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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도 미국이 옳지 않다는 걸 알아요. 그렇지만 아직은 미국의 말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국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대를 보내는 거예요. 베트남에 온 군대를 '박정희군대'라고 했듯이 이라크에 가는 군대도 한국군이라고 하지 않고 '노무현군대'라고 불러주면 안돼요?" 건석은 이쯤에서 농담으로 얼버무리며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팜 반 꾹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그의 얼굴에 희미하게 남아 있던 웃음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라크 인민은 자신들을 향해 총구를 들이대는 한국을 이해해줘야 하나,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너무 편한 논리라고 생각지 않나?" "베트남에 대해서 많은 한국사람들이 미안하게 생각해요." "나중에 이라크에 대해서도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네." - 본문 170 쪽에서 |
저자소개
방현석 - 1961년 울산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공부했다. 1988년 <실천문학>에 단편 <내딪는 첫발은>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새벽 출정>, <또 하나의 선택> 등 1980년대 대표적인 문제작을 내놓았다. 1991년 제9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으며, 현재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의 대표이다. 지은 책으로는 소설 <내일을 여는 집>, <십년간>, <당신의 왼편>과 산문집 <아름다운 저항>이 있다.
작가의 말
어떤 경우에도 문학은 삶, 그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다. 동시에, 문학은 지금 이 순간을 넘어서는 시간의 신기루 위에서 홀로 나부끼는 깃발이다. - 방현석
미디어 리뷰
경향신문 : 베트남전, 비전향 장기수... 낡은 앨범 속의 이야기처럼 들리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한구석을 받치고 있는 현실이다. 1960년대 베트남전 당시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요청에 따라 이라크전에 용병을 보내야 하는 상황이고, 분단과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여전히 한반도를 지배한다. 리얼리즘 문학의 전성기이던 80년대 황석영 조정래 김하기 같은 작가들이 직접화법으로 형상화했던 이 이야기들이 한 세대를 내려와 새로운 형식으로 우리 문학에 재등장했다.
88년 계간 '실천문학'에 단편 '내딛는 첫발은'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방현석(42)은 노동소설의 전범을 보여주었다. 중앙대 총학생회장 출신으로 노동현장에 몸담았던 그에게 노동현실은 올바른 삶을 위한 교과서이자 주요한 문학적 소재였다. 그런 그가 명백한 대립구도가 와해된 90년대를 보내면서 주력했던 일은 베트남을 알고 이해하는 것이었다. 한국 군대가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잘못, 나아가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기업이 후발자본주의 국가를 대하는 제국주의적 방식은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거울이 되어주었다.
그가 12년만에 낸 소설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창비)은 옛 베트콩 전사의 삶을 통해 80년대 운동권 청년들의 정신적 공황을 조명한 작품 '존재의 형식'과 미발표 신작 '랍스터를 먹는 시간' 등 4개 중편을 모은 책이다. 스스로 "작가인생에 전환점이 된 작품"으로 평가한 '존재의 형식'은 계간 '창작과비평' 2002년 겨울호에 발표돼 올해 황순원문학상과 오영수문학상을 안겨주었다.
이 작품의 배후에 깔린 것은 90년대 초반 후일담소설이 보여주었던 운동권의 방향감 상실이다. 주인공 재우와 창은, 문태는 대학시절 함께 운동했던 동지이지만 이후 미묘한 관계가 돼버렸다. 가장 헌신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던 창은은 한팔을 잃은 채 아직도 현장을 지키며 어렵게 살고 있다. 반면 문태는 속물스런 변호사로 변신했으며 여러가지 상황에 절망한 재우는 베트남에 머물고 있다.
이런 재우와 문태가 베트남에서 재회한다. 재우는 레지투이라는 베트남인과 시나리오 번역작업을 하고 있으며 문태는 학술회의 참석차 왔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레지투이는 시인이자 소설가, 영화감독으로 작가 방현석에게 큰 영향을 미친 실존인물이다. 그는 17살 때 베트남인민해방전선의 일원으로 참여해 300명의 동료 중 295명을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 반레라는 필명 역시 시인이 되고자 했으나 전선에서 숨진 동료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국 땅에서 만났지만 재우는 문태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에게 문태는 자본주의적이고 천박한 한국인의 표상이다. 그러나 관광가이드로부터 문태가 베트콩의 항쟁현장인 구치터널을 찾았다는 말을 전해들은 뒤 자신들의 우정에 대해 다시 생각한다. 그런 그에게 레지투이는 말한다. "친구가 친구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누구와 더불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나." 베트남인들의 이런 동지애야 말로 세계최강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원동력이었다.
