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요약]
■전신(全信)
1276년(충렬왕 2) - 1339년(충숙왕 복위 8)
고려 후기에, 보문각제학, 계림부윤, 복주목사 등을 역임한 문신으로, 본관은 천안(天安). 자는 이립(而立), 호는 백헌(栢軒). 밀직사를 지낸 전승(全昇)의 아들이다. 음서로 관직에 나아간 뒤 내의직장(內衣直長)으로 1301년(충렬왕 27) 문과에 급제하고, 다음해 숭경부승(崇慶府丞)이 되었다.
이어서 정방관(政房官)에 발탁되었고, 비서랑(秘書郞)에 올랐다. 1304년 국학직강(國學直講), 1307년 안동부판관, 1309년(충선왕 1) 전의부령(典儀府令), 1311년 김해부사, 1314년(충숙왕 1) 사헌장령·선부의랑(選部議郎)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317년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에 오르고 1319년 계림부윤, 1321년 복주목사(福州牧使)를 지낸 뒤 면직되었다.
1330년(충혜왕 즉위년) 감찰대부 진현관대제학 상호군(監察大夫進賢館大提學上護軍)에 올랐고, 다음해 동지밀직사사 상의 회의도감사(同知密直司事商議會議都監事)가 된 뒤 1332년(충숙왕 복위 1) 은퇴하였다. 성품이 엄격하고 근면하였으며, 집이 가난하였으나 산업에 뜻을 두지 않았다.
일찍이 백이정(白頤正)·김제안(金齊顔)·이제현(李齊賢) 등 현사들과 교의(交誼)가 두터웠으며, 또한 최해(崔瀣)와도 친교가 있었으므로 전신의 묘비문을 썼다. 충청남도 천안의 검계서원(儉溪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집필자 : 이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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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제123권 / 묘지(墓誌)
전백헌 묘지(全栢軒墓誌)
최해(崔瀣) 찬(撰)
지원(至元) 대덕(大德) 연간은, 위로 천자의 밝음이 있어 천하가 태평하고, 태사(太師) 충렬왕은 대를 이은 공신이요, 가까운 인척의 중한 위치로 동방을 다스린 지 35년이었다. 이때 선비의 풍습은 충후(忠厚)하여 권하지 않아도 스스로 학습하며, 중국의 조정에 가서 벼슬하는 자는 말할 것 없지만 와서 우리나라에 벼슬하는 이들도 모두 조심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면서 경박하고 간사한 일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런데 2, 30년 이래로 세속의 풍습이 날마다 무너져서 무엇으로 막을 길이 없으며, 간혹 가다가 당시의 사실을 들어 말하는 자가 있으면 비웃고 손가락질하여 고루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으며, 전의 늙은이들이 법을 잡은 이가 오히려 있었지만 요즈음은 또 연이어 세상을 하직하여 그 옛날의 유풍이 아주 없어지니, 아, 한탄스러운 일이다.
작고한 첨의재상(僉議宰相) 전공(全公)은 선왕을 섬긴 한 사람이었다. 공은 근후한 군자로 휘는 신(信)이요, 자는 입(立)이다. 선대는 천안부(天安府)가 본향인데, 태복 소경(太僕少卿) 휘 세주(世柱)와 합문지후(閤門祇候) 증 좌복야(贈左僕射) 휘 인량(仁亮)과 밀직사 대보문(密直司大寶文) 휘 승(昇)은 공의 3대 조부와 아버지이다.
선부인 최씨(崔氏)는 대재 문청공(大宰文淸公) 휘 자(滋)의 손자로 제안군(齊安郡)을 봉하였다. 공이 처음 벼슬하게 된 것은 아버지의 임직에 의해서이며, 대덕 신축년(충렬왕 27년)에는 내시관 내의 직장(內衣直長)으로 과거에 나가 합격하였다. 다음해에 숭경부 승(崇慶府丞)에 제수되었으며, 그대로 정방관(政房官)에 참여하고 다시 전직하여 비서랑이 되었다.
갑진년에 국학 직강에 보직되어 금자(金紫)의 복장을 하사받았으며, 정미년에는 나가 안동부 판관(安東府判官)이 되었다. 지대(至大) 기유년(충선왕 1년)에 전의부령으로 불러들였는데, 관품은 봉상대부로 가자되었으며, 세 번 벼슬을 고쳐 총랑의랑이 되었다.
