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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전당집 제12권 / 비명(碑銘)
1654년 신익성(申翊聖) 저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연흥부원군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 증시 의민 김공 신도비명병서
(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延興府院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懿愍金公神道碑銘 幷序) / 부친을 대신해서 짓다.
우리 성상(聖上 인조(仁祖))이 즉위하던 첫 해 6월 기묘일에 성상께서 경연에 나오시어 신을 나오라하고 이르시기를, “왕대비 전하께서 국구(國舅)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의 신도비를 대제학에게 짓도록 하명하셨으니, 경은 힘쓰시오.”하였다.
나는 일어나 절을 올리고 머리를 조아리고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물러 나왔다. 이틀이 지난 신사일에 성상이 행장(行狀)을 내리시며 거듭 명하셨으니 그때 나는 명을 받고 몹시 두려웠다. 생각하면 성상이 난리를 평정하여 정도(正道)를 돌이켜 귀신과 사람을 안정시키고 모후(母后 인목대비(仁穆大妃))를 복위시켜 인륜을 바로잡았으니, 효성스럽고 유순한 덕은 순(舜) 임금보다 더 뛰어나다.
또한 왕대비의 아름다운 뜻을 공경하여 이 묘지명을 새기라고 명하여 위로는 모후의 마음을 위로하고 아래로는 억울한 원한을 풀어주었으니, 지극하다 이를 만하다. 적신(賊臣) 이이첨(李爾瞻)은 선조(宣祖) 때에 낭서(郎署)의 소신(小臣)으로서 무리를 지어 정사(政事)를 어지럽히는 조짐이 있었다.
선조께서 내치고 9년 동안 서용하지 않자, 이이첨이 임금을 원수로 보고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이 하루 아침저녁의 일이 아니었다.
만력(萬曆) 정미년(1607, 선조40), 선조께서 위독해지자 이이첨이 몰래 정인홍(鄭仁弘)과 모의하여 유영경(柳永慶)이 사미원(史彌遠)의 계책이 있다고 모함하여 정인홍으로 하여금 상소를 올리게 하고 이간질을 자행하자, 선조께서는 그들의 간사한 짓을 간파하고 정인홍과 이이첨을 유배 보냈다.
무신년(1608), 선조께서 승하하자 이이첨이 드디어 나라의 권력을 장악하여 유영경을 죽이고 또 임해군(臨海君) 진(珒)을 죽이는 한편, 연달아 큰 옥사(獄事)를 일으켜 종실과 조정의 관리들을 도륙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까지 죽이고자 없는 죄를 만들어 내어 온갖 간교한 짓을 저질렀다.
마침 사람을 죽이고 재물을 빼앗은 도적을 유사(有司)가 잡아 치죄하였는데, 이이첨이 사람을 시켜 형벌을 면해주고 봉작과 관직을 받을 수 있다는 말로 유혹하여 날조하고 무고하여 고변하게 하였다. 위로 모후(母后)를 공격하여 바로 폐출(廢黜)의 논의를 정하고는 그 무리 이위경(李偉卿), 정조(鄭造), 윤인(尹訒)을 시켜 조정의 안과 밖에서 떠들어 대도록 하고 크게 살육을 자행하였다.
먼저 연흥 부원군을 사사(賜死)하고는 영창대군을 강화(江華)로 유배 보내어 핍박하여 죽였다. 선조(先朝)의 구신(舊臣)들을 모두 내쫓아 나라가 텅 비어 인물이 없게 되자 이이첨은 더욱 거리끼는 마음이 없었다. 병진년(1616, 광해군 8), 이이첨은 연흥부원군의 무덤을 파서 부관 참시하여 저자에다 늘어놓고, 공의 부인을 제주도에 감금하고 가시로 담을 둘러쳤다.
또 허균(許筠), 김개(金闓)를 시켜서 잇달아 혼란을 선동하게 하고, 조정의 신하들을 다그쳐서 모두 인목 대비의 폐위를 청하게 하였는데, 결국에는 대비가 폐위되었다. 기강이 퇴폐하고 인륜이 무너져 삼천 리 강토가 거의 금수(禽獸)의 영역으로 전락되어 버렸으니, 아! 또한 참담하도다.