또 다른 중편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 베트남에 위치한 한국 조선소를 배경으로 한국과 베트남의 악연, 양국의 참된 화해가능성을 탐구한다. 조선소 중간간부인 주인공 건석은 유창한 베트남어를 무기로 양쪽을 중계하는 위치에 있다. 그에게는 베트남전 참전군인이었던 아버지가 베트남 여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이복형과 관련된 상처가 있다.
사건은 조선소의 현지노동자인 보 반 러이가 비뚤어진 우월감을 가진 한국인 간부 김부장에게 폭행을 당하고 집권 공산당의 간부 팜 반 꾹이 여기에 개입하면서 시작된다. 용병과 반군에서 노사관계로 다시 만난 이들은 서로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낸다.
그 중에서도 보 반 러이는 한국에 특별한 원한을 품고 있다. 그의 부족은 박정희 군대에게 무차별적으로 몰살당했다. 회사를 떠난 그의 고향을 방문하면서 건석은 한국의 실체를 알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그같은 종류의 폭력이 대물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트남의 지식인 팜 반 꾹은 말한다. "전쟁으로 파괴된 세대가 스스로를 바꾸는 일은 어쩌면 불가능한 일인지 몰라. 절망은 당신과 같은 다음 세대가 지난 세대를 답습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거야." 결국 건석이 노동자로 일하며 자신의 학비를 대주던 이복형의 죽음을 새롭게 되새기고 팜 반 꾹의 조카인 리엔과의 사랑이 결실을 맺으면서 화해의 단초가 마련된다.
작가는 "베트남을 기웃거린지 10년만에 그곳을 무대로 한 이야기를 쓰게 됐다. 내가 몰랐던 건 베트남이 아니라 나와 나를 둘러싼 우리들이었다. 우리들이 존재하는 형식을 이제는 알 것 같다”고 말한다. 그의 소설에서 베트남인은 아량과 지혜를 가진 진정한 승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전까지 우리 문학에서 단순한 배경이거나 죄의식의 대상이었던 그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 한윤정 기자 ( 2003-11-22 )
동아일보 : 소설가 방현석씨(42)의 두 번째 창작집.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중편 '존재의 형식'으로 올해 오영수문학상과 황순원문학상을 한꺼번에 수상했다.
'존재의 형식'과 표제작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서는 오늘의 베트남과 한국 근현대사가 공존한다. 94년 만들어진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의 4대 회장인 방씨는 "기웃거린 지 10년이 되어서야 겨우 베트남을 무대로 한 이야기를 쓸 엄두를 냈다"고 '작가의 말'에 쓰고 있다.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서 랍스터는 인간이 가진 고독한 자기결단,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끊어내 버리려는 인간 존재를 상징한다.
베트남 주재 한국 조선소에서 일하는 건석은 한국인 관리자들과 마찰을 빚은 보 반 러이와 베트남 당 소속의 팜 반 꾹을 만나게 된다. 러이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에게 몰살당한 부족의 생존자 중 한 명. 러이는 복수심에 불타 해방전쟁에 참여하나 전쟁터에서 연인을 잃는다. 러이의 동네친구 꾹은 전쟁으로 파괴된 베트남을 재건하려는 사명을 안고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다.
건석에게도 숨겨진 상처가 있는데, 그것은 베트남 혼혈의 이복형. 어린 시절 건석은 동네에서 '베트콩'으로 불렸던 형을 내내 부끄러워했다. 형은 공장에서 일하며 건석의 학비를 댔고, 파업 농성을 하다가 경찰의 강경진압 중에 숨졌다.
러이는 회사의 은근한 압력에 결국 사표를 낸 뒤 고향으로 돌아가고, 베트남 공산당은 부당한 처사라며 러이를 복직시키라고 주장한다. 건석과 꾹은 러이를 찾아가지만 그는 고향에 남아 있겠다고 한다.
