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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행(文行)
류주(柳柱) - 자(字)는 경하(擎廈)이고 유일편(遺逸篇)에 있는 류기수(柳耆壽)의 아들이다. 문장(文章)과 학문(學問)과 효행(孝行)을 한 고을 사람들이 추앙(推仰)하고 존중(尊重)하였다. 효도(孝道)와 학문(學問)으로 중추부사(中樞府事)에 증직(贈職)되었다. 유고(遺稿)가 있다.
주(註) 160. 중추부사(中樞府事) : 중추원부사(中樞院府事).
손극명(孫克明) - 자(字)는 이회(而晦)이고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손원갑(孫元甲)의 아들이다,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을 일찍이 이루었다.
안선(安璿) - 자(字)는 백옥(伯玉)이고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안율(安慄)의 손자(孫子)이다. 덕(德)을 숨기고 벼슬에 나아가지 아니하였으며 세상(世上) 사람들은 광릉처사(廣陵處士)라고 일컬었다. 유고(遺稿)가 있다.
김계광(金繼光) - 자(字)는 효빈(孝彬)이고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김처중(金處中)의 증손(曾孫)이다. 정훈(庭訓)을 승습(承襲)하여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을 일찍이 이루었다. 은거(隱居)하면서 바른 행실(行實)을 하여 고을 사람들이 추앙(推仰)하고 존중(尊重)하였다.
송명(宋溟) - 자(字)는 치숙(致淑)이고 음사편(蔭仕篇)에 있는 송정영(宋廷英)의 손자(孫子)이다. 글방을 설치(設置)하고 부지런히 공부(工夫)하여 문장(文章)과 기예(技藝)를 일찍이 이루었다. 사람들이 법가통덕랑(法家通德郞)이라고 일컬었다.
송채(宋采) - 자(字)는 여빈(汝彬)이고 유일편(遺逸篇)에 있는 송수(宋洙)의 아들이다. 행실(行實)과 글 쓰는 것을 가학(家學)에 따라 하여 문원(文苑)에 명망(名望)이 높았다.
주(註) 161. 문원(文苑) : 문단(文壇). 홍문관(弘文館)도 문원(文苑)이라고 하였음.
안세갑(安世甲) - 자(字)는 대경(大卿)이고 안선(安璿)의 아들이다. 행실(行實)을 온전히 하고 학문(學問)을 심오(深奧)하게 하여 사림(士林)에 명망(名望)이 높았다.
류진문(柳振文) - 자(字)는 흥백(興伯)이고 류주(柳柱)의 아들이다. 학식(學識)이 넓고 바른 행실(行實)을 하여 고을 사람들이 추앙(推仰)하고 존중(尊重)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류재무(柳再茂) - 자(字)는 춘약(春若)이고 류진문(柳振文)의 손자(孫子)이다. 문장(文章) 과 학문(學問)과 바른 행실(行實)이 세상(世上)에 이름났다.
강백기(姜伯奇) - 자(字)는 백숙(伯淑)이고 사마편(司馬篇)에 있는 강추(姜鰍)의 후손(後孫)이다. 일찍이 정훈(庭訓)을 승습(承襲)하여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을 숙취(夙就)하였다.
김세중(金世重) - 자(字)는 중여(重汝)이고 호(號)는 만오(晩悟)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김덕휘(金德徽)의 아들이다. 성품(性品)이 청렴(淸廉)하고 검소(儉素)하여 문달(聞達)을 구(求)하지 아니하였으며 문(門)을 닫아 놓고 독서(讀書)하여 임천(林泉)에서 노년(老年)을 끝마쳤다.
주(註) 162. 문달(聞達) : 이름이 세상(世上)에 드러남.
송상훈(宋商燻) - 자(字)는 광징(光徵)이고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송제성(宋齊聖)의 증손(曾孫)이다. 재주와 기예(技藝)가 출중(出衆)하였고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이 깊었다.
