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베이징의 쯔진청紫禁城으로 잘못 들어선 줄로 알았다. 때마침 중국의 설인 춘제春節를 맞아 얼마나 많은 중국 관광객인 유커游客들이 한국으로 몰려 왔으면 경복궁을 완전히 점령당한 기분이 들었을까. 출장용무가 일찍 끝나는 바람에 하늘은 약간 흐린 데도 난 경복궁으로 향했다. 조선시대의 왕궁 근무자 교대식을 재현하고 있는 광화문 앞마당에서부터 근정전까지 짧은 거리를 이동하는데도 왕 서방네 사람들 천지다.
그들은 흡사 불난 호떡집을 만난 듯 왁자지껄 떠들어대면서 정신을 빼앗아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들에게 자리를 내주고 다 어디로 갔을까. 동남아나 중동에서 온 얼굴들도 빠지진 않았지만 미국이나 유럽 에서 온 서양인들처럼 가뭄에 콩 나듯 띄엄띄엄 보인다. 셀카봉 촬영에 익숙한 젊은 유커들은 땅바닥에다 미련하게 카메라의 삼각대를 세우는 나를 흘깃 훔치고는 '갈 때가 다된 노인네가 어디에 쓰려고 저러나' 하는 눈길로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세계 전사에 일대 사건으로 기록된 ‘흥남철수’도 저 젊은 유커들의 할아버지나 또 중년에 이른 이들의 아버지들이 전쟁에 뛰어들면서 생긴 비극이었다. 65년 전 눈보라 속의 전장에서 중공군으로 참여했던 병사들은 오늘날과 같이 번영된 한국의 고궁을 한가로이 관광으로 자신의 후손들이 밟을 것을 꿈에라도 생각했을까. 건망증이 심한 내가 호젓하게 걷는 청년들을 마주칠 때마다 말을 걸었다가 멀뚱한 표정만 짓는 것을 보고 이내 수습하곤 했다. 그들도 모두 우리나라 청년들이 아닌 젊은 유커들이었다.
경복궁엔 우리나라 최초로 1887년에 발전기를 설치하여 전기를 사용했던 '전기발상지' 표지석도 몇 년 전부터 들어섰다. 내가 지금 속해 있는 전력회사 은퇴자 단체에서 이곳을 찾는 내외국인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세운 것이다. 유커들은 이곳에서도 줄을 늘어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 국민들보다 이곳에 더 큰 관심을 보이는 것 같았다. 그런데 1960년대 초반에 전력회사에 발을 디뎠던 나도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에야 비로소 전기발상지에 관한 내용을 그림으로 처음 접했다.
그 오랜 세월 안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6.25동란이 있긴 했지만 우린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발굴하여 보존하는데 민첩하질 못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무려 128년이란 세월이 흐른 뒤에야 유물을 출토했기 때문이다. 기록은 이곳을 전기등소電氣燈所로 적고 지금까지 잘못 알려졌던 발전소 위치를 향원지 남쪽과 영훈당 북쪽 사이로 확인했다. 이곳에서는 석탄창고와 발전소 터 흔적이 나타났고 아크등에 사용했던 탄소봉과 ‘1870’이란 연대가 적힌 유리 절연체 유물도 출토되었다.
‘예禮로 지은 경복궁’이란 책을 펴낸 현직 건축학 교수는 고궁을 분석하면서 책 제목에서처럼 ‘예’에 관한 얘기를 들려준다. 저자는 경복궁을 설명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큰 중국의 쯔진청과 비교했다. 규모로 비교하면 경복궁이 약간 작지만 조선시대의 한양 내 궁궐을 모두 합치면 쯔진청의 무려 두 배 반이나 된다. 저자는 또 경복궁에는 미학을 넘어 시대의 사상까지 담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울림과 겸양의 미학으로서의 ‘예’를 물성화한 상징이 경복궁이라는 것.
동양사상의 핵심인 도덕과 교훈이 중심이 된 인의예지仁義禮智에도 부합된다는 것이다. 서양건축과 비교하면서 서양은 이상을 모방하면서도 형식에 치중한 반면 동양은 인간의 성정을 강조했다는 분석도 내놨다.
경복궁 설계는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정도전이 맡았다. 그는 정치인이자 성리학 학자였다. 그런 연유로 경복궁에 한 나라의 구심점이 되는 왕, 즉 개인의 품격에 해당하는 중中과 주변과의 조화와 어울림, 백성의 사랑을 뜻하는 화和를 담았으니 그것을 ‘예’의 가치로 본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복궁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어떤 것일까. 경복궁은 현대를 살면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웃과 함께 사는 마음을 잃고 서로 적이 되고 부정한 방법으로라도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바쁜 사람들. 경복궁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본분과 사랑, 희생을 강조하는 ‘예’의 정신을 담고 있다면 우리가 선뜻 이해할 수 있을까. 중국의 거대도시 베이징을 찾을 때마다 관광코스에 빠지지 않고 들어있는 쯔진청을 몇 차례나 둘러보면서도 경복궁의 근정전이나 경회루, 향원정처럼 카메라에 담을 만한 빼어난 풍광을 만나지 못하는 것이 늘 아쉬웠다.
쯔진청의 구심점이라는 타이허뎬太和殿도 다르지 않았다. 향원정과 연못을 배경으로 내가 오늘 경복궁을 찾은 기념을 남기려고 카메라 삼각대 위치를 이리저리 맞추고 있을 때 핸섬한 청년 둘이 다가왔다. 그 중 한 젊은이가 "어르신, 제가 찍어드릴까요?"라며 웃는다. 구도는 이렇게 잡아달라고 주문하려는데 그냥 서시기만 하란다. "파이팅도 한번 하셔야죠!" 불과 이삼 분 만난 그들로 인해서 그때까지 처져있던 기분이 금세 부풀어 오른 듯하다. 하늘은 여전히 무거운 구름을 드리우고 있었다.
첫댓글 우리는 언제 중국 베이징 인민광장을 점령할 수 있을까요? 안타깝고 불쌍합니다. 南岡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저출산일 것 같습니다. 청년백수 100만 시대라니 결혼도 쉽지 않고 육아에 드는 비용 또한 턱없이 높아 출산도 어려운 실정이니 이래저래 걱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관심 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