신해년에 나가 김해 지부(金海知府)가 되었으며, 다음해에 성안부(成安府)로 옮겨지고, 또 2년 만에 수원부(水原府)로 옮겨졌다. 연우(延祐) 갑인년(충숙왕 1년)에 사헌 장령으로 불러들였으며, 헌부ㆍ선부(選部)의 의랑으로 전직되었다.
정사년에는 보문각제학 봉순대부 판내부시 숙녕부우사윤 지제교 지민부제거 유비창 겸 선군별감사(寶文閣提學奉順大夫判內府寺肅寧府右司尹知製敎知民部提擧有備倉兼選軍別監使)에 제수되었으며, 기미년에 나가 계림 부윤(鷄林府尹)이 되고, 신유년에 복주 목사(福州牧使)로 옮겼다.
태정(泰定) 갑자년(충숙왕 11년)에 면직되었으며, 지순(至順) 경오년(충숙왕 17년)에 등용되어 감찰대부 진현관대제학 상호군에 임명되었는데, 관품은 봉익(奉翊)이었다. 다음해에는 감찰을 파하고 동지밀직사사 상의회의도감사가 되었다. 임신년에 또 파직당하고, 한가히 거처한 지 8년 만에 세상을 떠나니, 이때가 후지원(後至元) 기묘년(충숙왕 복위 8년) 7월 7일이요, 춘추는 64세였다.
부인 이씨는 상당군(上黨郡)에 봉하였는데, 판도 총랑(版圖摠郞) 휘 창우(昌祐)의 딸이며 먼저 세상을 떠났다. 또 김씨에게 장가들었는데 함창군(咸昌郡)으로 봉하였으며, 신호위 대호군(神虎衛大護軍) 휘 효진(孝進)의 딸이다. 아들 성안(成安)은 사의서 승(司儀署丞)이 되었으며, 그 다음은 출가하였는데 이름은 희찬(希璨)이고 조계종의 중이 되었다.
그 다음 불로(佛奴)는 아직 벼슬하지 않았다. 딸은 맏사위가 전 종부 영(宗簿令) 한대순(韓大淳)이며, 다음 사위가 행중서성 지인(行中書省知印) 이충인(李沖仁)이고, 다음 딸은 어리며, 손자 한 명도 어리다. 공의 선친 밀직은 선왕조에서 왕의 가까운 자리에 있으면서 제품(題品 정치ㆍ인물의 평정)을 맡았었는데, 사람들이 그 공평한 것을 칭찬하였으며, 공이 이어 그 자리에 들어가서도 또 그 아버지와 같다고 하여 중히 여겨졌다.
얼마 안 가서 왕이 친히 정사하는 데에 게으르니, 공은 나가서 고을을 맡았으며, 후에 자주 벼슬이 갈려 높은 자리에 이르렀지만 그의 정사의 업적은 밖에 많이 있었던 것으로서 떠난 다음에도 백성들이 더욱 생각하였다. 최후로 헌부(憲府)를 맡아 주관하면서, 늙은 탐관 두어 명을 들추어 내고, 하인 무리들이 세력을 남용하면서 그 원역(元役)의 문서를 불태워 벗어나려는 자를 억제하여 허물어진 기강을 좀 떨쳤지만 1년도 되기 전에 파면되었다.
공을 모든 일을 처리하는 데에 능력을 다하는 데에 힘쓰고 엄중하게 처리하기 때문에 청탁이 행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집안이 가난하지만 또 살림하는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아, 이것이 군자가 된 까닭일 것이다. 만년에 스스로 백헌(柏軒)이라 하니, 날씨가 찬 뒤에도 시들지 않는다는 뜻으로 붙인 것이다.