이현징(李玄徵) - 자(字)는 원경(遠卿)이고 공신편(功臣篇)에 있는 이원립(李元立)의 증손(曾孫)이다. 타고난 성품(性品)이 탁영(卓穎)하고 재주와 지혜(智慧)를 겸비(兼備)하여 문장(文章)과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을 고을 사람들이 추앙(推仰)하고 존중(尊重)하였다.
주(註) 163. 탁영(卓穎) : 높고 빼어남.
김세형(金世亨) - 자(字)는 가여(嘉汝)이고 호(號)는 졸재(拙齋)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김덕화(金德和)의 아들이다. 성품(性品)이 시율(詩律)을 좋아하여 사객(詞客)이 자리에 가득했다. 사람들이 이를 일러 장경(長庚)의 후신(後身)이라고 하였다. 시집(詩集)이 있다.
주(註) 164. 시율(詩律) : 시(詩)의 율격(律格).
주(註) 165. 사객(詞客) : 문필가(文筆家).
주(註) 166. 장경(長庚) : 샛별.
김세광(金世光) - 자(字)는 명여(明汝)이고 호(號)는 아성(我醒)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김덕현(金德玄)의 아들이다. 가정(家庭)에서 수학(修學)하며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를 근본(根本)으로 삼아 온순(溫淳)하고 덕행(德行)이 향리(鄕里)에 현저(顯著)하였다.
류적(柳績) - 자(字)는 군성(君成)이고 명환편(名宦篇)에 있는 류용(柳墉)의 후손(後孫)이다. 정훈(庭訓)을 승습(承襲)하여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을 숙취(夙就)하였고 늙어갈수록 더욱 경서(經書)를 연구(硏究)하여 향리(鄕里) 사람들이 추앙(推仰)하고 존중(尊重)하였다.
김치주(金致冑) - 호(號)는 성암(省庵)이고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김종집(金宗潗)의 아들이다. 삼성재(三省齋)를 짓고 삼형제(三兄弟)와 함께 살면서 힘써 배우고 노년(老年)에 이르러서도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김치백(金致伯) - 호(號)는 묵재(黙齋)이고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김종집(金宗潗)의 아들이다. 정훈(庭訓)을 승습(承襲)하고 독실(篤實)한 의지(意志)로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곤계(昆季)가 경전(經傳)을 강론(講論)하였다.
주(註) 167. 경전(經傳) : 성현(聖賢)들이 지은 여러 가지 책(冊)을 말함. 성경현전(聖經賢傳).
허온(許日昷) - 자(字)는 원량(元亮)이고 호(號)는 학락(鶴洛)이며 학행편(學行篇)에 있는 허경윤(許景胤)의 후손(後孫)이다. 임천(林泉)에서 덕(德)을 기르고 헌면(軒冕)에 뜻을 끊어 경전(經傳)을 연구(硏究)하였다.
주(註) 168. 헌면(軒冕) : 고관(高官)의 초헌(軺軒)과 면류관(冕旒冠)을 말하며 고관(高官)을 뜻함.
송호증(宋灝增) - 자(字)는 운초(運初)이고 송채(宋采)의 손자(孫子)이다. 명예(名譽)와 이익(利益)을 구(求)하지 아니하였으며 독실(篤實)하게 경사(經史)를 익혔다.
주(註) 169. 경사(經史) : 경서(經書)와 사기(史記).
임양하(林揚夏) - 자(字)는 군숙(君淑)이고 호(號)는 서래(西來)이며 무과편(武科篇)에 있는 임상유(林商儒)의 증손(曾孫)이다. 충효근검(忠孝勤儉)의 네 글자를 입신(立身)의 근본(根本)으로 삼아 마음 깊이 성리학(性理學)에 몰두(沒頭)하여 당세(當世)에 이름을 떨쳤다.
김세보(金世寶) - 자(字)는 보여(寶汝)이고 호(號)는 만성재(晩醒齋)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김덕유(金德裕)의 아들이다. 덕(德)을 가졌고 학문(學問)을 좋아하여 고을에서는 장로(長老)라고 일컬었다. 병의(兵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주(註) 170. 병의(兵議) : 병조참의(兵曹參議).
