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정환 신부(池正煥,디디에 세스테벤 Didier t'Serstevens: 1931년12월 5일 ~ 2019년 4월 13일)
벨기에 출신의 대한민국 천주교 전주교구 소속 신부이다. 한국 이름은 지정환이다. 천주교 전주교구 부주교였던 김이환(金二煥, 세례명 스테파노) 신부가 그에게 '지정환'이라는 한국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지정환이라는 한국 이름은 자신의 원래 이름인 '디디에'의 '지'(池, 디), '김이환'의 '환'을 딴 이름으로서 "정의(正)가 환(煥)하게 빛난다"는 뜻을 담고 있다.
1. 사제 서품과 대한민국 입국
지정환은 1931년 12월 5일에 벨기에 브뤼셀에서 귀족 집안의 3남 2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청소년기 그는 사제상소의 꿈을 키웠다. 벨기에 인구 80% 이상이 가톨릭 신자였고, 그의 친가와 외가에는 세대마다 적어도 한 명 이상이 사제의 길을 걸었다. 그의 부모님은 “하느님의 사제가 되는 것은 영광”이라며 축복했다. 1950년 무렵 한국이란 나라를 알게 되었다. 브뤼셀의 한 극장에서 영화를 보러 갔다가 영화 상영 전 방영된 뉴스에서 6.25 전쟁 소식을 들었다. 전쟁이 끝나면 한국은 밑바닥으로 떨어질 것으로 봤다. 자신이 그곳에 가면 뭔가 도움이 될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그것이 계기였다. 1954년 루뱅 가톨릭대 알베르토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이 시절, 디디에는 신학교에서 한국인 이효상과 장병화를 만났다. 이효상은 훗날 제6, 7대 국회의장이 되었는데 그 무렵 문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제 2대 천주교 마산 교구장이 된 장병화 신부는 1938년 사제 서품 후 본당 사목을 거쳐 1954년부터 알베르토 신학교에 유학하고 있었다. 두 한국인은 해외 선교를 꿈꾸던 디디에에게 한국을 추천했다. 디디에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커졌고 결국 가족에게 “한국으로 선교 활동을 떠나겠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부모님은 한국은 지구의 동쪽 끝 전쟁 위협이 도사리는 낯선 나라였다. 따라서 부모님은 벨기에령(領)인 콩고를 추천했지만 디디에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1958년 4월 27일에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리고 1959년 12월 8일에 천주교 전주교구 소속 신부로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다시 한국의 상황은 처참하였다.
2.사목활동
1) 간척
1960년 3월 15일에는 전동 성당 보좌신부로, 1961년 1월 4일에는 임실성당 주임 대리로 각각 부임했다. 1961년 7월 7일에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다. 3년 동안 간척지 30만 평에 이르는 땅을 간척하게 하고 간척에 참여한 농민들에게 각각 3천 평의 땅을 나누어 주었다. 그런데 간척지의 특성상 가뭄이 들면 염분 때문에 벼가 모두 죽어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인내로 이겨내는 사람들이 없었다. 잠시 한국을 떠난 사이 부안에서 간척한 땅은 주인이 바뀌어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당장의 배고픔을 참을 수 없어, 땅을 저당 잡혀 쌀과 술을 샀고 심지어 노름에 빠져들었다. 결국 피땀 흘려 일군 삶의 터전을 고리대금업자들에게 헐값으로 내어주었다. 이를 보며 분통이 터진 지정환 신부는 '다시는 한국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리라'라고 다짐했다고 한다.
