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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참봉 소은 김공 행장(參奉素隱金公行狀)
공은 휘가 성호(性豪)이고 자가 영숙(英叔)인데 만년에 기옹(嗜翁)으로 바꾸었으며 호가 소은(素隱)이다.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처음에 대보 알지(閼智)에서 나왔는데, 김부왕[金溥王: 신라 경순왕(敬順王)] 이후로 고려조에 벼슬하여 대대로 고관대작이 이어졌다.
본조에 들어와 휘 균(稛)은 태조(太祖)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여 계림군(鷄林君)에 훈봉(勳封)되었고 시호는 제숙(齊肅)이니 바로 공의 12대조이다. 증조 휘 원립(元立)은 포의 신분으로 혼조(昏朝 광해군)에 의리를 내세웠고 나중에 문과(文科)로 출사하여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관직을 마쳤다.
조부 휘 민효(敏斅)는 공조 좌랑을 지냈고, 부친 휘 재현(載顯)은 행 승정원 도승지를 지냈는데 박실(樸實)한 행실로 이름이 났다. 모친 청송 심씨(靑松沈氏)는 동지중추부사 진(榗)의 딸로, 대사헌 의겸(義謙)의 후손이니, 숭정(崇禎) 기해년(1659, 효종 10) 12월 15일 서울 낙동(駱洞)에서 공을 낳았다.
어려서부터 장난치기를 좋아하지 않았고 조금 자라서는 이미 문장에 힘을 쏟았다. 정사년(1677, 숙종 3)에 선비들이 우암(尤菴) 선생을 위해 억울함을 호소하였는데 공은 당시 관례를 치르기 전이었는데도 동참하였으며, 소두(疏頭)가 유배를 당하자 개탄하며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으니 젊어서부터 지조가 이와 같았다.
무진년(1688, 숙종 14)에 금리(禁吏)가 궁액(宮掖)의 일로 인해 궁궐 안에서 장살(杖殺)을 당하자, 공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시사(時事)를 알 만하다.”
하였다.
이때부터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옛 성현들의 글을 가져다 문을 닫은 채 탐구하느라 먹고 자는 것을 거의 잊을 정도였다.
병신년(1716, 숙종 42)에 돈녕부 참봉(敦寧府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학문에 매진하는 선비를 특별히 천거하게 하자, 대신이 공을 천거하여 서연(書筵)의 강직(講職)에 추천하였다. 차츰 등용될 참이었으나 공은 이미 병에 걸렸다. 죽음을 앞두고 시중드는 이에게 병들었을 때의 옷과 이불을 빨라고 시켰으며, 또 억지로 일어나 목욕하려고 하니 자제들이 만류하자 공이 말하기를,
“군자는 덕으로 남을 사랑하는데, 너희들은 내가 몸을 깨끗이 하여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느냐.”
하였다.
병이 심하여 말을 못하자 글씨를 써서 뜻을 전했는데 그 자획이 평소와 같았다. 유명(遺命)을 남겨 상례를 검소하게 치르고 염의(斂衣)는 청(淸)나라 물건을 사용하지 말며 명정(銘旌)에는 ‘처사(處士)’라고 쓰라고 당부하였다. 경자년(1720, 숙종 46) 5월 3일 용인(龍仁) 갈천(葛川)의 계당(溪堂)에서 세상을 떠났다.
유인(孺人)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첨정 지원(志遠)의 딸이자 우의정 응인(應寅)의 증손녀이다. 공보다 3년 일찍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에 보라산(甫羅山) 병좌(丙坐)의 언덕에 합장하였으니 계당(溪堂)에서 몇 리 떨어져있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정(碇)이고 딸은 교관 이현윤(李顯允)에게 시집갔다.
측실 소생 아들 한 명이 있는데 어리다. 이현윤의 사위는 김이정(金履禎)이다. 공의 학문은 박실(朴實)한 데에 전적으로 힘을 쏟았는데, 스승의 도움 없이 마음을 다해 스스로 공부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배우는 자들이 다행스럽게도 정자(程子)와 주자(朱子) 이후에 태어나 학문의 과정이 미혹되지 않고 분명하니 요컨대 깊이 생각하여 실천하는 데 달려있다.”