"잘못이 있다면 용서하세요. 옛날의 우리든, 지금의 우리든 말이에요."(건석)
"내가 용서하지 못한 것이 당신들인 줄 아나…. 남을 용서하는 일은 쉽네. 끝내 용서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자신이네."(러이)
건석의 연인 리엔은 러이의 고향에서 돌아온 건석을 위해 랍스터 요리를 준비한다. 끓인 랍스터 국물을 먹으며 건석은 중얼거린다. "우린 왜 랍스터처럼 자신의 일부를 스스로 잘라 내버릴 수 없을까?"
88년 단편 '내딛는 첫발은'으로 「실천문학」을 통해 등단했을 때 방씨는 공장에 위장 취업한 대학생 출신 노동운동가였다. 이후 작가는 첫 창작집 <내일을 여는 집>(1991), 장편 <십년간>(1995) <당신의 왼편>(2000) 등의 작품을 발표하며 70, 80년대 노동운동 현장을 비장하게 그려왔다.
이번 소설집은 이런 연장선에 놓이면서도 또 다른 화해의 길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이전과 달라 보인다. 등장인물들이 전작들처럼 맹렬한 투사로 변모하거나 '공동의 적'을 앞에 두고 연대하기보다는, 절망이 거듭되는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지난 세대의 악습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애쓴다. 이는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에 대한 깨달음이다. - 조이영 기자 ( 2003-11-22 )
문화일보 : 소설가 방현석(42)씨의 두번째 소설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창비)이 출간됐다. 표제작 이외에 '존재의 형식' '겨우살이' '겨울 미포만' 등 3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창작집 <내일을 여는 집> 이후 12년만에 펴낸 소설집이다.
올해 황순원문학상과 오영수문학상을 받으며 화제를 모은 중편 '존재의 형식'과 표제작 '랍스터를 먹는 시간'의 공간적 배경은 베트남이다. '한국과 베트남 사이에 떠 있는 섬'으로 베트남에서 살아가는 주인공은, 한국에서의 과거가 겹쳐지면서 지금의 베트남을 또 다른 한국으로 파악한다.
과거와 현재, 한국과 베트남의 이중주가 반복되면서 소설은 '지금, 여기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있다.
수록작 '존재의 형식'의 주인공 재우는 베트남에서 시나리오 번역작업에 매달린다. 과거 베트남민족해방전선의 전사였던 레지투이가 그의 번역작업을 도와준다. 그런 재우에게 한때 운동권 동지였으나 지금은 변호사로 속물적인 삶을 살아가는 문태가 베트남에 골프여행을 하러 왔다가 방문한다.
두 사람의 관계가 삐걱대면서 또 한사람, 끝까지 '원칙적인 삶'을 지켰던 창은의 사연이 사이사이 끼어든다. 작품 말미에서 레지투이가 전쟁 당시 죽은 동지의 이름, '반레'를 필명으로 쓰는 시인이자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문태가 골프여행 일행에서 빠져나와 구치터널을 방문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소설은 화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한다.
반레(레지투이)는 재우에게 "친구가 친구를 이해해주지 않으면 누구와 더불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나"라며 문태에게 전화할 것을 권한다. 그리고 반레의 어머니가 남긴 말 '떰 로옴(마음가짐)'이라는 말이 재우와 문태 사이의 ‘뜨악함’을 완전히 걷어치우는 매개로 작용한다.
'마음가짐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타인을 어떤 마음으로 대하는가'가 누구한테서도 경멸받지 않을 만한 삶을 사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작가는 후기를 통해 "나는 기웃거린 지 10년이 되어서야 겨우 베트남을 무대로 한 이야기를 쓸 엄두를 냈다"며 "내가 알고 싶었던 것은 처음부터 베트남이 아니고 여기, 지금의 우리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이어 작가는 "우리들이 존재하는 형식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며 "10년을 우회하여 다시 여기로 돌아올 수 있었던 자신이 다행스럽다"고 털어놓고 있다. - 김영번 기자 ( 2003-11-18 )
조선일보 : 전쟁은 대개 종전(終戰)과 함께 시작된다. 진짜 사랑이 이별과 함께 시작되듯이…. 전쟁은 개장은 있어도 끝장은 없다. 물난리가 물러갈 때 참상은 드러나고, 포화가 멎은 곳에서 전쟁은 맨 얼굴을 내민다.