하늘이 우리 동방을 돌보아 나라의 운수가 중흥하여 성상(聖上)이 천계(天啓) 3년(1623) 3월 임인일에 죄를 지은 자들을 처벌하고 백성들을 위로하는 한편, 경운궁(慶運宮)에 가서 왕대비를 알현하고 다음날 갑진일에 즉위하여 크게 사면령을 내려 나라와 더불어 다시 시작하였다. 이이첨, 정인홍, 정조, 윤인, 이위경은 차례로 죽음을 당하였다.
성상이 몸소 종묘사직에 고한 다음 살아 있는 자는 복위시키고 죽은 자는 그 유족에게 재물을 내리고 위로해 주었는데, 이에 이조에 교지를 내려 국구 김제남을 보국숭록대부 영돈녕부사 연흥부원군으로 삼았다. 부인 노씨(盧氏)는 광산부부인(光山府夫人)으로 삼아 중사(中使), 승지(承旨), 예관(禮官)을 보내 서울의 집으로 맞아 와서 살게 하였으며 예에 따라 공을 개장(改葬)하고 관에서 돕게 하였다. 아! 슬프도다.
공의 자(字)는 공언(恭彦)이고,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공의 성씨는 신라에서 비롯되었다. 그 선조 가운데 직간 하다가 시염성(豉塩城)으로 유배된 분이 있었는데, 시염성은 뒤에 연안(延安)으로 바뀌었으며, 자손들은 마침내 그 곳을 본적으로 삼았다. 휘 섬한(暹漢)은 고려를 섬겨 사문박사(四門博士)를 지냈다.
4대를 지나 도(濤)에 이르러서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문하에 유학하여 글을 잘하고 행실이 뛰어났다. 호를 나복산인(蘿葍山人)이라 하였는데, 공민왕(恭愍王)이 큰 글씨를 써서 내려 주었다. 원(元)나라 조정의 제과(制科)에 급제하여 동창부(東昌府) 구현 승(丘縣丞)에 제수되었으며, 본국으로 돌아와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랐는데, 무고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자, 사론(士論)이 애통해하였다.
이분이 자지(自知)를 낳았는데, 개성 유후(開城留後)를 지냈으며, 시호는 문정공(文靖公)이다. 문정공은 해(侅)를 낳았는데, 내자시 윤(內資寺尹)을 지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좌찬성은 우신(友臣)을 낳았는데, 지중추부사를 지냈고, 시호는 호간공(胡簡公)이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전(詮)을 낳았는데, 영의정을 지냈으며,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이다.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졌으며, 공에게는 증조가 된다. 조부 휘 안도(安道)는 현령을 지냈으며,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부친 휘 오(祦)는 사정(司正)을 지냈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부친은 두 번 장가를 갔는데, 부인은 모두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졌으며, 두 대가 추은(推恩)된 것은 모두 공의 귀함 때문이었다. 공은 두 번째 부인 권씨(權氏)의 소생이다.
공은 가정(嘉靖) 임술년(1562, 명종 17)에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단정하고 미더웠으며,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났다. 장성해서 학문을 배우면서는 정밀히 생각하고 자세히 물었으며, 몸가짐이 공손하고 말수가 적었지만 논의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을유년(1585, 선조 18),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갑오년(1594), 선발되어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후에 공조 좌랑으로 승진하였다. 병신년(1596), 연천 현감(漣川縣監)에 임명되었다. 당시에 왜구(倭寇)의 난을 만나 가는 곳마다 소란스러웠는데 연천은 더욱 피폐하였다. 공은 마음을 다하여 백성들을 위로하고 다스렸으며, 어려운 일을 만나도 잘 해결하자 관리와 백성들이 그의 명을 잘 따랐다.
정유년(1597),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으로 해직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백성들이 관아의 문을 지키며 만류하자 관찰사가 백성들의 마음을 물어보고는 공의 해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경자년(1600), 마침내 해직되어 돌아왔다. 신축년(1601),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헌납에 올랐으며, 사헌부 지평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천거되어 이조 좌랑으로 들어갔다.
