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까쩨리나는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는 열여덟이었다
열여덟은 보랏빛 라벤더 향기였으며
열여덟은 순백색 꽃구름 드레스였다
그 열여덟이 먹구름 속으로 떠밀려가는 것이다
예까쩨리나 가족이 승차한 객차는 서른일곱 번째 칸이었다
빅토르는 어둠을 더듬어 비어 있는 공간을 찾았다
어둠 속에서 검은 얼굴들이 검은 눈빛으로
늦게 승차한 예까쩨리나 가족을 주시 하고 있었다
바닥 자리가 비어 있었다
바닥의 빈 자리에 어둠이 고여 있었다
어둠은 조용히 눈을 들어 네 사람을 맞았다
이 어둠이 시베리아횡단열차의 동행자기 될 것이다
어둠은 모든 것을 볼 것이다
어둠은 모든 소리를 들을 것이다
어둠은 모든 영혼을 읽을 것이다
어둠은 홀로 몸을 떨며 참혹한 강제이주의 현장을
문신으로 새겨둘 것이다
문신은 더러운 역사의 증언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어둠은 사내들이었다 사내들 가슴이었다
호루라기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호루라기 소리에 어둠이 찢겨나갔다
어둠이 찢긴 자리에 경비병들의 총구가 어둠 뒤의 어둠을 겨냥하고 있다
호루라기 소리가 계속해서 날카롭게 울렸다
이어서 귀청을 찢는 총소리였다
예까쩨리나는 파르르 떨었다
열차의 모든 사람들이 돌처럼 굳어졌다
예까쩨리나가 빅토르에게 두 손을 내밀었다
빅토르는 예까쩨리나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엄마는 로자를 깊이 끌어안았다
예까쩨리나는 엄마의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엄마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작고 앙상한 어깨가 안쓰러웠다
더 이상 총소리는 나지 않았다
유예된 총소리가 무거운 불안으로 한인들을 옥죄었다
어둠이 두터워진 어깨를 열차 안으로 밀어넣었다
밤이 깊어갔다
달이 휘영청 밝았다
달빛이 멀리 자작나무숲을 느슨하게 물고 있다
고즈넉한 자작나무숲은 세상의 모든 비밀을 침묵 속에 묻고 싶은가 보다
시베리아횡단철로 위에 내려앉은 흐린 달빛을 비스듬이 보고있다
엄마는 뼈로부터 근육이 모두 이탈된 듯 위태로워 보였다
예까쩨리나는 엄마에게서 로자를 받아 안았다
엄마의 핏기 없는 얼굴이 불빛에 반쯤 가려 섬득했다
로자의 볼로 눈물 한 방울 떨어졌다
예까쩨리나는 급히 로자의 볼을 훔쳤다
로자가 움찔하고는 다시 잠 속으로 빠졌다
며칠이고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열차가
마지못해 떠나는 듯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적소리도 없이 시베리아횡단열차는
중앙아시아를 향해 운명의 쇠바퀴를 미는 것이다
죽음 같은 침묵을 뒤에 두고 시베리아횡단열차
느릿느릿 플랫폼을 벗어나
어둠 속으로 뻗어나간
평행의 철길을 밟는 것이다
철길은 느릿느릿 기관차를 향해 다가온다
느릿느릿 다가오던 철길은 차츰 속도를 얻어
씩씩거리며 달려오다 씩씩거리며 달려간다
기관차에서 뿜어져나오는 흰 연기가 점점 거세어진다
빅토르는 멀어져가는 라즈돌리노예 역을 본다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되는 한인들을
첫 열차에 실어 보내고 있는 라즈돌리노예 역이다
한인 강제이주의 비극적인 현장을
라즈돌리노예 역은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아니다 젊은 빅토르가 역사의 현장 속에서
역사의 더러운 문맥을 읽고 있는 것이다
그는 전율 한다
오늘의 참담함을 잊지 않으리라
라즈돌리노예 역이 어둠을 밀어내느라 필사적이다
역 광장을 밝히고 있는 불빛으로는
밀려드는 어둠을 밀어내지 못할 것이다
군용트럭들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흙먼지를 일으키며 광장을 뒤로 하고
어둠 속으로 달려나간다 헤드라이트가
어둠을 깊이 찔러 길을 벌린다
불 밝히지 않은 실내는 적막하다
어린 것들이 칭얼대는 소리가 가끔 들릴 뿐
누구도 침묵을 깨지 못한다
침묵의 두려움 때문이다
달빛이 라즈돌리노예 강물을 흐른다
강물에 비낀 달빛이 열차 안으로 슬며시 들어온다
사내들의 검은 얼굴에 강물 비껴온 달빛이 사선을 긋는다
사내들의 눈빛이 깊고 어둡다
깊고 어두운 눈빛이 달빛에 출렁인다
깊고 어두운 분노와 체념이 출렁인다
두려움과 염려스러움을 담고 있는 저 눈들
어제와 오늘을,
그리고 울울한 내일을 담고 있는 저 눈들
라즈돌리노예 강이 강제이주열차를 쫓는다
강폭을 좁히기도 하고 넓히기도 하며 검은 얼굴들을 쫓는다
달빛은 교교하다
달빛은 강물 위에서 잘게 부서지기도 하고
자작나무숲에 찬 볼을 오랫동안 부비기도 한다
강안을 병풍처럼 두루고 있는 자작나무숲에는
밤의 정령들이 달빛밟기를 하고 있는지
수런수런 자작나무 잎들이 잠들지 못한다
강제이주열차는 어둠을 가르며 북쪽으로 질주한다
북쪽은 우수리스크이고 하바롭스크고 브레야고
더 북쪽은 치타이고 이루크츠크고 크라스노아르스크고
마침내 노보시비리스크일 것이다
노보시비리스크에서 열차는 남으로 방향을 바꿀 것이다
그쯤서 시베리아를 버리고 중앙아시아로 달려갈
강제이주 열차다 강제이주 열차의 사나운 질주다
라즈돌리노예 역의 어둠을 두고 출발한지 얼마 되지 않아
우수리스크의 불빛이 보인다
열차의 쇠바퀴 구르는 소리를 세며 사내들은 어둠을 응시한다
노인들 앓는 소리가 어둠을 비틀고 바튼 기침소리가 정적을 깬다
아이들이 잠결에 엄마를 찾는다
아낙들은 어린것들 칭얼대는 소리에 젖을 물리고
등을 토닥인다 그것으로 열차 안은 다시 조용해진다
멀리서 다가오던 지명 우수리스크,
도시는 어둠 한 장으로
낮은 건물과 잠든 사람들을 덮고 있다
깨어 있는 창에 따스한 불빛이 졸고 있을 뿐
우수리스크 역은 시베리아횡단열차를
잠시 잡는 듯 하다 순식간에 철로 위에 뿌린다
열차가 사라지면
역을 밝히고 있던 불빛도 사라진다
불빛이 사라지면 지명도 사라지고
지명이 섰던 자리에 자작나무숲이 들어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