안달신(安達臣) - 자(字)는 명중(明仲)이고 안선(安璿)의 증손(曾孫)이다. 대대(代代)로 지켜온 가문(家門)의 예의범절(禮儀凡節)을 더욱 독실(篤實)하게 실천(實踐)하여 눌옹(訥翁) 안국민(安國民)이 찬양(讚揚)하여 말하기를 ‘우리 일가(一家)에서 가장 나으니 세상(世上)에서 청천고사(晴川高士)라고 일컫는구나.’라고 하였다.
홍주범(洪周範) - 자(字)는 여윤(汝允)이고 호(號)는 서와(西窩)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홍하정(洪夏定)의 아들이다. 효도(孝道)와 우애(友愛)와 문행(文行)에 뛰어나 가문(家門)의 명성(名聲)이 떨어지지 않았다.
홍도범(洪道範) - 자(字)는 여집(汝執)이고 호(號)는 일남(一南)이며 홍주범(洪周範)의 아우이다. 훈지(塤篪)를 담락(湛樂)하고 강론(講論)하고 연마(硏磨)하면서 서로 도왔다.
주(註) 171. 훈지(塤篪) : 훈지(壎篪)와 같으며 둘 다 악기(樂器)의 이름임.
김치만(金致萬) - 자(字)는 희윤(希允)이고 호(號)는 야옹(野翁)이며 김세현(金世賢)의 아들이다. 효행(孝行)이 뛰어나게 달랐으며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을 겸비(兼備)하였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조사진(趙思鎭) - 자(字)는 군옥(君玉)이고 호(號)는 와룡재(臥龍齋)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조가(趙榎)의 증손(曾孫)이다. 분수(分數)를 지키고 학문(學問)에 뜻을 두어 늙어갈수록 더욱 경서(經書)를 연구(硏究)하고 스스로의 규모(規模)를 고을의 긍식(矜式)으로 삼게 하였다.
주(註) 172. 규모(規模) : 법도(法度)
노유문(盧裕文) - 자(字)는 관여(寬汝)이고 절의편(節義篇)에 있는 노한석(盧漢石)의 후손(後孫)이다. 효도(孝道)와 정성(精誠)이 순수(純粹)하고 지극(至極)하였으며 우애(友愛)가 매우 독실(篤實)하였다. 아들과 조카들에게 학문(學問)을 권(勸)하고 바른 행실(行實)을 닦으면서 스스로를 끝마쳤다.
김복익(金福益) - 자(字)는 석보(碩甫)이고 증직편(贈職篇)에 있는 김현정(金顯鼎)의 손자(孫子)이다. 가훈(家訓)을 승습(承襲)하고 효도(孝道)와 우애(友愛)가 매우 독실(篤實)하였다.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에 부지런하여 명예(名譽)와 이익(利益)을 구(求)하지 아니하였으며 임천(林泉)에 둔적(遁迹)하여 바른 행실(行實)을 지키면서 스스로를 끝마쳤다.
성필구(成必久) - 자(字)는 문화(文華)이고 충신편(忠臣篇)에 있는 성정국(成定國)의 후손(後孫)이다. 일찍이 문명(文名)을 차지하였으며 지조(志操)와 행실(行實)이 고상(高尙)하였다.김해(金海)에 우거(寓居)하기 시작(始作)하면서 덕(德)이 있는 사람을 길러 낸 뒤에 자손(子孫)들이 인(因)하여 살고 있다.
김윤석(金潤碩) - 자(字)는 정중(正中)이고 호(號)는 신와(愼窩)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김숙(金淑)의 아들이다. 성품(性品)이 본래(本來) 순후(純厚)하였으며 후진(後進)들을 개유(開牖)하여 성취(成就)시킨 적이 많이 있다. 유고(遺稿)가 있다.
