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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잊고 있는 명승지, 근대정신이 살아있는 임청각
(글/사진/정연상_안동대 건축공학과 교수)
안동을 동에서 서로 관통하면서 흐르는 낙동강 물은 안동댐의 낙동강 물과 임하댐 물이 법흥동 앞에서 합쳐져 흐른다.
이들 강변과 천변에는 많은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이 물 따라, 사람 따라, 시간 따라 흐르고 있다.
안동의 많은 사람들은 과거에도 그랬던 것처럼 아침저녁으로 낙동강을 보면서 넘나다니고 있다.
그리고 용상동에 살고 있는 나와 집사람도 아침에 가끔씩 번갈아가면서 용상동과 법흥동 사이를 흐르는 낙동강을 건너다니곤 한다.
용상동과 법흥동은 현재 법흥교가 연결하고 있는데, 이른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법흥교를 이용하고 있다.
운동을 위해 아침 일찍 법흥교를 뛰어 건너는 사람들, 일찍 출근하는 사람들, 장날에 장보러 가는 사람들,
버스를 타고 등교하는 학생들, 아이를 학교에 등교시키기 위해 눈을 비비면서 지나가는 사람 등이 이 다리를 이용한다.
특히 아침 일찍 시내로 가면서 사람은 물안개 속의 낙동강 물과 강물을 향하고 있는 임청각(臨淸閣)과 고성이씨 탑동종택,
신세동 칠층전탑이 앞을 지나고 있는 기차와 철길을 본다. 물안개 속 낙동강과 임청각, 물속의 나무, 법흥교 주변을 보면
우리는 늘 잊고 살았던 아름다운 자연경관이 아주 가까이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날 딸아이를 집사람과 함께 학교에 등교시켜 주었던 일이 있었다. 이런 모습을 우리 아이는 늘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런 광경을 혼자 보기 아까워 안동밖에 살고 있는 친구들에게 핸드폰 카메라를 이용해 자랑했다고 한다.
법흥교와 임청각 주변은 새로 지은 현대적 건축물들이 들어서면서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1700년대 이곳의 모습을 알 수 있는 허주 이종악(虛舟 李宗岳)의 《산수유첩(山水遺帖)》을 보면,
임청각 주변의 옛 모습을 가늠할 수 있다.
이 화첩은 1763년 4월 허주와 그 일행들이 안동의 낙동강 연안 명승지를 선유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동호해람>은 허주 일행이 임청각 앞 동호에서 유람을 시작하는 1763년 4월 4일의 장면이다.
이때 임청각 주변 산과 나무에는 봄기운이 완연하다.
허주 이종악이 거주한 그림 속 임청각은 웅장한 기와집을 하고 있다.
과거 종택의 진입은 강을 따라 난 길을 이용했으며 도로 좌우에 나무들이 줄지어 있다.
그리고 배로 강을 건너다녔다. 임청각과 이 주변은 안동팔경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이중환은 영호루와 함께 안동 최고의 명승으로 극찬했다.
<동호해람> 속 임청각은 1767년 허주가 중수하기 4년 전의 모습으로 단청을 한 흔적이 보인다.
1900년대 초 임청각과 그 주변은 종택과 이웃한 건물들이 있었으며, 강 건너 용상동 지역은 넓은 들녘이 펼쳐져 있다.
당시 임청각 군자정에 앉아 밖을 보았다면, 굽이쳐 흐르는 물, 하얀 모래, 강가의 수초가 만들어내는 자연의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반듯하게 정비되지 않은 갈래갈래 흐르는 물줄기는 오늘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어렴풋이 1970년대 초 임청각을 감싸고 있는 자연경관, 둘 물길이 함수하면서 만들어내는 풍광이 눈앞을 스쳐 지나간다.
기차소리로 눈앞의 자연풍광이 사라지면서 현실의 복잡한 선들이 눈앞으로 다가온다. 자동차의 전조등 선, 임청각 앞 기차길 선,
방음벽 선, 전기선, 전화선, 무형의 선 등 다양한 선들이 생성되었다가 사라지고 있다.
그리고 망국의 아픔을 달래면서 종택 임청각을 뒷전에 두고 머나먼 만주로 떠나던 이상룡선생과 자손들이 손잡은 선도 그중 하였다.
법흥동 임청각이 겪은 이야기
임청각(臨淸閣)은 경북 안동시 법흥동에 있으며 보물 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집은 영남산(映南山) 동쪽 기슭에 앉아 낙동강을 바라보는 배산임수에 동남향을 하고 있다.