언제부턴가. 전쟁은 용서할 수는 있어도 잊어서는 안 되는 기억을 남기는 것으로 우리는 학습받았다. 이 책의 표제작인 중편소설 <랍스터를 먹는 시간>은 베트남 전쟁의 참전국 주민으로서 작가가 결코 편안히 내려놓을 수 없는 용서와 불망(不忘)의 화두에 대해 쓴 것이다. 타인을 용서할 수는 있어도 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베트남전의 게릴라 용사였던 러이도 그렇고, 70년대에 '따이한'이며 '박정희군대'였다가 지금은 현지 조선(造船)회사의 간부가 된 사람도 그렇고, 그의 직장 후배인 건석에게도 마찬가지다. 베트남인들에게 우리는 누구였는가를 묻는 소설이다. 베트남에서 그랬다면 이제 다시 이라크에서 또 그러한 기억을 남길 것인가라고 방현석은 묻는다.
팜 반 꾹의 부대와 원수가 된 참전 한국군 부대의 부대원이 건석의 아버지였고, 건석의 배다른 형은 사실은 그 아버지와 베트남 여인 사이의 소생이라는 사실이 소설적 형상화로서 극적인 결말을 예비한다. 그 형은 한국에서 D중공업 노조투쟁을 벌이다 의문의 죽음을 당한다.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는 소설은 아니다. 베트남 국수에 섞어먹는 고추의 매운맛에서 주인공 건석이 슬픔과 외로움을 견디게 하는 힘 같은 것을 얻듯이 궁극적으로는 그러한 왜곡과 뒤틀림에서 지금도 고통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진정한 위로가 될 것인지를 자문하고 있는 소설이다.
심지어 그곳으로 발령난 한국 회사의 간부조차 이런 자조(自嘲)에 묻혀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이곳으로 발령을 낸 사람들의 절반쯤에게 회사가 기대한 것은 사표였어. …전쟁 때는 나라가 우릴 여기로 내쫓았지. 그리고 지금은 회사가 우릴 여기로 내쫓았어."
아니다. 이 소설은 전쟁소설이 아니고 연애소설이다. 건석은 사랑하는 베트남 애인인 리엔과 '동등한 품위!'를 갖추고 당당하게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기 위해 이러한 고통의 길을 찾아나선 것이다.
게재된 네 작품 중 첫머리에 놓인 단편 '존재의 형식'도 비슷한 정조다. 대학시절 서로 각기 다른 층위와 입장을 갖고 노동운동을 했던 세 친구가 있다. 재우, 문태, 창우다. 창우는 아직도 노동현장에 남아 있고, 문태는 변호사가 됐으며, 재우는 베트남으로 유학을 갔다가 그곳에 눌러앉아 살고 있다.
각자의 눈높이로 바라본 그 시절, 그러니까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로 추정되는 한국에서 그들이 해냈던 역할과 의미를 되짚어 본다. 그러한 그들의 시각에 도움을 주는 것은 게릴라 출신인 반레 시인의 말이다.
"이렇게 살기 위해서 싸운 건 아니잖아요?"라고 묻는 문태에게 반레는 대답한다. "우리는 우리 세대가 해결해야 할 일을 끝냈을 뿐이지요. 다음 세대에게는 또 다음 세대가 해결해야 할 일이 기다리고 있지요. 우리가 다 해버리면 다음 세대는 뭘 하고 살겠어요?"
방현석은 '작가의 말'에서 "물소의 맨등에 올라탄 채 쏟아지는 폭우를 고스란히 맞으며 집으로 돌아가던 소년들의 뒷모습에는 범접할 수 없는 삶의 그 어떤 근원적인 형식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여기서 삶의 형식이란 결국 삶의 품위를 말한다. 그것은 국가의 품위, 주민의 품위, 그리고 사랑의 품위다.