류흥구(柳興龜) - 자(字)는 이길(离吉)이고 호(號)는 향양(向陽)이며 류적(柳績)의 후손(後孫)이다. 명예(名譽)와 이익(利益)을 구(求)하지 아니하고 더욱 경사(經史)를 연구(硏究)하고 선대(先代)의 일에 부지런하고 내학(來學)들을 교유(敎諭)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주(註) 173. 내학(來學) : 후학(後學).
주(註) 174. 교유(敎諭) : 가르치고 타이름.
김의석(金義碩) - 자(字)는 인로(仁老)이고 호(號)는 송재(松齋)이며 효자편(孝子篇)에 있는 김덕창(金德昌)의 증손(曾孫)이다. 효도(孝道)와 우애(友愛)와 독실(篤實)한 행실(行實)이 세상(世上)에 널리 알려졌다.
홍면회(洪冕會) - 자(字)는 달첨(達瞻)이고 호(號)는 낙파(洛波)이며 홍주범(洪周範)의 아들이다. 문장(文章)과 학문(學問)과 바른 행실(行實)이 뛰어나 선비와 벗들이 추앙(推仰)하고 존중(尊重)하였다.
안경수(安景洙) - 자(字)는 성방(聖邦)이고 호(號)는 지은(池隱)이며 학행편(學行篇)에 있는 안신현(安信賢)의 후손(後孫)이다. 일찍이 과거(科擧)를 사양(辭讓)하고 임천(林泉)에서 만도(晩韜)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주(註) 175. 만도(晩韜) : 끝까지 몸을 감춤.
윤기영(尹璣榮) - 자(字)는 형언(衡彦)이고 호(號)는 담헌(澹軒)이며 파평인(坡平人)이다. 판윤(判尹)인 윤종(尹鍾)의 후손(後孫)이다. 품성(稟性)이 온후(溫厚)하고 순수(純粹)하여 문장(文章)과 기예(技藝)를 숙취(夙就)하였고 경전(經傳)을 강학(講學)하며 임천(林泉)에서 노년(老年)을 끝마쳤다. 유고(遺稿)가 있다.
주(註) 176. 품성(稟性) : 선천적(先天的)으로 타고난 성품(性品)
홍수일(洪受馹) - 자(字)는 휘백(輝伯)이고 호(號)는 시남(是南)이며 홍면회(洪冕會)의 아들이다. 효도(孝道)와 우애(友愛)와 문행(文行)으로 가문(家門)의 명성(名聲)을 잘 지켰다.
윤임영(尹任榮) - 자(字)는 성오(聲五)이고 호(號)는 죽재(竹齋)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윤시현(尹時顯)의 현손(玄孫)이다. 품성(稟性)이 인후(仁厚)하고 조예(造詣)에 법도(法度)가 있으며 조업(祖業)을 계술(繼述)하고 아들과 조카들을 교육(敎育)하여 고을의 삼대로(三大老)의 한 사람이 되었다. 고종조(高宗朝)에 수직(壽職)으로 지중추(知中樞)가 되었다.
주(註) 177. 조업(祖業) : 가업(家業).
주(註) 178. 계술(繼述) : 조상(祖上)의 뜻과 사업(事業)을 이어감.
주(註) 179. 대로(大老) : 나이나 사회적(社會的) 지위(地位) 또는 덕(德)이 높은 사람.
주(註) 180. 지중추(知中樞) :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조기식(趙基植) - 자(字)는 치안(致安)이고 호(號)는 과락(跨洛)이며 조사진(趙思鎭)의 손자(孫子)이다.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를 근본(根本)으로 삼고 근검(勤儉)과 절약(節約)을 본심(本心)으로 하였으며 글방을 설치(設置)하여 교회(敎誨)하고 후몽(後蒙)을 개유(開牖)하였다.
주(註) 181. 교회(敎誨) : 가르쳐 깨우치게 함.
주(註) 182. 후몽(後蒙) : 후세(後世).