임청각은 고성 이씨 법흥종택으로 입향조 이증(李增:1419~1480)의 셋째 아들 이명(李洺)이 의흥현감을 사직 후
1519년에 건축하였다. 그리고 형인 이굉(李浤)이 귀래정(歸來亭)을 짓자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 중
“등동이서소 임청류이부시(登東而舒嘯 臨淸流而賦詩, 동쪽언덕에 올라 길게 휘파람 불고 맑은 시냇가에서 시를 읊조린다)에서
臨자와 淸자를 취해 임청각이라 했다.
임청각은 이명이 건립한 이후 1600년과 1769년에 중수가 있었다.
최근 중수한 정침의 자료를 보면, 임청각은 일부 구조가 고식으로 보이는 것으로 보아 옛 구조방식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기 임청각은 정면에 중앙선 철도가 들어서면서 정면 행랑채 일부와 문간채, 중층 문루가 철거되었다.
문루가 있을 때 임청각은 낙동강과 근거리에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임청각은 귀거래사의 시냇가에 시를 읊조린다는 말과 일치한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내신 석주 이상룡(石洲 李相龍)선생이 태어난 고택이다.
이상룡 선생은 1911년 독립운동을 위하여 모든 재산을 팔아 가족을 이끌고 중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주인을 잃은 임청각은 우리의 모습처럼 안개 속을 헤맸었다.
임청각은 이상룡 선생을 비롯하여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근현대기의 명문가이며, 당시 지식인으로서 할 수 있는 것을
행동으로 실천한 대표적인 명가다. 일제시기 이상룡 선생의 아들은 망국의 슬픔을 자결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였으며,
손자는 옥중에서 해방을 맞았으나 고문 후유증으로 숨졌다.
임청각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9명을 배출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조국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상징이다.
독립이후 임청각은 안개 속에서 많은 우여곡절 겪은 끝에 햇살이 비치면서 안개가 걷혔다. 마침내 임청각은 원래 주인을 찾게 되었다.
1963년 보물로 지정된 임청각은 1974년부터 3년에 걸쳐 완전해체 수리한 이후 외곽 담장과 문 등의 크고 작은 보수를 했다.
현재 종택은 외부 사람들에게 독립운동가 이상룡 선생 생가로서 알려졌고, 현재 전통고택 체험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택에서 다양한 체험을 하고 있다. 고택의 주변은 옛 모습과 달리 많이 바뀌었지만
아직도 예전 임청각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눈을 감고 방문을 열어 낙숫물이 떨어지는 군자정 처마 끝의 빗방울과 낙숫물 소리를 들어보면 어떠할까?
그리고 시대의 상흔에 딱지가 앉아 새살이 돋은 이때 기차소리를 들어보면 어떠할까?
채들의 배치 및 구성
임청각은 안동시내 동측에서 남쪽으로 경사진 영남산 산자락에 기대고 안동댐에서 흐르는 낙동강을 굽어보고 있다.
임청각은 낙동강과 반변천 물이 만나는 두물머리에 위치하여 도심의 확장으로 산만한 도심의 현대적 건물과 고가도로를 보고 있다.
예전에는 지금과 달리 아름다운 풍광을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임청각의 터는 남북방향으로 짧고 동서방향으로 길며,
남쪽이 낮고 북쪽이 높은 지형, 동쪽이 약간 높은 경사지 지형 조건을 갖고 있다.
임청각 정면에는 4m 폭의 임청각과 신세동 전탑 및 주변 가옥 접근로가 있고, 도로 너머에 1942년 완공한 중앙선 철도가
지나가고 있다. 도리와 철도 사이에는 반투명의 방음벽이 임청각 앞을 가리고 있다. 임청각은 현재 남아 있는 큰 고택 중 하나다.
임청각은 중앙선 철도의 건설로 대문간과 행랑채가 헐려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담장 너머로 보이는 임청각은 웅장한 모습의
행랑채가 아흔아홉 간 집의 자태를 보여주고 있다.
임청각은 대지의 모양에 따라 남북선상에서 동쪽으로 30도 정도 기울어져 남동향을 하고 횡적인 배치를 하고 있다.
좌향의 결정은 멀리 강 건너 문필봉과 낙타산 등이 보이는 넓고 수려한 자연경관을 갖고자한 노력으로 보인다.
