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세계
히11:1~16
오늘 본문 말씀 히11장은 성경에서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믿음이 뭐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확신(實像.實底)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3절 하반 절에서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나타나 있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말은 우리 눈에 보이는 물질세계는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 믿음 때문에 우리의 실제적 생활에서 드러나고 나타나게 되고. 내 자신이 달라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믿음이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인데 보이지 아니하는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 모든 물질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고 우리 눈에 보이는 것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으로 만들어져 나타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다시 설명하면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가 있는데 보이는 세계는 모두가 보이지 않은 것으로 말미암아 비롯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믿음의 세계는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믿는 것이지만 그 믿음은 우리의 현실에서 열매로 나타나고 내 삶을 통해서 증명이 된다는 이런 이야기입니다.
제가 두 세 차례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물질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아니한 것으로 구분이 됩니다. 보이는 세계를 물질계라고 하고 보이지 아니 하는 세계를 비 물질계라고 합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물질 생물계나 무생물계나 다 물질만으로 만들어졌지만 우리 인간만은 물질과 비물질로 하나님이 만들었습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물질로 사람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서 그 코에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 생기를 불어 넣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물질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생명이 떠나간 시체는 확실한 물질입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은 물질이 아닙니다. 그래서 존중받아야 하고 대접받아야만 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집어 던지거나 밀어내면 아니 됩니다. 이것은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것입니다. 강제로 차에 싣고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아도 아니 됩니다. 남의 집에 강제로 들어 왔더라도 좀 나가 주십시오. 라고 정중하게 부탁을 해서 스스로 나가게 해야 합니다. 하여튼 보이는 세계는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의 그림자이고 열매입니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자연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arche)를 찾아서 자연 현상을 규명라려고 했습니다. 탈레스 “물이 만물의 근원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불이야말로 만물의 근원이다.” 데모크리토스 “원자가 만물의 근원이다.” 피타고라스는 “數가 만물의 근원이다”
근대 철학에서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탐구가 철학의 핵심내용입니다. 모든 우주만물이 신의 그림자라는 사실은 소크라테스 이전이나 지금 이나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자연만물은 신의 그림자라는 말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데카르트를 기점으로 근대철학에서는 인간의 이성에 대한 탐구가 철학의 중심이지만 아직도 자연은 신의 그림자이고 인간의 이성의 근거이자 주관자가 신이라는 말이 철학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영미철학에 큰 영향을 끼친 경험론자 로크가 도덕은 복음에 근거한다고 했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인간이성의 절대성 혹은 판단의 완전성을 위해 신은 언제나 그 대리인자로 보증자로써 등장합니다. 우리가 직관적으로 인간의 이성과 신은 서로 배척할 것 같지만 결국은 서로 만나게 됩니다. 인간의 이성이나 과학은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자연의 법칙을 수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찾아내어서 증명하는 것이지 창조해 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으신 물질의 법칙을 과학적으로 이성적으로 활용하여 새로운 형상(물체)를 만들어내는 것은 재생이나 활용이지 창조가 아닙니다. 이것을 우리는 발명이라고 합니다. 發明? 자연의 법칙을 이용하여 전에 없었던 물건을 찾아서 세상에 밝혔다는 뜻이 발명이라는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확신)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정의를 내리고서 이 세상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 된 것인데 우리 인간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그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이 세계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이고, 보이는 세계보다는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가 더 소중한 것인데 믿음이란 더 소중한 세계를 바라보고 믿고 소망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보이는 세계는 물질세계이고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는 비물질세계 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의 그림자이고 실상이고 열매입니다. 한문 성경에서는 實底= 근본, 밑바탕이라고 했습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보다도 훨씬 더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들입니다. 꿈과 야망 비젼이 없는 사람은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려고 하면 남녀가 만나서 사랑으로 신뢰하고 살아야 하는데 남편은 아내를 의심하고 아내는 남편을 의삼하고 살면 행복한 삶을 꾸려나갈 수가 없습니다. 