하였다.
경전의 뜻을 논함에 있어 새롭거나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오직 평정(平正)하고 적실(的實)한 것을 귀결처로 삼았다. 또 저술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항상 정자가 주장문(朱長文)에게 답한 글을 예로 들면서 경계로 삼았다. 독서하다가 사색한 것이 있으면 손가는 대로 기록하되 두서가 없이 하였으니 입언(立言)에 가까워질까 혐의해서였다.
젊은 시절에 기억력이 좋았는데 늙어서도 한결같이 애쓰고 노력하였다. 사서(四書)를 더욱 깊이 공부하였고 나머지 성리(性理)와 관련된 글들도 모두 탐구하였으며, 상수(象數)와 율려(律呂)에 대해서도 그 원류를 섭렵하였다. 만년에는《주역》읽기를 그치지 않아 아침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었으며 의관을 정제하고 꼿꼿이 앉아서 날을 마쳤다. 심한 병이 아니면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간혹 한밤에도 잠자지 않고 이불을 끼고서 경서를 두루 암송하였다.
어버이를 섬길 적에는 잠시도 그 곁을 떠난 적이 없었고 잠자리는 반드시 직접 봐드렸으며 어버이의 뜻에 앞서 안색을 살피며 한마음으로 공경하였다. 옛 예법대로 상례를 집행하고 장례를 지낸 다음에도 염장(鹽醬)을 먹지 않았기에 그 애통함이 고을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모친상을 당했을 적에는 이미 노쇠하였음에도 부지런히 예를 다하였으며, 형이었던 신녕공(新寧公 김윤호(金胤豪))을 부친처럼 섬겼다.
선대에서 행하는 상례와 제례의 여러 가지 일이 간혹 시속을 따른 것이 있었는데 공에 이르러 비로소 일체 《가례(家禮)》를 표준으로 삼으니 신녕공도 믿고 따랐다. 충원(忠原)의 선영이 멀어서 보살피기 어려웠기 때문에 직접 그곳에 재실(齋室)을 지었고, 그곳을 지키던 노비가 빈곤하여 장차 흩어지려고 하자 양식을 나누어주어 구제하였다.
큰누이가 영남에서 죽고 여동생 하나가 남쪽 지방에 떨어져 살았기에, 항상 생사(生死)의 지극한 통한으로 여겼다. 신녕공이 관소에서 세상을 떠나자 상류(上流)에서 맞이하여 곡을 하고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병에 걸려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였다.
평소 처자식을 매우 엄하게 대하였고, 동복(僮僕)을 다스릴 적에는 위엄보다 먼저 은혜를 베풀었으며 종당(宗黨)을 대우할 적에는 곡진히 은혜로운 마음이 있었으나, 의롭지 못한 일을 하면 반드시 용서하지 않고 꾸짖었다. 후학에 대해서는 정성을 다해 가르치고 어린아이의 구두(口頭) 학습에 이르기까지 또한 기꺼이 부지런히 가르쳤으나, 절대로 스승의 도(道)로 자처하지 않았다.
특히 남들과 교유가 드물었으니 중년에는 비록 서울에 살았으나 문밖을 나서지 않았다. 속인과 마주하여 얘기를 하면 이내 마음이 분란해진다고 생각하여 학문에 뜻을 둔 이후로 일찍이 한 번도 장자(長者)의 집을 출입하지 않았다. 한번은 부친의 명으로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공을 찾아뵈어야 했는데, 현석이 평소 공의 명성을 듣고서 마음을 열고 맞이하려 했으나 공은 끝내 가지 않았다.
항상 우옹(尤翁)을 한번이라도 만나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만의(萬義)의 장례 때 자신을 밝히지도 않고 들어가 곡을 하고 상주(喪主)를 보지도 않고 나와 버려 좌중에 있던 모든 이들이 놀랐다. 학사 송주석(宋疇錫)이 말하기를,
“이것이 옛날의 의리이다.”
