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나무를 건축소재로 이용하여 특이하게 쓰인 경우가 있다
대표적인 예로는 경북 안동의 무량사 배흘림기둥,충남 개심사의 심검당,전남 화순의 물염정,화엄사 구층암의 모과나무 기둥,
그리고 소개하고자 하는 합천의 호연정이 그러하다
나무의 휘어짐 그대로를 자연스럽게 건축물 소재로 끌어들여 자연속에 더불어 삶을 살고자 했던 주이선생의 자연관을 엿볼수 있으며 건물은 정면 3칸,측면2칸의 익공식(翼工式)팔작지붕형태이지만 다양한 양식이 혼합된 매우 독특한 형태다. 이처럼 기묘한 건축방식때문에 조선시대 정자중 특이한 작품중의 하나로 꼽힌다
각부분의 자재사용은 일반건축에서는 볼수없을만큼 인공적 절제나 질서를 무시한 채 자연그대로의 모습을 재현하였다.
건물 주인의 건축관과 건물이름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혹자는 "천재의 도발성"이라 하지만 그 시절(조선시대)에 봐서는 확실히 도발적이고 과감한 건축소재라 볼수있는것이다
충남 개심사의 심검당,구례 화엄사 구층암의 모과기둥에 이어 합천 호연정을 탐방하였다
▲ 호연정 배치도
합천 호연정을 찾아가는 길은 네비에 주소를 치고 찾아가는것이 수월하다
공식명칭 : 호연정
종 목 : 시도유형문화재 198
지 정 일 : 1981.12.21
한자명칭 : 浩 然 庭
주 소 : 합천군 율곡면 문림리
조선 선조(재위 1567∼1608) 때 예안현감을 지내던 이요당 주이 선생이 관직에서 물러나 이곳에 호연정을 짓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불탔으나 후손들이 그의 덕을 추모해 다시 지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1층 건물로 지붕 옆모습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지붕 밑에 휜 나무를 그대로 사용했는데, 마치 꿈틀대는 용 같아서 장식적 효과가 크다. 전체적으로 부재가 장식적이며 두 가지의 건축양식을 혼용해 쓰고 있어 건물구조에 변화가 많다. 정자 주변은 주이가 직접 심었다는 여러 그루의 대나무에 둘러싸여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문화재청 펌)
▲호연정의 입구
흙담장너머로 기세등등한 은행나무의 웅장함에 주춤한다
▲다소 허접해보이는 입구인 인지문(仁智門)을 들어선다
주이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대나무가 입구쪽에 무성히 자라있다
▲인지문을 들어서자마자 낮은 돌계단을 밞고 오르면 호연정이 바로 보인다
▲호연정(浩然庭)
호연정은 사물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마음을 나타내는 호연지기(浩然之氣)에서 나온 뜻이라 하고
그의 성품을 나타내는 말이라고도 한다
조선시대의 사대부들은 때를 만나면 조정에 나가고 그렇지 않으면 귀향하여 자연을 벗삼아 지냈다
이때 귀향한 사대부들이 공들여하는 일중의 하나가 정자(亭子)를 짓는 것이었다
조선중기 이요당 주이(周怡 1515~1564)가 선조때 예안현감을 사직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들을 교육하던 곳이 바로 호연정임.
본래의 정자는 임진왜란때 불타버려 후손들이 인조때 중건후 1711년에 다시 지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정자는 협소한 계곡쪽에 자리를 잡고 있지만 이 정자는 먼곳을 조망할수 있는 누각(樓閣)처럼 경관을 넓게 볼수 있는 곳에 지었다.이를 통해 건립자의 자연관을 볼 수 있다.뿐만 아니라 호연지기를 기른다는 명칭과도 잘 어울리는 자리라고 하겠다.
▲ 호연정의 정면
처마밑,호연정이라 적힌 현판아래에 정면과 양쪽 측면에 휘어진 나무를 써서
마치 용이 꿈틀대는 듯한 형태로 생동감이 느껴진다
▲공포와 기단석
처마밑 공포는 화려한 조각과 기단의 앞면은 화강암장대석을 만들어 기둥을 올리고...
▲호연정 뒷면
뒷면은 창을 내고 자연기단석위에 건축물을 지었다.뒷뜰에도 공간이 넉넉해보이고 나무를 심어 가꾸었다
▲호연정 측면(팔작지붕)
▲뒷면에서 들여다본 정면측
▲시원스럽게 창을 낸것처럼 기둥과 기둥사이로 바깥전경이 보이도록 하였다
▲ 내부로 들어가서 천정을 올려다보니
여기도 휘어진 나무를 소재로 삼아 솜씨를 부려놓아 목수의 뛰어난 감각을 보는듯하여 그저 감탄만 할뿐....
▲아호 이요당(二樂堂)은 지자요수(知者樂水),인자요산(仁者樂山) 에서 인용한 것이라 함.
