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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학년 2학기 중간 고사 임박! 이제 우리 모두 열공 모드로 전환
4단원 (1)비교하며 읽기 강의 듣기.
과제 안내
자신이 생각하는 바람직한 삶의 태도를 만화로 표현해서,
사진을 찍어 올리자. (교과서 185쪽 또는 빈 종이)
*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다운 받아, 글씨를 입력하는 형식으로 과제를 해도 좋습니다.*
보너스 활동(상점챌린지)
padlet.com/kjinmi2000/6f2cdy25474gotqa
패들렛으로 여러 친구들과 함께 생각을 나누는 활동을 해 봅시다.
아래의 주소를 클릭! 반드시 크롬이나 엣지로 열어 주세요!
자신의 이름을 쓰고, 선생님의 질문에 자신의 생각을 써 보세요. <상점>을 부여하겠습니다.
✎ 첫 번째 글 ∥ 자기 자신 사랑하기, 그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공지영(소설가)
어떤 커플(여기서 커플이란 부부나 연인도 되고 친구도 되고 친한 선후배 등 붙어다니는 모든 사람을 이야기해)을 만났을 때 가끔 나는 깜짝 놀라곤 한단다. 분명 둘은 친한 사이고 심지어 사랑하기도 하며 서로 그 사실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는 커플인데도, 한쪽이 심한 면박을 주거나 모욕적인 언사 혹은 그런 행동을 하는데 다른 쪽에서는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심지어 그것을 애정이라고 하는 극언을 하는 것을 보았을 때의 놀라움 말이야. 그들은 대체로 이렇게 말하곤 했단다.
“그건 저 사람이 나 좋아서, 혹은 나 잘되라고 그러는 거예요.”
“저 사람이 말은, 혹은 행동은 그렇게 해도 속마음으로는 저를 무지 위하고 좋아해요.”
오 마이 갓, 무슨 말인지 좀 알 것 같니?
<“뚱뚱하니까 살 좀 빼라”는 친구>
가끔 고등학교에 강연하러 갈 때가 있는데 그때 엄마가 뭐 할 말도 딱히 없고 해서 아이들에게 몇 가지 당부하는 말이 있단다. 그건 이런 거야.
“여러분이 인생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정말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그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또 다른 나인 남과 나누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아이들이 묻곤 하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귀가 아프도록 들었어요. 그런데 그건 어떻게 하는 거예요?”
그러면 엄마가 대답하곤 했단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게 어떤 건지 쉽게 이야기해줄까요? 나보고 뚱뚱하니까 살 좀 빼라는 친구랑 다시는 놀지 마세요. 나보고 너 얼굴이 왜 그렇게 크니? 하는 친구랑 다시는 만나지 마세요. 너 다리 굵어, 하는 친구랑 말도 섞지 말라고요. 이게 나를 사랑하는 방법이에요.”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졸기도 하고 떠들던 아이들이 이쯤 되면 눈을 번쩍 뜨더라. 그러고는 막 웃는 거야.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러나 나는 알지. 그 말 어딘가에 그 아이들의 귀를 기울이게 하는 진실이 숨어 있다는 것을, 그것이 그 아이들을 눈뜨게 했다는 것을. 우리 유전자 혹은 우리 영혼은 무엇이 옳은지 사실 늘 알고 있거든.
“새로 머리를 자르고 갔는데 ‘어머 너 그거 어디서 잘랐어?’ 이러면서 키득거린다든지, ‘대박이다!’ 이러면서 경멸하며 웃는 친구를 이제 더 이상 친구라고 부르지 마세요” 하고.
그래 엄마는 이렇게 생각해. 너는 그런 친구들과 어울리면 안 돼. 이런 친구를 만나야 한단다.
“물론 네가 패션모델처럼 말라깽이는 아니지만 참 건강하고 아름다워. 얼굴이 뭐가 크다고 그러니? 너는 타조가 예쁘니, 수사자가 예쁘니? 어떤 사람들은 타조가 예쁘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얼굴 큰 수사자가 더 멋있어.”
이런 말을 하는 친구 말이야.