박영한의 <머나먼 쏭바강>, 황석영의 <무기의 그늘>로부터 이 소설은 어디쯤 놓여 있을까 가늠하다가 요즘 대중의 젊은 취향을 위한 소설 제목에 작은 축배를 올린다. - 김광일 기자 ( 2003-11-21 )
중앙일보 : 베트남민족해방전선 전사였고 지금은 시인.소설가.영화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는 실존인물 반레와의 만남을 통해 갈등을 해소하게 되는 과거 운동권 동지들의 이야기를 다룬 중편소설 <존재의 형식>으로 올해 황순원문학상을 받았던 소설가 방현석(42)씨가 소설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을 펴냈다.
<랍스터를 먹는 시간>에는 '존재의 형식'을 비롯, 표제작인 중편 '랍스터를 먹는 시간'과 '겨우살이''겨울 미포만' 등 4편의 중.단편이 담겨 있다.
역시 표제작인 '랍스터…'가 눈길을 끈다. '겨우살이'와 '겨울 미포만'는 각각 1996년과 97년 발표했던 것들이다. '랍스터…'는 이번 소설집을 통해 발표된 싱싱한 것이기도 하고, '존재의 형식'으로 '재미'를 본 작가가 다시 선보인 베트남에 관한 소설이기도 하다.
표제와 달리 소설은 베트남에 진출한 한국 조선소에서 일하는 주인공 최건석이 '프응미'라는 쌀국수 집에서 베트남 사람들이 놀래 입을 다물지 못할 정도로 많은 양의 저민 고추를 푸짐하게 얹은 쌀국수를 비오듯 땀을 쏟으며 먹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소설은 조선소의 한국인 관리자와 베트남 노동자 사이에서 심심치 않게 발생하는 폭행사건의 발생과 전개, 그리고 해결 과정을 따라간다. 폭행사건의 양쪽 당사자인 한국인 관리자 김부장과 베트남 노동자 보 반 러이가 모두 베트남전에 참전했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폭행사건을 특별한 것이 되게 한다. 더구나 보 반 러이는 영웅 칭호를 받은 전사였다. 더 많이 맞은 쪽은 보 반 러이 한사람을 당해내지 못한 복수의 한국인 관리자들이다.
한국인 중 유일하게 베트남어에 능통한 건석은 폭행사건의 부당한 마무리에 반발, 사표를 던진 보 반 러이를 만나기 위해 그의 고향을 찾아갔다가 보 반 러이의 고향 마을이 과거 따이한들에 의해 몰살당한 아픔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지금도 학살일이면 공동 제사를 지낸다는 사실, 서른개가 넘는 파편이 박힌 보 반 러이가 베트남전에 지원한 것은 순전히 '박정희 군대'에 복수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된다.
사건의 시간적 진행에 불쑥 불쑥 끼어드는 건석의 회상은 건석에게 베트남의 피가 절반 섞인 이복 형 건찬(우옌 카이 호앙)이 있었다는 사실, 진학을 포기한 형이 학비를 대준 덕에 건석이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는 사실 등을 드러낸다.
건석은 프응미의 여주인 우옌 티 리엔과의 섹스를 통해서만 온전히 살아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는 상태였다. 어릴적 또래들의 놀이집단이 '피가 낯선' 형을 왕따시킬 때 질끈 눈을 감아 동조했던, 결과적인 가해의 기억은 성인이 돼서도 괴로운 정신적 부채로 남아 있다.
건석이 리엔과의 결혼을 결심한 후 맵고 시원한 국물의 랍스터 요리를 맛보는 각성까지 가는데는 과거 박정희 군대에 의해 저질러진 추악한 전쟁 범죄, '노무현 군대'에 의해 또다시 저질러질지도 모르는 새로운 가해 행위에 대한 베트남인들의 거부반응 등 감춰졌던 진실에 눈 뜬 것이 계기가 된다.
정교한 플롯을 통해 양파껍질 벗기듯 사태의 전모를 한꺼풀씩 드러내는 '방현석식' 진행은 흥미진진한 것이다. 전작 노동소설들을 통해 체득됐을, 갈등하는 인물들간의 논리대결 등 충돌장면을 역동적으로 엮어가는 솜씨는 일품이다. 상식적이고 잠정적이지만 희망적인 결론도 행복한 것이다.