하였다.
당숙 재해(載海)와는 어려서부터 함께 공부하여 정의(情義)가 매우 돈독하였는데, 만년 이후로 논의가 어긋나 서로 맞지 않고 경서의 뜻에 관해 또 어긋나는 점이 있었다. 공은 지성으로 일깨워도 되지 않으면 또 더불어 따지지 않고 요컨대 정의를 해치지 않는 것을 중시하였으니 공의 충실하고 후덕함을 알 수 있다.
물욕(物欲)에 일절 담박하였으며 특히 여색을 조심하였다. 부친 지신공(知申公)을 모시고 관소에 가면 대부분 기방이 있는 곳이었는데 끝내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지신공의 맑은 덕이 조정 안팎에 드러남에 있어 공이 조석으로 도운 바에 힘입었다고 한다.
평생 굶주림을 참으며 곤궁하게 살았는데 사양하고 받는 일에 있어선 조심하고 엄격하였다. 한 유인(韓孺人)이 늘그막에 병이 드는 터에 집안일을 다스리지 못하여 변변찮은 끼니도 항상 잇지 못했으나, 태연하게 거처하였다. 공이 자신의 자(字)를 바꾼 설(說)을 읽어보면 그 은미한 뜻을 상상할 수 있다.
곤궁하게 살면서 세상에 뜻이 없는 듯하였으나,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이 지성에서 나와 조정의 잘못된 거조(擧措)를 들으면 그때마다 저녁 내내 즐겁지 않았다. 군민(軍民)의 부역(賦役)과 변방의 방수(防守)에 대해서도 또한 마음속으로 생각한 바가 있어서 일찍이 북한산성(北漢山城)에서 노닐 적에 지은 설이 있었으니, 공을 고리타분한 선비라고 말하는 이는 참으로 공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시론(時論)에 대해선 한 번도 한쪽에 치우쳐 주장하지 않고 오직 의리를 따랐으니 선악(善惡)과 소장(消長)의 구분에 엄격하였기 때문이었다. 항상 말하기를,
“나랏일을 맡은 자가 분명하게 시비를 가려 전심으로 일을 수행하되 우선 자신을 다스려 남의 마음을 감복시키는 데 힘쓴다면 절반은 넘게 깨달은 것이다.”
하였다.
또 근래 유자의 출처의 잘못에 대해 논하기를,
“조정에서 성심으로 선비를 대우하지 않고 오직 성명(聲名)과 이록(利祿)으로 농락하고, 선비는 사양하고 물러나기만을 일삼으니 군신(君臣)의 의리가 거의 무너졌다. 이러한 길이 한번 열리면 고관대작을 편안히 앉아서 해마다 승진할 것이니, 어찌 이러한 이치가 있는가.”
하였다.
어떤 이가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맞다. 조만간 조정에서 부른다면 그대는 어떻게 처신하겠는가?”
하니, 공이 웃으며 대답하기를,
“그렇다면 내가 어찌 감히 그렇게 하겠는가. 세상 사람들에게 내가 실질이 없음을 조금이라도 알게 한다면, 물러나기를 구하지 않아도 절로 물러나게 될 것이다.”
하였다.
공의 견식이 정밀하고 확실함이 이와 같았다. 문장은 조리가 통창하고 내용이 형식보다 뛰어났으며, 시는 평측(平仄)에 얽매이지 않아 참된 풍격이 볼 만하였으니, 유고 약간 편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나는 외람되이 집안끼리의 교분으로 인해 젊은 시절부터 공을 익숙히 알았다.
말과 표정, 행실이 남과 다를 게 없는 듯하였으나 멀리서 바라보면 저절로 공경하는 마음이 일어났으며 나아가 질정하면 대답하는 말씀이 끝없이 이어지고 정성스런 마음이 넘쳐흘렀으니 군자다운 사람임을 알 수 있었다. 배우는 이의 위기(爲己)와 위인(爲人)이 고금의 다름이 있는 것이 공자(孔子)께서 살던 당시에도 그러하였으니 하물며 오늘날은 어떠하겠는가.