조중진(曺重振) - 자(字)는 자성(子誠)이고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조원해(曺元海)의 후손(後孫)이다. 효도(孝道)와 우애(友愛)에 근본(根本)을 두고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을 부지런하게 하여 활천(活川) 가에 있는 집현재(集賢齋)에서 닦았고 적서계(積書契)를 하여 고을의 인재(人才)를 교육(敎育)하였다. 지금(至今)의 후학(後學)들이 고상(高尙)한 성품(性品)을 사모(思慕)하고 우러러 보고 있다.
조인식(趙寅植) - 자(字)는 양수(亮叟)이고 함안인(咸安人)이며 어계(漁溪) 조여(趙旅)의 후손(後孫)이다.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네 글자를 평생(平生)의 수신(修身)과 근행(謹行)의 근본(根本)으로 삼았다.
조익성(曺翼成) - 자(字)는 성경(聖卿)이고 호(號)는 우암(迂庵)이며 유일편(遺逸篇)에 있는 조몽징(曺夢徵)의 손자(孫子)이다. 학문(學問)에 박식(博識)하고 수행(修行)이 저명(著名)하여 당세(當世)에 세상(世上)에서는 독신군자(獨愼君子)라고 일컬었다. 유고(遺稿)가 있다.
김용석(金容碩) - 자(字)는 자응(自應)이고 호(號)는 삼은(三隱)이며 효자편(孝子篇)에 있는 김덕제(金德濟)의 증손(曾孫)이다. 성품(性品)이 강직(剛直)하고 현명(賢明)하며 정직(正直)하여 남과 함께 희학(戱謔)을 하지 아니하고 경서(經書)를 연구(硏究)하였다.
주(註) 183. 희학(戱謔) : 실(實)없는 말로 하는 농(弄)지거리.
조덕규(趙德奎) - 자(字)는 시안(時安)이고 호(號)는 헌곡(軒谷)이며 함안인(咸安人)이고 어계(漁溪) 조여(趙旅)의 후손(後孫)이다. 조행(操行)과 효도(孝道)와 우애(友愛)가 한 시대(時代)에 저명(著名)하였다.
노사후(盧思垕) - 자(字)는 이중(而重)이고 절의편(節義篇)에 있는 노한석(盧漢錫)의 증손(曾孫)이다. 타고난 성품(性品)이 총명(聰明)하고 지혜(智慧)로웠으며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이 깊었고 처사(處事)에 이치(理致)를 지니고 있었다. 스스로 중주(中籌)가 있었다.
주(註) 184. 중주(中籌) : 공정(公正)한 계책(計策).
조석화(曺錫和) - 자(字)는 성구(聖龜)이고 호(號)는 농암(聾巖)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조형(曺泂)의 아들이다. 일찍이 사장(詞場)에서 노닐고 견문(見聞)이 화려(華麗)하여 평소(平素) 저명(著名)하였고 늘그막에는 구(求)하고자 하는 뜻을 버렸다. 유고(遺稿)가 있다.
이규상(李奎相) - 자(字)는 무약(武若)이고 호(號)는 송암(松庵)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이장손(李長孫)의 후손(後孫)이다. 공명(功名)과 영화(榮華)를 단념(斷念)하고 글씨와 농사(農事)에 즐거움을 붙이고 변폭(邊幅)을 닦지 아니하였으며 바른 행실(行實)을 지키다가 스스로 끝마쳤다.
주(註) 185. 변폭(邊幅) : 겉만 꾸밈.
안주석(安周錫) - 자(字)는 숙경(肅敬)이고 호(號)는 우계(愚溪)이며 행의편(行誼篇)에 있는 안기홍(安基洪)의 아들이다. 천성(天性)이 순수(純粹)하고 효도(孝道)와 우애(友愛)와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이 저명(著名)하였다. 묘갈(墓碣)이 있다.
박우진(朴禹鎭) - 자(字)는 역서(朂瑞)이고 호(號)는 소헌(小軒)이며 대암(大庵) 박성(朴惺)의 후손(後孫)이고 허성재(許性齋)의 문인(門人)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밝게 이어받아 경사(經史)를 독실(篤實)하게 공부(工夫)하였다.