만일 어떤 친구와 만나고 집으로 돌아와 거울을 보는데 네 뺨이 싱싱하게 보이고 눈이 반짝이면서 참 아름다워 보이고 이 정도면 어디 내놔도 괜찮지? 하는 생각이 들고 왠지 책상에 앉아 차분히 일기라도 쓰거나 좋은 책을 읽고 싶어진다면 그런 친구는 만나거라. 그런데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왠지 화가 나고 막 아이스크림, 짜장면, 라면, 불닭볶음 이런 게 먹고 싶어지면서 오늘따라 내가 왜 이렇게 밉지, 하는 생각이 들거든 그 친구하고의 만남을 자제하거라. 이게 엄마가 네게 줄 수 있는 인생 선배로서의 가장 단순한 충고야.
✎ 두 번째 글 ∥ 우리 이기심을 뛰어 넘는 삶을 살아요
김승섭(의사)
이 글은 필자가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고 일하던 2011년, 보건의료학생 모임 ‘다리’의 소식지에 쓴 글입니다. ‘다리’는 의학, 약학, 간호학을 전공하는 대학생들이 건강과 사회문제가 무관하지 않다는 데 뜻을 모아 누구나 건강할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자 만든 모임입니다.
그날따라 그 말을 하는 게 왜 그리 힘들었는지 모르겠어요. 의과대학분과 3학년이던 2003년, 지구 반대편에서는 확인되지 않은 대량 살상 무기를 찾겠다고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했고, 방송에서는 머지않아 폐허로 변할 이라크의 마을을 마치 남 일인 양 뉴스에 내보내고 있었어요. 의과대학 강의실에서는 당장 내일부터 시작되는 시험을 앞두고 다들 정신없이 바빴고요 무고한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고 함께 반전 집회에 나가자고, 그 몇 마디 말하는 게 그날 정말 힘들게 느껴졌어요. 어떻게 말을 마쳤는지도 기억이 잘 나지 않아요. 답답한 마음에 건물 바깥으로 나가서 벤치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는데, 어쩌자고 햇살은 저렇게나 맑고 하늘은 끝없이 푸르던지, 지구 한편에서는 폭격으로 사람이 죽어가고 있는데요.
제가 20대에 했던 고민들에 대해 ‘다리’ 친구들에게 이야기해달라는 부탁을 받고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장면은 그때 그 모습이에요. 80년대에 운동을 했던 분들에게서 간혹 들을 수 있는 멋진 영웅담을 전해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제게는 사실 그런 기억이 없어요. 제가 대학에 들어간 1998년은 이미 학생운동이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고’, ‘학우들의 삶과 동떨어진 정치운동을 하는’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시절이었거든요. 대량 해고를 감수해야 했던 당시 지하철 노동자들이나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학교 친구들에게 할 때면, 마치 저만 다른 세상에 속한 사람인 것마냥 느껴지고 누구에게도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전달되지 않아 오히려 친구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상황이 반복되었어요. 그 어색함을 감당하는 게 제게는 활동하는 데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세상을 좀 더 인간다운 곳으로 변화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다는 자부심 비슷한 것을 느끼기 이전에 주변 사람들 누구도 하려 하지 않고 또 심지어 대부분의 동기들이 '누군가는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이 일을 왜 내가 나서서 해야 하는지 스스로 자꾸 되물어야 했던 시간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세상을 냉정하고 엄밀하게 분석하기보다는, 내가 왜 그런 활동들을 하려 하고 그게 내 삶에 있어서 어떤 의미인지 고민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쏟았던 것 같아요. 한동안은 함께 활동할 수 있는 동료들이 너무 적다는 게, 학년이 올라가면서는 한 명씩 한 명씩 활동들로부터 멀어지고 왠지 혼자 남았다는 느낌이 들 때는 ‘내가 하고 있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개인적인 이야기인데요, 저는 20세기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혁명이라는 단어에 매력을 느끼지 않게 되었어요. 사회를 전체적으로 바꾸어내는 ‘혁명’의 전망 없이 나는 어떻게 해야 진보적으로 살 수 있을까, 그리고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고민이 제게는 20대 내내 큰 화두였어요. 