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TP 관련자는 서울대 문리대에도 20여명 있었다. 학생회 간부도 있었다. 신상을 노출시키지 않겠다는 약속은 지금까지 지키고 있다. 일부는 정치권의 ‘알만한 인사’가 되기도 했다. 학생 시절의 일이므로 덮어둘 수 있다.
그러나 뒤늦게 6ㆍ3의 주역이라고 매명(賣名)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최근 6ㆍ3 동지회 모 간부로부터 증언을 들었다. “63년 초 여자 친구로부터 YTP 자료를 입수해 야당 쪽에 전해줬다.
그녀의 오빠가 YTP 보스였다. 모대학 간부였다. 그녀와 함께 오빠가 지휘하는 훈련캠프를 방문한 적도 있었다. 관악산 기슭이었다.”
난 부르주아였다. 친구들이 프로레타리아였다. 친구들은 6월 3일 린치사건으로 병원에 있던 나를 던컨에 싣고 광화문 시위에 나섰다. 계엄이 선포되고 도피가 이어졌다. 장충동에 있던 야당 의원 유모씨 집으로 갔다.
가정교사를 했던 집이었다. 부인이 곤란하다며 돈을 얼마 주더라. 고교 동창인 배순훈(전 정통부 장관) 집으로 갔다. 그의 부친이 반겨주었다. 계엄해제(7월 29일) 소식을 듣고 학교에 갔다.
아버지(당시 경찰병원 원장)에게 전화를 했다. 아버지는 “9ㆍ28 수복 때 급히 나와서 만세 불렀던 사람들 모조리 죽었다. 꼼짝 말라”고 했다. 아버지를 기다리다 낯익은 형사와 마주쳤다. 학장님께 인사드리고 경찰에 출두하려고 한다고 둘러댔다.
학장실 창문으로 뛰어내려 뒷담을 넘었다. 도망가다 보니 오후 2시 뉴스가 나왔다. “송철원이 검거돼 동대문경찰서로 압송 중이다”고 했다. 나를 기다리던 형사가 ‘송철원 검거’를 보고 했던 것이다.
등잔 밑이 어두울 것이라는 생각에 집으로 갔다. 마루에 구멍을 뚫어 그 밑에서 지냈다. 어느날 밤 대문 밖에서 “철도병원에서 왔다”는 고함이 들렸다. 아버지가 대문을 여니 2~3대의 자동차가 한꺼번에 헤드라이트를 비추었다.
2시간 가까이 집안을 뒤지다 갔다. 9월에 접어들면서 학생들에 대한 유화정책이 펴졌다. 동대문서에서 “나와서 조서나 한 장 써라”고 연락이 왔다. 어떻게 집에 있는 줄 알았느냐고 물었다. 미국에 있는 형님이 나에게 안부전화를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것을 도청했다고 하더라.
66년 건국대학원의 학생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가 입학했다. 68년부터 경제학과 대학원에서 강의를 맡았다. 취업반 대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부업도 했다. 이것이 나중에 나의 천직인 학원강사의 거름이 됐다.
아버지가 일하는 철도병원엔 걸핏하면 감사를 나왔다. 약값을 떼 먹었다며 알약의 개수까지 세었으며, X레이 필름 장수까지 기록했다. 아버지는 71년 말 사표를 내고 미국으로 갔다.
67년인가 종로에서 ‘석기시대’라는 음식점을 만들어 인기가 좋았던 김지하를 ‘얼굴마담’으로 세웠다. 다시 무교동에 ‘레지스탕스’라는 술집을 냈다. 72년 유신을 앞두고 우리 멤버들이 행적을 감춘 뒤에도 이 술집은 오랫동안 성황을 이루었다.
종로구청 직원이 찾아와 “술집 허가를 내주었다고 쫓겨났다”며 하소연했다. 그는 “이름이 ‘레스토랑’인줄 알고 허가해 주었는데” 라며 훌쩍거리던 생각이 난다.
71년 9월 15일 고려대학 사태로 위수령이 터졌다. 당시 신민당보 민주전선에 내가 기고한 글이 있었다. 종로에서 민주전선을 배포하다 뉴스를 들었다. 무조건 부산으로 갔다. 매일 방파제 옆 횟집에서 동료들과 소주를 마셨다. 주위에서 ‘이상한 젊은 놈들’이라는 소문이 나고 있었다. 서울로 되돌아왔다.
74년 초 후배인 조영래(82년 변호사 개업ㆍ90년 사망)와 함께 생업 차원에서 영어 참고서를 만들었다. ‘지학사의 영어문제집-송철원 조영래 공저’였다. 출판사에 함께 인세를 받으러 가려던 날 민청학련 사건이 발표됐다.
그 길로 조영래는 피신했다. 종로2가 제일학원에 영어강사로 취직했다. ‘문리대의 영웅’이라는 치기가 발동해 송문영이라는 가명을 썼다.
79년 남영동에서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김영삼씨 캠프에 있던 친구가 찾아와 YS 회견문이라며 영어번역을 부탁했다. 몇 건을 번역했는데 10ㆍ26이 터졌다. 건국대에 복귀하려고 하던 중 5ㆍ18이 일어났다.
93년 ‘신문로 포럼’이라는 6ㆍ3세대 토론광장을 만들었다. ‘YS 회견문’ 번역을 인연으로 94년 9월 민자당 성북갑 지구당위원장을 맡았다. 95년 8월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4개월 수감돼 있다 집행유예로 나왔다. 출마도 못한 채 YS계와 마음으로 결별했다. 99년 DJ 정부 때 복권됐다.