임청각은 크게 정침영역과 별당영역, 사당영역으로 나뉜다. 정침영역은 안채, 사랑채, 안행랑채, 바깥행랑채으로
구성된 用자형 배치를 하고 동남향을 하고 있다. 별당영역은 정침영역 북동측에 있으며, ‘丁’자형 군자정과 정사각형의
연못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당영역은 별당영역 북동측 경사면 위에 있다.
정침영역은 석축의 단을 상·중·하단으로 나누어 하단에 바깥행랑채가,
중단에 안채와 안행랑채, 사랑채가, 사랑채와 안채 뒤편의 상단에 텃밭을 일구고
외곽담장을 쌓아 뒤편 산자락과 경계를 그었다.
정침영역은 다양한 형태의 마당을 중심으로 각각의 채와 실을 배열하여 구성하였다.
정침영역은 안채를 중심으로 동측에 사랑채가 있고, 안채의 서측과 안채와 사랑채 정면을
안행랑채가 감싸고 있어 대청 앞에 사각형의 안채 안마당이고 있고, 안행랑채 마루간 앞에
세로로 긴 안행랑마당이 있다. 사랑 대청 앞에는 군자정 쪽으로 열린 사랑채마당이 있다.
정침영역의 하단에는 안채와 안행랑마당 아래에 바깥마당이 있고, 사랑채마당 아래에도 또 다른 바깥행랑마당이 있는데,
동측으로 열려 있어 대문에서 사랑채로 출입할 때 이 마당을 보면서 출입을 한다.
바깥행랑채의 외벽 구성은 건물 전체가 길어서 이미지가 무거워질 수 있는 것을 하얀 회벽과 벽선과
기둥의 배열을 통해 간결하고 리듬감을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사면이 실로 감싸인 마당을 보고 연구자들은 폐쇄적이며 매우 답답하게 느껴진다고 하는데,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도 폐쇄적으로 느꼈을까?
마루에 앉아 하늘을 보면 무한한 우주가 집속으로 들어온다.
폐쇄적으로 보이는 것은 그들만의 세상을 갖기 위해 틀을 만들어 세상을 보기 위한 것은 아닐는지.
임청각은 안동지역의 다른 집에 비하여 구조 부재를 크게 사용하여 집 전체가 튼실하고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안대청의 중앙기둥 상부는 납도리 구조로 초각한 보아지가 보를 받도록 하여 구조재의 장식효과를 높였다.
대청 상부의 가구도 단순히 동자주를 세워 도리를 받는 오량가구가 아니라 초각한 포부재로 포동자주를 구성하여
종보를 받도록 하여 무미건조해질 수 있는 대청 상부를 부드럽게 꾸몄다.
초각을 한 부재를 사용하는 것은 안 하는 것보다 많은 공력을 필요로 한다.
대청 위 서까래는 도리 위에서 주먹장이음을 했기 때문에 대청에서 보면 도리 위에 걸쳐 놓은 서까래 마구리가
보이지 않고 깔끔하게 마감처리 되어 보인다.
따라서 임청각은 집주인이 많은 공력을 들여 지은 건물이며, 집에 대한 섬세한 집주인의 고려가 곳곳에 배여 있다.
사랑채는 대문간에서 좌측 바깥행랑채 마당을 통해 사랑채 마당을 거쳐 오르는데, 사랑채마당 중앙에는 우물이 있다.
이 우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랑채는 사랑채 대청과 동측 1간 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측 방은 산방으로 이상룡선생도
이곳에서 태어났다. 사랑채 대청도 안채 대청처럼 뒤쪽에 자그마한 판문을 달아 텃밭아 한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동측을 보면 별당영역의 군자정이 한눈에 들어온다.
별당영역은 정침의 동측에 있으며 담장 안에 丁자형 군자정과 사각형의 연못이 있다.
연못 주위에는 모과나무와 백일홍, 단풍나무가 등이 자라고 있다. 출입은 사랑채영역의 협문과 대문쪽 협문을 이용한다.
군자정의 평면은 5칸의 마루간과 온돌방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루간은 가로세로 2칸의 마루간과 온돌방 사이의 마루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군자정은 누정형식으로 기둥 상부의 포작이 이익공형식과 민도리형식이며, 오량과 삼량가구로 짜였다.
내부 가구에는 기록에 있는 것처럼 단청을 한 흔적이 보인다.