김상진(金尙鎭) - 호(號)는 우당(愚堂)이고 효자편(孝子篇)에 있는 김치묵(金致黙)의 아들이다.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를 가정(家庭)의 규범(規範)으로 삼았고 신의(信義)를 고을 사람들의 긍식(矜式)으로 삼게 하였다.
이구의(李九儀) - 자(字)는 영여(榮汝)이고 호(號)는 재전(在田)이며 명환편(名宦篇)에 있는 이번(李氵旛)의 후손(後孫)이다.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이 한 시대(時代)에 저명(著名)하였다.
조용은(趙鏞溵) - 자(字)는 찬언(讚彦)이고 음사편(蔭仕篇)에 있는 조문규(趙文奎)의 아들이다. 문장(文章)과 학문(學問)과 효행(孝行)이 저명(著名)하였다.
노구연(盧龜淵) - 자(字)는 낙언(洛彦)이고 호(號)는 낙애(洛厓)이며 효자편(孝子篇)에 있는 노진성(盧振聲)의 현손(玄孫)이다. 효도(孝道)와 우애(友愛)와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으로 실지(實地) 공부(工夫)를 하였으며 후진(後進)들을 교회(敎誨)하였다.
조석환(曺錫桓) - 자(字)는 이용(以用)이고 호(號)는 야수(野叟)이며 유일편(遺逸篇)에 있는 조몽징(曺夢徵)의 증손(曾孫)이다. 신독(愼獨)하고 옛것을 좋아하여 늙어서도 달라지지 아니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안정중(安鼎重) - 자(字)는 구여(九如)이고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안경원(安景愿)의 아들이다.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이 순수(純粹)하고 바르며 일찍이 고을 사람들에게 저명(著名)하였다.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이 묘표(墓表)를 지었고 유고(遺稿)가 있다.
안효선(安孝善) - 자(字)는 순도(舜道)이고 호(號)는 석우(石愚)이며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안세갑(安世甲)의 후손(後孫)이다. 행실(行實)이 고상(高尙)하고 문장(文章)을 겸비(兼備)하여 선비와 벗들이 다 추앙(推仰)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김증우(金增瑀) - 호(號)는 축와(蓫窩)이고 김상진(金尙鎭)의 아들이다. 육행(六行)으로 고을 사람들에게 추앙(推仰)을 받았다.
주(註) 186. 육행(六行) : 효도(孝道), 형제 우애(兄弟友愛), 친척 화목(親戚和睦), 외척 친목(外戚親睦), 친구(親舊)의 믿음, 구휼(救恤)의 여섯 가지 덕행(德行).
조성원(趙性原) - 자(字)는 민현(敏顯)이고 조인식(趙寅植)의 아들이다, 부친(父親)의 명(命)으로 소학(小學) 한 부(部)를 구(求)하여 늘그막에 이르기까지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다. 효도(孝道)와 우애(友愛)를 근본(根本)으로 삼고 글씨와 농사(農事)일을 하였다.
윤규면(尹奎冕) - 자(字)는 여익(汝翊)이고 호(號)는 경은(耕隱)이며 윤임영(尹任榮)의 아들이다. 일찍이 정훈(庭訓)을 승습(承襲)하고 시(詩)와 글씨에 근면(勤勉)하더니 필법(筆法)으로 저명(著名)하였다.
조익승(曺翊承) - 자(字)는 정서(貞瑞)이고 호(號)는 아남(我南)이며 조중진(曺重振)의 손자(孫子)이다. 문장(文章)과 기예(技藝)가 남을 뛰어넘었고 경향(京鄕)에서 추앙(推仰)하고 자랑하였고(詡) 아들을 가르치는 데 법도(法度)가 있었으며 가정(家庭)이 물과 같았다.
주(註) 187. 후(詡) : 자랑하다.
