아남은 오형제를 오로지 당할망에 의지하여 키웠다는 문갑득 할머니(76세). 세 아이가 아파서 먼저 보내야 했을 때 당할망 앞에서 눈물로 읍소하고, 네 아들 군인 갔을 때 죽장 다녔으며, 아이들 커가면서 사소한 근심이 있을 때마다 할망을 찾아 빌고 또 빌었다. 식게멩질을 하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당에 다니기 시작하여 올해로 46년을 다녔다. 지금은 큰며느리에게 물려주어 큰며느리 역시 당골이 되었다.
당 올레에 도착한 할머니가 “쉿!” 하며 “이 당은 갈 때영 올 때영 말하지 않는 곳”이라고 당부한다. 헉, 이미 두어 시간 전에 당의 형태며 지전, 제물에 대해 맘껏 떠들고 돌아갔었는데 당할망의 노여움을 샀다면 어떡하지?
말없이 손으로 꾸욱꾸욱 가리키던 할머니는 당을 완전히 벗어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심해서 가라.”고 한마디 하더니 자기 집 올레로 휘적휘적 들어가 버린다.
신례1ㆍ2리, "우린 4ㆍ3으로 인한 갈등, 대립 없다"
[화해를 넘어 상생으로(4)] 중산간 마을 신례1리ㆍ해안마을 신례2리의 '상생'
이승록 기자<제주의 소리> 2005. 4. 2
▲ 정수현씨가 친부모처럼 여기는 오영란 할머니에게 음식을 드리고 있다.
4ㆍ3으로 인한 피해가 단순히 수만명의 목숨을 가져간 인명피해만 있을까. 아니다. 4.3으로 인해 마을공동체의 파괴는 물론 불신과 반목, 대립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또한 연좌제라는 '보이지 않는 사슬'로 제주도 출신들은 알게 모르게 많은 피해를 보았다. 이런 많은 피해 가운데도 특히 제주라는 '공동체'의 파괴는 여전히 도민 갈등과 분열의 원인이 되고 있다. 지금까지도 해안가 마을 사람들은 중산간 부락들을 '폭도'로, 중산간 사람들은 해안 마을 사람들을 '경찰 앞잡이'로 서로 업신여기고 있는 곳이 부지기수다. 심지어 몇몇 마을에서는 서로 결혼도 하지 않을 정도로 '갈등의 골'은 메워지지 않고 있다.
▲ 4.3을 겪은 후 더욱 가까워진 신례1.2리 주민들
하지만 4.3을 계기로 해안가 마을과 중산간 마을 사람들이 더욱 가까워진 마을이 있다. 바로 남제주군 남원읍 신례1.2리가 그곳이다. 신례리는 남원읍에서 설촌역사가 가장 오래된 곳일 뿐만 아니라 옛부터 '예촌(禮村)'이라고 불리며 '똑똑한 사람'이 많은 곳으로 유명하다.
신례리는 '한참(2㎞)'을 사이에 두고 신례1리(중산간)와 신례2리(해안가-공천포)로 나뉜다. 4.3 당시 신례1리에는 180가구 800여명이 살고 있었고, 신례2리에는 60여가구 300여명이 살고 있었다. 규모로 따지면 1리가 2리보다 3배 정도 큰 마을이다.
신례리 역시 4.3의 광풍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다른 중산간 마을 보다 늦은 12월11일에 신례1리(당시는 신례1구)는 소개령이 떨어졌다. 소개령에 따라 마을 주민들이 12일 새벽 이삿짐을 꾸리던 중 서귀중학교 학생들로 구성된 '우익단체'인 학생연맹의 급습을 받아 1명이 학살되고 2명은 행방불명되는 일반주민 첫 희생자가 나왔다.
이어 토벌대에 의해 마을 주민들은 구타와 총살로 4명이 죽음을 당했고, 토벌대가 준비해 온 명단에 의해 10여명이 위미지서로 끌려가 13일 총살당했다.
◀ 정수현씨
11살이던 정수현씨(68)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고 증언하고 있다.