임인년(1602), 중궁(中宮: 중전)의 자리가 비자 선조께서는 공의 둘째 딸을 계비로 맞아들이고, 고사를 따라 관등(官等)을 뛰어넘어 돈녕부 도정에 임명하였다. 가을에 왕비로 책봉하고 공을 영돈녕부사 연흥부원군으로 봉하였다. 공은 날마다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스스로를 다스렸는데, 몇 달 사이에 수염과 머리가 다 하얗게 변했다.
왕비가 공주와 대군을 낳은 뒤에 가문이 날로 번성하였지만, 공은 본분에 맞게 편안히 지냈으며, 외척(外戚)이 조정의 정사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물러나 겸손히 행동하였으며, 교유하던 사람들과도 담을 쌓고 다시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오직 친척, 형제들과 화목하고 즐겁게 지냈는데, 청담(淸談)을 나누거나 간소한 술자리를 마련하여 담담하게 보냈다. 친척이 공의 높은 배경에 기대어 벼슬자리라도 얻으려고 하면 공은 대번에 끊어버렸으며, 혹 자신을 써주지 않는 것을 원망하는 사람이 있으면 공은 그 때마다 말하기를, “나의 작록(爵祿)은 실로 국가의 은택이며 선조들이 쌓은 덕분이다.
여러 집안이 모두 같은 조상의 후예인데, 어찌 존영(尊榮)을 함께 누리고 싶지 않겠는가. 다만 이전의 귀척들이 불초한 자제들에게 벼슬을 제멋대로 주어 패망한 경우가 많은 것을 보았으니 내가 감히 삼가지 않을 수 없다.” 하니, 듣는 자들이 훌륭하게 여겼다.
공은 집안 대대로 이어졌던 청고(淸苦)한 삶을 체득하여 부임한 관사에서 쓰고 남은 물건을 으레 나누어주면 비록 여러 사람들에게 드러내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반드시 지키는 관리에게 모두 주어서 관아의 창고로 되돌려 놓았다.
집안사람이 희롱하여 공에게 이르기를, “어찌하여 자손을 위한 계책은 마련하지 않습니까?”하자, 공이 말하기를, “녹봉과 임금이 내려 주시는 것 이외에 어찌 구차하게 취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관청의 창고에 저장된 것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으니, 조금도 사사로이 취해서는 안 되네.”하였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세 살도 되기 전부터 조모 강씨(姜氏)에게서 양육되었는데, 공은 조모를 어머니처럼 섬기면서 공경하고 순종하여 뜻을 거스르지 않았다. 열네 살 때에 강씨가 세상을 떠나자 공은 예법에 따라 거상(居喪)하면서 제사를 몸소 거행하였다.
모친이 병이 나자 공은 의대(衣帶)를 풀지 않았고 반드시 약을 맛본 다음에 올렸으며, 천지신명에게 빌고 기도하면서 정성을 다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예법에 지나치게 슬퍼하여 상장(喪杖)을 짚고 일어설 정도였지만, 도리어 채과와 염장을 먹지 않고 3년 동안 여묘(廬墓) 살이를 하였다.
비록 전쟁 속에 피난을 가는 와중에도 한 번도 제사를 거르지 않았고, 매번 제사 때가 되면 그 달 초하루부터 술과 고기, 연회를 가까이 하지 않았다. 귀한 신분이 되고 나서도 사모하는 마음은 더욱 독실하였다. 친족 중에 가난하여 선조의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자가 있으면 그때마다 제사를 지낼 수 있게 해 주었다.
공은 형제들과 우의 있게 지내며 의식(衣食)을 함께하였다. 누이가 병이 들어 위독해지자 공은 놀라고 당황하여 달려가 구하려다가 발가락이 부러져 피가 나는데도 깨닫지 못하였다. 자제들이 공이 밤새도록 병을 간호하는 것을 보고 대신할 것을 청하자, 공이 이르기를, “나와 누이가 모두 늙었으니, 오래도록 누이를 보살피고자 한들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의지할 곳 없는 생질들을 자기 자식처럼 보살펴주고, 그들이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을 주관하였다. 한 가지라도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형제자매를 생각하여 차마 혼자 배불리 먹지 못했는데, 집안사람들도 공의 뜻을 이어받아 비록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나누었다.