좀 더 근원적으로 말하면, ‘꽃이 필 것이라는, 열매가 맺힐 깃이라는 기대 없이 어떻게 나는 계속 씨앗을 뿌릴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었어요. 그 고민이 마지막에 닿았던 지점이 그런 거였어요. 사회가 급격하게 바뀔 수 있다는 꿈이 없다면, 남은 길은 자신의 삶에서 가능한 한 오랫동안 진보적인 실천을 하도록 하고 그럴 수 있게 준비를 하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80년대 민주화운동에 그토록 적극적이었던 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 절반만, 아니 그 반의반만이라도 그때 열정의 10퍼센트를 가지고 좀 더 구체적으로 자신의 소득과 시간의 10퍼센트를 소외된 약자를 위해 쓰고 있다면, 사회가 지금보다는 훨씬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에요. 그래서 학생 시절에 했던 다짐이, 지금의 공부와 활동은 앞으로 수십 년간 ‘스스로를 망치는 일과 싸우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이라고, 중요한 것은 졸업 이후에 내가 살아가는 모습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넉넉지 않은 집안의 장남인 제가 시민단체나 노동운동단체에서 일하는 전업 활동가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정신적으로도 전업활동가로서 그 활동을 지속해나갈 자신이 없었어요, 졸업 후의 진로에 대한 고민 끝에 저는 학자가 되기로 결정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지만 무엇보다 공부를 좋아하고, 또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나 책을 통해서 기존에 생각하지 못했던 무언가를 알게 되는 순간을 좋아했으니까요. 임상의사로 일하는 동기들처럼 경제적으로 넉넉하게 살 수는 없겠지만, 열심히 한다면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연구를 하면서 경제적으로도 지속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또, 임상의사로 살면 20대 후반 30대 초반을 여러 활동과 단절되어 병원에서 지내야하는데, 그 수련 과정 속에서 스스로를 잘 지켜낼 수 있다는 확신이 없었어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어 있고, 물론 그 과정을 거치고 또 훌륭한 의사 활동가로 살아가는 경우도 있겠지만, 스스로를 냉정하게 판단하건대 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리고 임상의사로 살게 되면, 십중팔구 개업을 하거나 2차병원에서 일을 해야 하는데, 매일같이 비슷한 환자를 보면서 기계적으로 변하지 않고 그들에게 최선을 다 하는 게 제게는 참 힘들 것 같았어요.
함께 아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감수성
미국 유학 시절 놀러 온 사촌동생이 술에 취해 제게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더라고요. “형, 사람이 착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뭐야?"라고요 그 녀석이 보기에는 제가 착하게 살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보였거나 혹은 그런 고민을 많이 할 사람처럼 보였던 모양이에요. 곰곰이 생각하다가 ‘어린 시절 특별히 정의롭지도 또 용감하지도 않던 내가 어쩌다가 지금처럼 사람에 대한 꿈을 꾸고 이렇게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마도 제가 했던 활동들이 제게는 마치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 같은 것들이기 때문 아닌가 싶어요. 예를 들면, 의과대학 본과 1학년 겨울방학 때, 산업재해를 당한 분들이 모인 사무실에서 한 달 동안 자원상근을 한 적이 있는데요. 어느 날 저녁에, 제가 기타를 치면서 함께 여러 노래를 부르다가 기타를 다른 사람에게 넘기려고 주변 사람을 둘러봤을 때, 손가락 열 개가 온전히 있는 사람이 저 하나뿐이었어요. 그때 느꼈던 묘한 낯섦 같은 거요. 또, 고무장갑을 돌돌 말아 만든 큐대로 양손 합쳐 단 두 개뿐인 손가락으로 당구 150을 치며 아무리 쳐도 50을 넘기지 못하는 저를 놀리던 순간 느끼던 그 경쾌함이나, 밤새 민주노총 신문발송 작업을 하고서 모두가 피곤에 곯아떨어져 있을 때 산업재해를 당한 후 유일한 직업이 되어버린 우유배달을 하러 가야 한다고 아무 말 없이 오토바이를 끌고 새벽에 나가던 그 뒷모습에서 느꼈던 삶의 끈질긴 생명력 같은 거요.