"소개령이 떨어진 11일 마을 사람들은 공천포로 이사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서귀중 학생들로 구성된 학생연맹이 들이닥쳐 마을 사람들을 구타하고 몇몇 사람들을 지서로 끌고 갔습니다. 당시 숙부(정순종)가 입산했기 때문에 숙모가 끌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또 12일에는 작은 숙부(정화종)가 토벌대에게 끌려갔지만 총살집행 당시 구사일생으로 팔에 총을 맞고 기절했다가 살아났습니다. 그후 작은 숙부는 산으로 도망쳤다가 부상 때문에 소개했던 신례2구로 돌아오지만 경찰 신고로 49년 1월2일 저녁 숙부와 할아버지(정기흡), 친척(정봉주)까지 연행됐습니다. 하지만 무장대에게 습격을 받아 흥분할대로 흥분한 경찰은 하례리 주민들에게 '폭도들이다. 죽여라'라고 명령해 결국 3명 모두 돌아가셨습니다"
신례리 주민들은 대부분 12월12~13일 양일간에 걸쳐 피해를 겪었다. 이 피해에 대해 제민일보 '4.3은 말한다'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소개하던 날 새벽 학련이 일부 주민을 연행한 것이나 소개로 내려오던 주민들을 분류해 끌고 갔던 점으로 봐서 토벌대는 어떤 '명단'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마을 상황에 비춰 볼 때, 그 명단 속의 인물들은 집안에 젊은이가 피신한 소위 '도피자 가족'이거나 혹은 '무장대 지원자'로 지목된 사람들로 추정된다. 그 명단이 어떤 근거에 의해 작성된 것이든, 아니면 무고에 의한 것이든 비무장 주민들을 즉결 총살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희생자들은 토벌대의 명령에 순응해 내려오던 사람들이었다"
신례리 주민들의 피해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49년 2월에도 태흥리에 주둔했던 2연대는 '도피자 가족'이란 명분으로 6명을 끌고가 학살을 자행했다.
토벌대와 우익의 잔인한 학살로 수많은 신례1리 주민들이 죽음을 당하는 변고를 치르는 등 불행을 겪었지만 살아남은 사람들은 소개지인 신례2리 주민들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더 이상의 큰 희생은 치르지 않았다.
◀양금석씨
신례2리 주민들은 3배 규모의 1리 주민들이 내려오자 가구당 2~3가구를 받아들였다. 전 도의원을 지냈던 양금석씨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저희 집은 소개기간 동안 공천포(신례2리)에 사는 김대국씨의 받거리에 살았습니다. 물론 집을 얻지 못한 주민들은 모래판 위나 함바를 지어서 살았죠. 저희는 거의 김씨의 가족과 같이 생활했습니다. 방이며 부엌을 같이 사용하고, 굴묵에서 밥도 먹었습니다. 그 당시 모두 어려웠던 시기에 참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저희 마을 모든 사람들이 아랫동네 사람들에게 신세를 진 것입니다. 모두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입산자 가족'으로 많은 일가친척이 피해를 본 정수현씨도 비슷하게 이야기 한다.
"우리는 오순란씨(87) 댁에서 살았습니다. 당시 폭도가족으로 낙인찍혀 있던 우리 가족은 그 고마움을 잊을 수 없습니다. 57년이 지난 지금도 그 가족들과는 친부모, 친형제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인 문제 뿐만 아니라 마을차원에서도 단합이 잘 이뤄져 마을간 다툼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4.3으로 인한 고통과 상처를 함께한 신례1.2리 주민들은 지금까지 서로 더욱 각별하다. 각 마을마다 있는 청년회를 두 마을에서는 연합청년회를 구성해 운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2년마다 한번씩 마을별로 돌아가며 체육대회를 개최해 우의를 다지고 있다.
▲ 신례1리와 2리 주민들이 단합행사를 갖고 있다.
지난 3월26일 '제주의 소리'가 신례리를 찾았을 때에 마침 신례1리 주민들이 2리 주민들을 초청, 고마움을 표시하는 자리가 있었다. 40여명이 참석한 이날 행사에는 오랫만에 만난 친구처럼 허물없이 술잔을 돌리며 4.3 당시 얘기부터 살아가는 얘기까지 나눴다.