녹봉을 받으면 궁핍한 인척들에게 두루 나누어주고, 만일 친구의 상을 만나면 허둥지둥 급히 가서 도와주었다. 일찍이 여러 자식들에게 경계하기를, “무릇 교만하고 사치하는 마음은 부귀로 말미암아 생겨나지 않는 것이 없다. 높은 곳에 거처할 적에는 낮은 곳에 거처할 때처럼 하고, 화려한 옷을 입을 때에는 검은 옷을 입듯이 해야 한며, 행여 부귀하다고해서 남에게 교만하게 굴어서는 안 된다.”하였다.
평생 동안 굵은 베옷을 즐겨 입었고, 술과 여색, 노래 잘 하는 기생, 완호품, 개와 말 따위에 대해서는 조금도 마음을 두지 않았으며, 탈것이나 거처하는 집은 또한 구색만 갖추었을 뿐이다. 당(堂) 하나를 짓고는 홀로 그 곳에 거처하면서 좌우에는 서적을 두고, 뜰에는 꽃과 대나무를 가꾸어 놓고는 유유자적 거닐었다.
부인은 광주(光州)의 번성한 성씨 아무개의 따님인데, 순수한 덕과 유순하고 아름다운 행실이 있어 규방 안이 화목하였다. 부인은 복을 쌓고 덕을 심어 나라에 상서로움을 열어 우리 왕대비를 낳아서 한 나라의 국모가 되었다. 공의 장남 래(琜)는 청주 목사(淸州牧使)이고, 차남 규(珪)는 성균관 진사이며, 삼남은 선(瑄)인데, 모두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장녀는 현감 심정세(沈挺世)에게 출가 하였으나 먼저 죽었다. 왕대비는 정명공주(貞明公主)와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목사는 군수 정묵(鄭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2남 3녀를 낳았다. 아들은 주육(周六), 주칠(周七)이며, 장녀는 김광찬(金光燦)에게 출가하고, 차녀는 최여량(崔汝良)에게 출가하였으며, 삼녀는 아직 출가 전이다.
진사는 달성위(達城尉) 서경주(徐景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아들 한 명을 낳았다. 현감은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진(榗)이고, 딸은 백홍일(白弘一)에게 출가하였다. 내외의 증손(曾孫)으로 남녀 몇 명이 있는데, 모두 어리다. 공은 계축년(1613, 광해군 5) 6월 1일에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 52세였다.
공은 먼저 하옥되었다가 이날 죄수복 차림으로 안장 없는 말을 타고 도성의 서쪽 십자로에 가서 죽음을 당했다. 죽음에 임해서도 정신과 낯빛에 변화가 없었으며, 태연히 금오랑(金吾郞)에게 말하기를, “황천(皇天)이 위에 있으니 실로 이 마음을 비추어 볼 것이다.”하였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흐느끼고 남몰래 슬퍼하여 도로가 그 때문에 꽉 막혔다. 무리 가운데 어떤 사람은 외치며 말하기를, “아! 무고한 사람을 죽이는구나.”하였는데, 적신(賊臣)이 듣자마자 잡아서 죽였다. 집안사람들이 공의 시신을 수습하여 아무개 읍 아무개 언덕에다 묻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아무 월일에 아무 언덕에다 옮겨 묻었다.