익공재는 끝을 전면으로 돌출시켜 초각하지 않고 끝을 둥글게 초각한 물익공 모양을 하고 있다.
이런 모습은 건축주와 건축가가 건축 관련 법령을 지키고자한 것으로 판단된다.
군자정 사면은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출입은 정면과 동측 사랑채를 이용하고 있다.
온돌방의 난방은 정면에 아궁이를 꾸며 난방하고 있다. 온돌방과 마루간의 바닥은 아궁이를 꾸미고 누마루를 꾸미기 위해
주변보다 높게 했다. 따라서 실내에서 외부를 보면 철로와 방음벽, 전기선, 현대건축물 등으로 물안개가 낀 자연경관이
사라지고 있지만 우리는 마음속에, 머릿속에, 눈앞에 옛 자연경관을 그릴 정도의 경관을 지금도 볼 수 있다.
과거 이상룡 선생은 망국의 슬픔을 이곳에 앉아 밤을 낮 삼아 삭히면서 앞으로 살아가 날, 해야 할 일을 고민을 했을 것이다.
나도 이곳에 앉아 과거 나라를 생각하고 가족을 생각했던 선생의 숨결을 느껴본다.
사당영역은 군자정 동측에 있으며, 담장을 쌓아 외부와 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사당에 계신 고성이씨와 이곳을 스쳐간 분들은 남동측의 담장 너머의 자연경관을 바라보고 있다.
호연지기(浩然之氣)가 몸속에서 피어오른다. 옛일이 생각난다.
목수간에서 일할 때 노승이 호연지기라는 호를 지어주던 일이, 넓고 호탕하게 즐기면서 살아라…….
임청각은 1515년(중종 10)에 건립한 사대부 살림집으로 건축사적으로 귀한 사료이며, 한 시대의 소임을 다했던 많은 인물을
배출해 온 무형적 가치가 풍부한 곳이다. 특히 이 살림집은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선생의 살림집으로
망국의 슬픔을 뒤로 하고 가산을 처분하여 독립운동 자금 마련의 큰 밑천이 되었다.
그리고 석주 선생 외에 이집에서 자란 사람들은 독립운동을 통해 조국과 민족의 소중함을 몸소 실천했다.
이런 모습은 근대기 임청각의 고성이씨 선비가 선비로서 해야 할 일을 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 것이다.
이와 같이 고택에서 살았던 사람과 그들의 활동은 단순히 유형적 가치 이상의 무형적 인물사적, 사회사적, 시대사적 가치를
보여주는 것이다.
집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 그 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결과물로 시대를 담는 그릇이라 했다.
후손은 그 속에서 선대의 가르침을 스스로 배우고 그들의 이상을 꿈꾼다. 그리고 후손들은 군자정에 앉아
집 앞의 나무숲과 숲 사이로 흐르는 강물과 모래사장의 자연경관을 보면서 선대의 가르침을 받고 학문을 도야하고,
선비의 정신을 갈고 닦으면서 그 시대의 군자가 갖추어야할 호연지기를 키웠을 것이다.
따라서 집은 자연과 대화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인간에게 제공하여 인간이 그 곳에서 자연과 대화하면서
집 밖 세상을 준비할 수 있는 에너지를 제공한다.
임청각은 유형적 무형적으로 무궁한 가치를 갖고 있다.
임청각과 주변 경관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가까운 역사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정신을
배울 수 있는 최적의 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안동에 있는 우리는 문화를 편식하고 있는 것이 아닐는지?
안동지역에는 고택체험프로그램을 다양하게 운영하고 있는 고택들이 많지만, 임청각은 안동지역의 근대정신을 배울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이다. 임청각은 외세에 의해 국가의 존망이 위급할 때, 선비로서 장부로서 지식인으로서의 도리를 몸으로
실천한 근대정신이 살아 있는 곳이기 때문에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근대정신을 배울 수 있는 최적의 문화유산체험 장소다.
그리고 안동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를 널리 알리고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우리 집 초등학교 아이가 보훈처 교육을 받기 위해 수원에 다녀온 일이 있었다.
교육하던 선생의 질문이 “천안독립기념관 외에 독립기념관이 어디에 하나 더 있나?” 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우리 아이와 집사람은 안동에 있다고 자신 있게 대답했다고 한다. 대답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 마음에
안동이라는 곳에 산다는 것, 남들이 체험하지 못하는 것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문화를 체득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자부심을 갖게 한 것이 중요하다. <안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