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규권장가/작가미상
어화 세상 사람들아 이 내 말씀 들어 보오
불행하다 이 내 몸이 여자가 되어나서
김익주의 손녀 되어 반벌(班閥)도 좋거니와
금옥(金玉)같이 귀히 길러 오륙 세 자란 후에
여공(女工)을 배워내니 재주도 비범하다
월하(月下)에 수(繡)놓기는 항아(姮娥)의 수법(手法)이오
월지예의 깁 짜기는 직녀(織女)의 솜씨로다
(중략)
백화(百花)방초(芳草) 화원상(花園上)에 춘경(春景)도 구경하고
청풍명월 옥규(玉閨)중에 달빛도 구경하고
신신(新新)별미 다담상(茶啖床)도 입맛 없어 못 다 먹고
원앙금침 홍규 중에 책자도 구경하고
세시(歲時)복랍(伏臘) 좋은 때에 쌍륙(雙六)도 던져보고
설앙 옥비 시비(侍婢)들과 투호(投壺)도 던져보고
즐거이 지내더니 십 오세라 연광(年光)차니
고르고 다시 골라 강호(江湖)에 출가하니
가산(家産)이 영체(零替)하여 수간두옥(數間斗屋) 청강상에
사벽(四壁)이 공허하니 우린들 있을 손가...
한심하다 이내몸이 금의옥식(錦衣玉食) 쌓였을 제
전곡(田穀)을 몰랐더니일조(一朝)에 빈천(貧賤)하니
이대도록 되었는가 이목구비 같이 있고
수족이 성성하니제 힘써 치산(治産)하면
어느 누가 시비하리 저런 욕(辱)을 면하리라
분한마음 깨쳐먹고 치산범절(治産凡節) 힘쓰리라
김 부자 이 부자는 씨가 근본 부자리오
밤낮없이 힘써 벌면 낸들 아니 그러할까
색 당계(唐系) 오색실을 줄줄이 자아내어
육황기 큰 베틀에 필필(匹匹)이 끊어내니
한림(翰林) 주서(注書) 조복(朝服)이며·병사(兵使) 수사(水使) 융복(戎服)이며
녹의홍상(綠衣紅裳) 처녀치장 청사폭건(靑絲幅巾) 소년의복
원앙금 수(繡) 놓기와 봉황단 문채(文采)놓기
(중략)
딸아 딸아 아기 딸아 시집살이 조심하라
어미 행실 본을 받아 괴똥어미 경계(警戒)하라
딸아 딸아 아기 딸아 어미 마음 심란하다
여자의 유행(有行)에 부모 형제 멀었으니
명춘(明春) 3월 봄이 되면 너를 다시 만나리라
나이 15세가 되자 고르고 또 골라서 강 절강의 반가(班家) 손부(孫婦)로 출가를 하게 되지만, 끼니를 이을 수 없는 가난의 극한상황에 처한다. 매파의 말이나 집안만을 보고 혼인한 경우 민요나 규방가사에서 흔히 대할 수 있는 상황이다. 가난의 어려움을 겪어보지 못한 화자는 난생 처음 배고픔의 고통이나 슬픔을 극복할 수 없는 절망에 갇혀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이내 슬기롭게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적극적인 방편을 제시한다. 이것이 인고와 인종을 바탕으로 하여 어려운 현실을 타개해왔던 조선조 여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미덕이요, 슬기였다.
이 단락에선 비단 옷과 기름진 밥을 먹으며 유복하게 살아 왔던 화자는 거친 밭곡식의 음식이 어떤 것인지 꿈에서라도 몰랐는데, 하루아침에 가난에 처한 자신을 보며 ‘한심하다 이 내 몸이 금의(錦衣) 옥식(玉食) 쌓였을 제/ 전곡(田穀)을 몰랐더니 일조(一朝)에 빈천(貧賤)하니’라며 가난의 서러움을 절절히 토해낸다. 가난의 극한상황에 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그 서러움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는 법이다. 그러나 작중화자는 이런 가난에 머무르거나 절망을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를 극복하는 방편으로 치산의 방법을 선택한다.
즉 ‘수족(手足)이 성성하니 제 힘써 치산(治産)하면/ 어느 누가 시비(是非)하리’라며 극한의 가난을 탈출하기 위한 피땀 어린 고된 살림살이를 꾸려나감으로써 집안을 일으켜 치부(致富)할 수 있다는 여장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는 것이다. 베를 한 필 두필을 짜서 팔며, 관복이나 여성의 녹의홍상(綠衣紅裳) 옷 짓기, 소년의복과 노인핫옷 만들기, 원앙금침 수놓기를 하되, 낮엔 육행기(肉杏機) 베틀에서 두 필(匹)의 베를 짜고 밤엔 바느질 다섯 가지를 해서 돈을 모은다. 이 외에도 누에치기와 닭이나 개, 돼지 기르기 등 육축(六畜)짐승을 길러내어 장에 내다팔아 돈을 번다.
그리고 전답을 사들여 농사짓기로 부를 일구어서 시집온 지 10년 만에 가산이 10만에 이르는 큰 부자가 된다. 치부한 재산으로 훌륭한 스승을 모셔다가 아들 형제 잘 가르쳐서 과거에 급제시킴으로써 ‘내외 해로(偕老) 부귀(富貴)하니 팔자도 거룩하다’라 만족해한다. 시집가는 딸에게는 아름다운 부부금술과 바른 행동거지, 처신범절과 칠거지악을 조심해야하고 가산을 탕진해 거지신세를 면치 못한 괴똥어미를 언제나 경계 삼으라고 훈계하고 있다.
'내 나이 쉰 살이나 남편에게 조심하기 화촉동방(華燭洞房) 첫날밤과 일분(一分)인들 다를소냐’라며 지천명의 나이에도 부부는 언제나 신혼 첫날밤처럼 살아야 한다고 초심(初心)을 강조한다. 정성스런 손님맞이(接賓客)와 절약과 검소를 바탕으로 한 올바른 세간 살이 방법을 이르며 무당 같은 미신에 빠져서도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하루아침에 가산을 탕진하고 거지로 전락해버린 괴똥어미를 상기시키며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음란하면 재앙이 온다는 복선화음(福善禍淫)을 경계하고 있다.
결사에 이르러 금지옥엽 같은 딸을 연이어 안타깝게 부르며 시집살이 조심하고 어미의 행실을 본받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어머니는 또 한 번 괴똥어미와 같은 나태하고 허랑한 여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시집가는 딸에게 간곡하게 호소하며 심란한 어미의 심사를 술회한다. 여자의 행실 여하에 따라 부모 형제간의 정의(情誼)가 달렸음을 경계하고 내년 봄이 되면 다시 딸을 만나기 위해 올 것이라 위로하면서 자신과 시집가는 딸의 위안의 방편으로 장형의 ‘홍규권장가’를 맺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