공과 같은 이는 지금 세상을 살면서 옛 도에 뜻을 두었으니, 곤궁함을 지키고 학문을 좋아하여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힘써, 자신의 몸에 덕을 닦으면서도 무능한 사람처럼 겸손하였다. 이 때문에 세상 사람은 명성이 실질보다 지나치지만 공은 명성이 실질에 미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남들보다 매우 훌륭한 점이다.
어찌 면재(勉齋 황간(黃榦))의 이른바 진실한 마음으로 각고의 공부를 하는 경우가 아니겠는가. 만일 공이 그 뜻과 사업을 조금이라도 펼쳤다면 세교(世敎)에 보탬이 되었을 것인데, 끝내 곤궁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으니 필시 그 책망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학문은 자신에게 달려있고 알아주고 알아주지 않는 것은 남에게 달려있으니, 공에게 무슨 해가 되겠는가. 아들 정(碇)이 애통한 마음으로 멀리서 나를 찾아와 유사(遺事) 한 통을 주면서 행장(行狀)을 부탁하기에 삼가 위와 같이 가려서 모아놓아 입언군자(立言君子)의 선택을 기다리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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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脚註]
[주01] 참봉 …… 행장 :
저자가 김성호(金性豪, 1659~1720)를 위해 쓴 행장이다.
[주02] 금리(禁吏)가 …… 당하자 :
1688년(숙종 14)에 숙종의 후궁 소의(昭儀) 장씨(張氏)가 왕자를 출산하자, 장씨의 어머니가 장씨의 산후조리를 돕기 위해 입궐하
면서 옥교(屋轎)를 타고 들어온 일이 있었는데, 지평 이익수(李益壽)가 이를 참람하다고 여겨 사헌부의 금리(禁吏)를 보내어 옥교
를 멘 종들을 잡아 죄를 다스리고 상소하여 법도를 바로 세울 것을 간언하였다. 이에 노하여 금리들을 잡아와 장살(杖殺)하게 하고
엄중한 하교를 내렸다. 《肅宗實錄 14年 11月 12日》
[주03] 정자가 …… 글 :
정이(程頤)가 주장문(朱長文)에게 보낸 편지글을 가리킨다. 정이는 그 편지글에서 “후세 사람들은 처음 책을 잡으면 문장을 우선으
로 여겨서 평생에 하는 바가 번번이 성인보다 많으나 있어도 도움 되는 바가 없고 없어도 부족한 바가 없으니, 바로 쓸데없는 군더더
기의 말이다.
군더더기의 말일 뿐만 아니라 이미 요점을 얻지 못하였으면 진리를 배반하고 정도를 잃어서 도리어 도를 해칠 것이 틀림없다.”라고
하였다.《伊川先生文集 卷5 答朱長文書》
[주04] 신녕공(新寧公) :
김성호(金性豪)의 형 김윤호(金胤豪)는 1718년(숙종44)에 신녕 현감(新寧縣監)에 부임하였다가 이듬해 관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주05] 만의(萬義)의 장례 :
송시열(宋時烈)은 1689년(숙종 15)에 정읍(井邑)에서 사사된 다음 수원(水原) 만의(萬義) 무봉산(舞鳳山)에 임시로 안장되었다
가, 1757년(영조 33)에 이르러 청주(淸州) 청산(靑山)으로 이장(移葬)되었다.
[주06] 배우는 …… 그러하였으니 :
《논어》〈헌문(憲問)〉에 “옛날에 배우는 자들은 자신을 위한 학문을 하였는데, 지금에 배우는 자들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古之
學者, 爲己, 今之學者, 爲人.]”라고 하였다.
[주07] 면재(勉齋)의 …… 하는 :
주희(朱熹)의 문인이었던 황간(黃榦)이 임천현(臨川縣)에서 하기(何基)를 제자로 받아들일 적에 “학문은 반드시 진실한 마음으로
각고의 공부를 해야만 가능하다.[必有眞實心地, 刻苦工夫, 然後可.]”라고 당부하였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