신례1리 양윤경 리장은 "저는 4.3을 직접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여러 어르신으로부터 얘기를 들어 잘 알고 있다"며 "양 마을의 좋은 전통을 우리 후대에 이르기까지 전승해 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신례2리 양종옥 노인회장은 "4.3으로 인한 아픔과 고통을 함께해 온 우리가 벌써 57년이나 지났다"며 "우리 마을만 이럴 게 아니라 이제는 제주 전체가 화합돼야 할 때"라고 말했다.
4.3이 일어난 지 반세기 훌쩍 넘은 57주년이다. '화해' '상생'을 말하지만 그 한과 고통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화해' '상생'이란 말이 단순한 슬로건이 되지 않기 위해 '신례리'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다.
역시 자기 고향을 소개해야 나타 나시네요? 맨날 구경만 허멍 모른척 스쳐 지나가지만 말고 가끔씩은 댓글로 서로에게 안부도 전하고재미있는 글도 소개허면서 즐겁게 서로서로 잘 지냅시다! 까마귀 노는데는 백노가....... 그래도 옛날 탱크부대도 방문 했던 추억이 있었기에 얼마나 기분이 좋고 새롭습니까??
대종이네 동네는 30 수년 전 양태민이 잔치 먹으래 갈 때 가봤는데.... 아마 겨울로 기억되는데 마을이 유서깊고 포근하다는 인상이 남아 있네. 허나 '웃두리'마을인지라 4.3의 참화가 무척 심했던 모양이네. 아랫 동네 공천포(신례2리)출신 오영진과는 배구'먹을락' 허멍 꽤 친했었는데...ㅜㅜ
첫댓글 고맙습니다 놀라운 자료들을 발굴해주셔서 더우기 소개된 초가집은 제가 유년기때 뛰놀았던 큰고모님댁이고 사진이 실린
양금석씨는 고종사촌형님이고 정수현씨는 일가 손위조카뻘 되시는 분이라 반가웠습니다 큰고모님이 올해 100세로 생존해 계시는데 오늘 전화라도 드려야겠습니다
다 인척분들이구나...
더구나 민속자료로 지정된 댁이 당고모댁이고
마당에서 유년기에 놀던 집이라 하니 부럽기도 하군.
4.3의 상흔이 아직 말끔히 가시지 못하는 제주에서
어른들이 나서서 이렇게 화합하는 걸 보면
禮村이란 마을명이 명불허전...
역시 자기 고향을 소개해야 나타 나시네요? 맨날 구경만 허멍 모른척 스쳐 지나가지만 말고 가끔씩은 댓글로 서로에게 안부도 전하고재미있는 글도 소개허면서 즐겁게 서로서로 잘 지냅시다! 까마귀 노는데는 백노가.......
그래도 옛날 탱크부대도 방문 했던 추억이 있었기에 얼마나 기분이 좋고 새롭습니까??
탱크부대 방문은 상훈이가 주선해주어서 잘 갔다왔지요? ㅎ
땅굴도 구경하고, 전망대도 가고... 99년도 같은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구만!
일곱식구들이 모여서 하루를 즐겼던 일이 어제만 같습니다!
다른 회원들도 어느정도 역할을 해줘야 하는건 아닌지요?ㅋ
빛깔만 내기 좋아하고 폼 잡기 좋아 하기는 모두가 같은 마음일껄!!ㅎㅎ
예촌의 역사를 잘 알게 되었네요, 김양훈님.
정대종, 양태민 등 양질(?)의 사람들이 태어난 곳!
외상값 제일 잘주는 동네!기분좋은 동네! 인심 좋은 동네!!!
마을이름이 중요하고 가문내역또한 중요함을 새삼느끼게하네,예촌마을의정기가 정사장 기품에서 느껴집니다.
대종이네 동네는 30 수년 전 양태민이 잔치 먹으래 갈 때 가봤는데.... 아마 겨울로 기억되는데
마을이 유서깊고 포근하다는 인상이 남아 있네. 허나 '웃두리'마을인지라 4.3의 참화가 무척
심했던 모양이네. 아랫 동네 공천포(신례2리)출신 오영진과는 배구'먹을락' 허멍 꽤 친했었는데...ㅜㅜ
정사장 가끔보자구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