이재(彛齋)ㆍ죽헌(竹軒)ㆍ익재(益齋) 세 선생과 더불어 친교가 매우 깊었으며 서로 모일 때마다 나를 미치고 비루하다 하지 않고 데려다가 함께 놀았기 때문에 조용히 마주 대할 수 있었다. 성안(成安) 등이 8월 28일로 날을 정하고 서울 동쪽 선흥사(禪興寺) 뒷 골에 옮겨 장사 지내려 하니, 남쪽으로 부인 이씨의 묘와 몇 보 거리이다. 명문에 대한 부탁을 받고 어찌 감히 사양할 것인가. 명문에,
아, 나의 글을 / 噫予之文
무엇 때문에 스스로 감출 것인가 / 奚以自祕
때로는 사람을 위하여 / 亦或爲人
무덤길에 명문을 새기기도 하네 / 刻銘于
그의 뜻 어기지 않으려 함이지 / 意在重違
이 내 글이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 / 詞豈無媿
공의 생애를 생각하면 / 追惟公生
의 아닌 일 하기 부끄러워하였는데 / 恥蹈非義
재주 없는 이 몸이 / 第短於才
글로 다하지 못할까 두려워라 / 書懼未備
황천길 멀고 멀지만 / 泉臺冥冥
전과 다름없이 보아주시리 / 尙視不異
하였다.
ⓒ한국고전번역원 | 김용국 (역) | 19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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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全柏軒墓誌
至元大德間。上有天子之明。四海乂安。而太師忠烈王。以世勳懿戚之重。坐鎭東方三十有五年。是時士習忠厚。不勸自修。其登天朝者。已不在論。降而仕於王國。人皆謹飭。恥爲浮薄邪僻之行。自三二十年來。俗風日潰。無隄可遏。間有擧其當時事者。莫不嗤點以爲固然。見遺老典刑猶在。近又相繼隕謝。風流頓盡。嗚呼。可勝嘆也哉。故僉議宰相全公。其逮事先王者。公謹厚君子人也。諱信字而立。先世天安府籍。太僕少卿諱世柱。閤門袛侯贈左僕射諱仁亮。密直使大寶文諱昇。公三世祖父也。先夫人崔氏。大宰文淸公諱滋之孫。封齊安郡。公之始仕用父任。大德辛丑。以內侍內衣直長。赴禮闈登科。明年除崇慶府丞。仍豫政房官。再轉爲祕書郞。甲辰試國學直講。賜服金紫。丁未出爲安東府判官。至大己酉。以典儀副令召。階加奉常大夫。三改官爲揔郞議郞。辛亥出知金海府。明年移成安府。又二年移水原府。延祐甲寅。以司憲掌令召。轉讞部選部議郞。丁巳授寶文閣提學奉順大夫判內府寺肅寧府右司尹知製敎知民部提擧有備倉兼選軍別監使。己未出尹雞林府。辛酉徙牧福州。至泰定甲子免。至順庚午起拜監察大夫進賢館大提學上護軍。階奉翊。明年罷監察。爲同知密直司事啇議會議都監事。壬申又罷。閑居八年而歿。實後至元己卯七月七日也。春秋六十有四。夫人李氏封上黨郡。版圖揔郞諱昌祐之女。先卒。又娵金氏封咸昌郡。神虎衛大護軍諱孝進之女。男成安爲司儀署丞。次出家名希璨。爲曹溪僧。次佛奴未仕。女壻前宗簿令韓大淳。次壻行中書省知印李沖仁。次幼。孫一人亦幼。公之先密直。在先王時。處邇密掌題品。人稱其平。及公繼入。又以克肖見重。未幾王倦親政。公出爲郡。後數更官。雖至華顯。而其政迹多在於外。民去益思。最後主憲府。發老贓數人。抑隷竪擅勢。欲焚其元役之籍以脫者。稍振頹綱。而未一年罷。公凡莅事。務盡己而以嚴重處之。故請謁不得行。其家貧。又不以生産爲意。嗚呼。此所以爲君子者矣。晚自號柏軒。以寓歲寒後凋之意。與彝齋,竹軒,益齋三先生。交甚懽。每相會。不以予爲狂鄙。引與游。故得接從容焉。成安等。卜用八月二十八日。將擧柩遷葬京東禪興寺之後洞。南距夫人李氏之墓若干步。見託以銘。其安敢辭。銘曰。
噫予之文。奚以自秘。亦或爲人。刻銘于隧。意在重違。詞豈無媿。追惟公生。恥蹈非義。第短於才。書懼未備。泉臺冥冥。尙視不異。<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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