2) 지정환 치즈
1964년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그는 다시 가난에 시달리는 농민들을 보아야 했고 마음이 흔들린다. 임실성당 부임 후 지 신부는 사제관에 산양 두 마리를 키웠다. 삼례성당 오기순 신부가 선물로 준 것이었다. 어느 날 물끄러미 산양을 보던 그의 머리에 아이디어가 번쩍였다. 풀밭이 많은 임실에서 자라기 쉬울 산양을 길러 산양유(乳)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당시 한국인들에게 낯설었던 산양유는 잘 팔리지 않았고 남은 것이 버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산양유로 치즈를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66년 5월, 드디어 산양을 키우던 조합원들과 치즈 만들기에 도전했지만 결과는 큰 실패였다. 이후 실패가 거듭되자 벨기에의 부모님들께 2,000달러만 원조해달라고 하여 전라북도 임실군에 대한민국 최초로 치즈 공장을 설립했다. 하지만 치즈를 생산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고 3년이 지나도 성과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동료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프랑스, 이탈리아를 견학하면서 치즈 제조 기술을 전수받고자 하였다. 그러나 유럽 치즈 산업체에서는 산업 기밀이라며 기술을 알려주는 걸 꺼렸다. 수소문 끝에 소개받은 한 남자는 지 신부의 딱한 사정을 듣고는 노트 한 권을 건넸다. 치즈 제조법이 상세하게 담겨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공산당 간부였다. 3달 만에 이탈리아에서 돌아와 보니, 그동안 같이 치즈 생산 작업을 했던 사람들중 단 한 사람만 남고 모두 산양을 팔아버리고 떠났다.(남은 단 한 명은 신태균 야고보라는 분이다) 그들은 사제가 돌아올지도 치즈 사업이 성공할지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이탈리아인 공산 당원에게 받은 비법으로 치즈를 만드는 데 성공했고 다시 사람들을 모을 수 있었다. 1969년 드디어 ‘한국산 1호’ 치즈 제조에 성공하자 사업은 날개를 달았다. 서울의 조선호텔에 납품하기 시작하고 외국인 전용 상점 등 유통망을 넓혀갔다. 브랜드는 지정환 치즈로 하였다. 후에 지정환 신부는 이 치즈 공장의 운영권, 소유권을 모두 주민 협동조합에 넘겼다. 1967년 설립된 임실치즈 협동조합은 1970년대 국내 치즈 생산량의 70%를 담당할 정도로 성장했다. 1998년에는 임실치즈피자도 탄생했다. 2019년 오늘날 임실치즈가 지역사회에 끼치는 경제효과는 1,000억 원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적으로 임실치즈피자 프랜차이즈 업체만 20여 개, 임실치즈를 쓰는 브랜드만 70여 개에 달한다.
3) 민주화 운동
지 신부는 한국의 민주화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1970년대 대한민국에 거주하던 외국인 사제들 선교사들과 함께 박정희 유신체제에 저항하고 지학순 주교 석방 시위 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추방 위기까지 갔다. 그러나 농촌 발전에 지대한 관심이 있던 박정희 대통령이 '치즈 생산을 통해 농촌 발전에 헌신한 신부'라는 사실을 전해 듣고 추방을 철회시켰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때는 시민군에 제공할 우유 트럭을 몰고 광주를 직접 방문하여 참상을 목격하고 시민군에게 우유를 제공하기도 했다.
1970년대부터 오른쪽 다리에 다발경화증을 앓게 되었다. 이 치료를 위해 1981년 11월 16일에 벨기에로 떠났다가 3년 후 1983년에 오른쪽 다리가 마비된 상태로 귀국했다. 1984년부터 장애인 사목을 권고받아, 그해 7월 중증 장애인 재활 쉼터 ‘무지개 가족’을 만들었다. 전북 전주의 한 아파트에서 시작한 무지개 가족은 전주교구와 벨기에 선교협조회의 도움으로 1989년 전북 완주군 소양면에 1만3,223㎡(약 4,000평) 규모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3년 후에는 제2 무지개 가족의 집도 완공됐다. 100명 넘는 장애인이 이곳을 거쳐 재활하고 자립했다. 2002년에는 치즈 산업을 일구고 장애인 복지에 힘쓴 공로로 호암상을 수상 상금 1억 원과 수익 배당금 5억을 합해 2007년 무지개 장학재단을 설립했다. 전북도민 중에서 장애인이거나 장애가족 학생에게 대학 4년간 학비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3.말년
2003년 7월 12일에 은퇴하여 2004년부터는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별해리에 '별 아래'라는 이름의 저택에서 무지개 가족에서 함께 일했던 사람들과 거주했다. 조선 후기에서 구한말에 활동했던 신부들에 대한 기록들을 정리해 편찬하는 작업을 했다.
대한민국은 반세기 이상을 이 땅과 사람들에게 헌신한 그에게 2016년 2월 대한민국 국적을 선물했다. 2012년 국적법 개정으로 ‘대한민국에 특별한 공로가 있는 외국인’에 대해 특별귀화를 허가했는데, 4년 후 법무부가 그에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한 것이다. 창성창본(創姓創本)도 허락받아 지 신부는 ‘임실 지씨(池氏)’의 시조가 되었다. 그해 11월 임실군으로부터 명예군민증을 수여받았다. 말년의 지 신부는 한국에서의 공로를 치하하는 사람들에게 “내 공로는 아무것도 없다. 봉사는 의무이다라고 하며. 다만 더 못 해서 아쉽습니다” 라고 하였다.
4.수상
2002년에는 치즈 산업을 일구고 장애인 복지에 힘쓴 공로로 호암상을 받았다. 2016년 9월 28일에는 지역산업진흥 유공자로 대통령 포장을 수상했다. 선종 이틀 후인 2019년 4월 15일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5.선종
2019년 4월 13일에 전라북도 전주시에서 향년 87세를 일기로 선종했다. 생전인 2018년에 본인의 장례식에서 노사연의 노래 '만남'을 불러달라고 부탁했는데, 인생의 모든 여정이 만남과 만남으로 이루어짐에 대한 깊은 통찰이었다. 유해는 전라북도 전주시에 위치한 치명자산 성직자 묘지에 안장되었다.