한인택(韓仁澤) - 자(字)는 처인(處仁)이고 호(號)는 괴파(槐坡)이며 청주인(淸州人)이고 문간공(文簡公) 한상경(韓尙敬)의 후손(後孫)이다. 독실(篤實)한 의지(意志)로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여러 학생(學生)들을 가르쳤다. 유고(遺稿)가 있다.
정병엽(鄭柄燁) - 자(字)는 주여(周汝)이고 호(號)는 희재(熙齋)이며 동래인(東萊人)이고 설학재(雪壑齋) 정구(鄭矩)의 후손(後孫)이다. 명예(名譽)와 이익(利益)을 구(求)하지 아니하고 마음을 경사(經史)에 전념(專念)하여 아들을 가르치는 데 순박(淳朴)하고 깊었으며 남을 접대(接待)하는 데 너그럽고 부드러웠다.
김양희(金良熙) - 호(號)는 초은(樵隱)이고 유행편(儒行篇)에 있는 김정삼(金鼎三)의 후손(後孫)이다. 만가정(晩稼亭)을 짓고 후진(後進)들에게 권장(勸獎)하였으며 임번(林樊)에 은거(隱居)하여 영화(榮華)와 이익(利益)을 구(求)하지 아니하였다.
안효정(安孝政) - 자(字)는 순제(舜齊)이고 호(號)는 벽우(碧藕)이며 사마편(司馬篇)에 있는 안민중(安珉重)의 아들이다. 타고난 성품(性品)이 순수(純粹)하고 문장(文章)과 기예(技藝)를 숙취(夙就)하였으며 임천(林泉)에 즐거움을 붙여 연못을 파서 정자(亭子)를 짓고 편액(扁額)을 벽우(碧藕)라고 하고 여기에서 살면서 쉬었다고 한다.
조영승(曺瑛承) - 자(字)는 경백(敬伯)이고 호(號)는 추강(秋岡)이며 조석환(曺錫桓)의 아들이다. 서적(書籍)을 널리 보고 엄격(嚴格)하고 굳세었으며 바르고 사사(私私)로움이 없어 남에게 추앙(推仰)을 받았다.
조성단(趙性坦) - 자(字)는 무현(茂顯)이고 호(號)는 옥산(玉山)이며 조성원(趙性原)의 아우이다. 고상(高尙)하고 인의(仁義)를 가졌으며 세상(世上)의 부침(浮沈)에 함께 하지 아니하였다.
이민영(李珉榮) - 자(字)는 순명(順明)이고 호(號)는 죽원(竹園)이며 이규상(李奎相)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타고난 성품(性品)이 순수(純粹)하고 강직(剛直)하였으며 학문(學問)을 널리 하고 행실(行實)이 독실(篤實)하여 이름이 일세(一世)에 존중(尊重)되었다.
윤영희(尹永熙) - 자(字)는 주서(周瑞)이고 호(號)는 자은(自隱)이며 윤임영(尹任榮)의 손자(孫子)이다. 가훈(家訓)을 승습(承襲)하여 노년(老年)을 끝마칠 때까지 학문(學問)을 좋아하고 고을의 수재(秀才)들을 교육(敎育)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노시용(盧是容) - 자(字)는 순민(舜民)이고 호(號)는 만오(晩悟)이며 음사편(蔭仕篇)에 있는 노상설(盧相說)의 아들이고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의 문인(門人)이다. 문장(文章)과 학문(學問)에 뛰어나고 재산(財産)을 다스리는 데 부지런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조윤규(趙允奎) - 자(字)는 사강(士剛)이고 호(號)는 안계(安溪)이며 조성원(趙性原)의 아들이다. 가난에 이르러도 남행(濫行)을 생각하지 아니하였고 빈한(貧寒)에 이르러도 더러운 것을 탐(貪)하지 아니하였다.
이기영(李璣榮) - 자(字)는 순정(順政)이고 호(號)는 죽하(竹下)이며 이민영(李珉榮)의 아우이고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의 문인(門人)이다. 분수(分數)를 지키고 힘써 학문(學問)을 익혀 경사(經史)를 널리 보았다.