아! 공과 같은 분은 부귀에도 잘 대처하였고 또한 환난에도 잘 대처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부귀가 공에게 행운이 아니라 다만 결국 재앙의 그물로 빠져들게 된 것은 세상의 운수가 불행해서 그랬던 것이다. 옛사람이 하늘의 도는 10년이면 돌아온다고 하였는데, 공에게서 징험할 수 있다. 삼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아! 하늘이 재앙을 내려 / 嗟天降割
운수가 중간에 막히니 / 世運中否
인륜이 손상되고 끊어져 / 彝傷倫絶
종묘사직이 불타는 듯 하였네 / 宗社如燬
역적이 움트듯이 일어나서 / 賊隷蘗牙
금주 당겨 거문고 줄 재촉하듯 / 絃促柱迫
동기를 죽이고는 / 同氣旣戕
국모를 폐위시켰네 / 母儀斯易
공은 당시 국구로서 / 公時國舅
바로 법망에 걸려들었네 / 迺罹于罟
화가 온 나라에 미치자 / 禍延一邦
백성은 원망하고 하늘은 노하였네 / 民怨天怒
이치는 본래 어긋나지 않으니 / 理固不僭
박괘가 다하면 복괘가 오는 법 / 剝盡則復
성군이 일어나 만물이 바라보니 / 聖作物覩
삼강이 다시 이어졌네 / 三綱再續
임금께서 말씀하시길 / 王若曰咨
내 마음 애통하다하시고 / 予心是䀌
아! 우리 공을 돌보시어 / 繄眷我公
제사를 내리고 작위를 주셨네 / 爵錫祭貤
깊은 원한 불쌍히 여기시고 / 愍茲幽冤
그 죽음 애도함이 성대하셨네 / 隱卒其殷
대비를 궁전에 받들어 모시니 / 奉引長樂
순 임금과 같고 문왕과 같다네 / 如舜如文
아! 불쌍한 이 동방의 나라 / 唉哀東土
예전엔 짐승이요 지금은 사람이라 / 昔獸今人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우며 / 父父子子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네 / 君君臣臣
임금께서 말하시기를 / 王若曰咨
그대가 공의 비명 지으라 하셨네 / 爾其銘公
공의 행적 비명에 합당하니 / 公行當銘
묘비가 풍성하도다 / 螭首其豐
공을 신원시켜 주시니 / 伊公之伸
임금의 덕 어지시네 / 王德之仁
신이 절하고 머리 숙여 / 臣拜稽首
공의 무덤을 꾸민다네 / 以賁公窀
<끝>
[註解]
[주01] 보국숭록대부 …… 신도비명 : 이 글은 김제남(金悌男, 1562~1613) 에 대한 신도비명이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언(恭彦),
시호는 의민(懿愍)이다.
[주02] 사미원(史彌遠)의 계책 : 사미원은 송 영종(宋寧宗) 때 시랑으로, 권신 한탁주(韓侂胄)를 건의해 죽이고는 그 자리에 앉아서 황후
양씨(楊氏)와 결탁하여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영종이 죽자 거짓 조서(詔書)를 칭탁하여 황태자 횡(竑)을 폐한 다음 이종(理
宗)을 옹립하고는 간사하고 아첨하는 자들을 등용하고 당시의 군자들을 모두 축출하였다. 《宋史 卷414 史彌遠傳》
[주03] 마침 …… 죽였다 : 박응서(朴應犀)의 옥사를 말한다. 광해군 5년(1613)에 대북파(大北派)가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이해에 조령(鳥嶺)에서 잡힌 도둑 박응서(朴應犀), 서양갑(徐羊甲) 일당을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등이 꾀어 그
들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역모하였다고 무고하여 화옥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사(賜死)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강화도(江華島)에 유폐(幽閉)되었다가 죽었다.
《燃藜室記述 卷20 廢主光海君故事本末 朴應犀之獄》
[주04] 계축옥사(癸丑獄事) : 광해군 5년(1613)에 대북파(大北派)가 박응서(朴應犀)를 사주하여 일으킨 옥사를 말한다. 박응서의 옥사
라고도 한다. 이해에 조령(鳥嶺)에서 잡힌 도둑 박응서(朴應犀), 서양갑(徐羊甲) 일당을 대북파의 이이첨(李爾瞻) 등이 꾀어 그들
이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이 역모하였다고 무고하여 화옥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김제남은 사사(賜死)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은 강화도(江華島)에 유폐(幽閉)되었다가 죽었다. 《燃藜室記述 卷20 廢
主光海君故事本末 朴應犀之獄》
[주05] 박괘가 …… 법 : 난세가 극에 이르면 치세가 다가온다는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이치를 말한다. 박(剝)은 《주역(周易)》 64괘
중 23번째 괘의 명칭으로, 음도(陰道)가 극성한 난세(亂世)를 상징하며, 복(復)은 24번째 괘의 명칭으로, 1양(陽)이 다시 생기는
치세(治世)를 상징한다.