소설 중반 보 반 러이와의 대화를 통해 건석의 궁금증이 말끔해지는 대목은 단조롭다. 현안인 이라크 파병문제를 거론하는 실시간 중계는 소설을 통한 주의주장의 한계가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해 보게 한다. 물론 '랍스터…'는 소설의 경계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랍스터 풍미가 그윽하다. - 신준봉 기자 ( 2003-11-22 )
인터뷰
한겨레신문 : 소설가 방현석(42)씨에게 2003년은 매우 특별한 해다. 제11회 오영수문학상과 제3회 황순원문학상을 내리 수상하면서 '운동권 작가'라는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올해 최고 상금의 작가"가 됐다. 그에게 이처럼 쑥스러운 타이틀을 달아준 작품은 지난 겨울 발표한 중편 '존재의 형식'.
운동의 좌절과 현실의 환멸을 안고 베트남으로 떠나 정착한 재우가 베트남해방전사 출신 레지투이와 시나리오 번역작업을 하면서 겪는 현재와 과거를 교직시키며 낮은 목소리로 써내려간 작품이다. 이 작품을 비롯해 네편의 중단편을 묶은 소설집 <랍스터를 먹는 시간>(창비)이 최근 출간됐다.
늦가을비가 을씨년스럽게 내리던 20일 오후 만난 방씨는 '존재의 형식'이 자신의 작가적 삶에서 "하나의 출구를 만들어준 소설"이라고 말했다. 그는 "90년대의 급속한 변화와 운동의 퇴조 속에서 좌절과 곤혹감을 느꼈고, 부당하고 억울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던 적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이러한 절망과 고민이 녹아들어갔던, 그러나 아직 출구를 찾지 못했던 작품이 장편 <당신의 왼편>이었다. "우리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밖을 들여다 보고 바깥의 시선에서 우리를 다시 들여다 보자"는 취지로 최인석, 김영현, 김남일씨 등 동료작가들과 함께 90년대 중반 만든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은 그의 삶과 문학에 하나의 실마리가 됐다.
"집단이 실패해도 자신의 삶에 대한 몫이 남아 있는 개인은 아름다울 수 있다. 또 집단이 진보, 발전해도 해결될 수 없는 개인들의 문제가 있다. 이 문제에 있어 80년대와 90년대 소설이 편향적으로 보여준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과제였고 베트남과 반레(레지투이)를 만나면서 구상하게 된 '존재의 형식'은 개인적으로 내가 찾은 답변을 담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그 답변은 소설에 등장하는 반레의 어머니가 하는 이야기 "모든 사람들로부터 좋은 말을 들을 수는 없다. 사람들이 너를 미워하고 욕할 수는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누구한테도 경멸받을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에 녹아 있다. 어떤 체제나 어떤 이념 하에서도 세상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이 있다는 의미다.
이번 소설집에서 처음 발표하는 표제작은 '인간과 역사 사이에 놓여 있는 심연'을 보다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베트남의 한국 현지회사에 일하는 건석은 한국인 관리직과 현지인 노동자의 싸움에 말려들면서 무관심했던 과거 베트남과 한국과의 어두운 그림자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이야기 초반 과거의 상처로 인해 한국인에게 반감을 보이는 베트남인에게 "내가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 나에게 말하지 마라"고 잘라 말했던 건석은 결국 회사를 떠나는 보반 러이에게 "옛날의 우리든, 지금의 우리든" "잘못이 있으면 용서해 달라"고 말한다.
역사가 개인의 삶을 가둘 수 없지만 역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개인도 존재할 수 없다는 작가의 생각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그는 이 소설 뒷부분에서 베트남인의 말을 빌려 이라크 전쟁의 모순과 한국군 파병의 문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21세기 새로운 질서 재편이라는 중요한 시점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 쓴 품이고, 그래서 서사에 다소 무리를 주면서도 해야 할 발언들을 심어놓았다"고 말하는 방씨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문학의 존재의미를 현실과 함께 가지고 갈 '운동권' 작가다. - 김은형 기자 ( 2003-11-22 )
책속으로
차례
존재의 형식
랍스터를 먹는 시간
겨우살이
겨울미포만
해설:박수연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