주(註) 188. 문행(文行) : 문장(文章)에 관(關)한 행실(行實).
훈신(勳臣)
김유신(金庾信) - 명신편(名臣篇)에 있는 김서현(金舒玄)의 아들이다. 임신(姙娠)한 지 이십월(二十月)만에 낳았는데 등에 칠성문(七星文)이 있었다. 신라(新羅) 무열왕조(武烈王朝)에 당(唐)나라 장수(將帥) 소정방(蘇定方)과 함께 백제(百濟)를 평정(平定)하고 문무왕조(文武王朝)에 또 고구려(高句麗)를 평정(平定)하여 삼한(三韓)을 통합(統合)하였다. 관직(官職)이 대각간(大角干)에 이르렀고 식읍(食邑)이 오백호(五百戶)였다. 비(碑)를 세워 공(功)을 기념(紀念)하고 흥무왕(興武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주(註) 189. 추봉(追封) : 죽은 뒤에 벼슬에 봉(封)함.
김보(金普) - 호(號)는 죽강(竹岡)이고 금녕군(金寧君) 김목경(金牧卿)의 아들이다. 고려조(高麗朝)에 관직(官職)이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이르렀고 시종(侍從)으로 기록(記錄)되었으며 공훈(功勳)으로 금녕부원군(金寧府院君)에 봉(封)해졌다.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
김완(金完) - 자(字)는 자구(子具)이고 김해인(金海人)이며 참의(參議)인 김사종(金嗣宗)의 손자(孫子)이다. 기상(氣像)과 법도(法度)가 크고 훌륭하며 힘은 능(能)히 정(鼎)을 들었다. 무과(武科)에 올라 정유년(丁酉年)에 남원(南原)의 대첩(大捷)을 이루었다. 인조(仁祖) 갑자년(甲子年)에 이괄(李适)의 난(亂)을 평정(平定)하여 진무삼등공신(振武三等功臣)에 기록(記錄)되고 공훈(功勳)으로 학성군(鶴城君)에 봉(封)해졌다. 정묘년(丁卯年)에 황해병사(黃海兵使)로 용천(龍川)에서 강홍립(姜弘立)의 군(軍)을 격파(擊破)하였다.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追贈)되고 시호(諡號)는 양무(襄武)이다. 부조(不祧)를 명(命)하였고 문순공(文純公) 박세채(朴世采)가 행장(行狀)을 지었으며 운호사(雲湖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주(註) 190. 부조(不祧) : 사당(祠堂)에 합사(合祀)하지 않음.
주(註) 191. 훈신(勳臣) : 공훈(功勳)이 있는 신하(臣下). 공훈(功勳)이 작으면 원종훈(原從勳)임.
원종훈(原從勳)
김상(金祥) - 자(字)는 찬지(贊之)이고 명환편(名宦篇)에 있는 김계희(金係熙)의 후손(後孫)이다. 임진난(壬辰亂) 때 칠곡군수(漆谷郡守)로 군공(軍功)이 있었고 성(城)이 함락(陷落)되기에 이르러 사절(死節)하였다. 선무원종일등공신(宣武原從一等功臣)에 기록(記錄)되고 공훈(功勳)으로 병참(兵參)에 추증(追贈)되었으며 동래(東萊) 안락원(安樂院)에 제향(祭享)되었다.
주(註) 192. 병참(兵參) : 병조참판(兵曹參判).
동대순(董大順) - 자(字)는 치화(致和)이고 광천인(廣川人)인데 제독(提督)인 동일원(董一元)의 아들이다. 만력(萬曆) 정유년(丁酉年)에 홍로주부(鴻矑主簿)로 양친(兩親)을 모시고 종군(從軍)하여 여러 번(番) 이겨서 공훈(功勳)을 세웠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기록(記錄)되고 좌승지(左承旨)로 추증(追贈)되었다.
주(註) 193. 홍로(紅爐) : 조선조(朝鮮朝)의 중추부(中樞府)나 장례원(掌禮院)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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