[주06] 성군이 …… 바라보니 : 《주역》 〈건괘(乾卦) 문언전(文言傳)〉에,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르듯이 성인이 일어나면 만
물이 쳐다본다.〔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覩.〕”에서 유래한 말이다. <끝>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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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延興府院君兼五衛都摠府都摠管。贈諡懿愍。金公神道碑銘。幷序。
代家君作。
我聖上踐阼之初載六月己卯。上御經筵。進臣欽。若曰。王大妃殿下以國舅延興府院君神道之碑。命大提學銘之。卿勖哉。臣起拜稽首。辭不獲退。越二日辛巳。上降行狀而申命之。惟時臣聞命悸恐。竊惟聖上撥亂反正。克奠神人。母后復位。倫彝攸敍。孝順之德。優於大舜。而又克欽遵王大妃懿旨。命此顯刻。其上慰母后之心。下伸覆盆之冤。可謂至矣。賊臣爾瞻。在宣廟朝。以郞署小臣。有黨比亂政之漸。宣廟斥之。九年不敍。爾瞻讎視君父。而欲反之者非一朝一夕矣。萬曆丁未。宣廟大漸。爾瞻陰與鄭仁弘謀。搆柳永慶將有史彌遠之計。使仁弘上章。恣行離間。宣廟察其奸。竄仁弘,爾瞻。戊申。宣廟棄群臣。爾瞻遂柄國。誅永慶。又殺臨海君珒。連起大獄。屠戮宗室薦紳。欲及永昌大君。鍛鍊傅致。交訐百狀。會盜有殺人分貨者。有司捕治。爾瞻嗾人誘以逭刑封勳之說。捏誣上變。上侵母后。迺定廢黜之議。使其徒李偉卿,鄭造,尹訒倡於朝野。大行夷戮。先賜延興府院君死。遷永昌大君江華。偪殺之。盡逐先朝舊臣。國虛無人。爾瞻益無忌諱心。丙辰。發延興之藏。肆諸市。錮夫人于耽羅。栫之以棘。又使許筠,金開。繼踵煽亂。驅使廷臣。合辭請廢。終至貶削。斁紀滅常。環東土三千里。殆淪於縱目之域。吁亦慘矣。天睠我東。邦運中興。聖上以天啓三年三月壬寅。伐罪弔民。秪謁王大妃于慶運宮。翌日甲辰。卽位大赦。與國內更始。爾瞻,仁弘。若造若訒若偉卿。長弟伏誅。上親告廟社。存者復位。死者贈恤。於是敎吏曹。以國舅金悌男爲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延興府院君。夫人盧氏爲光山府夫人。遣中使承旨禮官迎置京第。改窆公以禮。官庀之。嗚呼傷哉。公字恭彥。延安府人。肇姓於新羅。其先有以直諫謫豉鹽城。豉鹽後改延安。子孫仍籍之。有諱暹漢。事高麗四門博士。歷四代至濤。游於牧隱之門。有文章節行。號蘿葍山人。恭愍王書大字以錫之。登元朝制科。宣授東昌府丘縣丞。東還陞密直提學。坐非辜以殞。士論哀之。是生自知。開城留後。諡文靖公。文靖生侅。內資寺尹。贈左贊成。贊成生友臣。知中樞府事諡胡簡公。贈領議政。議政生銓。領議政諡忠貞公。以淸白聞。於公爲曾大父。祖諱安道。官縣令。贈左贊成。考諱祦。司正。贈領議政。娶再室。俱封貞敬夫人。兩世推恩。皆用公貴。公卽後夫人權氏出也。公生於嘉靖壬戌。資稟端諒。幼而穎脫。旣長就學。精思審問。自持恭嘿。而論議不撓。乙酉中司馬。甲午選授義禁府都事。