논어 옹야편에 나오는
子曰 知者樂水 仁者樂山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하니
知 者 動 仁 者 靜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고 어진사람은 정적이며
知 者 樂 仁 者 水 지혜로운 사람은 인생을 즐기고 어진 사람은 장수한다
즉 지혜로운 사람과 어진 사람을 물과 산에 견주어 설명한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모든 이치에 통달하여 막힘없이 흐르는 물과 같고
어진 사람은 의리에 밝고 산과 같이 중후하여 쉽게 마음이 변치않는것이 변함없이 한자리에 있는 산과 같다
주이선생은 예안현감을 사직한후 고향 문림(文林)으로 내려와 호연정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며 자연을 벗삼아 살았다고 한다
당숙(堂叔)인 주세붕과 퇴계이황선생과도 교류를 하셨다고 전해져 오고, 당숙인 주세붕선생이 어릴적에 주이선생을 무릎위에 앉혀서 "네가 장차 우리 집안의 가둥이다"라고 하셨다 합니다.어릴적부터 총명한 주이선생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집니다
퇴계 이황선생이 신재집(愼齊集)을 교정하다가 잘못된것이 있으면 제자를 시켜 "글 가운데 적당하지 않는 부분이 있거든 예안공(禮安公,이요당을 말함)과 상의하여 처리하라"고 하였다 하니 이요당의 뛰어난 학식이 어느정도인지 짐작이 갑니다
문림마을은 고려말,조선초기에 형성된 상주 주씨 집성촌으로 600여년의 역사가 넘는 마을입니다
마을이름 문림은 원래'민갓' 또는 '문갓' 으로 불렀는데 조선시대 중종임금이 주세붕에게 출생지를 물어보니 '민갓'이라 하였더니
선비가 숲같이 많아 나라는 뜻으로 "문림(文林)"으로 하사했다'고 합니다
▲ 건축의 모서리부분인 공포끼리 연결하는 부재가 독특하게 연결시켜놓았다
▲ 천정의 주두와 도리에서 이어진 부재가 지붕의 무게를 분산시키는 역할을 하며 기교를 부린듯...
예술성과 창의력을 접목시켜놓은듯 보인다
▲기둥 대들보
무슨 나무인지 찬찬히 보아도 문외한이라 잘 모르겠다 .
나무표면이 매끈하고 뒤틀림이 거의 없으며 균열도 잔금을 제외하곤 거의 없는 편이다
조선중기때 만들어진 건축물이라 하는데 거의 원형보존에 손색이 없는것같다
▲ 뜰에는 다수의 배롱나무와 은행나무, 느티나무,울타리쪽에 대나무등이 주인없는 정원에서 쓸쓸히 지내고 있다
상주 주씨 문중에서 관리한다고 하나 찾아갔을때에는 여름철이라 그런지 손질되지 않은 잡풀이 무성히 자라고 있어
더욱 사람발길이 드물다는 것이리라
고즈넉한 호연정에 매미만 목청껏 울어댄다
▲호연정 중수기
▲ 세덕사 담장너머로 배롱나무가 꽃을 피워 호연정의 여름을 알리고 있다
정문인 인지문을 지나면 경내에 호연정,비석,사당인 영묘사,세덕사가 있고 또 다른 출입문인 인지문을 통과하면 관리실이 있다
▲영모사(상주 주씨 시조의 위패를 모셔놓은곳)
▲바깥 담장에서 바라본 세덕사(조상의 위패를 모셔놓은곳) 전경
▲세덕사와 배롱나무
▲주이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400년은 족히 넘을듯...암,수 은행나무 두 그루가 양측에 각각 자라고 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며 살아온 나무의 거대한 줄기는 여전히 이집의 터줏대감으로 꿋꿋이 버티며 자라
호연정의 예술성과 주인의 호연지기 성격을 닮아서 그런지,,,하늘로 가지를 뻗어 호연정을 지켜주고 있다
▲ 호연정을 빠져나오면 문림마을이 있는데 언덕처럼 풀밭이 있는 너른 곳에 오래되어보이는 나무들이 여럿모여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
▲아주 오래되어 보이고 부러진 가지하나 없이 건강해보입니다
키가 훌쭉 커서 15~20 m나 되어보임.
▲잎을 살펴보니 잎가장자리에 날카로운 잔톱니가 나 있습니다
▲ 그 옆으로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나란히 서 있어... 마을사람들의 쉼터로 자리매김하고 있나봅니다
▲ 뒷산쪽으로 소나무 몇 그루가 보기좋게 서 있고...
▲ 호연정 앞쪽으로는 황강이 굽이쳐 흐른다
마을의 높은 언덕에 자리잡은 호연정은 조망이 내려다보이는 좋은곳에 위치해있습니다
합천인근에 여행하신다면
한번 들러보시기를....
고색창연한 단청은 아니더라도
낡아 퇴색되어 버린 정자 난간에 걸터앉아
숨은듯... 들어앉은 호연정을 바라보니
호연지기 뜻을 세운 주이선생이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