의과대학 학생 시절 점심시간에 재활병원에 있는 사지마비에 걸린 아이 들의 점심 식사를 먹여주는 활동을 했었는데, 나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지만 손가락 하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없는 아이들이 장난삼아 싸움을 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면, 아이들이 외치곤 하거든요. ‘내 주먹을 받아라’라고요. 그러면 제가 대신 그 아이의 주먹이 되어서 상대편에게 날아가야 했어요. 물론 상대방이 ‘반사’라고 한 번 외치면 끝이었지만요. 그 아이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그 아이들보다 하루만 더 살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그 모든 것을 온몸으로 감당해내는 부모들을 보면서 느꼈던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경험들이 저를 살아 있게 하는 것 같아요. 저는 세상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하지만, 제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런 경험들을 계속하고 그것들에 대해 함께 아파하고 기뻐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간직할 수 있기를 또 길러나갈 수 있기를, 그것이 가능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욕심이 훨씬 커요. 어찌 보면 지극히 이기적인 것이지요.
얼마 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다섯 살 된 아이가 유치원 버스에 타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였어요. 아빠가 경찰진압으로 인해 버스에서 워낙 심하게 구타당하는 것을 봤던 게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거지요. 다른 아이들이 다 같이 동물원에 소풍을 가도, 버스 계단에 발을 올리는 게 그리 어려워서 홀로 유치원에 남아 있어야 했던 그 아이의 가슴속에 들어 있을 무언가에 대해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가 있는 김진숙 씨가 전기가 끊겼던 밖에 얼마나 외롭고 무서웠을까를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나이 60이 되어서도 꼭 되고 싶고 그게 가능한 삶으로 저를 끌고 가고 싶어요. 그리고 아름다운 사회는 나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없는 타인의 고통에 대해 예민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그래서 열심히 정직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자신의 자존을 지킬 수 없을 때 그 좌절에 함께 분노하고 행동할 수 있는 사회라고 생각해요. 점점 그런 인간을 시대에 뒤떨어진 천연기념물처럼 만들고, 타인의 고통 위에 자신의 꿈을 펼치기를 권장하고 경쟁이 모든 사회구성의 기본 논리라고 주장하는 사회가 되어가는 게 저는 싫어요.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
20대를 돌아보면서 여러 가지 후회되는 것들이 있어요. 그중 하나는 좀 더 스스로에게 정직하지 못했다는 거예요. 내 주변 사람들이 하는 생각과 내 생각이 다를 때 좀 더 정직하게 질문하고 이야기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어요. 예를 들어, 산업재해로 자살한 노동자를 추모하는 집회에서 전경들과 몸싸움을 할 때에, 이제 막 20대 초반인 전경들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군대에 끌려와 우리와 부딪쳐야 하는 상황에 대해서 그들의 입장에서 생각을 해보지 못했어요. 이제야, 해고와 사회적 낙인 그리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어려운 시간을 보내던 쌍용 자동차 해고노동자만큼이나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 명령에 따라 그들을 진압해야 했던 젊은이들이 겪었을 상처에 대해서도 관심이 생겼어요. 기회만 주어진다면, 시위를 진압하는 전경으로 복무해야 했던 젊은이들이 겪었을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상처에 대해서 직업병 역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꼭 연구해보고 싶어요. 세상에 상대방을 때리고 상처를 주면서 아무런 죄책감 없이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되겠어요. 정작 그 싸움으로 이득을 본 사람은 노동자도 전경도 아니잖아요.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당부할게요. 상처받는 거를 두려워하지 마세요. 여러 활동을 하다 보면, 내가 '상대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도 분명히 상처를 받는 일이 생길 거예요. 그리고 ‘우리 편’에게서 받는 상처가 훨씬 더 아플 수도 있어요. 많이 힘들겠지만, 그 상처로 인해서 도망가지 말고, 그것에 대해 꼭 주변 사람들과 용기를 내서 함께 터놓고 이야기하고 자신의 경험으로 간직하세요. 상처를 준 사람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해서 성찰하지 않아요.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자신의 경험을 자꾸 되새김질을 하고 자신이 왜 상처받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 질문해야 하잖아요. 아프니까, 그래서 희망은 항상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요. 진짜예요.
얼굴을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다리’의 후배님들 항상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어요. 어떤 사람들은 프로이트를 인용하면서 인간이 하는 모든 행동은 결국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기심을 채우는 일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해요.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우리 결국에는 이기심을 뛰어넘는 삶을 살아보도록 해요. 저도 열심히 노력할게요.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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