俄陞工曹佐郞。丙申除漣川縣監。時丁寇難。所在擾攘。而漣尤瘠。公單心撫治。遘棘刃解。吏民趨令。丁酉。捷巍科。以病乞解。民守牙門留之。方伯詢民情。不聽公去。庚子。竟褫歸。辛丑。拜司諫院正言。陟獻納。移司憲府持平。薦入爲吏曹佐郞。壬寅。中宮虛位。宣廟聘公第二女。用故超敦寧都正。秋冊王妃。封公領敦寧府事延興府院君。公日加祗畏。自牧以卑。數月之間。髭髮盡白。旣誕公主大君。門戶日盛。公安於素履。以后戚之家。不可干朝政。逡巡退讓。其所交遊。亦畫門墻不復進。公唯與族黨昆季。衎衎相樂。淸談小酌淡如也。親戚欲藉公重爲官。公頗裁之。或望其不售者。公輒曰。我之爵祿。實國家恩澤。祖先積德。諸族皆昭穆之裔。豈不欲共享尊榮。但觀前世貴戚。妄官不肖子弟。敗類者夥。吾不敢不愼。聞者多之。公克體家世氷蘗之業。所莅官司。例分羨餘。雖不對衆顯辭。必徐付守吏。反之公庫。家人戲謂公曰。獨不爲子孫計耶。公曰。祿俸上賜之外。何可苟取。況公家庫藏乎。尺寸不可私也。公少孤。未三歲。祖母姜鞠之。公事之如母。敬順亡違。十四姜捐世。公服喪以制。祀奠禔躬。母夫人疾病。日夜不解帶。必嘗藥而進。祈禳禱祠。莫不以誠。哀毀踰制。杖而後起。却菜果鹽醬。廬墓三年。雖在避兵中。一不廢祭。每遇諱日入月。不御酒肉宴樂。已貴孺慕彌篤。先祖之祭。族人貧不能辦者。輒行之。友于兄弟。衣食與共。姊嘗病革。公驚慌奔救。至折趾流血猶不覺。子弟見公侍疾終夜。請代之。公曰。吾與姊俱老。欲長侍姊。豈可得乎。甥姪之無依者。撫猶己出。尸其嫁娶。得一佳味。念兄妹不忍獨飽。家人承公之志。雖小必分。祿入徧賙窮族。如遇朋友之喪。匍匐救之。嘗戒諸子曰。凡驕侈之心。莫不由富貴而致之。處崇如處庳。服華如服緇。愼無以富貴而驕人。平生好衣大布衣。酒色聲伎玩好狗馬。一無留心。車騎垣屋。亦苟完而已。搆一堂。獨處其中。左右圖史。庭列花竹。逍遙自適也。夫人光州大姓某之女。有純德婉儀。閨梱之內穆如也。積慶種德。祥開于邦。誕我王大妃。母儀一國。公長子琜。淸州牧使。次珪。成均進士。次瑄。俱株纍癸丑之獄。殞于獄中。長女適縣監沈挺世。先歿。王大妃育貞明公主,永昌大君。牧使娶郡守鄭默女。生二男三女。男曰周六曰周七。女適金光燦。次適崔汝良。次未字。進士娶達城尉徐景霌女。生一男。縣監生一男一女。男曰榗。女適白弘一。內外曾孫男女若干人幷幼。公之不淑。在癸丑六月一日。得年五十有二。公先已下獄。是日囚服驏馬。就城西十字街遇害。臨死神色不變。從容謂金吾郞曰。皇天在上。實鑑此心。觀者歔欷暗傷。途爲之枳。有一人衆中嘖嘖曰。唉殺無辜。賊臣聞卽捕殺之。家人收葬公於某邑某原。至是用某甲遷厝于某原。噫。若公者可謂能處富貴。亦處禍難哉。富貴之於公。非幸。而乃顧終陷機辟者。世運之不幸歟。古人云天道十年而復。足徵于公矣。謹綴以銘曰。
嗟天降割。世運中否。彝傷倫絶。宗社如燬。賊隷蘗牙。絃促柱迫。同氣旣戕。母儀斯易。公時國舅。迺罹于罟。禍延一邦。
民怨天怒。理固不僭。剝盡則復。聖作物覩。三綱再續。王若曰咨。予心是䀌。繄眷我公。錫祭貤爵。愍茲幽冤。隱卒其殷。
奉引長樂。如舜如文。唉哀東土。昔獸今人。父父子子。君君臣臣。王若曰咨。爾其銘公。公行當銘。螭首其豐。伊公之伸。
王德之仁。臣拜稽首。以賁公窀。<끝>
樂全堂稿卷之十二 / 碑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