‘지정환 신부: 임실치즈와 무지개 가족의 신화’의 저자인 박선영 명인문화사 대표는 “지 신부님은 누군가 삶에 빛이 되는 사람이었다. 평생 희생하는 삶을 사셨지만, 그걸 당신께서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이를 실천에 옮겼다”며 “‘포용’의 가치를 몸소 실천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항상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그를 기억했다.
* 긴 여운 인터뷰(조선일보에서 발췌)
―박정희 대통령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내가 요즘 노자(老子)에 빠져 있어요. 그중에서도 공수신퇴(功遂身退)라는 말을 좋아해요. 공을 이루었으면 물러나라. 박정희 대통령이 유신을 하지 않았더라면, 정권 이양을 제대로 했더라면 세계 역사에 남을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무서운 지도자가 아니라 참 좋은 지도자가 되었을 거예요."
―대한민국이 신부님 모국도 아닌데 정치 시위까지 나설 필요가 있었을까요?
="경찰도 내게 똑같이 묻더군요. '당신 외국 사람이지?' 하길래 '아니오' 했지요. 벨기에에서 태어났지만 나는 대한민국 천주교 신부로서 살고 있다고 했지요. 지금도 마찬가지고요."
―요즘의 한국 정치에도 관심이 있습니까.
="매일 저녁 뉴스는 봐요. TV를 보고 있으면 '아직도 한국에 사람들이 살고 있나?' 하는 의문이 들지요. 교통사고로 매일매일 죽고, 부정부패로 매일매일 잡혀들어가니(웃음). 민주주의는 참 어렵지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우리는 여전히 모릅니다. 선망의 대상이던 유럽 민주주의는 국민이 달라는 대로 주었다가 수입지출이 안 맞아 요즘 '주야빵꾸' 아닙니까. 외신을 보니 토론하다가 상대방 뺨도 때리고 권총까지 꺼내듭디다. 서로에게 귀 기울이지 않고 내 주장만 옳다고 외치는 한, 지구촌의 민주주의는 요원하다고 봅니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고요."
―개신교를 두고 하는 말씀인가요?
="제일 배타적인 사람은 우리 교황이지요(웃음). 다음이 무슬림."
―사랑했던 여인은 없었습니까.
="저 아랫집 담벼락에 이런 글귀가 적혀 있어요. '나는 하느님 보고 꽃 하나 달라고 했는데 하느님은 공원을 하나 주셨다. 나는 하느님 보고 나무 한 그루 달라고 했는데 숲 하나 주셨다. 나는 하느님 보고 강 하나 달라고 했는데 태평양을 주셨다. 나는 하느님 보고 천사 하나 보내달라고 했는데 당신을 보내주셨다' 이것이 나의 답입니다."
―사랑은 열정입니까, 희생입니까.
="사랑은 주고받는 거예요. 사랑이 희생이면 위험하지요. 주기만 하다 보면 화가 나거든요. 누구를 '위하여' 일하지 마세요. 남편을 '위하여'가 아니라 남편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부안에서 내가 실패했던 이유는 농민들을 '위해서' 일하려 했기 때문이에요."
―행복하십니까.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있는 음식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이지요. 한국이 벨기에보다 좋은 이유는 내가 지금 한국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터뷰를 겸한 점심식사에 지정환 신부는 막걸리를 곁들였다. "운전은 술기운으로 해야지, 아니면 무서워서 못혀." 영락없는 시골 아저씨 넉살이다. 곁에 있던 오선씨가 재미난 이야기를 했다. "신부님이 당신 장례미사에 노사연의 '만남'을 꼭 불러달라고 교구 신부님께 부탁하셨어요." 그 이유를 지 신부가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랑도 배움도 민주주의도 모두 만남에서 시작되니까요. 다시 노자 이야기를 할까요? '공수신퇴'는 지도자들에게 하는 말이지요. 백성한테 가거라. 가만히 앉아서 '이놈 이리 와'가 아니라 백성 속에 들어가 함께 살아라. 그들에게 배워라. 거기서 공을 이루었으면 모든 공을 그들에게 돌려라. 치즈도, 무지개가족도 내 공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그들'의 공입니다.“
*어록
교회는 신앙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해야 한다.
1원이 모이면 십원이 된다. 협동조합은 남을 돕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돕는 것이다
참고:
위키백과; 임실치즈 문화역사공간 사진말; 나무위키; 2019년 5월 신동아 졸기卒記 ‘임실치즈의 아버지’ 故 지정환 신부 가난하고 소외된 한국인들의 영원한 벗; [김윤덕의 사람人] '임실치즈'의 代父… 디디에 세스테벤스,김윤덕 문화부장( 2012.07.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