믿음과 신뢰는 행복의 근거입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의 정수는 자신이 믿는 그 믿음으로 끝을 보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번 주 목요일이 광복절입니다. 1910년 한일합방이되자 일부 친일파들을 제외하고서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독립을 꿈꾸면서 항일운동을 전개 했습니다. 가슴에 품고 있던 독립의 꿈이 1919년 3,1독립운동만세사건으로 전국에서 물결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나 1920년대가 다 지나도 어떤한 조짐이나 변화가 없고 오히려 친일파들만 승승장구하면서 잘살고 있습니다. 그러자 1930년대를 지나면서 약삭 빠른 국민들은 현실을 직시하고 일본 사람들 밑에서 친일파들 밑에서 굽신거리면서 호화호식을 누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목사들도 이러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까운 부산 신사참배 앞장선 김길창목사는 일본에 협조하면 엄청난 부를 거머쥐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남성재단입니다. 남성초중고등학교 계성여상 경성대학교 등등. 남성, 훈성, 한성, 대동, 금성, 건국. 창신학원등이 김길창목사가 이사장이었다. 김길창목사는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바라보지 못하고 보이는 세계만을 직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친일파들의 후손들이 우리 사회 속에서 더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친일파들의 후손들은 재력과 세상 지식과 기득권을 조상들로부터 물러 받은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금수저들입니다. 경제와 언론과 정치적인 권력까지도 기득권을 누리고 있는 자들이 친일 후손들입니다. 왜 우리 사회에서 친일후손들이 승승장구했을까요. 미국이 신탁통치가 국민들의 저항에 부딪치자 독립운동가 중에 유일한 미국파 이승만. 상해 임시정부에서 탄핵당한 대통령 이승만을 앞장 세워서 일반 국민들을 좌익으로 몰아붙이는 여론전을 전개하고,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승만 지지세력을 규합하기 위해서 친일파들과 손을 맞잡고 속전속결로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강행한 것입니다. 신탁통치가 무산되자 미국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기 위해서 국민들에게 속임수를 쓴 것입니다. 이명박정부가 8월15일을 건국일로 제정하려고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 친일 후손들입니다. 그래야만 자신들이 친일 프레임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건국의 일등 공신들이 되기 때문에 8월 15일을 건국일로 제정하려고 밀어 붙였지만 국민들의 저항에 꼬리를 내리고 말았습니다.
우리 기독교의 신앙은 보이지 아니하는 것을 믿고 바라보고 소망하며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돈과 물질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애정과 배려하는 사랑으로 현실에 만족하지않고 보았던 세계나 보이는 세계가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고 신앙입니다.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신 예수님이 아직도 오시지 않았지만 다시 오실 메시아를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는 보이는 세계보다 더 소중합니다. 속이 깊은 사람들은 보이는 현실만 직시하지 않고 보이지 아니하는 상대방의 마음을 읽어내는 지혜가 있습니다. 물질세계에서도 보이는 물질보다 보이지 아니하는 물질이 더 소중한 것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수많은 원소들. 보이지 아니하는 산소, 질소, 탄소, 그리고 원소를 이루는 핵 , 이러한 것들이 소중한 것들입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전자나 전파 얼마나 소중한지 모릅니다. 갑자기 우리가 전자시스템이나 전파 시스템을 이용할 수 없어지면 지구상에 대혼란이 얼어납니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전자시스템이나 전파 시스템, 열감지시스템이 우리 인간들 생활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을 우리가 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만 믿고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위해서 무조건 고향과 친적을 떠나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일제침략 초창기에는 대부분의 지성인들이 독립운동의 꿈을 꾸었으나 10년이 지나고 20년이 지나면서 현실을 직시하면서 독립의 꿈을 접고 친일로 기울어졌습니다. 학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목사님들이 친일로 기울어졌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믿음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바라보면서 독림의 꿈을 접지 않고 투쟁한 사람들은 우리 기독교인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감리교회 상도동교회입니다. 일반 세상 사람들 중에서 독립의 꿈을 접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의 꿈을 펼치기 위해서 서울 우리 감리교회 상도동교회로 몰려들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과학과 경혐과 이성으로 현상세계를 바라보지만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믿음으로 바라보며 체험할 수 있는 세계도 있습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를 결국은 지배하게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보이는 세계, 현실을 믿고 사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자들이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현실이 지금은 일본보다 못하지만 장래에 반드시 일본을 지배하게 된다는 미래가 있는 민족은 반드시 그러한 현실을 만나게 됩니다. 저는 흑인들이 아직도 미국 사회에서 차별을 받지만 언젠가는 흑인들이 미국사회를 지배하고 세계를 지배하게 되리라고 봅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는 믿음으로 바라보아야만 볼 수 있고 체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이는 것만 현실만 직시하면 우리의 미래가 사라집니다. 보이지 아니 하는 미래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미래도 있고 현재도 주어집니다. 믿음은 보이지 아니하는 세계를 바라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우리의 고막을 울리지는 않습니다. 내 생각과 마음에 고막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보이지 아니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살아가는 복이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2019년 8월 11일
푸른교회 담임목사 박 영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